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62화
대찬은 이완승 앞에 놓인 종이컵에 소주를 따르면서 물었다.
“순천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하이고, 그걸 물어보기 전에 우리 조대찬 씨가 순천까지 어쩐 일로 왔는지 먼저 말씀을 해주시는 게 순서 아닐까예.”
“여기까지 와서 용건만 후딱 해결하고 뜨는 건 너무 정 없는 거 같아서요.”
“뭐, 그것도 그렇네예.”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나 먼저 나눌까 했는데 피곤하시면 말씀대로 용건만 여쭙고 일어나겠습니다.”
“하하, 조대찬 씨는 일마다 풍류를 찾으시나 봐요.”
“풍류랄 것까진 없고… 그래도 이렇게 뵌 것도 인연이니까요.”
“좋아요. 그럼 그리 하지예. 그럼 새우깡으로 어림도 없제. 요 앞에 늦게까지 하는 포차 있으니까 거서 한잔 하까요.”
“좋습니다.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아이라예. 먼 길 오신 분한테 얻어먹을 정도로 염치 안 없습니다.”
대찬은 족히 한 시간 동안 이완승과 잡담을 떨었다.
이완승도 대찬의 방문이 은근히 반가운 모양이었다.
굳이 대찬이 분위기를 끌고 가지 않아도 알아서 이 얘기 저 얘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얘기를 이어가다 보니 대찬은 그가 자신이 상정했던 최악의 인간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앞에서 헤실헤실 웃다가 냅다 뒤통수 후리는 인간들이 하나둘은 아니긴 했다.
그래도 얘기를 꺼내볼 만은 했다.
이완승이 먼저 판을 깔아주었다.
“그래, 이제 슬슬 이렇게 수고롭게 나 보자고 한 이유를 말해도 될 거 같은데?”
술 좀 마셨다고 대찬에게 건네는 이완승의 말투도 제법 친근해져 있었다.
대찬은 소주로 속을 씻고 이완승에게 말했다.
“예, 별 건 아니고요.”
“별 거 아닐 리가. 바쁜 사람이 이 밤중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 찾아왔으모 별 거도 그냥 별 거가 아이지.”
“청년회 분들이 그러시더라고요.”
“청년회 아들이? 뭐라고 하데?”
“저희 부모님 댁 건물이 도합 두 채니까, 한 채는 부모님 쓰시고 한 채는 마을 위해 희사하라고.”
대찬은 긴장을 애써 숨기고 이완승에게 말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완승은 뭐라고 말할 것인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이완승의 미간이 확 찌그러졌다.
“으잉?”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말이죠. 물론 좋은 게 좋죠. 근데 제가 서울깍쟁이라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너나들이에도 최소한 내외하는 건 있어야죠.”
“허, 참나. 어이가 없구만.”
어이가 없다는 건 누굴 두고 하는 말인가.
대찬은 천천히 물을 마시면서 이완승의 눈치를 흘끔 살폈다.
다행히 이완승이 쏘는 혀 화살의 과녁은 대찬이 아니었다.
“금마들 골 빈 거는 내 전두화이 때부터 알았지마는 이랄 줄은 몰랐다. 하이고, 빙시들.”
대찬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완승은 자기가 낸 화에 더 불타올랐다.
“지미, 자기네 밭뙈기 절반 내놓으라하모 아가리에 하이타이 처먹은 거맨치로 거품 질질 흘려쌀 거면서 남한테는 건물 한 채를 내놓으란다, 참 나.”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이고 나발이고 상식이 없다 안 합니까.”
“저희 부모님도 마을 분들과 얼마든지 어울리고 싶어 하십니다. 마을의 일원으로 기여도 해야죠, 물론.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기여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하모, 하모예.”
“모쪼록 그분들이 혹 저희 부모님께 모질게 굴려고 하시거든 말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뭐 그렇긴 하겠는데 금마들이 내 말을 들어 처먹을지를 모르겠어예.”
“회장님 아니십니까.”
“간판이야 회장 간판이기는 한데, 말발이 잘 안 먹혀예. 당장 오늘만 해도 안 그래요. 회장이 버젓이 밖에 나와 있는데 굳이 오늘 지들끼리만 술 얻어먹으러 갔다 아입니까.”
“그렇군요…….”
대찬은 이완승의 말에 실망했다.
그가 말하는 게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는 없었다.
정말 그들 앞에서 회장의 면이 서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오래 알고 지낸 그들과의 우애를 해치지 않기 위해 대찬의 부탁을 완곡히 거절한 것일 수도 있었다.
무엇이든 간에 뾰족한 도움을 얻지 못한다는 게 아쉬웠다.
이완승 역시 민망했던지 괜히 안주로 나온 고갈비나 젓가락으로 뒤적였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근데 지금 부모님 살기 전에 원래 필래 서청수 회장 별장이었다 아입니까.”
“네, 맞습니다.”
“서 회장이 돈이 없어가 별장을 내놓은 건 아닐 거고, 팔아도 왠지 연줄이 있긴 있는 사람한테 팔았을 긴데. 아이라예?”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 회장님하고 연이 있긴 있습니다만.”
