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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80화 (380/556)

난 할 수 있어 380화

남은 문제는 몇 개의 육하원칙이었다.

누가 자리에 나설 것인가.

어디서 만날 것인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무엇을 통해 공개할 것인가.

로튼 프룻츠와 MFG그룹의 공개적인 난상토론이 결정되자 자기 쪽에서 주최를 맡겠다는 말들이 많았다.

작은 인터넷언론사부터 케이블 채널까지 가지각색의 방송사였다.

심지어는 송희근은 쏭과장TV에서 생중계하겠다고 숟가락을 얹어오기까지 했다.

그만큼 일개 중소기업에 전해지는 관심 치고는 대단한 관심이 불러일으켜졌다.

대찬이 필래 비바체 사외이사실에 머무는 시간에도 어쩐 일인지 직원들은 필래의 일보다 저 공개토론회를 자주 입에 담았다.

오다혜가 대찬에게 커피 한 잔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커피는 그저 구실일 뿐이었다.

실상은 공개토론회 관련해서 얘기를 건네고 싶었다.

“요즘 로튼 프룻츠가 저희 회사보다 더 핫해요.”

“그래?”

“네! 인터넷에서도 아주 난리라니까요. 배양육 양대산맥이 캐삭빵을 한다는 둥.”

대찬은 커피를 들다 말고 오다혜를 바라봤다.

“캐삭빵이 뭐야?”

“에이, 이사님도 이제 아저씨 다 되셨구나. 애들 쓰는 말도 이제 모르시네.”

“…정곡 찌르지 말고.”

“캐릭터 삭제 빵이요. 뭐, 아저씨 언어로는 사생결단이나 진검승부쯤으로 해둘까요?”

“거 듣는 아저씨 기분 안 좋으니까 아저씨 소리 좀 그만합시다.”

“헤헤.”

“아니, 오 대리랑 나랑 겨우 세 살 차이 아니야? 나 아저씨 시킬 거면 오 대리도 아줌마 해.”

“아유, 요즘 3년이면 옛날 30년이에요. 세대가 달라지거든요.”

오다혜는 실실 웃으면서 이제 아예 사외이사실 한구석에 눌러앉았다.

대찬은 커피를 홀짝이며 뚱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오 대리, 일 안 해?”

“이사님 개인 신변을 챙기는 것도 사외이사실 직원들 업무예요.”

“가십거리에 관심 갖는 거랑 내 개인 신변 챙기는 거랑 무슨 상관?”

“이게 그냥 가십이에요, 어디? 이사님 신변에 아주 중차대한 영향을 끼칠 이벤트잖아요. 거기에 관심을 두는 것 역시.”

“당신 업무라고?”

“당연하죠.”

대찬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게 업무겠지. 도와줄 거면 아예 도와주든가. 반상회 나온 아줌마처럼 고개만 기웃거리고 있으면 다야?”

“일단 갈피가 잡혀야 도와드리든 말든 하죠.”

“어째 직원들이 갈수록 ‘허운’화가 되는 거 같아.”

“어머, 그런 모욕적인 말씀을.”

“그런 말 듣기 싫으면 좀……!”

대찬의 간곡한 말에도 오다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래 썩은 과일이 있으면 그 옆의 멀쩡한 과일들도 썩는 법 아니겠어요? 그 만고의 진리를 섬기는 회사라 이름도 로튼 프룻츠 아니었던가요.”

“저, 저 얄밉게 말하는 것도 여자 허운이네.”

이사실 안에서 아웅다웅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다른 직원들도 스멀스멀 다가오기 시작했다.

빵가루 던져진 곳에 비둘기 떼가 뒤뚱거리며 다가오는 꼴이었다.

“무슨 재밌는 일 있어요?”

“저희도 같이 들어요, 이사님.”

대찬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지었다.

“언제부터 이사실 문지방이 이렇게 낮았어요?”

“좋잖아요. 탈권위의 상징처럼 느껴지고?”

“탈권위랑 비권위는 아예 다른 개념일 텐데요.”

“저희는 그런 어려운 말 몰라요.”

모른다는 사람들에게 대고 더 할 말이 없었다.

대찬의 말문이 막히자 직원들이 한 마디씩 보태고 나섰다.

“시키실 일 있으면 저희한테 시키세요.”

“엄밀히 말하면 개인 업무이긴 하지만, 서 대표님도 용인해주시겠죠.”

“허 과장님한테 수당 두둑이 주셨다면서요? 저희는 그 반값에 일할게요.”

대찬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들과의 대화를 침묵으로 차단했다.

대찬이 더 대응하지 않고도 그들의 조잘거림은 한참을 지속했다.

대찬은 날짜만 정해놓고 다른 구체적인 사항들은 결정하지 않았다.

점점 대중의 관심이 붙으면서 중계를 제안해오는 쪽의 급수가 올라가고 있었다.

