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59화
“좋아. 그렇게 하지. 내가 한 말이 있으니 무슨 염치로 안 되겠다 말하겠나.”
“감사합니다.”
“자네의 자격을 논할 필요는 없지만, 이유를 논할 필요는 있겠어. 왜지? 왜 비바체 사외이사 자리를 원하는 거지?”
대찬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욕심입니다.”
“욕심?”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필래에 전념할 여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제 시간과 열정을 쏟았던 필래를 아주 떠나긴 싫으니까요.”
“그래, 영락없는 욕심이군.”
“네, 변명의 여지가 없죠.”
서청수 회장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말했다.
“만약에 수틀려서 나중에라도 자네를 사외이사 자리에서 쫓아내면 어떻게 하겠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약이라고 했어, 만약.”
“수가 어떻게 틀렸는지에 따라 다르겠죠. 저는 이익에 반한다고 무조건 들이받고 보는 멧돼지는 아닙니다. 제가 비바체 사외이사에서 축출된 까닭이 온당하다면 받아들일 것이고, 부당하다면.”
“부당하다면?”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때 제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서 투쟁하겠죠.”
“무서워라.”
서청수 회장은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회장님께서 무서워하실 위치에까지 제가 갈 수 있을까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자네라면 가능성이 70퍼센트는 된다고 보네. 그런 꼴을 보느니 차라리 천년만년 비바체 사외이사로 썩게 두는 편이 좋겠군.”
대찬은 엷은 웃음기를 머금었다.
“비바체 사외이사로 있으면서 서원웅 대표를 측면에서 지원하겠습니다. 제 미력을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도울 거고요.”
“당연히 그래야지! 비바체는 내 회사이고 원웅이의 아지트인 동시에 자네 작품이야.”
“옳은 말씀이십니다.”
“뭐, 자네 작품에 값을 제대로 못 쳐줘서 미안하긴 하네만 사외이사 자리라면 AS 대금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네.”
“물론입니다.”
서청수 회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특별한 계기라도 있나? 굳이 이 시점에 비바체를 나가겠다고 한 특별한 계기. 그동안은 양다리 걸치면서도 잘해 왔잖나.”
“운명을 걸어볼 만한 사업이 생겼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말의 행간을 손쉽게 짚어냈다.
“배양육 쪽에서 성과를 냈구만.”
“예, 맞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해보게. 우리도 그쪽에 적잖이 투자한 거 알지?”
“알고 있습니다.”
“필래그룹도 벤처캐피탈을 운용하고 있는데 수익률이 개판이야. 부디 로튼 프룻츠에 투자한 게 소위 신의 한 수가 되기를 바라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네처럼 영특한 사람이 최선을 다하면 못해낼 게 없어. 기대하지.”
서청수 회장이 내미는 손을 대찬은 굳게 잡았다.
서원웅 역시 대찬의 결정을 존중했다.
그로서는 못내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결정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섭섭하네.”
“나도 마냥 마음이 편한 건 아니야.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방 하나 만들어줄 테니까 자주 들러서 의견도 내주고 경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줘.”
대찬은 웃으며 대답했다.
“최대한 은인자중해야지. 아마 네 와이프는 좋아할 거다. 앓던 이가 빠졌다고.”
“와이프 얘기 하면 난 할 말 없어. 누구 편도 못 드니까.”
“너는 무조건 와이프 편 들어야지. 편 들어달라는 얘기는 아니었어. 그냥 그렇다고.”
“그래, 로튼 프룻츠 경영하면서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도울 테니까.”
“상부상조하면서 잘하자.”
서원웅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는 조 대표 아니면 조 이사로 불러야겠네.”
“이사보다는 대표가 낫겠다. 이사라고 하니까 꼭 환갑 넘은 아저씨 된 것 같아.”
“그래도 어쩔 수 없어. 필래타워 안에서는 신분이 이사니까.”
대찬은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그의 사표는 수리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이어진 필래 비바체 정기주주총회.
대찬은 그 자리에서 정식으로 필래 비바체의 사외이사로 선임되었다.
기존의 사외이사는 모 대학의 명예교수였다.
그는 비바체 사외이사가 되기 위해 있는 인맥 없는 인맥 다 끌어 모아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그러나 대찬의 등장에 아무런 힘 한번 못 써보고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대찬은 소리 소문 없이 필래 비바체 혁신경영팀장으로서의 흔적을 지웠다.
어차피 필래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질 터다.
요란법석을 떨고 싶지 않았다.
