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61화
대찬은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다시 차를 돌려 읍내로 나갔다.
거기서 손맛 좋은 주인이 만드는 음식들을 잔뜩 샀다.
“다 해서 오십 인분 주세요.”
“오, 오십 인분?”
“네, 종류 별로 다요.”
“우야꼬, 남은 재료가 될라나 모르겠네. 시간 좀 걸려요?”
“오십 인분인데 당연하죠.”
주인은 대찬의 주문이 다소 당혹스러웠지만 문 닫기 전 맞은 횡재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트렁크에는 개 사료, 뒷좌석에는 포장된 음식을 잔뜩 싣고서야 대찬은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 수찬이 밥을 주고 대찬은 부모님과 둘러앉아 방금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그러자 부모님도 난색을 표했다.
“모처럼 아들하고 단란하게 있으려고 했더니 일이 이렇게 되니.”
“그래도 제가 있을 때 단단히 매조지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하기야 그것도 그렇다. 암튼 사람들 온다니까 음식 좀 서둘러 준비해야겠다.”
“그냥 밥만 하세요. 나머지 음식은 식당에서 다 포장해왔어요.”
“아유, 뭐 하러.”
“별로 반갑지도 않는 손님들 때문에 어머니 고생할 거 뭐 있어요. 사다 먹이는 게 낫지.”
대찬은 퉁명스레 툴툴거렸다.
그가 포장해온 음식을 때맞춰 한 번 데워서 상을 차렸다.
두 시간이 채 안 됐는데 저 대문간부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부모님이 마중 나가려는 걸, 대찬이 일어나면서 만류했다.
“여기 그냥 계세요. 제가 나갈게요.”
대찬은 혼자서 마을사람들을 맞이했다.
트럭에서 봤던 남자를 포함해 종잡아 서른 명은 돼보였다.
대찬은 그들을 깍듯하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하이고, 집 한번 널찍하이 좋다. 마당도 좋고.”
“읍내 식당에서 공수한 음식들로 상 차렸습니다. 아무래도 처음 맞는 손님들이시니 함부로 대접할 수 없는데 시간은 또 부족해서요.”
“부담시럽구로.”
“모쪼록 편히 즐기다 가십시오.”
“아이, 또 그렇게 말하면 안 즐기다 갈 수 없제. 햄요, 오늘 진창 놀다가 가실 거지예.”
“하모, 하모.”
대부분 중늙은이 남자로 이뤄진 이 무리는 마을의 청년회라고 했다.
이 작은 마을의 청년회에는 거동 불편한 노인을 제외한 모든 주민들이 가입돼있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청년다운 청년은 대찬 하나뿐이었고, 개중 가장 어린 사람이라 해봤자 마흔다섯 먹은 이였다.
대찬은 의도적으로 부모님을 그들과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는 가장 극성맞은 성향을 보이는 이의 옆에 딱 붙었다.
다른 소리 못하도록 밀착마크 하면서 열심히 술 상대를 해주었다.
그래도 대찬이 싹싹하게 나오니, 그쪽에서도 일단 물렁해졌다.
“설서 오신 아우가 술 엥간히 하네.”
“못 마시진 않습니다.”
대찬의 대답에 청년회원들은 와르르 웃었다.
대찬은 어느새 그들의 아우가 되어 있었다.
그의 부모님은 실없이 웃으면서 술이나 퍼대는 아들에게 은근히 눈총을 쏘았다.
대찬은 애써 모른 체 했다.
그러나 분위기가 그렇게 마냥 말랑하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트럭 사내가 자기 일행들에게 말했다.
“오늘 회장 행님이 와야 얘기가 좀 될 텐데, 온다는 소식 몬 들었나.”
“순천 다녀온다고 했잖아요. 내일 돌아오신다고 했어예.”
“아쉽구로. 그라모 우짤 수 없제. 설서 온 아우, 이름이 대차이라고 했제.”
“네, 조대찬이요.”
“그래, 내 회장님 오모 말할라 캤는데, 못 오신다 하이 그냥 지금 말하께.”
“네, 말씀하시죠.”
“아까 우리 처음 봤을 때 있다 아이가.”
“네.”
남자는 대찬에게 슬쩍 눈을 흘겼다.
“그때 대차이 말하는 게 좀 꼬롬하데?”
“꼬롬하다뇨, 어떤 게 말씀이세요.”
