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67화
마음 같아서는 왕복 항공권과 숙박비를 그린블러드에 청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그걸 입 밖에 냈다가는 꼬락서니만 더 비참해진다.
그들은 시원찮은 배웅을 받으며 그린블러드를 나섰다.
대찬이 진위생에게 말했다.
“그래도 소득이 아주 없진 않아요.”
“그래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 업계 선두라고 평가받는 그린블러드가 생각 외로 업계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냥 우리한테만 관심이 없는 거 아닐까요?”
진위생의 말에 대찬이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상황을 제대로 파악 못하고 이는 게 업계동향을 파악 못하고 있는 거죠. 이걸 꼭 설명해야 돼?”
“아니, 좀 구차해서……. 그럼 두 번째는 뭔데요?”
“우리 회사가 생각보다 지금 잘 나가고 있다는 거.”
그러자 진위생은 코를 훌쩍이며 대찬을 바라봤다.
“그게 무슨…….”
“아까 우리가 생산단가가 백 그램에 천 달러라고 했을 때, 그 백돼지 얼굴 봤어요?”
“아, 원 싸우전 달러 말씀하시던 게 생산단가 얘기였어요?”
“아, 진위생 씨 영어 잘 못하지.”
“네.”
이번에는 대찬이 코를 훌쩍였다.
“저쪽에서 대충 얼버무리긴 했지만 우리가 앞서있거나 아무리 못해도 그린블러드 수준은 와있는 게 분명해요.”
“사장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소득이라고 하긴 뭐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좀 낫네요.”
대찬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로 다양한 인종의 실리콘밸리 사람들을 지나치면서 진위생에게 말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는 성에 안 차지.”
“그건 그래요.”
“음, 못 먹은 판이지만 그래도 개평 정도는 챙겨가야 하는데.”
대찬은 맑은 하늘을 잠깐 올려다보다가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는 진위생을 곁눈질로 흘끗 보며 말했다.
“여기 근처에 피자 맛있는 집 있는데 거기서 맥주나 한잔 할까요?”
“마다할 리가 있나요.”
“갑시다.”
피자 생각을 하니 출출해져서 대찬의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잠깐의 실리콘밸리 방문을 마치고 대찬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장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직원들은 쩝,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아쉬웠다.
괜히 가서 봉변만 당하고 온 것만 같아 혈기왕성한 일부는 비분강개했다.
“미친 미국 돼지 멱따러 가실 분 구합니다!”
“나 갈래!”
“저도 갈래요. 잭 머피인지 머핀인지 아주 그냥, 확!”
“나도! 회사에서 비행기 끊어주면…….”
“사장님, 우리 혹시 돼지고기 배양육은 안 만듭니까?”
대찬은 웃으면서 되물었다.
“갑자기 웬 돼지고기?”
“제가 그 미국 돼지새끼 세포 떼어올 테니까 우리 그걸로 배양육 만들어요.”
대찬은 직원의 농담 반 진담 반의 분노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자기보다 더 분을 토하는 그들을 보면서 탁월한 애사심을 확인했다.
그게 또 빈손으로 돌아온 대찬에게 일말의 위로가 되었다.
직원들은 대찬을 향해 칭얼거렸다.
“분노가 안 풀리는데 어떡해요? 정식으로 항의라도 하면 안 됩니까?”
“항의하는 팩스 넣어봤자 책임 있는 사람한테 도달하기도 전에 실무자 선에서 북북 찢겨져서 쓰레기통에 처박힐 걸요?”
“하긴 그렇네요. 아니면 그대로 파쇄기에 갈리거나.”
차분한 직원들은 쩝, 입맛을 다시며 투정을 관뒀다.
그러나 여전히 혈기 넘치는 이들의 목소리는 분에 차있었다.
“그럼 이대로 한 대 맞고 가만히 있어야 됩니까?”
“그린블러드 쪽에 갚아주는 길은 우리가 더 치고 나가는 것뿐이에요. 그런데 그거랑 별개로 오늘의 수모를 잘 이용할 방법은 있어요.”
“그게 뭡니까?”
대찬은 웃으면서 직원에게 말했다.
“대대적으로 발표회를 했으면 하는데.”
“발표회요?”
직원의 귀에는 뜬금없는 소리였다.
그린블러드 미트에게 제대로 된 응수 좀 하자는데 발표회가 웬 말인가.
그저 말 돌리기 정도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직원이 의아한 듯 되묻자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체급치고는 조금 거창하게. 이목을 확 끌 수 있게.”
“그게 초록 선지 돼지한테 앙갚음해주는 거 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대찬은 헐렁하게 웃었다.
“그 의문은 일단 접어두고요. 일단 준비합시다.”
