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66화
반항심을 소심하게 드러내는 행동이었다.
자유롭기 그지없는 어메리칸 스타일에 다리를 꼬든 무릎을 꿇든 상대는 관계하지 않을 테지만.
잭 머피는 웃으면서 말했다.
“회사 이름이 로튼 프룻츠더군요.”
“맞습니다.”
잭 머피는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로튼 프룻츠라. 한국에서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의 귀에는 좀 우스꽝스럽습니다.”
“웃기기라도 했으니 됐습니다. 그래도 그저 그런 이름들보다는 기억에 남을 테니.”
“낙천적이시군요.”
“그린블러드도 재미를 의도한 거 아닙니까? 초록 피라니, 에일리언도 아니고.”
남 놀리기 좋아하는 놈들은 꼭 자기가 조금만 놀림을 받아도 참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잭 머피가 그랬다.
“하하, 에일리언이라니, 농담도 잘하십니다.”
“농담 아닌데.”
대찬이 조금만 비꽜는데도 잭 머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말로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얼굴색은 그러지 못했다.
“그린블러드 미트는 고심 끝에 지은 이름입니다. 이면에 담긴 뜻을 모르시고 그렇게 장난 식으로 부를 이름이 아닙니다.”
“어쩜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을 그렇게 잘 해주시는지.”
“아니, 그게…….”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피차 웃긴 회사끼리 누가 더 우스꽝스럽네 따질 거 뭐 있습니까.”
“…….”
‘입꼬리 내려오니까 그나마 좀 봐줄 만하네.’
대찬은 알맞게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반대편 다리를 꼬았다.
시선은 잭 머피를 정면으로 향했다.
“그린블러드에서 제안을 주셨을 때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만나자고 한 이유를 모르겠더군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하, 만나자고 한 이유도 모르시면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잭 머피의 그렇게 말하는 태도에는 와줘서 고맙다는 느낌보다는 ‘오란다고 진짜 왔네’의 느낌이 강했다.
지레 심각해지면 자신의 꼴만 우스워질 거란 걸 대찬은 알았다.
대찬은 어깨를 으쓱였다.
“얼마나 구미 당기는 제안을 하려고 꽁꽁 감춰두셨나 궁금증이 동해서 말이죠.”
“아마 초에게도 기분 좋은 제안일 겁니다.”
“한국 사람들 성격이 급합니다. 에두르지 말고 바로 말씀하시죠.”
“아, 저도 시간이 없습니다. 요즘 아주 바빠졌거든요. 로튼프룻츠 같은 회사 대표분들이 지금도 손목시계 흘끗거리면서 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 말고 다른 분들도 와계십니까?”
대찬은 잭 머피의 말을 들을수록 불쾌했다.
“예, 하하. 다들 급하신가 봅니다.”
“급하다뇨.”
잭 머피는 눈을 빛냈다.
“제가 초를 여기로 부른 이유는, 기회를 드리기 위해섭니다.”
“무슨 기회 말씀이십니까.”
“엑싯(Exit)할 수 있는 기회.”
그러자 대찬의 미간이 교통사고 난 마티즈처럼 구겨졌다.
엑시트는 말 그대로 탈출, 퇴장을 의미했다.
비즈니스에서, 특히 스타트업 비즈니스에서의 엑시트는 의미가 각별했다.
회사를 세우고 가치를 키워서, 단단히 한몫 챙겨 팔아넘기는 걸 의미했다.
스타트업 기업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은 이 엑시트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기도 한다.
자기 객관화가 잘된 사람은 자기 그릇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
회사가 감당할 수 없을 지경까지 커졌는데 제때 탈출하지 못하면, 혹은 더 욕심을 부리면 회사와 함께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경우가 있다.
고스톱의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쓰리고를 외쳤다가 독박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느니 차라리 제 몫을 챙겨서 팔아치우고 그걸 종잣돈으로 삼아 다른 회사를 일구는 편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는 사람의 관점마다 달랐다.
통이 작다, ‘소시민적’이라고 이죽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현명하다, 영리하고 합리적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잭 머피는 대찬 역시 그런 소시민적이거나 합리적인 사람들 중 하나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자신은 전혀 그 부류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대찬에게는 황당한 말일 뿐이었다.
물론 엑시트를 ‘성공’의 동의어로 쓸 수 있을 만큼, 엑시트 자체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동네 치킨집보다 더 망하기 쉬운 게 스타트업이었다.
