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69화
서청수 회장은 자신의 입김으로 그들을 대동했다.
세를 과시하는 동시에 대찬이 그들과 우선 안면이나 트게끔 만들어준 것이었다.
그것과 별개로 적절한 투자처를 찾고 있는 그들에게 대찬은 충분히 매력적이기도 했으니 윈윈이었다.
대찬은 그들을 향해서는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비굴할 필요야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필요는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필래벤처캐피탈의 대표를 비롯한 ‘돈줄’들은 자본가의 여유로운 미소를 걸치며 대찬과 악수를 나눴다.
“로튼 프룻츠는 오랜만에 구미가 당기는 스타트업입니다. 패기도 있고, 이미 가진 경쟁력도 충분하고.”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우리가 먼저 점찍어놓았는데 그 대단하신 쵸 후쿠히로가 먼저 돈을 꽂는 바람에 말이야, 너무 유명해졌어.”
대찬은 겸손한 태도를 견지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합니다.”
그 말에 자본가들은 또 넉살 좋게 웃었다.
“허허, 그거 쵸가 들으면 실망하겠구만. 자기를 고작 우물에 비하다니. 본인은 스스로가 오대양 중에 하나라고 속으로 으스대고 있을 텐데 말이야.”
“하하,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거 얼마 이상의 투자는 허락하지 않는다며?”
“안정적으로 회사를 꾸려나가기 위해 허벅지 찔러가며 인내하고 있습니다.”
“보통 조 대표 같은 젊은이는 사방에서 돈이 쏟아지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서 중심을 잃기 마련인데.”
“스타트업에도 수저가 있으면 저는 금수저는 아니어도 은수저 축에는 들지 않겠습니까.”
“하기야 그렇지. 당장 필래로부터 적잖은 돈을 받았으니까.”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급하지 않습니다. 저도 투자에 목말랐다면 이렇게 태연하지 못했을 겁니다. 남들하고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역시 목구멍이 포도청입니다.”
그러자 돈 많은 사람들은 대찬을 기특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겸손할 줄도 알고. 확실히 은수저 티가 나는구만.”
“앞으로 사업을 확장하면 저도 갈증을 느낄 겁니다. 그땐 대표님들의 구미가 당기도록 회사를 잘 키워나가겠습니다.”
“쌈짓돈 들고 요이땅만 기다리고 있으니, 돈 받을 생각 있으면 우리한테 먼저 귀띔을 해줘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찬은 다시 깍듯한 인사로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서씨들이 데려온 자본가들을 제해도 제 발로 찾아온 자본가들이 꽤 되었다.
그들도 대찬의 사업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특히 바로 위험부담이 큰 배양육 사업에 뛰어들지 않고, 원두와 포도주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해 둔 점을 높게 샀다.
그 부분이 자신의 지분이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되지는 않을 것이란 믿음을 주었다.
그런데 대찬은 돈 많은 사람과의 무수한 악수 끝에, 그들이 스스로 알음알음으로 소문을 들어 찾아온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모두 발표회장 안으로 들어간 후.
대찬은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만몽거사를 발견했다.
양들을 축사 안으로 다 들여보내고 흡족하게 웃는 양치기 같았다.
대찬의 얼굴에 반가움이 번졌다.
“거사님!”
“이놈의 새끼. 제 딴에 이제 거물이 됐다고 뒷방 늙은이는 보러 오지도 않더구만.”
“그럴 리가요. 저는 항상 거사님 생각이죠. 많이 바빠서 잘 못 찾아뵌 건 죄송합니다.”
“그래, 네놈이 늙은이를 하도 무시하길래 아직 안 죽었다고 시위하러 왔다. 나 아직 쓸 만하지?”
“무시라뇨, 당치도 않아요.”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만몽의 심술을 부정했다.
만몽거사는 에잉,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고는 뒷짐을 진 채로 발표회장을 향해 걸어갔다.
대찬은 자신의 뒤에 멀뚱히 서있는 직원에게 눈빛을 보내서 만몽을 부축해 입장하도록 했다.
만몽이 데리고 온 돈줄은 숫자로만 따지면 서청수 회장보다 많았다.
물론 굴리는 돈의 규모로 따지자면 비교가 안 되긴 했지만.
만몽의 측은 암자 앞에 조약돌로 쌓은 돌탑 수준이고 서 회장 측은 석가탑 수준으로.
만몽은 팔자에도 없고 체질에도 안 맞는 남의 영업을 뛰어주느라 숱한 고객들을 구워삶았으리라.
얼마나 심통이 잔뜩 나있었을지.
잔뜩 부은 만몽의 입술을 떠올린 대찬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만몽의 노고에 감사했다.
꼭 돈 되는 손님만 손님은 아니었다.
주머니 가벼워도 손님은 손님이었다.
대찬은 그들이라고 꺼리지 않았다.