여전히 의문은 남았지만 보스의 명령이니 더 따지고 들 계제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대찬 산하의 비도축육 사업부 직원들은 대찬의 지시에 ‘비도축육 발표회’ 준비에 착수했다.
물론 실제로 붙여지는 이름은 그렇듯 투박하지 않을 테지만.
꼭 그린블러드 측과의 일 때문에 결정한 일은 아니었다.
발표회는 원래 대찬의 구상에 있었다.
다만 그린블러드와의 일이 있는 고로, 시일을 조금 앞당겼을 뿐이었다.
대찬은 이 발표회에 회사 서까래 하나쯤은 빠질 정도로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도록 했다.
어중간한 군불만 일으켜서는 바닥에 돈만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봉화를 피우는 정도는 돼야 한다.
그렇게 해서 이웃 고을과 그 옆 고을의 사람들까지 모두 봉화가 피어올린 연기를 볼 정도는 돼야 한다.
그래야만 보람이 있다.
군불 피워서 얻을 정도의 유명세는 이미 확보되어 있었다.
매스컴에 여러 차례 로튼 프룻츠가 소개된 덕택이었다.
알음알음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대찬은 그 알음알음의 유명세를 한국의 남녀노소가 다 알 정도의 유명세로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큰 불을 일으키려면 그만큼 많은 장작을 밀어 넣어야 한다.
유명세가 불이라면, 그걸 가능케 하는 가장 전형적인 장작은 역시나 돈이다.
대찬은 비도축육과 더불어 회사의 3대 축을 맡고 있는 ‘낮한잔, 밤한잔’의 민승기 전무와 사회공헌사업부의 박 이사와 이 일을 먼저 논의했다.
“염치없지만 곳간에 쌓아놓은 돈 좀 저희가 가져다 쓰겠습니다.”
대찬이 조직의 정점에 서기로 결정된 지 한참이었다.
그렇게 체제가 굳어져 안정된 지도 한참이었다.
그가 하겠다면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대찬은 민승기와 박 이사에게 사전에 이를 알렸다.
비도축육은 수익을 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사업이었다.
제품화가 됐다고 해도 그것이 수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아직 제품화 단계에도 미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저쪽에서 벌어들인 돈을 이쪽으로 끌어들여 구멍을 메워야 한다.
아무리 대찬이 회사의 전권을 쥐고 있다 하더라도 양해를 구해야만 껄끄러운 알력을 예방할 수 있었다.
대찬의 말에 민승기와 박 이사는 선선히 동의해주었다.
민승기는 웃으며 농조로 말했다.
“어차피 나중에 비도축육이 본궤도에 오르면 그 돈, 나하고 박 이사가 쪽쪽 빨아먹을 거예요.”
그러자 민승기에게 웃음이 옮은 박 이사도 말을 얹었다.
“지금 대표님이 일부러 쩔쩔매는 척하시는 거, 나중을 염두에 둔 영악한 포석 아닙니까?”
대찬은 소파에 몸을 묻으며 가볍게 받아쳤다.
“사장 노릇 서럽네요. 일부러 양해까지 구하는데 영악한 포석이라니!”
“돈 내놔라, 네 글자면 될 걸 일부러 부탁의 형태를 띠면서 말씀하시는 거 아니냔 거죠. 나중에 저희가 빨대 꽂기 어렵게 만들려고.”
“사람의 선의를 그렇게 오해하시다니. 섭섭합니다.”
박 이사는 대찬의 토로에도 꿈쩍하지 않고 후룩 차를 마셨다.
“지금까지 구렁이 담 넘어가는 걸 한두 번 본 게 아니니까요. 귀책사유는 대표님께 있죠.”
“제가 구렁이면 박 이사님은 땅꾼이시네요.”
대찬의 헐렁한 비유를 박 이사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무튼 사회공헌사업부, 쌓아놓은 돈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바닥까지 딸딸 긁어가도 아무 원망 안 하겠습니다.”
대찬은 잔잔한 웃음을 머금으며 박 이사를 흘끔 바라봤다.
“저더러 구렁이라고 하시더니 박 이사님도 똑같아요.”
민승기도 박 이사와 마찬가지의 취지로 얘기했다.
“어쨌든 현재 스코어 우리 회사 캐시카우는 낮밤한잔이니까, 우리 쪽에서 적극 지원사격 할게요.”
“낮밤한잔에 신세 좀 질게요, 선배.”
“당장 오늘부터 허리띠 확 졸라매렵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네요.”
“인력도 최대한 지원할게요. 말만 해요.”
대찬은 민승기와 박 이사가 흔쾌히 동의해준 데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사내의 합의를 얻어낸 대찬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발표회를 위해 마음 놓고 회사 돈을 살포했다.
물론 이만 한 규모의 사업이야 대찬에게 낯설진 않았다.
