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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63화 (363/556)

난 할 수 있어 363화

기실 이번에 쳐들어온 목적도 아예 건물 한 채를 꿰차겠다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된다면야 금상첨화다.

하지만 못해도 두둑한 봉투라도 취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 막돼먹은 서울 놈의 태도를 보아하니 십 원짜리 한 장 뜯어내기도 어려워 보였다.

그러자 트럭 남자는 두 번째 카드를 꺼냈다.

“그래, 뭐 좋다고 치자고. 근데, 마을발전기금도 안 내고 뻐팅기고 있는 건 뭐라고 할 긴데?”

“발전기금이라뇨.”

“마을의 일원이 될라모 마을발전기금을 내야 한다. 그기 통과의례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형님은 발전기금 내셨습니까?”

그 말에 트럭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내는 여기 토박이다. 숙종 임금 때부터 여서 살았다꼬. 니는 한국에서 태어나가 한국에다 귀화신청 할래?”

“저희가 뭐 다른 나라로 이민 왔습니까?”

“하, 말이 그렇다는 기지.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흔한 비유도 이해를 몬하나? 아님 몬하는 척 하는 기가?”

“대체 마을 일원이 되는 데 돈을 왜 내야 합니까?”

“왜 내야 되냐꼬?”

“네!”

트럭 남자는 피식 웃었다.

“하, 아 새끼 대답 한번 씩씩하다.”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기금 내면 뭐 마을 주민증이라도 나옵니까?”

“법전에는 안 나와있지만서도 마을법이다, 마을법. 관행이고 관습법이라, 이 말이야.”

대찬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관습법.”

“니 영국에는 법전이 없는 거 알제? 그것맹키로 마을법도 법전엔 없어도 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기라.”

대찬은 대문간에 기대 삐딱하게 섰다.

“저희는 못 냅니다. 이런 일로 왜 불화를 조장하려고 그러십니까?”

“뭐? 조장?”

“마을행사 있으면 저희 몫 각출할 겁니다. 품앗이 할 일 있으면 그럴 거고요, 도울 일 있으면 도와드릴 겁니다. 근데 이건 아니죠.”

“마을법을 거스르겠다, 이 말이가.”

“형님, 그런 부당한 법은 따를 수 없습니다.”

대찬이 분명히 입장을 밝히자 트럭 남자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기 싫으모 어쩔 수 없제. 근데, 우린 마을법 안 따르겠다는 사람 싫다. 일원으로 인정할 수가 없는 기야. 싫으모 싫은 대로 살자꼬. 알았다. 일봐라.”

트럭 남자는 그렇게 툭 던지듯 말하고 대찬의 앞에서 물러났다.

대찬은 그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봤다.

싱거운 상황종료는 아닐 것이다.

트럭 남자의 저 당당한 뒷모습을 보라.

저건 권토중래를 다짐하는 역발산기개세 항우의 그것이다.

대찬은 그런 뒷모습을 보고도 일말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저놈이 항우라면 비장의 한 수를 지닌 대찬은 파초대원수 한신이었다.

대찬은 남해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자기를 찾는 곳이 많았다.

“저 서울로 올라가볼게요.”

“저 인간하고 해결은 잘 된 거니?”

“아직 해결은 안 됐는데, 조만간 해결될 거예요. 그동안 심통 좀 부릴 수 있는데 그것만 좀 견뎌주세요.”

그러자 아버지는 대찬을 향해 눈총을 쐈다.

“너, 백만 원 주기 싫어서 둘러대고 튀는 거 아냐?”

“백만 원은 이거 아니어도 공으로 드릴 거거든요? 아들을 그렇게 못 믿으세요?”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딴 곳을 바라봤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조금 귀찮은 건 어쩔 수 없어요. 그래도 아들이 다 손 써놨으니까 결과적으로는 해피할 거예요.”

대찬은 서울로 올라갔다.

며칠 후.

그나마 소위 ‘꼬장’을 피우던 대찬이 올라가자 트럭 남자는 행동을 개시했다.

대찬의 부모님이 장을 보러 읍내로 차를 몰고 나갔다.

그러나 읍내로 향하던 차는 마을 어귀마저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곳을 청년회 남자들 중에서도 덩치 좋은 이가 떡하니 막고 있었다.

운전석의 아버지가 고개를 내밀고 그에게 말했다.

“뭐해요? 지나가게 길 좀 터봐요.”

“돌아가이소.”

“뭐? 돌아가라니.”

“이 길은 마을사람들이 한 푼 두 푼 모아가 만든 길이라예. 마을 일원도 아닌 분들이 이용할 권리가 없어예.”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재요, 얻다 대고 소리를 빽빽 지릅니까.”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나 진짜……!”

대찬의 아버지는 목 주변까지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차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주먹다짐이라도 할 기세.

그러자 어머니가 아버지의 손목을 붙들었다.

“아서.”