그래봤자 괜히 홍승연이나 대찬에게 불온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 뿐이었다.
그런 대찬의 소망과는 반대로 서원웅은 요란법석을 떨었다.
미국에는 사외이사실 설치를 의무화하는 등, 사외이사에게 힘을 실어주는 여러 장치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의 사외이사들은 잘 쳐줘야 명예직, 회사 오너일가의 응원단장에 불과했다.
그런데 서원웅은 대찬에게 확실히 힘을 실어주려는 행보를 보였다.
사외이사실을 별도로 설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 술 더 떴다.
서원웅은 한국 대기업 역사상 최초로 사외이사 산하 별도의 사무조직을 설치했다.
거창한 조직은 아니었다.
그러나 별도의 조직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부터가 일개 거수기는 아니라는 증거가 되었다.
사외이사실은 단지 대찬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 그를 포함한 세 명의 사외이사를 위해 일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나머지 두 명의 사외이사가 그 조직을 제대로 운용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폴레옹 집권 이후 그를 포함해 세 명의 통령이 혁명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을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의 통령은 그저 유명무실했다.
그게 필래 비바체 사외이사실의 구도와 다를 것이 없었다.
사외이사실이 신설되자 혁신경영팀에서도 대거 물갈이가 일어났다.
혁신경영팀의 팀원들이 그대로 사외이사실로 옮겨졌다.
혁신경영팀은 옥문영 상무가 지휘하는 경영지원부문 산하에 속하게 되었다.
팀장의 권한도 대찬이 재임하던 때보다는 상당히 감축되었다.
허운이 사외이사실장으로 보직을 발령받았다.
그 이하 유채경, 김산호, 오다혜, 홍은주까지 줄줄이 사탕으로 사외이사실로 옮겨갔다.
대찬은 짐을 한아름 들고 사외이사실로 들어오는 그들을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이러면 내가 퇴사한 보람이 없잖아요.”
“에이, 좋으시면서.”
허운은 능글맞게 웃었지만 대찬은 그의 말과는 다르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필래와 적정거리를 유지하면서 로튼프룻츠 일에 전념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러면 필래에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없잖은가.
대찬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난감하네.”
그러자 유채경이 웃으면서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희 못 믿으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이쪽 사무는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 거예요. 이사님은 딱 이사님 본분에만 충실하면 된다구요.”
유채경의 말을 허운이 거들었다.
“유 과장 말이 맞아요. 무슨 혼자서 십자가 다 짊어지려고 그래요. 우리가 얼마나 못 미더우면.”
“유 과장은 아닌데 당신은 좀 못 미덥긴 해.”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았어요. 내가 너무 여러분을 못 믿었네. 잘 부탁해요. 필래에는 열흘에 한 번 올까 말까 할 거 같으니.”
김산호가 말했다.
“이러는 쪽이 저희한테도 좋아요. 저희는 완전 조 이사님 라인으로 분류돼 있다고요.”
“그런데?”
“이게 지금 당장은 좋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각자 다른 부서로 뿔뿔이 흩어지는 것보다는 이렇게 뭉쳐 있는 편이 더 안전하지.”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러네.”
“아무튼 우리도 이사님한테서 어깨너머로 배운 게 있으니까 우리 몫은 충분히 해낼 수 있어요.”
“그래요. 잘 부탁해요.”
대찬과 사외이사실 직원들은 서로를 향해 빙긋 웃었다.
대찬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우리사주조합 조합장의 자리를 더 지키고 있을 수 없었다.
우리사주조합장의 자리는 오로지 필래 비바체 임직원만 맡을 수 있는 까닭이었다.
더 이상 대찬은 필래 비바체의 ‘우리’가 아니었다.
대찬은 그 자리를 옥문영 상무에게 넘겼다.
필래 비바체의 우리사주는 점점 소유한 지분을 늘여나가고 있었다.
필래 비바체의 주가는 더욱 탄력을 받아 연일 위로 치고 올라갔다.
클로빌과의 공방전에서 판정승을 거둔 이후 더 그랬다.
이런 상황이니 우리사주를 공모할 때면 신청자가 항상 준비된 물량 이상으로 몰렸다.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몇 년 안에 비바체의 우리사주조합이 대주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그것도 제법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대주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게 중론.
그런 까닭에 우리사주조합장 자리를 아무에게나 넘길 수 없었다.
옥문영 상무는 그 자리를 믿고 맡길 만한 인물이었다.
그녀 역시 대찬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대찬이 떠난 후, 리더십의 공백은 그녀가 채울 예정이었다.