반대로 MFG그룹은 그저 체면치레만 하고 판을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작은 인터넷언론사 주최의 인터넷방송으로 중계를 하자고 계속 제안했다.

“자꾸 멋대로 일정 안 정하고 빙빙 돌리면 그쪽에서 의사가 없는 걸로 간주하고 판 엎을 겁니다.”

MFG그룹 쪽에서는 그렇게 엄포를 놨다.

그들은 차라리 대찬이 계속 그렇게 시간을 끌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면 로튼 프룻츠 측에 책임을 돌리고 이 달갑지 않은 자리를 파할 수 있으니까.

대찬은 그들이 그러도록 두지 않았다.

“그럼 원하시는 대로 그 언론이랑 할 테니, 인원은 저희가 원하는 대로 대표 한 명씩만 나와서 하시겠습니까?”

“…….”

그건 그것대로 어려운 말이었다.

없는 실속을 그래도 그럴 듯하게 만들어주려면 일반인만으로는 불가능했다.

전문가가 한 명쯤은 배석해야 했다.

그래야 대중의 귀에는 어려운 전문용어를 남발하여 적어도 판을 반반으로 이끌 수는 있으니까.

근데 대찬과 고범수, 딱 둘만 나와서 입씨름을 하면 그렇게 할 재간이 없었다.

저쪽이 입을 다물자 대찬이 웃으면서 말했다.

“중계 채널을 선정할 권한을 저한테 주시면, 얼마든지 인원을 대동하셔도 좋습니다. 저희는 저 포함해서 딱 두 명만 나가겠습니다.”

“…딱 두 명?”

“딱 두 명.”

MFG그룹에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물량 앞에 장사 없다고 하지 않나.

우르르 쪽수를 끌고 나와 이구동성으로 찍어 누르면 아무리 잘난 로튼 프룻츠라도 수가 없지 않겠는가.

로튼 프룻츠 측의 제안을 받은 MFG그룹은 한참 고심하다가 이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 했지.’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MFG는 애초에 쥔 패가 얼마 없었다.

그런 그들이 둘 수 있는 수는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는 운명.

대찬은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결국 평균적으로 시청률이 꽤 나오는 한 종편채널이 낙점되었다.

지상파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으니, 이만 하면 최선이었다.

시간도 오후 9시 30분.

주말뉴스가 끝나고 바로 이어지는 시간대였다.

대찬은 그 와중에 자기 사람도 챙겼다.

쏭과장TV가 인터넷 방송으로는 유일하게 저 방송을 받아 2차 중계를 하도록 배려해주었다.

날짜, 장소가 정해지자 대찬은 이제 준비에만 몰두했다.

커피와 와인을 다루는 것만 해도 바쁜 민승기도 은근히 걱정이 되는지, 자기 일을 마무리하고서는 대찬을 거들어주었다.

“우리 쪽에서는 둘만 나가기라도 했다면서?”

“네, 저쪽은 거의 사단급으로 나올 태세던 걸요.”

“그러니까. 둘 갖고 되겠어?”

대찬은 민승기를 보며 웃었다.

“오히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거예요. 쪽수 많다고 마냥 좋은 게 아닌 거, 선배도 아시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너 나가고, 나머지 하나는 누구야?”

“은 교수님이요.”

“아, 그 양반, 카메라 울렁증은 없나 몰라.”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안 그래도 지금 독방에 들어가서 카메라 앞에 앉으셔갖고 무진 애 쓰고 계세요.”

민승기는 은오영 교수가 있는 독방을 가려놓은 버티컬 블라인드의 틈을 슬쩍 열어 엿보았다.

과연 은오영 교수는 침을 꼴딱꼴딱 삼키면서 딱딱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카메라 앞에서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민승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못 미더워했다.

“저 아저씨, 계속 적응 못할 거 같은데?”

“그럼 은 교수로 흥한 우리 회사, 은 교수로 망하는 거죠, 뭐.”

“남의 회사 말하듯이 하네.”

“너무 걱정 마세요. 다 잘 될 거예요.”

“알았다. 내가 뭐 더 도와줄 건 없고?”

“저 이거 준비하는 동안 직원들 땡땡이 안 치나 감시 좀 해주세요.”

민승기는 싱겁게 웃었다.

“알았다.”

주말.

윤이영은 주말 스케줄을 취소하고 집에서 대찬의 코디를 도맡았다.

대찬은 어정쩡하게 웃으면서 윤이영의 손길을 받았다.

“어차피 방송국에서 다 해줄 텐데.”

“됐어. 대기실 가서는 그냥 푹 쉬어. 내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네.”

윤이영은 대찬의 얼굴에 분칠을 하면서 하소연조로 말했다.

“암튼 어떻게 연예인보다 손이 많이 가? 떠들썩하게 발표회 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젠 방송까지 나가셔.”

“본인이 나서서 분칠 해주겠다고 했으면 그냥 군말 없이 해주시죠?”

“이런 말도 못해? 확 떡칠을 해버릴까 보다.”

