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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65화 (365/556)

난 할 수 있어 365화

개척자가 된다는 건 그만큼 심장이 간질간질한 것이었다.

‘물론 연구는 은 교수가 하고 나는 뒤에서 돈만 대고 있긴 하지만.’

대찬은 혼자 겸연쩍게 웃으며 자료를 뒤적였다.

매일 공유되는 자료는 날이 다르게 변해갔다.

기실 제 딴에 아무리 열심히 공부했어도 어려운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보고서보다 자료 말미에 적힌 간단한 숫자가 보기 더 쉬웠다.

며칠 전 100g 당 150만 원을 호가하던 로튼프룻츠의 배양육의 생산단가는 팔랑귀 옆집 아저씨의 주식처럼 매일 떨어졌다.

매일 아침 그 떨어지는 숫자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단가가 떨어질수록 시장에 비도축육을 선보일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지는 셈이었다.

그러나 다마고치 키우듯이 때 되면 자료나 흘끗거리는 게 대찬의 임무는 아니었다.

은오영 교수의 소임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대찬의 소임은 막중했다.

대찬이 선발한 직원인 진위생은 그의 비서격이었다.

대찬은 회사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검토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 그를 대신해, 진위생은 그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을 간추려 대찬에게 보고했다.

그것이 진위생의 주된 업무였다.

진위생은 이런 쪽에 감각이 있었다.

그렇게 이슈를 간추리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찬이 미처 짚고 넘어가지 못한 부분을 그때그때 알려주는 일까지 했다.

대찬은 의외의 업무능력에 진위생을 신뢰했다.

더군다나 요즘은 표준어를 구사하려고 무진 애를 쓰기까지 했다.

연변말투가 대표의 위신에 흠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찬은 피식 웃으면서 진위생에게 말했다.

“그럴 거까지야 있어요? 말이야 알아들을 수만 있게 하면 되지.”

“아닙니다. 만나는 사람들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다고 해도, 뒤에서는 무슨 조선족을 비서로 데리고 다니냐고 수군거릴 게 분명합니다. 앞으로 서울 말 쓸 겁니다.”

대찬은 그런 그의 마음이 갸륵하고 일견 측은하기까지 했다.

하던 말투를 계속 써도 좋다는 대찬의 형식적인 만류는 따지고 들자면 이상론이었다.

진위생의 말이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대찬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

다만 대찬이 해줄 수 있는 건 그의 노력에 상응하는 대우였다.

연변말투와 표준어가 헬레니즘문화처럼 묘하게 결합된 진위생의 어색한 말투를 참아주는 약간의 인내와 더불어.

그는 대찬을 한 시도 쉬지 못하게 채찍질을 했다.

가끔 보면 누가 상사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잠깐 한숨 돌리려고 하면 진위생이 쪼르르 달려와 이것저것 자료와 보고서 따위를 챙겨주었다.

쉬지 말고 일하라는 뜻이었다.

대찬은 항의의 뜻으로 어처구니가 사라진 눈빛을 쏘아댔지만 진위생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게 태어날 때부터 간직한 자신의 사명이라도 되는 양, 대찬을 들들 볶는 데 열중했다.

가끔은 헤실헤실 웃는 낯이 즐기는 듯도 했다.

지금 또 예의 그 웃음을 지으면서 사무실 끝자락에서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진위생을 보고 대찬은 척추가 찌릿했다.

대찬은 그가 다가오자마자 선수를 쳤다.

“나 오늘은 좀 쉴 거예요, 알았어요? 어떤 보고도 안 들을 겁니다.”

“그게 무슨 사장입니까?”

“사장한테 따박따박 그렇게 따지는 게 직원입니까?”

“우리는 그런 수직적인 한국 직장문화 타파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역시 사장님도 고인 물 되셔서 썩어버리시는 겁니까?”

대찬은 저 연변과 서울의 중간지점, 함흥이나 원산쯤에서 사용할 것만 같은 말투로 왕왕대는 진위생을 째려봤다.

“암튼 난 오늘 셔터 내렸으니 그리 알아요!”

“그럼 저도 셔터 내려도 됩니까?”

“안 되지.”

“왜 안 됩니까?”

“로튼프룻츠의 사규에는 임원의 근무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직원의 근무시간은 나인 투 식스라고 아주 명명백백히 명시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지금 드리는 보고를 안 들으시겠다고요?”

“안 들어요.”

대찬이 어린 애처럼 떼를 쓰자 진위생은 전략을 바꿨다.

“엄청 중요한 보곤데 안 들으실 겁니까?”

“블러핑하는 거 보니까 안 중요한 보고가 분명해요.”

“이거 때문에 몇 십 억을 날릴지도 모르는데요? 절호의 찬스를 날릴지도 모르는데요?”

“…….”

진위생은 흐흐 웃었다.

“더 고집 피우지 마시고 빨리 보고 받으십시오.”

