난 할 수 있어 382화
“MFG 측에서 좀 시원시원하게 우리는 이런 기술을 갖고 있다, 말씀을 해주실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그래야 시청자 여러분께서도 MFG의 권위를 인정하실 테고, 그런 다음에야 배양육, 비도축육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연구원이 입술을 우물거리기만 할 뿐 더 말하지 못하자, 고범수가 진화에 나섰다.
“저희는 조대찬 대표의 주장이 터무니없음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힙니다. 우리는 배양육에 대한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원천기술이란 것에 대해…….”
“그 기술에 대해 공개 가능한 부분이 있고, 아닌 부분이 있습니다. 즉석에서 그 부분을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추후 서면으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손호엽 아나운서는 답답한 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딱히 MFG그룹에 우호적인 것도 아닌 그가 답답해 할 정도로 MFG그룹은 제 무덤을 열심히 파고 있었다.
“서면으로라도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만,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혀주시지 않으시면 시청자 여러분은 MFG그룹의 기술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조대찬 대표가 노리는 술수라는 겁니다. 우리의 곤란한 처지를 이용해 우리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려고!”
대찬은 거기에 대고 구태여 화를 내지 않았다.
고범수의 반론은 세 살 먹은 아이도 침을 뱉을 정도로 터무니없었다.
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회장님께선 지금까지 골백번은 더 투자설명회 자리에 나서셨죠. 거기서 설명한 내용의 십 분의 일만 여기서 말씀하시면 되는 겁니다.”
“…….”
“왜 즉석에서 못하신다는 거죠? 그건 애초에 기술이란 건 있지도 않으며, 투자자들을 설득할 때 기술에 대한 얘기는 손톱만큼도 안 하셨다는 거죠.”
“억측입니다.”
“그 다섯 글자로 퉁치고 넘어가시려고요? 시청자가 우스우세요? 국민이 우스워요?”
손호엽 아나운서가 대찬을 제지했다.
“자자, 진정하시고요. 기술에 대한 부분은 여기까지만 얘기하도록 하죠. 아, MFG그룹 측에서 로튼 프룻츠 측에 기술에 대한 진술을 바란다면 마찬가지로 로튼 프룻츠 측에 요구하겠습니다.”
손호엽 아나운서의 말에 당장이라도 강의에 나서고 싶은 은오영 교수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고범수는 그 보기 싫은 입술을 보고 뚱한 표정을 지었다.
“됐습니다.”
로튼 프룻츠의 기술은 이미 발표회까지 거치고 언론을 통해 닳고 닳도록 소개되었다.
괜히 저쪽에 그걸 요구했다가는 로튼 프룻츠에 긴 시간 무료 광고를 허락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MFG그룹과 확연한 대조를 이루는 건 덤이었다.
저쪽에서 자진해서 로튼 프룻츠에 대한 의혹제기를 포기하겠다고 하니, 손호엽 아나운서 역시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다.
PD 역시 적잖이 아쉬워 보이는 모습.
그는 대찬이 MFG그룹을 마구잡이로 때려잡는 독무대를 원하지 않았다.
그건 대찬에게만 유익하고 방송사에게는 그다지 유익하지 않았다.
서로 얽히고설켜 물어뜯는 진흙탕 개싸움이야말로 그가 원하는 바였다.
그런데 전황이 한쪽으로 훅 쏠린 채로 진행되었다.
내세울 기술이 없다는 게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MFG그룹은 치명상을 입었다.
그러나 대찬은 치명상을 입히는 정도로 끝낼 심산이 아니었다.
‘아예 기둥뿌리를 뽑아버려야 돼.’
대찬 자신의 비즈니스를 위한 사적인 목적으로도, 그리고 순진한 투자자들의 눈먼 돈이 증발되는 걸 막기 위한 공적인 목적으로도 필요했다.
대찬은 PD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이제 대찬에게 온전히 전권을 맡기기로 했다.
몇 번의 잽에 고범수가 해롱해롱 정신을 못 차리니 치열하게 치고 박는 개싸움은 체념했다.
고범수가 사기꾼이라는 가설이 99퍼센트 진실로 밝혀진 마당.
그를 앞에 두고 배양육의 현재와 미래를 속 편하게 논하지도 못하게 돼버렸다.
그러니 작가들이 애써 준비한 순서 역시 완전히 못 쓰게 돼버렸다.
결국 이 시간은 온전히 대찬의 세 치 혀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었다.
손호엽 아나운서 역시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대찬의 발언은 가급적 제지하지 않았다.
덕분에 대찬의 말은 발음되는 족족 그대로 방송을 탔다.
이미 전세가 기운 마당에 앞뒤 잴 이유가 없었다.
