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372화 (372/556)

난 할 수 있어 372화

대찬은 그들의 지원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부정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동정심이나 인정이나 친분에 의해 그들의 지원 혹은 투자를 이끌어낸 것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 돈 나올 곳에 돈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대찬은 그 말을 쉽게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실제와 언론이 전달하는 사실의 가장 큰 차이는 맥락에 있다.

당연한 걸 얘기해도 구본진은 얼마든지 뒤집고 비틀 수 있었다.

가령 교황이 독일에 방문하여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고 하자.

기자들이 교황에게 묻는다.

지금 가장 먼저 생각나시는 것이 무엇이냐.

교황은 웃으면서 대답한다.

오랜 여행에 지쳐서 시원한 맥주 한잔을 하고 싶다.

독일이 맥주로 유명하니 그걸 염두에 둔 가벼운 농담이다.

그러나 한 기자가 이를 비틀어 내보낸다.

교황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술을 찾았다고.

고통과 번민에 시달리는 무수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술부터 찾는다고.

졸지에 교황은 제 소임을 내팽개친 알콜중독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대찬이 교황보다 상황이 안 좋다.

교황은 대중에게서 두터운 신뢰와 호감을 얻고 있지만 대찬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언론에서 물어뜯으면 좋다고 호응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사람들은 혈기만 넘치고 실속은 없는 젊은이를 미워한다.

거기에 과대포장까지 되어있다고 한다면 미움에 조롱이 더해진다.

게다가 유명세만큼이나 적잖이 규합된 윤이영의 안티팬들이 멋모르게 놀려대는 손가락은 별책부록이다.

교황은 자신을 비호해줄 세력이 삼중사중으로 있다.

그러나 대찬은 그렇지 않다.

구본진도 그걸 알고 저러는 것이다.

일단 자극적인 몇 가지 낱말만 이끌어내면 대찬을 요리하기란 간단하니까.

‘화를 내라, 얼른. 네가 뭘 아냐고, 인맥도 실력이라고, 인맥 없는 네 신세를 원망할 것이지 애먼 사람을 질투하느냐고 화를 내라. 기왕이면 잔뜩 날을 벼려서.’

구본진은 숨죽인 채로 대찬을 바라봤다.

대찬은 당장이라도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면전에서 관자놀이가 따끔하도록 혀 화살을 날리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선 이기는 것이 곧 지는 것이다.

대찬은 최대한 둥글둥글한 언어로 최소한의 방어만 해낼 작정이었다.

대찬이 입술을 떼려는 찰나.

서청수 회장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양복 외투의 앞섶을 살짝 여미며 대찬을 바라봤다.

“아, 실례가 안 되면 구본진 기자의 말에 내가 대신 대답해도 좋겠습니까, 조 대표.”

서청수 회장은 대찬에게 깍듯한 높임말로 허락을 구했다.

대찬은 갑작스런 그의 기립에 살짝 당혹했다.

그런 대찬의 표정을 보고 서청수 회장은 웃음기를 머금었다.

“물론 나는 로튼 프룻츠 임직원도 아니고, 이 행사의 주최 측도 아니지만 저 질문에 대해 할 말이 있어서. 결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요청을 드립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회장님.”

대찬은 기꺼이 서청수 회장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서청수 회장은 웃으며 대찬에게 목례하고 구본진 쪽으로 몸을 틀었다.

구본진은 당혹했다.

대찬이 닭이라면 서청수 회장은 소다.

현재 상황으로는 그렇다.

닭을 잡으려고 작은 칼을 잘 갈아놨는데 거대한 황소가 이쪽을 부라리고 있는 꼴이었다.

체급이 안 맞는다.

서청수 회장은 구본진에게 말했다.

“구 기자의 말씀을 듣자하니, 제 기분이 상당히 불쾌해집니다.”

“그게 무슨 말씀…….”

“천천히 곱씹어보니 말입니다. 내가 무슨 조 대표하고의 단순한 친분 때문에 로튼 프룻츠에 투자를 결정한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아,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긴, 맞지. 내가 투자를 결정한 건 전적으로 상업적인 마인드에 기인합니다. 아시겠어요?”

구본진은 침을 꼴깍 삼키고 고분고분 대답했다.

“물론 그걸 부정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문제 될 게 없겠군요. 오히려 나나 장복광 회장 같은 깐깐한 부자들을 자진해서 투자하게 만든 조 대표의 역량을 칭찬할 일이지.”

“조 대표의 역량은 인정합니다. 다만.”

“다만?”

“지금까지의 성과가 개인의 힘만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란 걸 강조하고 싶은 겁니다.”