“마을 사람들끼리 상부상조하고 으쌰으쌰 사는 게 시골 법도 아이가. 근데 우리가 좋은 말로, 좋은 취지로 얘기했는데 무 자르듯 싹뚝 잘라뿌면 우야노? 그래 매정하면 햄 가슴이 아야하겄제, 그제?”
건물 한 채는 대찬의 부모님이 쓰고 나머지는 마을을 위한 공공재로 사용하자는 제안을 말하는 것이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형님, 죄송하지만 어려운 건 어려운 거예요. 저희 부모님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시라.”
대찬은 그렇게 말하면서 부모님을 흘끗 바라봤다.
우리가 무슨? 하는 표정을 짓던 그들은 대찬의 뜻을 알고 얼른 수긍하는 표정으로 바꾸었다.
“마을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거야 환영이지만, 이 공간만큼은 두 분이 조용히 지내시게 하고 싶거든요. 이해 좀 해주세요.”
“하, 이래 말귀가 어둡다. 못 알아듣는기가, 아니모 못 알아듣는 척 하는기가?”
“잘 알아들었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답답하네, 참말로.”
남자는 막걸리를 꿀꺽꿀꺽 넘겼다.
넘치는 막걸리가 땀처럼 그의 목 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는 탁, 탁자에 사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알았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제.”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대찬도 따라 일어났다.
“더 드시죠, 왜.”
“술맛이 싹 가셨다. 이만 간다이. 우리 이만 가께요.”
트럭 남자는 대찬의 부모에게 건성으로 인사하고 우르르 몰고 들어왔던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우르르 나갔다.
음식은 잔뜩 남아 식어가고 있었다.
대찬은 그걸 내려다보고 허리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건 뭐 변학도 수청 드는 것보다도 더하네요.”
아버지는 쯧, 혀를 한번 차고 더 말하지 않았고, 어머니 역시 말은 없었지만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제, 트럭 남자의 말이 자꾸 대찬의 귓전에 맴돌았다.
대찬은 마뜩찮은 듯 입술을 씰룩였다.
찜찜했다.
제깟 놈들이 해봤자 얼마나 대단한 해코지를 하겠느냐고 생각했지만, 또 마음먹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패거리가 사라진 대문간을 노려봤다.
대찬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버지, 청년회장이라는 사람 아세요?”
“어… 오다가다 여러 번 봤지. 이름이 뭐더라. 이완승인가 그랬지.”
“사람이 어때 보이던가요.”
“글쎄, 몇 번 본 걸로 어떻게 알겠냐마는.”
“그래도 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이 시원시원하고 괜찮아 보이더구나.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그래요? 아버지 믿을게요.”
“믿다니.”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 양반 연락처 혹시 아세요?”
“우리 이사 온 첫날에 내 휴대폰 뺏어서 직접 입력해주던데.”
대찬은 아버지의 휴대폰에 있던 청년회장, 이완승의 연락처를 입수했다.
그는 외투를 입으며 부모님에게 말했다.
“불효 좀 할게요. 이거 음식은 두 분이서 좀 치워주세요. 저는 급히 가볼 데가 있어서.”
“서울에 무슨 일 생겼니?”
“아뇨, 순천으로 가요.”
“순천? 설마 청년회장 그 양반 만나러 가니?”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하러 순천까지 가서 만나. 아까 말하는 거 못 들었어? 내일 온다잖아.”
“내일이면 저 망할 인간들이 청년회장까지 단단히 한 패로 포섭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자 어머니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이구, 회장이 달리 회장이겠니? 한 패는 진즉 한 패지. 아까 우르르 왔던 그것들이 회장 졸개들이지.”
“그래도 아버지가 그러시잖아요. 나름대로 합리적인 분이시라고.”
“그 말 한 마디에 순천까지 가겠다고?”
“다녀오면 뭐 어때요. 소득 없어도 몸만 좀 피곤하고 마는 거지.”
“부지런하기는 참 부지런해.”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자신 있어요. 식탁 못 치워서 미안해요. 아니면 그대로 두세요. 다녀와서 치우게.”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원격시동을 걸었다.
부르르, 대찬의 애마가 투레질을 했다.
그때 아버지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야, 너 술 마셨잖아.”
“…아, 맞다.”
“됐다. 오늘은 그냥 자고 뭘 하더라도 내일 일어나서 해라.”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에요. 쇠도 뜨거울 때 두드려야지.”
“그럼 뭐, 음주운전이라도 하겠단 소리냐?”
대찬은 잠깐 고민하다가 겸연쩍은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제가 무슨 선택을 하든 불효를 저지르게 돼있는데요.”
“뭐?”