“나 그냥 방송국에서 받을래.”

“좋은 말로 할 때 앉아라.”

“…….”

그래도 괜히 윤이영이 자신이 코디를 맡겠다고 한 건 아닌 듯했다.

솜씨가 썩 괜찮았다.

대찬은 흡족하게 거울을 들여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암튼 이런 쪽으로는 잠자코 윤이영 말 듣는 게 정답이네.”

“당연하지. 이런 쪽이 아니라 다른 쪽이래도 무조건 내 말이 정답이야.”

“날이 갈수록 과격해져.”

“본색을 드러내는 거지.”

윤이영은 흐흐 웃었다.

그녀는 방송국까지 대찬을 따라나서지 않았다.

MFG 쪽에서 얼굴마담이니 간판이니 어쩌고 마타도어를 쏟아내는 통이었다.

따라가 봤자 구설에만 오를 터였다.

윤이영은 현관까지만 대찬을 배웅했다.

대찬은 은오영 교수와 단둘이 방송국으로 향했다.

은오영 교수는 차 안에서도 준비한 서류를 무슨 염불 외든 계속 중얼거렸다.

대찬은 씩 웃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많이 떨리세요?”

“안 떨리면 사람이랍니까. 방송을 탄다잖아요, 방송을.”

“왜요, 은 교수님 은근히 무대체질이시던데.”

“제가요?”

“지난번에 전문가들 앉혀놓고 교수님 검증할 때도 똑 부러지시게 잘 해놓으시고선.”

“몇 사람 앞에 앉혀두고 하는 거랑, 불특정다수가 보는 카메라 앞에서 하는 거랑 같습니까, 어디.”

“본질은 같아요. 어차피 땅 짚고 헤엄치기예요. 상대는 사짜라구요, 사짜.”

“그래도…….”

“저쪽 껍데기가 카이스트라고 지금 쫄아계신 거예요, 설마?”

대찬이 살짝 건드리자 은오영 교수는 울컥했다.

“그, 그럴 리가 있습니까! 지들만 카이스트예요? 난 서울대예요, 서울대!”

“그러니까.”

“제깟 놈들이 이쪽 일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기가 막혀서, 정말.”

“국내 최고 권위자께서 그런 잔챙이들한테 왜 위축이 되셨냐, 그 말이잖아요, 제 말이.”

“그, 그러게요?”

“그러게요.”

대찬은 웃으면서 엑셀을 밟았다.

은오영 교수는 분기탱천한 채로 긴장감은 저 멀리 날려버렸다.

방송국에 도착하자 로튼 프룻츠 측과 MFG그룹 측은 같은 대기실로 안내받았다.

대찬의 일행은 단출한 수준을 넘어서 오붓했다.

대찬과 은오영 교수, 둘이 끝이었다.

지참한 물건도 거의 없었다.

생수 한 병씩과 한 손에 잡히는 문서 몇 장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생수는 오는 길에 다 마셔서 방송국에 도착하자마자 재활용 쓰레기통으로 던져졌다.

반면에 MFG그룹은 매머드급, 혹은 골리앗급이라고 부름직했다.

인원만 해도 무슨 장관 청문회를 준비하는 듯 잔뜩 달라붙었다.

고범수 회장의 비서만 해도 서넛은 되었고, MFG그룹의 연구실과 카이스트에서 나왔다고 거들먹대는 이들도 족히 열 명은 헤아렸다.

거기에 그룹 관계자와 기타 등등해서 대기실이 이산화탄소로 꽉 들어찰 지경이었다.

대찬은 고범수 회장에게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회장님.”

“…직접 보니 신수가 더 훤하시구만.”

“회장님 신수만 할까요.”

고범수는 대찬과 딱 2초만 악수를 나누고 바로 손을 거두었다.

MFG그룹 인사들은 대찬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대찬은 그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잠깐 대기하고 있으니, 사회를 맡은 아나운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참, 별 일도 다 있습니다. 이런 토론회는 처음이에요.”

그는 대찬, 고범수와 악수를 나누며 우스개로 말했다.

그 말을 얼른 고범수가 받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감도 안 되는 일을 감으로 키우는 것도 능력이지. 여러 사람 귀찮게 됐어요.”

“아유, 저는 그런 뜻으로 말씀 드린 게 아니고요. 이런 좌담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나운서는 고범수의 바람과는 다르게 긍정적으로 말했다.

그는 빙긋 웃으면서 대찬과 한 번 더 눈인사를 했다.

“근데 원래 토론이나 좌담회는 양쪽이 숫자가 비등비등해야 하는데, 오늘은 어째 한쪽이 너무 많은 듯합니다만.”

“그 부분은 괜찮습니다. 사전에 조율이 된 거라서요.”

대찬의 대답에 아나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러면 그림이 좀…….”

“하하, 제가 일방적으로 쥐어터지지만 않으면 그림 걱정은 안 하셔도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만.”

고범수는 냉수를 들이키며 대찬을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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