서청수 회장에게 필래 비바체 사외이사 자리를 얻었다.
서원웅에게도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통보하고 선선한 승낙을 얻어냈다.
대찬은 모든 일이 정리되고 나서야 쵸 후쿠히로 회장의 펀드에서 투자금 70억 원을 받았다.
본격적으로 배양육 개발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자금에 목말라있던 로튼프룻츠에 70억은 달콤한 오아시스였다.
그러나 그 70억 원보다 더 큰 이득은 쵸 후쿠히로 회장의 이름값이었다.
업계는 액수보다도 쵸 후쿠히로가 투자를 결정했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했다.
그가 투자를 결정한 한국 기업은 클로빌 이후에 로튼프룻츠가 두 번째였다.
쵸 후쿠히로는 단순한 투자의 귀재를 넘어, 한 수 앞을 내다보는 선각자적인 이미지가 있었다.
물론 클로빌이 예상외로 고전하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쵸 후쿠히로가 손을 뻗기 전에 비하자면 괄목상대할 만큼 발전한 모습이었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수완을 인정받는 쵸 후쿠히로가 커피 원두를 깔짝, 와인을 깔짝거리던 작은 회사에 투자를 결정했다는 소식은 이목을 집중시킬 만했다.
게다가 로튼프룻츠의 수장이 클로빌에 한 방 먹인 비바체의 혁신경영팀장이라니.
얘깃거리가 됐다.
언론은 로튼프룻츠에 관심을 보였다.
그래도 의리가 있어서, 대찬은 최재한에게 단독 인터뷰를 맡겼다.
“이런 자리 너무 낯선데. 맨날 서청수 회장이나 원웅이가 인터뷰 하는 걸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는데.”
“나도 낯설어. 많이 컸다, 조대찬이.”
“컸지, 그럼.”
대찬은 흐흐 웃었다.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으로 입안을 헹구고 대찬은 차분히 최재한과의 인터뷰에 임했다.
대찬은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쵸 후쿠히로를 내세우지 않았다.
이미 알려진 사실을 굳이 자신의 입으로 반복하는 우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가 내세운 건 배양육이었다.
앞으로 로튼프룻츠의 간판이 될 사업이었다.
배양육은 영어 ‘cultured meat’의 번역어였다.
그런데 어감 자체가 어딘가 껄끄러웠다.
대찬은 원래 있던 배양육이라는 말 대신 ‘비도축육’이라는 단어를 굳이 만들어서 사용했다.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고기라는 이미지를 지우고 생명을 빼앗지 않고 만들었다는 측면에 집중시키기 위함이었다.
“비도축육은 국토가 비좁고 곡물자급률이 세계 최저 수준인 우리나라에게 가장 훌륭한 식량대책이 될 수 있습니다.”
대찬은 최대한 여유로운 표정과 자세로 인터뷰에 나섰다.
텍스트로 된 기사가 아니라 목소리, 어조, 표정, 제스처까지 모두 드러나는 영상으로 인터뷰가 나갈 것이다.
로튼프룻츠의 대표로서 매스컴에 처음 등장하는 자리에서 긴장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대찬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우리 로튼프룻츠는 적극적인 연구개발에 나서, 비도축육 업계에서 선두그룹의 일원이 되고, 나아가 국민 경제와 건강에 이바지하는 기업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쵸 후쿠히로의 투자사실이 알려지고, 대찬의 인터뷰가 세간의 이목을 끌자 로튼프룻츠에 투자하겠다는 문의전화가 하루 종일 울려댔다.
로튼프룻츠는 그 문의의 대부분을 사양했다.
쵸 후쿠히로 회장의 투자액을 일부러 낮게 책정해서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문제는 역시 지분이었다.
맨 처음 로튼프룻츠가 창립될 때 들어간 자본은 아주 적었다.
그나마 파푸아뉴기니에서의 원두사업이 수익을 창출하기 시작하자 큰 차질 없이 작은 회사를 굴릴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공동대표인 대찬과 민승기가 가진 자본도 웬만한 자산가가 봤을 때 티끌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물 밀 듯 들어오는 투자를 좋다고 넙죽넙죽 받으면.
나중에 가서는 로튼프룻츠가 더 이상 두 사람의 회사가 아니게 될 것이다.
피둥피둥 열심히 살을 찌워놨더니 웬 돈 많은 녀석이 와서 회사를 날름 집어먹는 사태까지 치달을 터.
그러니 쏟아지는 투자에 침이 줄줄 흐르면서도 대찬은 눈을 꼭 감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