“하나는 아버지 좀 고생시키는 거고, 나머지 하나는 쇠고랑 차는 거예요. 그래도 앞에 있는 불효가 좀 가벼운 불효겠죠?”
그러자 아버지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나더러 네 운전기사라도 하라는 소리냐?”
“딱 한 번만 고생해요, 아버지.”
“싫다.”
아버지는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러나 대찬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늘만 고생하시고 저 무뢰배들한테 안 시달리면 그것도 남는 장사잖아요?”
“만약 고생한 보람이 없으면? 청년회장이 문전박대하면?”
대찬은 무례하지만 가장 매혹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럼 백만 원 드릴게요.”
“…가자.”
아버지는 대찬의 손에서 차키를 인수했다.
앞좌석에 나란히 앉은 부자는 무작정 순천을 향해 달렸다.
대찬은 1분이라도 아끼고자 차 안에서 청년회장 이완승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울리고, 다소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이완승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이완승 청년회장님 맞으십니까.”
“맞는데예. 누구세요.”
“저, 필래 서청수 회장 쓰시던 별장에 이사 온 부부 계시잖습니까.”
“아, 그 수더분한 내외분들.”
수더분한 내외분들이라는 말에 대찬은 희망을 얻었다.
“예, 제가 그 아들입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하지만 뵐 수 있을까 해서요.”
“어쩌지예. 내가 지금 순천에 와있는데…….”
“지금 순천 가는 길입니다. 부지런히 갈 테니 잠깐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아… 지금 여로 오고 있다꼬요?”
“네, 가고 있습니다.”
대찬은 순천 모처의 여관 근처에 차를 세웠다.
이완승이 거기 묵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면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그대로 다시 집으로 가세요.”
“뭐? 너는 어쩌게.”
“택시를 잡든 여기서 하룻밤 묵든 할게요. 영영 여기서 기다리실 수는 없잖아요.”
“…정말 괜찮겠냐?”
“네.”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곤 차에서 내렸다.
아버지는 그런 대찬을 잠깐 보다가 아들의 말대로 했다.
여관 가까이 가자 미리 연락을 받은 이완승이 나와 있었다.
푸짐한 인상의 그는 아직도 갈피가 잡히지 않은 얼굴이었다.
역지사지로 따지면 대찬 역시 마찬가지의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대찬은 어리둥절할 그를 위해 더욱 깍듯한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조대찬입니다.”
“아, 예. 하룻밤만 자고 인나면 될기를, 무신 급한 일이길래 이 밤중에 순천엘 다 왔어예.”
“안에 들어가서 말씀 나눠도 되겠습니까?”
“하모예, 들어오이소.”
대찬과 이완승은 좁은 여관방 안에 마주앉았다.
이완승은 그 와중에 손님대접을 하겠다고 새우깡과 소주를 꺼냈다.
서울과 지방, 청년과 무늬만 청년회장, 넥타이와 새마을 모자.
둘 사이에는 공통분모도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대찬은 애써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최대한 이완승과 신변잡기를 나눴다.
그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대화는 이완승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대찬은 이완승에게 청탁을 할 참이었다.
청년회 사람들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한데 따를 보복이나 뒤끝을 무마해달라는 청탁.
그러나 그걸 다짜고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이완승은 마을 청년회장이었다.
대찬의 어머니가 말하였듯, 그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경우의 수는 세 가지였다.
위처럼 이완승이 가장 악질일 경우가 첫 번째였다.
가장 골치 아픈 경우였다.
이 경우에는 무슨 좋은 말로 회유해도 넘어오지 않을 것이다.
이완승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판단이 된다면 오히려 속내를 털어놓는 게 역효과를 일으킬 게 뻔했다.
이완승이 이쪽인 경우 대찬은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날 작정이었다.
둘째는 딱히 대찬에게 우호적이지 않으나, 그래도 아주 악질은 아닌 경우였다.
이 경우가 어쩌면 현실적으로 가장 확률이 높았다.
이 경우, 대찬의 능력 여하에 따라 그를 포섭할 수도 있었다.
물론 언변만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몇 번의 향응이 필요할 것이고, 좀 고약하다면 적잖은 금품이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해볼 만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환을 제거할 수 있다면 수지가 맞는다.
제일 편한 경우는 이런저런 수 쓸 거 없이, 누구랑 친하고 누구랑 덜 친하고를 따질 것도 없이 상식적으로 판단하고 상식적으로 행동하는 경우였다.
이런 상식적인 사람일 확률이 세 가지 경우 중 가장 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