“연이 질긴 연이라예? 아니면 옷깃만 스친 정도라예?”
“질기다면 질기죠.”
그러자 이완승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래예……?”
이완승은 슬쩍 은밀한 목소리로 대찬에게 말했다.
대찬은 이완승의 여관방에서 잠을 청했다.
그리고는 새벽잠도 없는 이완승을 따라 새벽 4시에 일어나 다시 남해로 돌아왔다.
이완승은 자신의 트럭 조수석에 대찬을 앉히고 말했다.
“푹 주무시이소. 이랄 때 자는 잠이 꿀잠이라예.”
“제가 웬만하면 조수석에서 안 조는 스타일인데 지금은 잠을 이기기가…….”
대찬은 그렇게 말하면서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그는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로 푸, 푸, 규칙적으로 숨을 뱉었다.
전날 서울에서 중림대에 들렀다가 남해로, 그리고 날이 바뀌기 전에 순천에 와서 술 몇 순배 돌리고 새벽 4시에 일어났으니 피곤할 법도 했다.
이완승도 비슷한 스케줄을 소화했지만 체질 자체가 대찬과는 달라서 끄떡없었다.
이완승은 완전히 뻗어버린 대찬을 흘끗 보고 웃음을 지었다.
이완승은 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대찬을 차에서 내리도록 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며 대찬은 항의하지 않았다.
그의 뜻을 알았다.
대찬과 이완승이 같은 차를 탄 채로 마을로 들어오는 걸 남의 눈에 보여 봤자 좋을 게 하나 없었다.
“왕래 많은 골목이라 택시 금방 옵니다. 타고 가이소.”
“알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신세졌습니다.”
“이깟 걸로 신세는 무신.”
이완승은 대찬을 내려놓고 저만치 사라졌다.
이완승이 마을 초입에 다다르자 트럭 남자가 그를 맞이했다.
“행님, 무사히 잘 다녀오셨어예.”
“어, 두철이, 만다꼬 마을 입구에서부터 기다리고 있노.”
“아우가 돼가 행님 오시는 길 마중 나오는 건 당연하지예.”
이완승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니 뭐 할 말 있나.”
“아, 별 건 아니고예. 서울서 온 양반들 있잖아예.”
“그 양반들 왜.”
“너무 꼬장꼬장하거든요. 버르장머리를 좀 고쳐줘야겠어예.”
“둥글게 둥글게 살지, 뭘 또 일을 벌리고 그러네.”
“그런 말 마시라예. 요즘 귀농하는 인간들 얼매나 많아요. 초장에 버릇을 잘못 들여놓으면 나중에 골 아파진다니까요.”
“사람 거 참.”
트럭 남자는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이완승에게마저 퉁을 놨다.
“행님은 사람이 물렁해도 너무 물렁하다니까요. 나설 자신 없으모 소금이나 뿌리지 마이소. 내가 알아서 할 테니께네.”
“그러다 잘못 코 꿰이면 어쩌려고 그러네?”
“에헤이, 제깟 놈이 뭐 어쩔 건데예. 이 마을에서 서울 놈들 방귀도 맘 놓고 못 뀌어예. 됐어예. 행님하고 길게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지. 가만히 빠져 있으라 했어예. 아셨지요.”
“그래, 알았다. 네 맘대로 해봐라. 대신, 나중에 잘못되면 책임은 옴팡 네가 쓰는 기라. 알았나.”
“잘못 안 돼예.”
“만에 하나라도 돼모.”
“아, 알았어예! 잘못돼모, 내가 행님이 하라는 대로 다 하께. 문제 생기모 마을에 피해 손톱맨치도 안 끼치고 내가 해결하께.”
“그래, 그라모 됐다.”
트럭 남자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당당히 말했다.
“대신요, 내가 저 서울사람들 깔고 앉은 건물 하나하고 마당 하나하고 우리 공공재로 얻어내모, 행님이 나 다음 지선 때 군의원 밀어주세요. 알았지요.”
“허, 참 나, 결국 감투 쓸라꼬 이 푸닥거리 하는기지.”
“알았어예, 몰랐어예 대답만 딱 해요.”
“알따, 알따!”
이완승은 그렇게 말한 뒤 차창을 올리고 가던 길을 갔다.
“니 벌통 잘못 쑤싰다. 이번에 된통 혼나고 정신 좀 차리바라.”
그는 혀를 끌끌 차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마을 초입에 내린 대찬은 이완승의 말대로 금방 온 택시를 타고 뒤를 따랐다.
대찬은 아침 일찍 수찬이와 함께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는 어머니와 대문 앞에서 마주쳤다.
어머니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땠어?”
“음, 적어도 저쪽에서 시비 걸면 받아칠 건수는 만들었어요.”
“그래? 뭔데?”
“일 터지면 아시게 될 거예요. 안 터지면 굳이 아실 필요 없고.”
“너, 허탕 쳤는데 백만 원 주기 싫어서 이러는 거지.”
“아들을 안 믿으면 이 풍진세상 누굴 믿고 사나요.”
“그러니까 내가 아무도 안 믿고 사는 거 아니니.”
모자는 싱겁게 웃었다.