오히려 필래에서 대찬이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갖가지 사업들을 생각하면 낯설긴커녕 우습기까지 했다.
월드몰 인수부터 필래 인 마켓, 필래택배 인수, 필드 업 준공 등.
그것들에 비하면 단발적인 발표회쯤이야 새 발의 피였다.
그러나 그것들과 이번 발표회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필래에서의 일들은 대찬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결국 남의 돈으로 하는 사업이었다.
이번 발표회는 엄연히 내 돈을 쓰는 것.
체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쌈짓돈을 한 번에 쏟아부으려니 손이 달달 떨리긴 했다.
발표회에 투입되는 예산을 장만하려면 마마 와인을 몇 병 팔아야 되는지.
또 파푸아뉴기니 원두를 몇 킬로그램 들여와야 되는지.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셈이 되었다.
대찬이 제법 큰 출혈을 감수한 돈은 다방면으로 쓰였다.
우선 장소 대관과 무대설치에 상당한 예산이 투입되었다.
장소는 필래호텔에서 가장 큰 연회장인 다이아몬드홀로 낙점했다.
대찬은 필래 비바체의 사외이사이고 필래호텔의 터줏대감이었던 오윤 전무와도 안면이 깊은 사이.
필래호텔 측에서는 먼저 상당한 편의를 제공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대찬은 이를 고사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친절과 편의는 감사히 받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금액을 깎아주겠다는 제안은 받을 수가 없었다.
물론 군침이 흐르긴 했지만 자신이 극동일보의 표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했다.
십 원짜리 한 장이라도 편의를 봤다가는 당장 극동일보가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 남자의 수상한 특혜’ 어쩌고 운운하며 따갑게 쏘아댈 활자들이 눈에 선했다.
‘강제로 성인군자 노릇을 하려니까 죽겠네.’
대찬은 필래호텔 측에 온전한 값을 지불하며 쓰린 속을 부여잡았다.
이에 못지않은 금액이 언론 쪽에 투입되었다.
극동일보를 제외한 주요 신문사에 광고를 내걸었다.
극동일보와의 광고가 불발된 건 로튼 프룻츠 측과 극동일보 측의 뜻밖에 통일된 견해였다.
로튼 프룻츠는 애초에 극동일보 측에 별로 광고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자기들을 차별하네 어쩌네 불평을 늘어놓을까봐 견적만 문의했다.
그런데 극동일보 측에서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제시했다.
내놓고 퇴짜를 놓은 건 아니지만, 사실상의 거절이었다.
대찬은 그 통보를 받고 쓴웃음을 지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주는구나.’
로튼프룻츠는 아예 그 제안에 일언반구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레 광고는 결렬되었다.
대찬은 언론의 관심을 얻기 위해 애를 썼다.
기자협회가 주관하는 골프대회에 부상으로 쓰든 뒤풀이에서 마시든 맘대로 쓰라고 와인과 고급원두를 협찬했다.
또, 기자협회 창립 기념식에도 조지아 와인을 만찬주로 제공했다.
대찬과 안면이 있는 기자들은 그렇게까지 안 해도 어련히 잘 써주겠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대찬은 그런 그들의 반응에 미소를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꿍얼댔다.
‘내가 너희를 모르냐. 으이그.’
그들의 펜촉을 유리한 쪽으로 끌어들이려면 그만한, 혹은 그 이상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대찬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먹인 포도주가 효험은 있었다.
기자들은 미사여구를 동원해 이번 발표회를 은근히 홍보해주는 동시에 대찬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젊은 기수로 소개하기도 했다.
대찬이 필래 비바체 사외이사실에 잠깐 들렀을 때.
허운이 대찬의 개인공간에까지 쳐들어왔다.
그는 탁, 신문을 보란 듯이 펼치며 대찬을 위한 언론의 용비어천가를 또박또박 낭독했다.
“이 젊은이의 사전에 ‘결핍’이란 단어는 없다!”
“깜짝이야.”
대찬은 허운을 노려봤다.
허운은 대찬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훤칠한 외모. 윤이영의 연인. 필래 비바체를 진두지휘한 유통업계의 총아. 모든 것을 다 가진 그가 새로운 모험을 시작한다.”
“뭡니까.”
“전인미답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그에게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흡사 폭주기관차다. 그는 이제 한국경제를 한 차원 끌어올릴 첨단산업의 마에스트로가 되려고 한다.”
“아, 시끄러워요.”
대찬은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지만 허운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비도축육’을 보편화시켜 소비자에게는 무항생제 청정육으로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하고…….”
“갑자기 들이닥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즐비한 축사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좁은 국토에 너른 부지를 제공하고, 가난으로 입맛만 다시는 서민들의 밥상에 값싼 고기를 제공하고자 한다.”
대찬은 허운을 쏘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