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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60화 (360/556)

난 할 수 있어 360화

대찬의 인터뷰가 매스컴을 타고 좋은 반응을 얻자 직원들도 고무되었다.

게다가 대찬이 마침내 필래에서의 신분을 정리하고 로튼프룻츠에 전념하겠다고 하니 더욱 고무되었다.

그 말인즉슨, 대찬이 필래보다 로튼프룻츠의 성장가능성을 훨씬 높게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안목을 믿는 직원들은 최소한 이 회사에서 노동으로 갈려나갈지언정 권고사직이나 명예퇴직처럼 아예 직장 밖으로 갈려나갈 일은 없겠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배양육, 아니 비도축육을 내세워 회사가 탄탄대로를 달릴지도 모른다는 희망마저 품게 되었다.

그들의 상상 속에서는 저마다 자신이 전무고 상무고 이사였다.

대찬이 로튼프룻츠에 전념하기로 한 결정을 가장 반기는 사람은 민승기였다.

그는 커피와 와인을 다루는 브랜드인 ‘낮한잔, 밤한잔’의 업무를 소화하기에도 벅찬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찬의 가세는 천군만마와 다름없었다.

민승기는 대찬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말했다.

“공동대표 체제 이제 청산하자.”

“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너 필래 나왔으니까 내가 더 이상 대표 자리 안 맡아도 되잖아. 조대찬 원톱으로 가자.”

대찬은 싱겁게 웃었다.

“싫어요. 내가 어떻게 선배를 밑에 깔아뭉개고 혼자서 사장노릇해요.”

“그게 맞아. 둘 다 잘 달리는 말이면 쌍두마차로 가겠지만 한 쪽이 처지면 절뚝거린다.”

“선배는 본인 역량을 과소평가하고 있어요.”

“네가 날 과대평가하는 거지. 그리고 공동대표라는 거 자체가 투자자들한테는 불안요소야. 언제 쌈박질하고 갈라설지 모르거든. 지금이야 좋은 말로 들어오는 돈 사양한다지만, 나중에 회사 사이즈 커지면 받아야 하잖아, 투자.”

그렇게 말하는 민승기는 대찬을 떠보려 한다거나 가식이나 위선의 의도가 없었다.

그와 오래 알고 지낸 대찬도 그의 진심을 알았다.

이 이상 사양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 고집이다.

어차피 위계서열이 수직적인 회사도 아니고, 대찬은 그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았어요. 그럼 제가 사장할 테니까 선배가 전무 해주시고요. 낮밤한잔은 전적으로 선배가 책임져주세요.”

“오케이, 좋았어.”

비도축육은 사장인 대찬이 지휘하고 다르샨 싱 전무와 은오영 교수가 실무를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낮한잔, 밤한잔’은 전무인 민승기의 몫이었고, 사회공헌사업은 박 이사가 도맡았다.

회사 전체를 아우르는 리더는 대찬이었지만 서로 성격이 다른 사업을 동시에 진행하기에, 이 부분에서는 완벽한 분업화가 이뤄졌다.

한 지붕 세 가족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사무실도 세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본사, 공유오피스를 사용하는 사회공헌사업부, 비도축육 연구가 진행되는 중림대 연구실.

때문에 이런 조치를 직원들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대찬은 공동대표 체제를 청산하고 대찬의 원톱체제로 변경된 걸 기념하여 임직원들과 가볍게 회식을 하고, 오후 9시가 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름대로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필래에서의 악전고투는 이제 막을 내리고, 로튼프룻츠에서의 악전고투가 막을 올렸다.

그는 악전고투와 악전고투의 사이에서 달콤한 휴식을 원했다.

누구와 휴식을 취할 때 가장 달콤할까.

대찬은 성수동 집으로 윤이영을 불렀다.

현관에 제 집처럼 들어온 윤이영은 아예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신발장에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그런 채로 대찬을 보고 배시시 웃기만 했다.

소파에 누워있던 대찬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뭐야, 왜 안 들어와?”

“아유, 황송해서.”

윤이영이 연극투로 말하자 대찬은 고개를 젖힌 채로 피식 웃었다.

“또 시작이다. 뭐가 황송해?”

“쵸 후쿠히로와 서청수에게 동시에 선택받은 남자. 비도축육이라는 단어의 창시자.”

“얼씨구.”

“유니콘(1조 이상의 가치를 지닌 기업)을 넘어 데카콘(10조 이상의 가치를 지닌 기업)이 될 회사의 주인, 한국 최초로 대기업 사내 조직을 거느린 사외이사.”

“그쯤 하세요, 윤이영 씨.”

그쯤 하라는 말에 그쯤 할 윤이영이 아니었다.

“가장 파푸아뉴기니 사람을 잘 꼬드기는 한국인, 미국 상원의원하고 맞다이 뜨는 거물, 또 뭐가 있을까.”

대찬은 마침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윤이영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하나 빼먹었구만.”

“뭘 빼먹었지?”

“세계 최고 여배우랑 연애하는 인간.”

“유치하게 세계 최고는 뭐야, 내 얼굴이 다 빨개지네.”