장내가 북적거릴수록 기자들의 카메라에 찍히는 그림이 예쁘게 나온다.
대찬의 연락을 받은 돈 안 되지만 반가운 손님들도 속속 입장했다.
양파 파동 때 인연을 맺었던 한마음양파영농조합의 도진애 조합장이 로비로 걸어왔다.
“조합장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조 대표가 초대 안 해줬으면 이런 데 구경할 엄두도 못 냈을 걸.”
도진애 조합장은 홀로 오지 않았다.
장거리를 뛸 체력이 여전히 왕성한 마을 어른들이 동행했다.
그리고 그들을 어리광을 졸업하고 어엿한 청년의 태가 나는 한마음학교 학생들이 부축했다.
대찬은 그들과도 반갑게 인사했다.
인연을 쌓은 남해 떡골마을 이완승 청년회장과 마을사람 몇몇도 상경해 대찬에게 얼굴을 비췄다.
그들은 와글와글 떠들면서 발표회장으로 들어갔다.
시시콜콜한 돈 얘기만 해대는 시시한 부자들 사이에 돈 없는 남녀노소가 끼어들었다.
장내가 한결 활기차졌다.
노근기도 발표회장을 찾았다.
국내에는 쉰 곳 가량의 지점을 보유하고 심지어는 중국 본토에까지 지점을 냈다고 했다.
오로지 요리 실력 하나만으로 중견 경영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에게는 이번 발표회에서 주어진 임무도 따로 있었다.
“셰프님, 어서 오세요.”
“셰프는 무슨. 조 선생, 오늘따라 더 멋지게 차려입었네?”
“한두 사람 앞에 서는 게 아니니까요. 괜찮아요?”
노근기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넥타이를 안 하니까 한결 시원하고 패기 있어 보이네. 좋아.”
“아, 그래요? 그래도 뭔가 멋들어진 넥타이를 했다면 좀 더 낫지 않았을까요? 예를 들면 멸종위기 보호종 나비 무늬를 수놓은…….”
노근기는 대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질색했다.
“엑, 그게 뭐야. 구려.”
“…구리군요.”
대찬은 쩝, 입맛을 다시며 노근기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밖에도 대찬을 아는 여러 손님들이 한 무더기 등장했다.
송희근은 인터넷 방송인답게 고프로를 들고 렌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리며 입장했다.
“오늘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배양육인가 뭔가 인조고기 발표회 한다고 해서 와봤습니다. 커피남한테 돈 받은 건 아니고요. 그냥 초대권 받아서 참석하기로 했는데 이왕 온 김에 방송 한번 켜봤습니다. 여러분도 실험실에서 고기 만든다니까 좀 신기하지 않아요?”
“아, 거 비도축육이란 좋은 이름 놔두고 인조고기가 뭡니까.”
대찬이 끼어들어서 툴툴거리자 송희근이 퉁을 놨다.
“인조 보고 인조라는데 뭘 그렇게 불만이야? 네가 봉림대군이냐?”
“남의 장사 방해하러 온 거 아니면 바른 말 고운 말 써주세요.”
송희근은 대찬의 말을 무시하고 쌩하니 발표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누가 뭐래도 나는 인조고기라고 할 겁니다, 여러분. 인조고기, 인조고기, 인조고기…….”
대찬은 질린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렇듯 각계각층의 이런저런 사람들이 찾아와 발표회장은 북새통을 이뤘다.
개중 저명한 사람들은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하이라이트는 윤이영이었다.
윤이영은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맨 마지막에 등장했다.
과연 기자들의 관심도가 남달랐다.
그녀만 촬영하고 돌아갈 요량이던 연예부 기자들은, 윤이영이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그 사이에 놀 수는 없었으니 열심히 다른 유명인사들 사진도 올려서 인터넷 기사로 게시했다.
대찬은 윤이영까지 친근한 미소로 에스코트한 후, 찌뿌듯한 몸을 풀었다.
직원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대표님, 이제 대기 장소로 이동하시죠.”
“네, 그래야죠.”
대찬은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부랴부랴 무대 뒤편으로 이동했다.
무대 뒤에 서니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전에 왕왕 울렸다.
보지 않아도 얼마나 인파가 몰렸을지 충분히 직감되었다.
‘다행이다.’
대찬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심 사람이 들어차지 않으면 어쩌나 고민이 깊었다.
그래도 든든한 우군들이 있으니 파리 날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난한 정도로 끝나서는 곤란했다.
자신이 독단적으로 결정해 예산을 무리하게 투입한 일이었다.
대성황이어야만 했다.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우선 넓은 대연회장을 사람들로 꽉꽉 채워냈으니 판은 깔아졌다.
이제 성공 여부는 오롯이 대찬 자신의 능력만으로 판가름 날 것이다.
이날 발표회를 위해 중림대 연구실에서 썩어가던 은오영 교수와 다르샨 싱 전무도 상경했다.