“똥 같은 소릴 지껄이는데 그냥 가만히 있자고?”

“대찬이가 그랬잖아. 좀 귀찮아질 거라고. 그냥 돌아가자.”

“아우! 열 받아.”

어머니는 호호 웃으며 말했다.

“지금 박차고 나가면 뭐, 저 근육돼지를 당신이 이길 수나 있을 거 같아? 망신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내가 진짜 10년만 젊었어도.”

“얼씨구. 10년 전에도 물렁살 그대로였으면서 말은.”

아버지는 불만을 꿍얼거리면서 차를 뒤로 뺐다.

이 정도 일은 약과였다.

청년회는 마을 끄트머리에 있는 대찬의 부모님 소유 밭에 들어가는 농수로를 차단했다.

딱 그 앞집까지만 쓰도록 해놓고 아예 시멘트를 발라버렸다.

그걸로 밥벌이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농사는 좀 거창한 취미 정도로 삼고 있던 차였다.

그러니 부모님에게 농수로는 이용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불편이 있고 없고는 두 번째였다.

첫째로는 견딜 수 없는 불쾌감이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그날 술을 잔뜩 마시고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하소연을 들은 대찬은 짧게 대꾸했다.

“사흘 안에 해결할게요, 아버지.”

그의 말대로 이뤄졌다.

사흘 후.

대찬은 경상남도 남해군의 궁벽하고 작은 마을에 폭탄을 투하했다.

마을회관에 한 통의 우편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필래비바체 대외협력팀.

제목은 ‘농촌지원사업 대상 재지정에 관한 안내’였다.

그렇게 도착한 한 통의 우편을 이완승이 개봉해서 트럭 남자에게 보여주었다.

트럭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완승을 바라봤다.

“이기 뭡니까?”

“읽어봐라. 니 사고 단단히 칬다.”

“에?”

트럭 남자는 주섬주섬 안내문을 펼쳐 읽었다.

마을에 두루 평안이 깃들기를…로 시작하는 첫 문단은 건너뛰고 바로 두 번째 문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걸 읽어 내려가는 트럭 남자의 얼굴이 점점 사색이 돼갔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발음했다.

“떡골마을은 당사의 농촌지업사업 재지정 심사 대상으로, 내년도 지원대상에서 배제될 수 있음을 미리 공지드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필래 비바체 대외협력팀으로 문의 바랍니다?”

“우리 마을 좆된 기라. 그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돈이 지금까지 얼만 줄 니도 알기다.”

“…….”

“덕분에 혼자 사는 할배 할매들 집에 에어컨 놓고, 도로도 예쁘게 포장하고, 풍어제에 올릴 돼지머리도 샀다 아이가. 이제 다 글러뿐기라.”

“이, 인마들 갑자기 와 이라는데예? 지금까지 이런 거 보낸 적 없었다 아입니까.”

“지금까지 없었제. 근데 와 지금 이걸 보냈겠노.”

“와 보냈는데예.”

“수틀렸다는 말 아이겠나.”

“수는 또 와 틀리는데예.”

이완승은 쯧 혀를 걷어찼다.

“니 때문에.”

“와 저 때문인데예!”

갈수록 트럭 남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이완승은 그에게 눈을 흘겼다.

“어데서 고함을 지르고 있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니가 패악질을 부리니까 이런 사달이 난기라.”

“내가 언제 패악질을 부렸다꼬 이라십니꺼!”

“니, 옛날 서 회장 별장에 사는 부부 건드렸제. 그 내외 아들내미하고 한 판 했제?”

“하, 한 판 한 건 아이고예.”

“내가 분명히 경고했다 아이가. 니, 그 아들내미가 뭐하는 인간인 줄은 아네?”

“뭐, 뭐하는 인간인데예. 그냥 회사 다닌다꼬 했는데?”

“틀린 말은 아이지. 그 인간, 중소기업 운영하그든. 근데 그뿐만이 아인기라.”

“뭐가 또 있는데예.”

“그 인간이 얼마 전까지 필래 비바체 실세였고 지금은 자기 회사 꾸릴라꼬 나와서 필래 비바체 사외이사로 옮겼다 하데.”

“그, 그게 정말입니꺼.”

“그래. 그런 인간을 건드려놨으니 필래에서 뭐 좋다꼬 우리 마을을 돕겠느냐 이 말이다.”

“행님은 그걸 알면서 진작 안 알려주고 뭐 했심니꺼!”

트럭 남자의 외침에 이완승의 눈이 돌아갔다.

그는 벌떡 일어나 트럭 남자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이 쌍놈의 새끼가 누울 자릴 보고 다릴 뻗어야지, 얻다 대고 책임을 떠넘기네!”

“햄요!”

“내가 조심하라고 분명히 말했제. 근데 니가 괜찮다매?”

“그놈아가 필래에서 방귀 좀 뀌는 놈인 줄 알았으면 내가 이랬겠어예!”