대찬은 저쪽에서 그저 무사히 지나가주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일을 치를 거면, 자신이 남해에 머무는 동안 치러주길 바랐다.
이제 슬슬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부모에게 지리멸렬하는 악다구니판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더러운 꼴을 볼 거면 차라리 자기가 보는 편이 좋았다.
그러던 차, 불행인지 다행인지 대찬이 남해에 머물고 있을 때 일이 터졌다.
점심께에 트럭 남자가 부모님의 집에 들이닥쳤다.
전날 그랬듯 자기 패거리 몇몇을 거느린 채였다.
대찬은 테라스에서 그들이 다가오는 걸 보고, 홀로 나섰다.
부모님은 그저 집에 그대로 있도록 했다.
감정이 상해도 자기하고 상해야지, 좋든 싫든 부대끼고 살아야 할 이웃사이였다.
대찬은 그들이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대문을 열어주었다.
“어쩐 일이세요?”
“얘기 좀 나누까.”
“네, 하세요.”
대찬은 대문을 지키고 서서 그들이 문지방도 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드가서 천천히 얘기했으모 하는데.”
“말씀이 길어질까요?”
트럭 남자는 피식 웃었다.
“마 됐다. 그럼 여기서 말하께. 지금까지 우리가 이 댁에 편의를 좀 많이 봐줬거든?”
“편의요?”
“그래. 마을회관 지을 때, 그쪽 부모님 안 계셨제? 건립비용 지원 안 했제? 근데 이용하시제?”
“…….”
“글고 텃밭 치고는 농사 크게 하시더만. 상수도 이용비용도 안 내시제? 농수로 정비할 때도 찬조 안 하셨제?”
“…….”
대찬이 입도 벙긋하지 못하자 트럭 남자는 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우리가 남는 공간 좀 같이 쓰자고 할 때는 거품 물고 열변을 토하더니마는. 와 지금은 말이 없네?”
“거품은 안 물었고요.”
한다는 말이 고작 거품은 안 물었다니.
트럭 남자는 비식비식 웃었다.
“우리가 무슨 날강도가? 맨입으로 그런 말 했는 줄 아나. 우리도 다 베푼 기 있으니까 당당하게 요구한기라. 기브 앤 테이크, 인생사 다 기브 앤 테이크 아이네.”
“그래서, 저희가 건물 한 채를 개방 안 하면 마을회관도 이용 못하고, 상수도도 이용 못하고, 농수로도, 기타 등등도 다 이용 못하게 하시겠다, 이 말씀이세요?”
트럭 남자는 쯧, 혀를 찼다.
“우리도 그라고 싶지 않다. 더불어 사는 사회 아이가. 같이 쓴다고 닳는 것도 아이고 같이 쓰모 좋지. 근데, 근데 말이다. 사람이 경우란 게 있고 그런 거 아이가?”
“경우요.”
“그래, 경우. 솔찌 저 건물 다 쓰지도 몬할 거 마을 사람들하고 공유하면 얼마나 좋아. 근데 먼저 대문을 걸어 잠그니, 우리도 별 수 없는 거 아이가?”
“경우 말씀하셔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제 경우와 그 경우가 어떻게 같겠습니까?”
“같지 뭐가 다르네?”
“말씀하신 마을회관 건립비용부터 상수도, 농수로까지. 그건 저 별장을 인수할 때 다 포함이 돼 있는 거 아닙니까?”
“뭐라꼬?”
“저희 이전에 저 별장 쓰시던 주인, 그러니까 서청수 회장님 측에서 이미 지불하시지 않았느냔 말입니다.”
“…뭐, 내시긴 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아니네?”
“왜죠?”
“왜냐니! 당연히……!”
대찬은 그의 말을 싹둑 자르고 자기 할 말을 했다.
“저희는 저 별장 인수할 때, 마을회관과 농수로, 상수도 이용에 대한 권리까지 동시에 인수한 겁니다.”
“그기 무신 억지고.”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왜 억지입니까. 가령 농수로도 없고 상수도도 없는 산골 오지에 저희 집과 똑같은 건물을 짓는다고 가정하죠. 똑같은 건물이지만 산골오지의 건물과 지금 여기에 있는 건물 가격이 똑같겠습니까?”
“…….”
“다르죠. 왜 다를까요. 그건 이미 인프라에 대한 비용이 부동산 가격에 포함돼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을 또 내라고요.”
“씨그럽다, 마! 사내 자슥이 주절주절 말이 많아.”
“그건 저희한테 이중으로 갈취하겠다는 거밖에 더 됩니까?”
“야! 갈취라니! 사람을 강도 취급해도 분수가 있지!”
“농수로가 노후해서 다시 마을사람끼리 십시일반해서 정비해야 된다, 그럼 기꺼이 낼 용의가 있습니다.”
“근데?”
“그런데 저희 집에만 돈을 내라고요. 그건 아니죠. 못 냅니다.”
어제까지 거절을 하더라도 완곡하게 거절하던 대찬이었다.
목소리도 조곤조곤 얌전했는데.
그러던 대찬이 대뜸 강경하게 나오자 트럭 남자는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