오히려 이날 발표회의 주인공은 대찬이라기보다는 이들이었다.
대찬은 빈 깡통이었다.
그가 깡통을 두드리며 열심히 분위기를 끌어올려주면, 은오영 교수와 다르샨 싱이 대담 형식으로 비도축육의 장점과 현재의 개발상황, 미래의 성과, 그리고 한계까지 솔직하게 공개할 예정이었다.
대찬이 무대에 오르기 전, 섭외된 사회자의 정제된 목소리가 들렸다.
프리 선언을 한 전직 아나운서였다.
윤이영이 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친분을 쌓아 기꺼이 오늘 도와주기로 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적절한 보수에서 몇 푼 할인된 가격이었다.
그녀는 대찬이 올라오기 전까지 무대를 책임졌다.
“안녕하십니까, 바쁘신 와중에도 불구하고, 오늘 자리를 빛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 이후로 간략한 발표회 개요의 설명이 뒤따랐다.
“오늘 여러 훌륭한 내빈 분들께서 참석해주셨지만, 여러 사정으로 부득이 불참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몇몇 분들께서는 아쉬운 마음에 영상을 보내오셨습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스크린에 영상이 재생되었다.
쵸 후쿠히로의 얼굴이 가장 먼저 등장했다.
“안녕하십니까, 장복광입니다.”
그걸 맨 앞자리에서 보는 서청수 회장의 얼굴 근육이 씰룩거렸다.
물론 그걸 알 리 없는 영상 속 쵸 후쿠히로의 얼굴은 더없이 평온했다.
그게 더 서청수 회장의 복장을 뒤집었다.
“로튼 프룻츠가 열과 성을 쏟은 결실이 오늘 첫 선을 보입니다. 오늘이, 인류의 식생활에 중대한 변혁을 일으키는 원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발표회를 찾은 이들은 친숙한 쵸 후쿠히로의 얼굴을 보고 박수를 쳤다.
쵸 후쿠히로가 로튼 프룻츠에 투자를 결정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본인이 나서서 공을 들이는 건 또 느낌이 달랐다.
쵸 후쿠히로의 등장만으로도 로튼 프룻츠는 속 빈 강정이 아니라는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쵸 후쿠히로에 이어, 한 중년 백인 남성이 화면 가득 얼굴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 옆에는 ‘마이크 햇치/美 상원의원’이라는 자막이 전시되었다.
“안녕하십니까. 미국 미네소타 주를 대표하는 마이크 햇치 상원의원입니다. 로튼 프룻츠의 조대찬 대표와 인연을 맺은 지 벌써 십 수 해가 되었습니다. 미네소타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대학생이 이제는 세계의 식량산업을 선도하는 대열에 섰습니다.”
대찬은 식량산업을 선도하고 싶어 하는 지망생이지, 아직 선도하는 위치는 아니었다.
역시 정치인은 뻥이 셌다.
“비록 오늘 행사에 참여하지는 못하지만, 멀리 워싱턴에서 조대찬 대표의 열정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식량혁명의 현장을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기회를 얻으신 여러분께 깊은 질투의 마음을 보냅니다.”
마이크 햇치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마무리했다.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쵸 후쿠히로, 그리고 세계 정치의 중심을 지키는 마이크 햇치.
두 사람의 인사만으로 로튼 프룻츠에 대한 공신력은 확 올라갔다.
그렇게 자신이 저잣거리에 흔한 약장수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나서야 대찬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우레 같은 박수소리가 들렸다.
아는 사람이 많았으니 사적인 응원의 감정이 듬뿍 담긴 박수였다.
테이블 하나를 꿰차고 앉은 필래 비바체 사외이사실 사람들이 그런 대찬을 보고 수군거렸다.
허운이 김산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 양반 저거 좀 신난 거 같다?”
“그러게요. 평소답지 않게 들떠 보이시긴 하네요.”
그러자 유채경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지금까지 저렇게 주인공으로 섰던 적이 없으니까.”
허운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것도 그러네. 일은 열심히 했는데 저런 자리에는 주로 서 회장이나 서 대표가 나갔으니까.”
유채경은 살짝 턱을 괴며 대찬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우리 입사 동기가 대중친화력도 좋을지 한번 볼까.”
“망했으면 좋겠다.”
허운의 말에 유채경이 찌릿 눈총을 쐈다.
“그건 또 무슨 심술이야?”
“이것저것 착착 잘하니까 하나라도 빠지는 게 있어야지. 올라오다가 확 넘어지기라도 했어야지.”
“암튼 내 남편이지만 진짜 못났다.”
허운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런 못난 놈이랑 왜 결혼했냐!”
“됐어.”
유채경은 허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대찬 쪽에 집중했다.
허운은 그런 유채경의 뒤통수를 향해 질투의 눈총을 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