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368화 (368/556)

난 할 수 있어 368화

“어딜 감히 이사님 개인공간을 침범합니까? 허락도 없이?”

꿋꿋이 읽고 싶은 부분을 다 읽은 허운은 자기에게도 할 말이 있었다.

그는 따지듯 대찬에게 말했다.

“이사님, 오실 때마다 좋아하시는 빵 준비돼있죠?”

“근데요?”

“책상 어질러놓고 가셔도 다음에 오시면 딱 취향에 맞게 정돈돼있죠?”

“근데요?”

“그게 다 누구 공이겠습니까. 조대찬 심리학과 박사학위 소유자, 허운이가 있으니 가능한 일이죠.”

“근데요?”

“아, 진짜 앵무새 빙의하셨어요? 근데요밖에 하실 말씀이 없으세요?”

대찬은 세상에서 가장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 허 과장이 근데요밖에 할 말 없게 만들잖아.”

“섭섭하게 이러실 거예요? 이렇게 이사님을 위해 노력하는 저한테 이러실 수가 있어요?”

“나 빨리 이슈 파악하고 이사회 참석해야 돼. 허 과장하고 노닥거릴 시간 없어.”

허운은 짓궂은 말로 대찬의 관심을 갈구했다.

자기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는 짝사랑을 괴롭히는 초등학생처럼.

“로튼 프룻츠 조대찬 대표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예비하는 첫 걸음을 오는 24일, 필래호텔에서 개최되는 발표회에서 내딛는다.”

대찬은 신경질적으로 쥐던 펜을 탁 내려놓으며 허운을 쏘아봤다.

막 악을 쓰려는 순간, 대찬의 분노를 눈치챈 허운이 후다닥 이사실을 뛰쳐나갔다.

대찬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펜을 쥐었다.

6월,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날이었다.

전방위적으로 발표회에 공을 들였던 대찬을 하늘이 기특하게 여기기라도 한 듯한 날씨.

대찬은 수트를 빼입었다.

마지막으로 넥타이를 매려는 대찬의 손을 윤이영이 잡았다.

“노타이로 가.”

“그래도 격식 따지는 양반들이 많은데 괜찮을까?”

윤이영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첨단산업의 총아라며?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예비하는 첫걸음을 내딛는다며?”

“그건 내가 하는 소리가 아니라 포도주 먹고 취한 기자가 오버하는 거지.”

“어쨌든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은 그런 걸 거 아냐. 근데 넥타이로 목 꽉 조르고 등장하겠다고?”

대찬은 궁색하게 항변했다.

“그래도 트렌디하게 보이려고 멸종위기 2급 쌍꼬리부전나비 무늬 들어간 넥타이 골랐잖아. 환경보호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하는 대찬의 말은 급조된 멘트라는 게 뻔히 드러나듯 어색했다.

윤이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휙 대찬의 넥타이를 낚아챘다.

대찬은 애처롭게 손을 뻗었지만 윤이영은 잽싸게 넥타이를 숨겼다.

“안 돼! 내 쌍꼬리부전나비!”

“좋은 말로 할 때 노타이로 해라. 오늘 관심은 철저히 배양육이 맞춰져야 돼. 괜히 쌍꼬리부전나비로 쏠리면 기껏 준비한 발표회 망치는 거야, 알아?”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긴 하네.”

“대신 내가 수염풍뎅이 브로치 달아줄게. 이건 멸종위기 1급이다?”

윤이영은 자신의 보석함에서 정말 수염풍뎅이를 본뜬 브로치를 꺼내 착용했다.

다른 이가 했으면 복장이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혹평을 들을 일이었다.

누가 보면 벌레 붙었다고 떼어주려고 할 정도로 수염풍뎅이가 지나치게 사실적이었다.

그러나 윤이영이 착용하니 의도된 언밸런스함으로 비춰졌다.

흉한 벌레도 윤이영을 무슨 대지의 여신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주었다.

옷걸이가 되니까 몸에 붙은 벌레 한 마리도 그렇게 우아할 수가 없었다.

대찬은 그럼에도 볼멘소리를 했다.

“그래도 쌍꼬리부전나비가 더 예뻐.”

“초딩이니?”

대찬은 윤이영이 집어던져 처량하게 널브러진 쌍꼬리부전나비 넥타이를 흘끗 보고는, 윤이영의 손에 이끌려 현관 밖으로 내몰렸다.

대찬은 윤이영과 함께 필래호텔로 향했다.

그곳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대찬은 발표회 준비를 총괄하는 직원에게서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모든 준비 차질 없이 완료했습니다. 오늘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사표 내겠습니다.’

자신감이 묻어나는 메시지였다.

대찬은 신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대찬이 그걸 슬쩍 윤이영에게 보여주자 배시시 웃었다.