90퍼센트 이상의 스타트업이 소위 ‘죽음의 계곡’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망해버린다.
더군다나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는 이 분야에서의 스타트업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만일 대찬이 끝까지 갈 각오가 아니었다면.
정말 적당히 이익을 보고 회사를 털어낼 요량이었다면 지금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엑시트를 염두에 뒀다면 한없이 자애로운 부처님의 미소였을 것이다.
물론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지금의 대찬에게는 잭 머피의 웃음은 주먹을 꽂아주고 싶을 뿐이었지만.
잭 머피가 저렇듯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할 수 있는 것은.
그래도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를 기다리는 수많은 ‘을’들은 잭 머피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기 바빴다.
그렇게 굴어도 상대를 해줄까 말까 한 상황이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로튼 프룻츠에는 그린블러드가 먼저 제의하기까지 했다.
응당 몸 둘 바를 몰라 해야 정상이었고, 잭 머피도 당연히 대찬의 그런 태도를 기대했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볼이 잔뜩 부어서는 불량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잭 머피로서는 그 나름대로 황당했다.
물론 대찬은 미국까지 날아와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찬가지로 황당했다.
그러니까 대찬과 잭 머피는 서로가 서로를 황당해하고 있었다.
대찬은 구겨진 얼굴을 펴지 않은 채로 말했다.
“엑시트 할 수 있는, 기회라고요? 기회?”
“왜 그러십니까? 그게 초의 목표 아닌가요?”
“…….”
“내숭 떨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봐요, 잭.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것 같군요.”
“설마 그 회사를 끝까지 밀고 가실 생각이십니까?”
대찬은 허탈하게 웃었다.
“잭, 이렇게 다짜고짜 엑시트 얘기를 꺼내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대찬은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왜 엑시트를 안 하냐고 물어보는 게 아니라, 엑시트 할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는 게 정상 아닙니까?”
“하하, 하지만 정황상 초가 엑시트 하지 않는 게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요.”
대찬은 이제 예의를 차리기 위한 웃음도 짓지 않았다.
그는 잭 머피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왜 이해가 안 되십니까?”
“이 사업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요.”
“만만하다고 생각해본 적,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잭 머피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다가 초는 엔지니어 출신도 아니잖습니까.”
“엔지니어 출신이 아니라고 무조건 엑시트를 목표로 두고 있다 단정하시는 건 너무 섣부른 판단 같습니다.”
“나는 오히려 빠져나올 기회가 생겼는데 빠져나오지 않고 버티려는 초가 오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제 일은 제가 결정합니다.”
“아, 그거야 물론이지요. 그러나…….”
대찬은 잭 머피의 흰소리를 차단했다.
“그린블러드 입장에서 냉혹하게 보자면 제가 차라리 망해버리는 게 이득 아닙니까? 경쟁자가 제거되니까.”
그 말에 잭 머피는 푸흡,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잭 머피는 누린내 나는 앞발을 저으면서 형식적으로 사과했다.
“아,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그만.”
“왜 웃으시죠?”
“로튼프룻츠가 우리의 경쟁자라고요?”
“그게 그렇게 웃긴 얘기였습니까? 동종업계에 있으니 당연히 경쟁자 아닙니까.”
잭 머피는 완고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동종업계에 있다고 어떻게 다 경쟁자입니까.”
“…….”
“월드몰 아시죠,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의 할인점 체인.”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월드몰. 아주 잘 알죠.”
“그 월드몰하고 한국의 구멍가게하고 같은 유통업이라고 하지만 경쟁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찬의 관자놀이가 꿈틀했다.
“지금 저희 회사가 구멍가게라는 뜻입니까?”
“조금 극단적인 비유이긴 하지만… 맥락을 고려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 싶은데.”
“그렇게 판단하고 계시군요.”
대찬이 당장 반박하지 않자, 잭 머피는 자신의 말이 대찬에게 불편한 진실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기회라고 표현한 겁니다. 사실 아니라고는 하시지만 초도 엑시트를 위해서 분주히 준비하시던 걸요.”
“제가요?”
자기보다 자기를 더 잘 아는 잭 머피를 보고 대찬은 웃음을 흘렸다.
“쵸 후쿠히로 회장에게서 투자를 유치했다고 대대적으로 광고하시던데.”