“패악은 지가 부려놓고 누구 탓을 하는 기고 지금!”

“미리 말해줬으모 안 그랬제!”

이완승은 트럭 남자의 뒤통수를 후렸다.

“이 새끼야, 니는 그게 문제다. 금마가 필래에서 방귀를 뀌건 똥을 뀌건 그기 뭔 상관이고?”

“상관이 왜 없어예! 그놈아가 필래 안 다녔음 이런 일도 없을 거 아이라예!”

“막말로 금마가 그지새끼면 패악 부려도 된다 이기가? 니는 좀 혼나야 맞다. 그 치사한 썩은 근성을 고치려면 좀 혼나야 맞다고.”

이완승은 입술을 씰룩이며 트럭 남자를 쏘아봤다.

이건 대찬이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었지만, 기실 아이디어 자체는 이완승의 것이었다.

대찬과 술을 마시던 이완승은 그가 서청수 회장과 친분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본인이 필래의 요인이었다는 걸 알고 무릎을 탁 쳤다.

이완승은 흐흐 웃으면서 대찬의 잔을 채웠다.

“그라모 얘기가 좀 쉬워지지예.”

“제가 필래와 관련이 있는 게요?”

이완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청수 회장이 이쪽에 별장을 만들고, 마을사람한테 좀 잘했어예. 하기야 자기 기준으로 푼돈 좀 뿌리고 주변 인심 얻어둬서 조용히 시킬 수 있으면 괜찮은 장사니까.”

“그랬군요.”

“뭐 사비를 털어다 준 건 아이고, 자기 계열사 움직여서 여러 가지 지원사업을 많이 해줬지예.”

대찬은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을 지금 저한테 하시는 건…….”

“뭐, 회장님하고 연줄이 있으모 블러핑이라도 해보라고 할라캤는데, 마 들어보이 블러핑 할 것도 없겠네예. 우리 필래 비바체에서 이것저것 많이 받고 있거든예?”

“받아요? 뭘요?”

“그걸 줄줄 읊자면 팔만대장경이지.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필래 도움 없으면 동네사람들 삶의 질이 팍 떨어질 거라예.”

“그 정돕니까?”

이완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예. 그거 확 짤라뿐다꼬 으르렁거려 보이소. 그럼 그걸로 껨 끝이라예.”

이완승이 흐흐 웃으면서 말하자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이런 귀띔을 저에게 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사실 친한 걸로 따지면 저보다는 청년회 쪽이 훨씬 친하실 텐데요, 당연히.”

“마 세상일이 친하고 안 친하고로 돌아가면 되겠어예? 맞고 안 맞고로 돌아가야지. 난 좀 무섭그든예.”

“무섭다뇨?”

이완승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여기서 입 꾹 다물고 있어봐예. 아마 조대찬 씨 부모님, 오래 못 버티고 짐 싸가 다시 서울로 올라 갈기라예.”

“그게 무서우시다고요?”

“예, 난 그기 무서워요. 서울로 올라간 부모님이, 그리고 조대찬 씨가 뭐라 하겠어예. 귀농해보이 시골 것들 상종 못하겠다 하겠지요.”

“아… 꼭 그러진 않겠지만요.”

“그 쌍놈 새끼 하나 때문에 나까지 시골 것들로 도매금으로 퉁 쳐가 욕을 처먹는다꼬요.”

“억울한 일이죠.”

“억울하다마다. 나만 그래요? 이 마을, 저 마을,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사람들까지 싸잡혀가 욕을 처먹는다꼬요. 그거, 큰 죄라예. 하모, 큰 죄고 말고.”

“아…….”

“그거, 무서븐기라예. 나도 모르는 새에 모르는 사람한테 욕을 먹고 있다는 건 참말 무서븐기라예. 난 그거 싫어요. 밥 굶는 것보다 싫어.”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귀띔해주신 덕분에 그런 불상사는 안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조대찬 씨가 힘깨나 있는 사람이라 차라리 다행이라예. 빈털터리였으면 이런 심통도 못 부린다 아임니까. 꼼짝없이 당해버렸을 거라예. 끔찍한 일이지요.”

그 말에 대찬은 대답할 말이 딱히 없었다.

이완승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대찬의 손을 꽉 붙들었다.

“이번에 회초리 단디 들고 내려쳐주이소.”

“그래도 되겠습니까?”

“하모예. 이건 내가 조대찬 씨 도와주는 기 아이고, 조대찬 씨가 내를, 그리고 우리 마을 사람들 욕 안 먹게 도와주는 깁니다. 아시겠어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날 밤 작당모의의 결과가 바로 필래 비바체에서 날아온 한 통의 우편물이었다.

이 종이 한 장의 위력은 굉장했다.

이완승은 이 소식을 마을사람들에게 널리널리 퍼트렸다.

좁은 동네라 소문이 빨리 퍼졌다.

조용하던 마을회관을 향해 사방에서 동네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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