“그걸 왜 강조하고 싶죠?”

“중요한 문제입니다. 남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꾸려나간다면 그건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기수가 아니라 인큐베이터 안에서 돈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는 미숙아에 불과하니까요.”

서청수 회장은 다소 노기가 오르는 듯 허리춤을 짚으며 말했다.

“구 기자, 사업 해봤어요?”

“예?”

“사업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닙니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못합니다. 안으로는 직원들의, 밖으로는 투자자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죠.”

“그야 그렇습니다만…….”

“남의 도움을 이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사업가의 첫 번째 덕목입니다. 분명히 강조합니다. 조 대표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남의 보살핌을 받은 게 아니라, 척박한 광야로 나가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금을 조달했습니다. 그 차이를 모르진 않으시겠죠.”

“…예.”

“이걸 걸고넘어지실 거면 먼저 귀하의 보스부터 그렇게 하시죠.”

“예?”

“저의 사돈이기도 한 홍구완 사장께서 얼마 전에 제주 극동호텔을 짓는 데 홍콩계 자금을 투자받으셨더군요. 대단한 성과 아닙니까? 구 기자님은 홍 사장님도 미숙아라고 하시렵니까. 미숙아라니, 구 기자의 단어선택이야말로 미숙합니다.”

“…….”

구본진은 감히 그러겠다고 하지 못했다.

서청수 회장은 그를 더 몰아붙였다.

“조 대표의 말과 행동을 멋대로 주무르면서 왜곡보도 한다면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이는 로튼 프룻츠에 투자한 필래의 이익마저 침해한 행위니까.”

“…….”

서청수 회장은 구본진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아시겠습니까? 대답하세요.”

“…알겠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구본진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자리에 착석했다.

본전도 못 찾은 구본진은 한 입 가득 모래알을 머금은 듯 입 안이 까끌까끌해졌다.

대찬은 그런 그를 웃으며 바라보고는 청중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자, 다음 질문하실 분 계십니까?”

발표회는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대찬은 발표회를 위해 귀한 시간을 내준 이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대신해 그들에게 금일봉을 건넸다.

회장님이 친히 봉투를 찔러주는 건 모양이 빠진다.

봉투를 건네받은 수행비서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대찬에게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약소하지만 회장님의 마음입니다. 좋은 곳에서 식사라도…….”

대찬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유, 아닙니다. 이렇게까지 민폐를…….”

“회장님께서는 조 대표님이 그렇게 나올 걸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이렇게 대답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요?”

“자네 예뻐서 주는 거 아니야. 여기저기서 오시느라 수고하신 분들한테 드리는 거야. 자네는 내숭 떨 자격 없어.”

“…네.”

받아칠 말이 궁해진 대찬은 공손히 서청수 회장의 금일봉을 받았다.

얼마가 들었나, 대찬이 슬쩍 봉투를 훔쳐보려고 하자, 비서가 또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자네 돈 아니니까 열어보지 마, 라고도 하셨습니다.”

대찬은 그에게 눈을 흘겼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회장님 말씀 빙자해서 그쪽 속마음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비서는 어흠, 헛기침을 하고 황망한 걸음으로 떠나갔다.

대찬은 아무래도 자신의 가설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을 내준 모든 이가 고맙긴 했지만 대부분 먹고 살만 한 이들이었다.

돈푼 아까운 줄은 잘 몰랐다.

그러나 한마음영농조합은 이래저래 주머니 사정이 가벼웠다.

대찬은 양해를 구하고 서청수 회장의 금일봉을 도진애 조합장에게 건넸다.

“이걸로 함평 내려가시기 전에 어르신들하고 아이들 맛있는 거라도 사드리세요.”

“아유 안 이러셔도.”

“제가 드리는 돈 아니에요. 회장님이 드리는 돈이에요. 이거 안 받으시면 저 회장님한테 옴팡 혼납니다.”

대찬은 거푸 사양하는 도진애 조합장의 주머니에 봉투를 욱여넣었다.

대찬은 내빈들을 전송하고 급하게 기자들에게로 갔다.

로튼 프룻츠에서 기자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

맛있는 저녁을 먹인다고 예쁜 기사가 뽑혀 나올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맛있는 저녁을 먹이지 않으면 예쁜 기사는 절대 기대할 수 없다.

대찬은 왜 기자들 중에 미식가가 그렇게 많은지, 그 이유를 확실히 알았다.

밥을 얻어먹으려는 기자들이 와글거리는 틈바구니에 최재한도 와있었다.

그는 대찬과 가볍게 악수했다.

“오늘 메뉴는 뭐야?”