“언제부터 이렇게 꿋꿋하고 능글맞아졌습니까?”

“남 탓 할 거 없습니다. 다 우리 사장님한테 배운 거라서요.”

대찬은 한숨과 함께 진위생과의 논쟁을 포기하고 손을 내밀었다.

“줘봐요.”

진위생은 서류를 건네고 내용을 간추려서 말로 전했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그린블러드 미트라는 회사 아십니까?”

“아, 거기도 배양육 만드는 회산데?”

진위생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은오영 교수님이 몇 년 전에 실리콘밸리에서 끙끙대고 있을 때, 한 번에 훅 치고 나가서 은 교수님 회사에 직격탄 날렸던.”

“맞습니다.”

“거기가 아마 미국에서는 선두를 달리고 있죠?”

진위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시네요.”

“무슨 숙제 검사하는 선생님처럼 말씀하시네.”

“아유, 제가 어찌 감히.”

“하루에도 열두 번 사장 찜 쪄드시는 분한테 감히가 어디 있어요. 그린블러드는 동종업계 최강자예요. 당연히 알고 있어야지. 근데 왜요?”

“그쪽에서 우리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한번 미팅 하자고 하던데요.”

“그래요?”

대찬은 그렇게 반응하고는 그린블러드 미트에서 날아온 서류를 찬찬히 읽었다.

단순히 밥이나 한 끼 하려고 만나자 제안한 건 아닐 터다.

분명한 의도가 있을 것이다.

진위생이 전달하는 간략한 정보로는 그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서류를 찬찬히 뜯어보고 사용한 낱말과 관용어구를 들여다봐야 담긴 의도의 편린이나마 건질 수 있었다.

그걸 읽은 대찬의 입술이 살짝 아래로 처졌다.

“어째 좀 시큼털털한데요.”

“예? 그게 무슨 말씀…….”

“무슨 행운의 편지처럼 성의가 없어. 으레 정해진 양식에 이름만 우리 회사로 바꾼 거 같거든.”

“저는 영어가 짧아서 그 정도까지는 간파를 못했습니다.”

“제안은 거창한데 구체적이지가 않아요. 기술협약과 발전적 관계 등 다방면으로 논의하고 싶다는데,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콕 짚어서 언급했을 거란 말입니다.”

진위생은 슬쩍 웃으면서 대찬에게 물었다.

“그럼 안 가시겠습니까?”

“고민되네요. 그래도 미국 쪽에서는 최고로 쳐주는 회사인데, 견학만 해도 나쁠 건 없다지만.”

“그건 그렇죠. 세 사람이 걸어가면 반드시 스승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좋은 놈이면 좋은 것 본받고, 나쁜 놈이면 저러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대찬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도 존심 상하잖아요? 필요하면 지가 올 것이지. 사람을 오라 말라야.”

“중화사상은 중국인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양키들도 자기네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듣는 변방의 코리안은 기분이 나빠요.”

대찬은 의자에 벌러덩 눕듯이 앉아 좌우로 흔들거리면서 고민했다.

왼쪽으로 흔들면서 갈까, 오른쪽으로 흔들면서 말까.

갈까, 말까, 갈까, 말까.

대찬이 계속 그렇게 까딱거리자 정신이 사나워진 진위생이 대찬의 손을 턱 잡았다.

“아우, 복 떨어집니다.”

그제야 대찬은 좌우운동을 멈췄다.

왼쪽, 그러니까 ‘갈까’였다.

대찬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해줘서 고마워요. 다녀와야겠네.”

“우리 회사가 이렇게 원시적인 방법으로 돌아갔습니까?”

“50 대 50으로 결정하기 어렵다면 원시적인 방법으로라도 결정해야죠. 더 최악은 아무것도 안 하는 거니까?”

“어련하시겠습니까.”

대찬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쪽에 회신 보내서 내 일정 중에서 되는 날들 중에 가장 가까운 날들로 꼽아서 전달해주세요. 일정 잡히는 대로 LA행 비행기표 끊어주시고요.”

“비즈니스로 끊어드립니까?”

“아무 말 안 하고 비즈니스로 끊었으면 됐을 걸. 굳이 물어보는 건 형편 어려우니까 이코노미 타고 가라는 뜻이죠?”

“사장님 너무 배배꼬이셨습니다.”

“아니면 아니라고 해보시죠. 이코노미로 끊어주세요. 무릎 좀 시큰거리고 말지.”

진위생은 헤헤 웃었다.

“알겠습니다.”

“두 장 끊으세요. 나만 시큰거리긴 싫으니까 같이 시큰거리자고요.”

“…네.”

진위생은 그린블러드 미트와의 일정이 잡히자마자 대찬의 분부대로 LA행 비행기 티켓을 두 장 구입했다.

그리고 며칠 후, 대찬과 진위생은 그린블러드 미트의 사옥에 도착했다.