필래호텔 정문에 도착하자 대찬은 하차를 준비했다.

그러나 윤이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찬이 의아한 듯 그녀에게 물었다.

“안 내려?”

“안 내릴래.”

대찬은 불안이 가득 찬 눈으로 윤이영을 바라봤다.

“오늘 윤이영 안 오면 발표회도 나가리야.”

“그렇게 자기 제품에 자신이 없어?”

“아니, 그만큼 윤이영이 대단한 사람이다, 이 말이지.”

“둘러대기는.”

둘러대는 게 아니고!

대찬은 급히 항변하며 정말로 둘러대기 시작했다.

“너 온다고 안 했으면 연예부 기자들까지 우글거리겠어? 여기까지 와서 안 오면 안 돼요, 윤이영 씨. 진짜로.”

대찬의 말에는 은근한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윤이영은 미소를 지었다.

“쩔쩔매는 조대찬도 귀염성이 좀 있다?”

“그만큼 급하다니까.”

“걱정 마. 불참하려는 거 아니니까. 오히려 그 반대야.”

“반대라니.”

“아직 시간이 임박하지 않아서 기자들이 덜 모였어.”

“아.”

그제야 대찬도 윤이영의 의도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바람잡이 역할은 잘해줄 수 있잖아. 그러려면 기자들이 더 모여야 돼.”

“그럼 어쩌려고?”

“오빠는 이것저것 챙길 거 많으니까 먼저 내려. 나는 차로 한 바퀴 더 돌고 들어갈게.”

대찬은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그녀에게 물었다.

“윤이영 혼자 들여보낸다고 내가 욕먹지 않을까.”

“암튼 자기 이미지는 엄청 아껴. 별 문제 없을 거야.”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생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찬은 먼저 차에서 내리며 윤이영에게 말했다.

“나 때문에 괜히 꽉 막히는 도로 한 바퀴 돌게 생겼네.”

“이러는 보람만 있으면 좋겠네.”

“있을 거야. 끝나고 맛있는 거 먹자.”

“배양육 남은 거 짬처리나 하지 마.”

“우리 고기 너무 맛있어서 남을지나 모르겠네.”

윤이영은 대찬을 보며 씩 웃음을 짓고는 저만치 떠나갔다.

홀로 내린 대찬은 필래호텔 로비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부지런한 기자들은 벌써 나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무슨 대단한 영화제도 아니고, 연말 시상식도 아니었다.

당연히 눈이 시릴 정도의 플래시 세례는 없었다.

그래도 일개 중소기업이 단독으로 추진하는 발표회임을 감안하면 반응이 썩 괜찮은 편이었다.

대찬이 간간이 터지는 플래시의 환영을 받으며 로비 안으로 들어가자, 차질 없는 발표회 준비를 위해 적극 협조 중이던 필래호텔 직원이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

“아, 고생이 많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들의 헌신적인 봉사는 물론 대찬이 필래의 요인이라거나 필래에서 세운 공로가 탁월한 것에만 기인하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현재 권력보다 더 신경 쓰이는 미래 권력, 서원웅의 최측근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대찬도 유감이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니까.

조금이라도 차질이 있으면 사표를 쓰겠다던 직원의 포부는 허언이 아니었다.

대찬이 깐깐한 행정보급관처럼 이것저것을 점검했는데도 이상이 없었다.

석연치 않은 지점을 콕콕 짚어 묻는 말에도 지체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찬은 그런 그를 흡족하게 보고는 승진시켜줘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본 행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제법 시간이 남았다.

로튼 프룻츠가 이런 행사를 여러 차례 치러본 관록이 있었다면 여유롭게 프레젠테이션 준비에만 열중했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다보니 대찬도 그렇게 유유자적할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대찬이 있는 인맥 없는 인맥 모두 동원하여 초대한 마당이었다.

그들이 애써 찾아준 노고에 감사를 표해야 했다.

대찬은 마치 자기 결혼식처럼 행사장 앞에 서서 내빈들을 맞이했다.

이번에는 정말 단단히 얼굴에 철판을 깔고 쭉 연락을 돌렸다.

평소 아쉬운 소리 한번 잘 하지 않던 대찬이 적극적으로 참석을 권하니, 엉덩이 무거운 사람들도 필래호텔을 향했다.

대찬의 초대는 다단계식이었다.

대찬이 초청한 각 분야의 저명인사들은 또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을 초청했다.

대찬은 다소 상기된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서청수 회장은 서원웅과 함께 등장했다.

그는 대찬의 발표회를 빛내주는 김에 자기 떡고물도 챙기려 들었다.

이 자리는 아들과의 돈독한 관계를 공개하며 서원웅의 위상이 견실함을 드러낼 좋은 기회였다.

대찬은 서원웅의 지기지우였으니 맥락이 억지스럽지도 않고 자연스러웠다.