“고작 이 정도에 얼굴 빨개지면서 나는 그렇게 놀려댔어?”

“나는 사실만 얘기한 건데?”

대찬은 웃으면서 여전히 현관에서 버티고 있는 윤이영의 손목을 잡고 쑥 잡아당겼다.

윤이영은 그대로 대찬의 품으로 끌려 들어갔다.

대찬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윤이영을 꼭 껴안았다가 입을 맞췄다.

달콤한 휴식이 뒤따랐다.

대찬은 중림대학교 연구실을 자주 들락날락거렸다.

연구실의 연구일지를 공유 받아 꼼꼼히 검토했다.

연구 자료를 확보해 밤에는 때 아닌 야간자율학습까지 했다.

주방장처럼 탕수육을 잘 튀길 순 없다.

그래도 최소한 탕수육 만드는 방법을 어깨너머로 구경 정도는 할 필요가 있다.

탕수육을 만들려면 뭐가 필요한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했다.

중림대 연구실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지만, 대찬은 실험이 이뤄지는 곳에는 의식적으로 향하지 않았다.

사단장이 병사들 위로한답시고 뻔질나게 생활관 들락거리는 것만큼 민폐가 없는 까닭이었다.

“먼 길 오셨는데 술이라도 한잔 하시죠. 좋은 데로 모시겠습니다.”

중림대를 찾아온 대찬에게 은오영 교수가 모처럼 권유해도, 대찬은 응하지 않았다.

그럴 때면 대찬은 그저 법인카드를 넘겨주며 속닥거렸다.

“너무 많이만 드시지 마세요.”

“대표님도 같이 드시지 왜 안 드세요.”

“연구원들이 얼마나 불편해 하겠어요.”

“에이, 불편하기는요.”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팀끼리 오순도순 마시는 게 훨씬 낫죠. 너무 많이 드시진 마세요. 내일 연구에 차질 있으니까요.”

“아,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저 남해 갔다가 내일 다시 들를 겁니다. 연구실에 술 냄새 나기만 해봐요, 진짜.”

은오영 교수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걱정 마시라니깐.”

“그럼, 대충 마무리하시고 술 한 잔 하러 가세요. 저도 갈 길이 바빠서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운전 조심하세요.”

“고맙습니다.”

대찬은 빙긋 웃고는 자리를 떴다.

중림대가 있는 경북 모처와 부모님이 있는 남해 사이 거리가 가깝지는 않았다.

그래도 서울에서 가는 것보다야 훨씬 수월했다.

이럴 때라도 남해를 들르지 않으면 당분간 부모님 얼굴 뵙기는 명절이 아니고서야 그른 상황.

대찬은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서 중림대에서 남해의 부모님 댁으로 차를 몰았다.

지금의 부모님 댁은 원래 서청수 회장의 별장이었다.

그 덕인지 집은 풍경 좋은 곳에 자리해있었다.

다도해가 보이는 마을의 끝자락이었다.

대찬은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지방의 고속도로는 뻥 뚫려 있었다.

대찬은 핸즈프리로 아버지와 통화했다.

“지금 남해 가는 길인데 뭐 사갈까요?”

“뭘 사오냐. 먹을 거 다 있고 입을 거 다 있는데.”

“마을 슈퍼에 안파는 거 많잖아요.”

“네 일도 바쁠 텐데 거추장스럽게 이것저것 사올 거 없다. 몸만 와라.”

“그래요? 그래도 이왕 가는 김에.”

“괜찮다니까.”

그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잠깐, 잠깐. 너 뭐 하나만 사와라.”

“뭐 사다드릴까요. 빵이라도 맛있는 거 사갈까?”

“아니, 빵 같은 건 됐고. 수찬이 먹을 사료나 좋은 걸로 한 포대 사와.”

그러자 대찬은 잠깐 침묵한 다음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두 분 드실 거 사간다니까 웬 개 사료를 사오래요.”

“우리는 좋은 거 먹고 잘 지내고 있으니까 수찬이도 좋은 거 먹여야지. 잔말 말고 제일 비싼 사료로 사와라.”

“참 나, 아주 우리 수찬이 복 받았네요. 어째 나보다 수찬이가 더 대접받는 거 같아?”

“당연한 거 아니니? 너보다 훨씬 낫지. 하루 종일 살랑살랑 꼬리 흔들면서 쫓아다니지, 어디 잠깐 나갔다 오기라도 하면 왕왕 짖으면서 반겨주지.”

“암만 그래도 돈 보내주는 아들보단 못할 걸요.”

“너는 내 배 아파서 낳았으니까 그 정돈 해야지!”

“알았어요. 내가 졌어요. 사갈게요, 사료.”

“그래, 진즉 그랬으면 얼마나 좋니.”

대찬은 뚱한 얼굴로 전화를 끊고 계속 차를 달렸다.

읍내에 도착해 반려동물용품 가게에서 트렁크 가득 사료를 싣고, 다시 후미진 곳에 위치한 집을 향해 구불구불한 길을 운전했다.