대찬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사옥을 바라봤다.

실리콘밸리는 온갖 회사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있었다.

그린블러드 미트의 사옥은 개중에서도 제법 규모가 있었다.

“어우, 주차장도 널찍하고.”

로튼프룻츠의 CTO를 맡고 있는 다르샨 싱이 건물은커녕 캠핑카에 온갖 살림을 차려놓고 살던 실리콘밸리였다.

그런 땅값 대단한 곳에서 저런 널찍한 부지와 큰 건물을 소유하고 있으니 재력이야 현재의 로튼프룻츠와 비교도 안 된다는 뜻이었다.

진위생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왠지 위축이 되네요.”

“그럼 곤란하죠. 우린 로튼프룻츠의 얼굴이에요. 어깨 쫙 펴고,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

대찬은 진위생의 등을 툭툭 두드리고 출입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책임 있는 사람과 대면하는 데까지 지루한 과정이 펼쳐졌다.

검색봉으로 사타구니까지 훑어가며 보안검색을 하질 않나.

출입증을 발급하는 데 출입국심사를 하듯 꼬치꼬치 묻지를 않나.

대찬은 가뜩이나 서울에서 이곳까지 와주는 것만해도 대단한 예의를 차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접은 못 나올망정 이런 식으로 대우하니 짜증이 차곡차곡 쌓였다.

진위생도 무언가 석연찮음을 감지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슬슬 열이 받으니까 묻어두었던 연변 말투가 다시 튀어나왔다.

“이런 쌔스개들이 돌았나……. 야들 대체 와 이럼까?”

“낸들 아나요. 일단 해달라는 대로 해줍시다. 얼마나 대단한 제안을 하려고 이 모양이야.”

“이런 씨양간나놈들. 시답잖게 굴면 궁둥짝이라도 걷어차줄 검다.”

“꼭 그렇게 해주세요.”

출입문을 들어와서 정식으로 안내받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담당자를 만나기도 전에 대찬은 지쳐버렸다.

진위생도 마찬가지.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커피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차를 드릴까요?”

“커피 한 잔 차 한 잔 부탁드립니다.”

대찬의 말에 진위생은 씩 웃었다.

“제가 커피 안 먹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 정돈 기본이죠.”

둘은 시시하게 웃으면서 앉은 채로 담당자를 기다렸다.

담당자가 납시는 데도 또 15분이 걸렸다.

진위생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대찬도 불쾌한 기색을 표정에서 숨기지 않았다.

목 주변이 붉은 뚱뚱한 백인 중년 남성이, 부하 몇 명을 거느리고 등장했다.

그는 넉살 좋게 웃었다.

‘웃어?’

대찬에게는 그 웃음이 짜증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미스터 초. 저는 이 회사 투자담당 잭 머피입니다. 잭이라고 부르십시오.”

“예, 반갑군요. 조대찬입니다. 이쪽은 제 보좌인 진입니다.”

잭 머피는 진위생에게는 고개만 까딱거리고 일언반구 인사말이 없었다.

어차피 이 회사하고 대단한 비즈니스를 하러 온 게 아니었다.

대찬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잭 머피에게 말했다.

“회사의 보안절차가 상당히 까다롭더군요. 여기까지 오기 참 힘들었습니다.”

“하하, 우리 고급기술을 빼가려는 불순분자들이 종종 있거든요. 양해해주십시오.”

대찬은 떨떠름하게 웃었다.

“저는 정식으로 귀사의 제안을 받고 방문했는데, 그 불순분자를 추려내는 작업에서 열외시켜주셨으면 더 감사했을 겁니다.”

“예외란 없죠. 특히 초는 우리 동종업계에 계시니까. 더 까다로우면 까다로웠지 가볍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대찬은 속에서 울컥 솟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딱딱한 얼굴을 유지했다.

동네 구멍가게가 아니다.

천하의 실리콘밸리에 떡하니 버티고 있을 첨단기업이다.

지금 이 상황이 비즈니스 매너에 어긋난다는 건 촌로도 안다.

저 뒤룩뒤룩 살찐 백돼지도 모르진 않을 터다.

그렇다면 이 소위 ‘비매너’는 의도된 것이다.

왜 굳이 사람 성질을 박박 긁어대는가.

일면식도 없는 대찬을 여기까지 불러다 해코지나 하자고 그러진 않을 터다.

척을 질 생각이 아닌데 위세를 부린다면 답은 하나다.

자신의 위신이 훨씬 높다는 걸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것.

그리하여 굴복시키려는 것이다.

‘우릴 굴복시켜서 얻다 쓰려고.’

대찬은 잭 머피를 감정 없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잭 머피는 대찬의 앞에 마주앉았다.

서있을 땐 두 겹이던 턱이 앉으니까 세 겹이 됐다.

대찬은 다리를 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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