대찬은 갖고 있는 실탄을 고범수의 머리 위로 몽땅 투하했다.
“저희는 MFG그룹 측에서 주관한 투자설명회 현장의 자료를 입수했습니다. 준비한 화면을 보시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영상 준비됐습니까?”
대찬의 질문에 PD는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 보였다.
대찬이 사전에 제출한 영상이 화면으로 전시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돈 좀 더 들여서 화질 좋은 놈으로 구비해놓을 걸.’
대찬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화면에는 고범수의 거침없는 언변이 그대로 등장했다.
대찬은 그 화면을 짚어가면서 말했다.
“고범수 회장님께서는 투자설명회 자리에서 저희 회사에 대한 무분별한 비난을 계속 하셨습니다. 그걸 이 자리에서 하나하나 짚지는 않겠습니다. 그건 법정에서 다투시고요.”
“…….”
땀 한 줄기가 고범수의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대찬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시청자 분들께 가치가 있는 대목만 짚겠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본인의 화려한 인맥을 투자자들에게 선보였습니다. 제가 봐도 입이 떡 벌어질 분들이더군요.”
화면은 고범수가 교황을 알현했다며 떠들어대는 대목을 보여주고 있었다.
“교황님을 알현하셨다고요. 회장님, 그렇게 말씀하셨죠?”
“…예.”
“사진에 찍힌 장소는 교황이 아르헨티나에 방문하셨을 때입니다. 2015년 2월 3일. 회장님은 교황께서 회장님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서 알현을 허락한 것처럼 말씀하셨는데요, 과연 그러셨습니까?”
“…….”
“사진을 보시면 주위에 사람이 많습니다. 고 회장님 일행만 교황을 알현한 게 아니죠. 고 회장님이 악수를 나누고 교황께서는 그 다음 사람하고도 악수를 나누십니다. 그러니까, 회장님께서는 교황과 독대를 나눈 게 아니라 그저 일반 알현 와중에 자리 잘 잡은 덕택으로 손 한 번 잡은 게 전부라는 거죠.”
“…….”
“아르헨티나까지 날아가는 비행기 삯하고 미리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약간의 노력만 있으면 저는 물론이고 여기 계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번 교황께서 특별히 대중과의 스킨십에 자비로우신 덕택이죠. 그런 자비와 배려로 악수를 하셔놓고 뻔뻔하게도 투자자에게 의미를 왜곡하여 장사 수단으로 팔아치우는 건 좀 너무하셨죠?”
따발총을 쏘듯 또박또박 귓전에 한 마디 한 마디 때려 박는 대찬의 말에 고범수가 할 수 있는 건 침묵뿐이었다.
“교황님이야 그렇다 치고 다음은 더 심각합니다.”
대찬의 말 다음으로 투자설명회 당시 고범수가 열심히 설파했던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치에 조금만 관심 있는 분들이면 이 사람들 다 아실 거야. 최귀원 여당 원내대표, 송일준 3선 의원, 김태홍 청와대 대변인, 이신옥 청와대 민정수석. 이 사람들이 다 우리 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니까요.’
“회장님께서는 여당 실세와 청와대 요인들이 MFG그룹의 사업에 관심을 보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번 더 쐐기를 박으셨죠.”
‘정부에서도 우리 사업을 역점사업으로 지정하고 힘을 다해 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회장님께 여쭙겠습니다. 정말 정부에서 MFG그룹의 사업을 힘을 다해 밀어주겠다고 했습니까?”
고범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감히 그렇다고 하지 못했다.
당사자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을 것이다.
일반인도 아니고 정치권력의 한 자락씩을 붙들고 있는 이들을 기만할 순 없었다.
대찬은 고범수의 침묵을 대답으로 듣고 말을 이었다.
“이것도 거짓말이시죠? 저희도 당사자를 통해서 이미 다 확인을 했습니다.”
손호엽 아나운서가 손을 들어 대찬의 말을 잠깐 막고 발언했다.
어째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었다.
“잠깐, 그러니까 여기서 정리를 해보자면 바티칸의 교황과 여당 실세, 청와대 핵심인물들과의 거짓 친분을 투자자들에게 광고하여 투자를 유치했다, 이거군요?”
“맞습니다. 모든 사항은 고 회장님께서 침묵으로 동의하셨고요.”
“허… 이러면 문제가 좀 심각해지는군요.”
손호엽 아나운서는 고범수를 흘끗 바라봤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는 고범수를 향해 경멸의 감정을 듬뿍 실어 보냈다.
대찬은 이후로도 갖고 있는 모든 자료를 이용하여 고범수의 목을 졸랐다.
이제 말하는 것도 귀찮아져서 아예 준비한 VCR로 대신했다.
그렇게 약 2분 간 VCR이 방송을 탔다.