그렇게 마을 초입에 이르러 대찬은 잠깐 차를 세웠다.

부모님이 담배냄새를 싫어했다.

초입에서 한 대 피우고, 탈취제로 냄새를 좀 날린 다음 갈 요량이었다.

그는 안전한 곳에 차를 대고 문에 살짝 몸을 기댄 채로 칙칙,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렇게 서둘러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는데, 멀리서 오다가 대찬을 스쳐 지나가려던 트럭이 대찬에게 다가와서는 구물거리다가 이내 멈췄다.

조수석에서 한 남자가 고개를 불쑥 내밀고 대찬에게 말했다.

“어이, 아재.”

그러자 대찬은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봤다.

‘이제 아저씨라고 부르는 소리에 화도 못 내는 나이가 됐지.’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에게 대꾸했다.

“예?”

“못 보던 찬데, 서울서 왔네?”

“네, 서울에서 왔어요.”

남해의 사투리는 어째 일반적인 경상도 사투리와도 또 다른 면이 있었다.

그래서 알아듣기 조금 더 수월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내내 수도권에서만 살았던 대찬은 귀를 쫑긋 세웠다.

“여 마을 사람 다 해봤자 100호가 안 돼가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데 아재는 처음 보네.”

“아, 예. 저희 부모님이 여기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셔서요.”

그 말에 남자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그래? 혹시 쩌 끝에 삐까뻔쩍한 곳에 사는 아재, 아지매가 그짝 부모님이가.”

“아, 아시네요. 맞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트럭에서 껑충 뛰어내려 대찬에게 다가왔다.

“저기가 원래 필래그룹 서 회장 별장인데, 맞제.”

“맞습니다.”

“근데 요즘 통히 서 회장 외제차가 안 보이데. 그라모 저 집에는 이제 서 회장 안 오는 기가.”

“안 오실 겁니다. 서 회장님한테서 저희가 넘겨받은 거라.”

“아… 그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이다. 문제는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이고, 그럼 부모님은 아예 여서 사시는 기제?”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웃분들하고 교류가 잘 없어서 모르셨나 봐요.”

“옆집 사는 할매하고만 왔다갔다하고 우리하고는 통히 교류가 음따. 이게 시골은 원래 기러면 안 되는 긴데, 그렇지 않네?”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아, 예, 뭐, 그렇죠. 기왕 이웃끼리 잘 지내면 좋죠.”

“그제? 그라모 아들내미가 부모님한테 가가 함 얘기를 해보는 게 어떠까.”

“무슨 얘길요?”

“그 삐까뻔쩍한 회장님 별장을 둘이서만 쓰모 좀 아깝지 않겠네?”

“예?”

“까놓고 말하면 우리 마을 사람들 전부 방 한 칸에 옹기종기 사는데 저쪽만 대궐 같은 집에 살면 쪼매 께름칙한기라.”

“…….”

“그쪽 건물이 두 채나 되는데 한 채는 부부가 오순도순 살고, 한 채는 주민들을 위해 마 쫌 개방을 하면 어떠까 싶은데? 마을의 화합과 화목을 위해.”

대찬은 기가 찼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대찬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건 좀 어렵겠습니다.”

“으잉?”

“주민들끼리 화합하는 거 좋지만, 저 공간은 저희 부모님만의 공간입니다. 사생활은 엄격히 지켜져야죠.”

“아, 누가 사생활 침해한다꼬 했네? 좀 베풀며 살라는 거지. 건물 한 채는 사생활, 나머지 하나는 공공생활.”

여기서 무르게 나오면 나중에 부모님에게 피해가 갈 것이다.

대찬이 끊어내지 못하는데 그보다 냉정하지 못한 부모님이 끊어내리라 기대할 수 없었다.

대찬은 자기 선에서 처리하고자 했다.

“주민들과 상생할 다른 방법을 찾겠습니다. 두 분만의 공간은 두 분만의 공간으로 놔두고요.”

“하, 설 사람들 이래 깝깝하다. 이래가 우째 공동체생활을 하려고 그러는지. 그래 뭐, 좋아. 그럼 조만간 저 넓은 마당에서 고기나 꾸버먹는 건 개않겠제?”

이것도 당장 안 된다고 하고 싶었다.

만일 저 큰 집에 대찬이 살고 있었다면 매몰차게 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딱 잘라 말했다가는 저들이 부모님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찬은 최대한 성질을 죽이고, 최대한 유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오늘 오시렵니까.”

“오, 오늘?”

“네, 제가 내일 바로 서울로 올라가야 돼서요. 저희 부모님도 연세깨나 드셔서 제가 안 거들면 마을 분들 드실 음식을 준비하기 어려울 거 같거든요.”

그러자 남자는 트럭에 동승했던 이들과 뭐라 말을 나누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 그래, 좋다! 술은 우리가 받아갈 테니까네, 많이도 아니고 안주거리 쪼매만 차려놓으면 된다.”

“그러시죠. 한 두어 시간 뒤에 오시면 되겠습니다.”

대찬은 그렇게 말을 남기고 푹 한숨을 쉰 뒤에 다시 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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