“대대적으로는 아니지만 광고는 했습니다. 그런데요?”
“그런데 그 액수란 게 사실 쥐꼬리만 하고.”
대찬은 일일이 반박하기를 포기했다.
그의 침묵 속에 잭 머피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이 기회에 저희에게 로튼 프룻츠를 넘기라 권하려고 초를 부른 겁니다.”
“그렇다면 헛걸음했군요.”
“하하, 현실적으로 판단하세요. 꽤 거금을 들여 인수할 생각입니다.”
“그럴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액수라도 들어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대찬은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희는 로튼프룻츠를 그린블러드 코리아로 바꿔 동북아 시장을 공략할 교두보로 삼고자 합니다.”
어차피 이뤄지지 않을 일.
대찬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잭 머피는 그게 자기 몸값을 불리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제 주장을 이어갔다.
“원한다면 초를 그린블러드 코리아의 지사장으로 선임할 수도 있습니다. 쵸 후쿠히로가 선택한 사람이라면 그럴 가치가 충분할 테니까요.”
“제안은 감사하지만 고사하겠습니다.”
그러자 잭 머피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완고하신 이유를 모르겠군요.”
“자꾸 저희 회사를 인수하는 게 선심 쓰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제 입장에서는 듣기 불쾌합니다.”
“비록 이쪽 전공은 아니시지만 그래도 대표이시니까 돌아가는 사정은 잘 알 겁니다.”
“최소한 잭만큼은 알 겁니다.”
대찬의 응수에 잭 머피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럴까. 이건 동네 구멍가게들도 입에 풀칠하고 살 만한 유통업계하고는 아주 달라요.”
대찬은 팔짱을 낀 채로 살짝 눈을 감았다.
저 벌겋게 달아오른 목젖을 보면 당수를 후려주고 싶은 충동이 너무 심하게 들었다.
“자본과 기술을 갖춘 소수의 업체만 살아남을 겁니다. 이미 실리콘밸리에만 우리 그린블러드를 포함해 유망한 업체 서너 곳이 성업 중입니다. 그뿐입니까.”
“이 분야에 선구적인 네덜란드, 식량안보를 위해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이스라엘, 그리고 동아시아에는 일본이 있고. 홍콩과 싱가포르의 자본을 바탕으로 갑각류 연구에 천착하는 동남아 지역.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는 시장인 거, 압니다.”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대찬은 눈을 뜨고 잭 머피를 바라봤다.
“왜 주제도 모르고 고집을 부리냐. 이겁니까, 지금?”
“그렇게 거칠게 표현하고 싶진 않지만 엇비슷한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유감이네요. 상대를 구멍가게라고 깔아뭉개시려면 적어도 파악은 잘하고 계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예?”
“그린블러드의 연구가 얼마나 진척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역시 구멍가게 취급당할 정도는 아닙니다.”
잭 머피는 언뜻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자신할 정돈가요?”
“최소한 생산단가에 있어서만큼은 경쟁력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얼마나 됩니까, 백 그램 당.”
대찬은 숨기지 않았다.
“조만간 천 달러 선을 깰 것 같습니다.”
“…천 달러요? 만 달러가 아니라……?”
대찬은 고개를 끄덕여 잭 머피가 제대로 들었음을 확인해주었다.
“예, 천 달러.”
“…….”
구구절절 말이 참 많던 잭 머피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린블러드 미트의 현재 생산단가는 백 그램에 이천 불이 조금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단순히 생산단가만 따졌을 때,
로튼프룻츠가 앞서도 한참 앞서있는 상황이었다.
잠깐 멍해있던 잭 머피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둘러댔다.
“아, 뭐, 저희는 그것보다 한 걸음 앞서있긴 합니다만, 로튼프룻츠의 저력도 예상보다는 꽤 되는군요.”
“그런가요.”
‘거짓말.’
대찬은 속으로 웃었다.
잭 머피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가 회사를 넘길 의사가 절대 없다면 얘기를 더 길게 해봤자 시간낭비겠죠.”
“그렇겠죠.”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잭 머피는 급히 악수를 청하고 사라졌다.
대찬은 진위생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야, 뭐 이런 회사가 다 있나.”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가 뭐 옆 동네 온 것도 아니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조심히 돌아가라 하고 땡입니까?”
“보람 없다, 보람 없어.”
진위생의 말대로였다.
보람이 없어도 이렇게 없나.
대찬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