그리고 다시 화면이 스튜디오를 비췄을 때는 손호엽 아나운서의 난감한 얼굴이 등장했다.
“…어 이거 참, 상황이 난감해졌습니다.”
베테랑 아나운서인 그도 지금의 상황이 당혹스러운지 계속 앞에 놓인 종이만 만지작거렸다.
“네… 지금 고범수 회장님께서 자리를 비우셔서 부득이 매끄러운 진행이 어렵게 됐습니다.”
고범수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선장을 잃은 MFG그룹 측 연구원들의 동공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손호엽 아나운서는 그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좌담회를 더 진행해도 좋겠습니까?”
“의미가 있을까요?”
연구원의 반문에 손호엽 아나운서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게 웃으면서도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를 어찌해야 하나.
아직 방송 종료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았다.
처음에는 조대찬이란 놈이 준비한 순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더니, 이제는 고범수마저 제멋대로 자리를 떠서 어떻게 손쓰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의 머릿속이 퍽 복잡했다.
PD 역시 급하게 아랫것들을 닦달했다.
“야, 지금 여기서 자르면 차질 없이 바로 방송할 수 있어?”
“주,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에이 씨, 괜히 한다고 했어, 괜히!”
PD는 원격으로 손호엽 아나운서에게 말했다.
“호엽이 형, 어떻게든 시간 좀 때워줘야겠다.”
그 말을 들은 손호엽 아나운서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굳었다.
그가 지금 이 상황에서 기댈 수 있는 존재라고는 대찬이 유일했다.
그는 대찬 쪽으로 몸을 틀며 물었다.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하긴 하지만, 로튼 프룻츠 조대찬 대표님, 그리고 중림대 은오영 교수님 모시고 비도축육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의논하는 시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MFG그룹을 완전히 도려냈다.
이제 평화롭게 비도축육의 가겨거겨를 읊는 일은 이제 대찬도 반길 만했다.
대찬은 태평하게 손호엽 아나운서와 비도축육에 대한 대담을 나눴다.
은오영 교수 역시 다소간 긴장이 풀렸다.
그는 자신이 가진 지식을 유감없이 대중에게 설파했다.
나중에 가서는 대찬보다 더 많은 발언권을 가져왔다.
중림대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듯, 제 안방에서 방송을 하는 듯 편하게 주절주절 할 말을 다 했다.
긴장이 풀린 은오영 교수 덕분에 남은 시간은 물 흐르듯 잘 흘러갔다.
대찬은 기대 이상의 면모에 흡족했다.
이 자리는 MFG그룹을 폭파시키기 위해 마련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로튼 프룻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마련했다.
경쟁업체를 폭삭 가라앉혔으니 이제는 로튼 프룻츠의 브랜드를 광고할 차례였다.
잠깐의 개싸움으로 MFG그룹을 일망타진했다.
로튼 프룻츠 역시 개싸움의 당사자로서 자칫 가볍다는 이미지를 줄 수도 있었다.
그건 적극적으로 투자를 유치하기로 태세를 전환한 로튼 프룻츠에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은오영 교수의 술술 이어지는 전문적인 설명은 그런 우려를 말끔하게 불식시켜주었다.
“오늘 다소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지만, 후반부는 참 유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은 교수님.”
“아유, 별 말씀을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떠들었습니다.”
손호엽 아나운서는 씩 웃었다.
“시청자 여러분께는 여러모로 볼거리가 많은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방송 과정에 있어 일부 불편을 드린 점은 죄송합니다. 오늘 로튼 프룻츠 조대찬 대표, 중림대학교 은오영 교수, 그리고 지금 자리에는 안 계시지만 MFG그룹 고범수 회장 이하 관계자 여러분을 모시고 한국 식량산업의 미래, 비도축육에 대한 좌담회를 가져봤습니다. 이것으로 모든 순서를 마칩니다. 시청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손호엽 아나운서의 마지막 멘트가 끝나자, PD는 황급히 음악을 내보내며 프로그램을 종료시켰다.
손호엽 아나운서는 화면이 완전히 TV광고로 넘어가자 그제야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한숨을 쉬었다.
“저도 아나운서 짬밥깨나 먹었지만 이런 일은 또 처음입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조 대표님 잘못도 아니잖습니까.”
PD는 헤드셋을 벗어 목에 걸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폐를 끼치긴 끼치셨죠. 정해진 순서가 완전 엉망이 돼버렸으니까.”
“거듭 사과드립니다.”
PD는 대찬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래도 조 대표님 덕분에 시청률은 기대 이상으로 나왔어요. 사람들은 역시 싸움 구경하기 좋아한다니까.”
“얼마나 나왔나요?”
대찬은 은근히 기대하는 목소리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