“밥보다는 술이 중요하지 않나? 마오타이주 진퉁으로 모셔놨어.”

“웬일로 회사에서 취급하는 포도주로 안 깔고.”

대찬은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아까 화장실에서 일 보는데 어떤 기자가 그러더라. 몇 번씩이나 와인 선봬놓고 이번에도 와인 내놓으면 진짜 센스 꽝인 거라고.”

“기자들 고약한 거야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

그 고약한 집단에 소속되어있는 터, 최재한은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대찬은 적개심 어린 눈빛으로 기자들을 조심스레 흘겨보며 속닥거렸다.

“김영란법 통과돼도 아무 소용이 없어. 아무렇지도 않게 비싼 술 얻어먹는 건 여전하다니까.”

“하하…….”

“내가 누구 욕할 상황은 아니지. 정의구현보다는 내 앞가림 하느라 자진해서 비싼 술 바치는 판이니”

최재한은 대찬의 말에 헐렁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조금만 참아.”

“참아야지.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와도 어쩌겠어. 기자님들 비위에 1밀리라도 어긋나면 맹폭을 맞는 걸.”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그래도 오늘처럼 자질구레한 비위 맞추기가 오래가진 않을 거야. 배양육, 아니 비도축육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 목을 매는 쪽은 도리어 기자들이 될 테니까.”

“미래의 가정은 별로 위로가 안 돼. 당장 기자들 중에 밝히는 것들이 2차 보내달라고 할까봐 겁나는 판이야.”

최재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찬은 최재한의 손을 살짝 흔들면서 주변을 흘끗거렸다.

“그런데 구 기자는 안 보인다?”

“아까 서 회장한테 훈계 듣고는 씩씩거리면서 먼저 나가더만.”

대찬은 김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암튼 좀스러운 건 알아줘야 돼.”

“서 회장이 태클 걸어줬으니까 별일은 없을 거야. 기자단 중에서도 구 기자 호박씨 까는 사람들 많더라.”

대찬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인간들 상대하면서 웬만하면 면전에선 침착하거든. 근데 그 인간 상대로는 그게 안 돼. 군대 있을 때 입에서 설사 냄새 나던 중대장 상대하는 것보다 더 고돼.”

“그 인간은 입에서만 설사 냄새 나는 게 아니니까.”

“그 자체로 설사인 인간이지, 설사 인간. 아니, 인간 설사인가.”

최재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설사 타령은 그만하고 얼른 기자들 상대로 비즈니스 해라.”

최재한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과 가까운 기자들에게 대찬을 소개해주었다.

“여기는 민국신문 성대우 기자, 나랑 회사는 다르지만 입사동기.”

“반갑습니다, 조대찬입니다.”

성대우 기자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늘 말씀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모쪼록 기자님께서 대중에게 오늘 자리를 잘 소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걱정 마시죠. 조 대표님 기사는 나오기만 하면 제법 잘 팔리는 편이에요. 윤이영 씨도 단단히 한 몫 하지만 조 대표님 기사는 그 이야기만으로도 재미가 있으니까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성대우 기자는 웃음을 머금었다.

“원체 좋으시니 좋게 봐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더 잘 부탁드립니다.”

대찬과 성대우 기자는 서로를 향해 깍듯이 묵례했다.

성대우 기자는 흐흐 웃으면서 대찬에게 말했다.

“구본진 선배, 아마 속 많이 쓰릴 겁니다.”

“그러시겠죠. 안타깝습니다. 저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시니.”

성대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두 분 사이의 악연은 저희 기자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합니다. 구 선배도 딱히 개의치 않고 곧잘 조 대표님 들먹이시기도 하고요.”

“악연이라고 하면 억울해요. 저는 일방적인 피해자거든요.”

성대우는 쾌활하게 웃었다.

“하하, 걱정 마십시오. 누구도 조 대표님 잘못이라고 생각 안 하니까.”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성대우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허공을 바라보며 가볍게 탄식했다.

“구 선배가 번번이 당하고 마네요. 저번에는 유소진이한테 당하더니 이번에는 서청수 회장 같은 거물이 조 대표님 방패막이를 자처하고 나서니 이길 도리가 있나요.”

“서 회장님이 저렇게 나서시는 분이 아닌데.”

“오죽하면 그러셨겠어요, 오죽하면. 뭐 그래도 구 선배는 본인이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할 거예요. 그 양반도 속 많이 쓰릴 겁니다. 그지, 최재한?”

성대우의 질문에 최재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소주깨나 드실 거다.”

“을지로 껍데기집 아줌마 오늘 또 고달프시겠네.”

성대우의 말에 대찬이 그를 흘끗 바라보며 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