대찬은 이런 자리에서도 알뜰살뜰 자기 이익을 챙기는 서청수 회장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서청수 회장은 빙긋 웃으며 대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제법 사업가 태가 나는구만.”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청수 회장은 흐뭇한 미소를 계속 머금었다.

“듣자하니 아주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내빈으로 참석한다더구만. 내가 별자리 1등성일 줄 알았는데 필래 서청수는 3등성이나 되면 다행이겠어.”

“센타우루스 자리에는 1등성이 두 개라던데요.”

서청수 회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래?”

“네, 다른 내빈이 1등성이라고 회장님이 1등성이 아닌 건 아닙니다.”

서청수 회장은 서원웅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현학적인 사탕발림이구만.”

“하하…….”

서원웅은 특유의 겸연쩍은 웃음만 지었다.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바라봤다.

“같은 1등성이라도 더 밝은 게 있고 더 어두운 게 있을 거 아닌가. 알파 별, 베타 별인가. 나는 어느 쪽이지? 알파인가?”

“죄송하지만 더 어두운 쪽입니다.”

대찬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서청수는 장난식으로 역정을 냈다.

“이런 젠장.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안 되나?”

대찬은 흐흐 웃으며 대꾸했다.

“오늘 윤이영 씨도 참석하기 때문에…….”

“그래, 그렇다면 이길 재간이 없군. 난 또 반쪽발이 장복광이라도 오나 싶어서, 그 치한테 벌써 밀려버렸나 싶어서 섭섭할 뻔했지 뭔가.”

“하하, 쵸 후쿠히로 회장은 오늘 불참입니다.”

“그건 그것대로 기분 나쁘군. 내가 그 인간보다 한가해 보여서.”

“저를 아끼는 마음이 더 크시기 때문이겠지요.”

“요리조리 빠져나가기는.”

서청수 회장은 씩 웃으면서 대찬의 어깨를 툭 건드리고 발표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서원웅 역시 대찬과 잠깐 시선을 마주치고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대찬은 그런 서청수 회장의 뒷모습을 흘끔 바라봤다.

서청수 회장이 쵸 후쿠히로를 일컬어 반쪽발이 운운한 건, 그의 언어생활이 천박한 까닭은 아니리라.

면전에서 쵸 후쿠히로를 욕보이면 대찬이 무슨 반응을 보일까.

그걸 확인해보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필래는 쵸 후쿠히로보다 먼저 로튼 프룻츠에 투자하여 적지 않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서청수 회장은 대찬의 가능성을 높게 쳐주고 있었다.

로튼 프룻츠가 토실토실 잘 크면 어떤 방식으로든 필래에 유익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국내에서의 입지는 자신만 못하지만 세계적으로는 오히려 자신이 그만 못한 쵸 후쿠히로가 끼어들었다.

그게 적잖이 서청수 회장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굳이 냉철한 비즈니스 마인드를 제하고도 서청수 회장이 쵸 후쿠히로를 의식할 이유는 다분했다.

남자는 자라고도 한 자락의 유아적 호승심과 알량한 소유욕을 지니기 마련.

그렇기에 서청수 회장은 쵸 후쿠히로의 개입이 썩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부러 쵸 후쿠히로를 세게 할퀴고 대찬의 표정을 슬그머니 살폈다.

저 녀석이 쵸 후쿠히로와 돈의 문제를 넘는 정신적인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지.

대찬은 잠깐 약한 진저리를 쳤다.

서청수 회장 부자는 자신들만 참석하지 않고, 이름값 있는 동행들을 대동한 채였다.

김태준 사장과 왕윤수 사장, 장백주 실장이 뒤따랐다.

그들의 살가운 표현도 김왕장의 순서를 따랐다.

물론 김태준 사장 쪽이 대찬에게 가장 살가운 덕담을 건넸다.

장백주 실장은 예의상 하는 덕담도 우물우물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비바체의 김풍호 전무, 오윤 전무, 옥문영 상무 등도 말쑥하게 차려입고 등장했다.

그들은 김왕장보다 대찬에게 더 친숙했기 때문에, 대찬은 더 편안한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다.

서청수 회장이 대동하고 온 사람들은 비단 김왕장 실장 등 자신의 측근과 김풍호 전무 이하 서원웅의 측근들만이 아니었다.

로튼 프룻츠에 필래의 자금을 적잖이 투입한 필래벤처캐피탈의 대표를 위시하여 무슨 사모펀드의 대표, 어디 재단의 이사장 등.

돈깨나 굴린다는 인물들이 속속들이 등장했다.

지금이야 대찬은 거액의 투자를 자진해서 물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훗날에도 그럴 순 없었다.

치열한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그들의 존재는 필수, 그야말로 빛과 소금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