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58화
대찬은 미래를 살아본 자격으로 슬그머니 말했다.
“원래는 2조가 되어야 할 돈이 아닙니까?”
“뭐라고요?”
지금까지 대찬을 바라보는 쵸 후쿠히로의 표정은 한없이 여유로웠다.
그런데 대찬이 2조를 꺼내는 순간 그 평정이 일시적이나마 깨졌다.
정곡이 찔렸다.
“2조가 되어야 할 돈이 4천억으로 줄었으니 오히려 저는 회장님의 결정이 반가웠습니다. 외람되지만요.”
“허, 놀랍군.”
대찬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쵸 후쿠히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좋아요. 아니었다고 둘러대지는 않겠습니다. 4천억은 내가 구상했던 것에는 터무니없이 미치지 못하는 액수가 맞습니다.”
“예.”
“그래서 한국에 새로운 투자처를 발굴하고 있어요. 뭐, 클로빌처럼 전격적인 투자는 아니지만 백억 단위 규모로 생각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십니까.”
대찬은 남의 일처럼 반응했다.
기실 이 정도 얘기가 나왔으면 누구나 대충 눈치를 채기 마련이었다.
쵸 후쿠히로는 일 분 일 초를 아껴서 쓰는 사람이다.
흰소리나 늘어놓으려고 굳이 대찬을 불러다 앉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찬 역시 그의 부름을 받을 때부터 분명한 용건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저 정도면 용건의 8할 정도는 얘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쵸 후쿠히로의 투자를 받는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아니, 애초에 그와의 식사자리 자체가 귀했다.
어느 자선경매에서 쵸 후쿠히로와의 점심식사 티켓이 억 대에 낙찰된 일도 있었다.
그런데 대찬은 심드렁하게까지 보이는 모습이었다.
감이 없거나 대범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쵸 후쿠히로는 자신의 안목을 믿었으니 전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꿈쩍도 안 하시는군요. 꼭 내가 마지막 말까지 해야 움직이겠습니까?”
“말씀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제가 설레발부터 치면 그건 그것대로 한심한 모습 아니겠습니까.”
쵸 후쿠히로는 픽 웃었다.
“좋아요. 나는 조 대표의 회사에 투자할 의향이 있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그렇게 감정표현에 인색합니까?”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충분히 기쁩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어서요.”
“왜죠?”
“저는 회장님의 종복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내 종복이 되라고 요구한 적 없습니다.”
“로튼 프룻츠는 자본이 큰 회사가 아닙니다.”
“그렇지. 그러니 나 같은 자본가의 투자가 필요한 것이고.”
“회장님의 말씀대로 백억 대의 투자가 이뤄진다면, 로튼 프룻츠의 선장은 제가 아니라 회장님이 되십니다.”
“지분 상으로 그렇지만 나는 경영에 간섭하는 걸 별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대찬은 짧게 대답했다.
“압니다.”
“아는데, 왜?”
“회장님은 간섭할 의사가 없다고 하시지만 저희 쪽에서는 회장님을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으음…….”
“클로빌과 동종업계라 종종 그쪽 소식을 접합니다. 클로빌 경영진이 회장님을 주인 모시듯 하더군요. 저도 그러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방금 전에 조 대표가 클로빌하고 다르다고 말했어요. 그 말이 무색하게 지금 그쪽이랑 조 대표가 같다고 자인하는 겁니까?”
“멱살이 잡힌 상태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건 사람이든 개나 돼지든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그렇지.”
쵸 후쿠히로는 싱거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대찬의 얼굴은 시종 진지했다.
“제가 귀여워서 회장님이 로튼 프룻츠에 투자하는 건 아니시겠죠. 로튼 프룻츠가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투자하시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맞아요.”
“그렇다면 저희에게도 조건을 제시할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쵸 후쿠히로는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물론이지. 나는 파트너를 항상 동등하게 대우합니다.”
“70억 원의 투자금, 그리고 회장님이 저희 회사에 투자하셨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자유롭게 알릴 권한을 허락해주십시오.”
“70억이면 내 손아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렇습니다.”
쵸 후쿠히로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찬에게 손을 뻗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단, 나한테도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나는 로튼 프룻츠의 가능성을 보기도 했지만, 사실 로튼 프룻츠보다는 조 대표를 보고 투자를 결정했어요.”
“…….”
“그런 조 대표가 마냥 필래에…….”
“잠깐만요.”
대찬은 쵸 후쿠히로의 말을 막았다.
일개 새파란 젊은 벤처기업가가 자신의 말을 막았다.
쵸 후쿠히로에게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에게서 발언권을 가져온 대찬이 말했다.
“제가 필래에 매여 있는 상태에서는 선뜻 투자를 결정할 수 없다, 그 말씀이시죠.”
“맞아요.”
“회장님께서 조건으로 내거시기 전에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음?”
“저는 필래 비바체 직원 신분은 청산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더 말할 것도 없겠군요.”
“단, 말미를 주십시오. 사흘 안에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쵸 후쿠히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죠? 이미 결정한 일인데 사흘 말미가 필요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게 해주십시오.”
대찬이 이유를 밝히지 않고 거듭 권하기만 하자, 쵸 후쿠히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이게 제 아시아·태평양 지역 투자담당자 연락처입니다. 이쪽으로 연락을 주시죠.”
“알겠습니다.”
쵸 후쿠히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쳤다.
“오늘 만남은 상당히 의미가 있었습니다. 나는 비행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이만 일어나야겠습니다. 조 대표는 남아서 천천히 식사 들어요.”
“또 뵙겠습니다.”
“청국장 냄새가 그리워지면 돌아오지요.”
쵸 후쿠히로는 빙긋 웃고 먼저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대찬은 철퍼덕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식어가는 청국장을 열심히 먹었다.
쵸 후쿠히로의 마음을 최대한 떠올리며 바닥까지 긁어 먹었다.
대찬은 필래 비바체 혁신경영팀장으로서의 역할을 내려놓고자 했다.
그러나 필래와의 인연을 아예 결딴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로튼 프룻츠는 앞으로 공들일 탑이지만 필래는 이미 공든 탑이었다.
아무리 쵸 후쿠히로의 제안이 달콤하고, 은오영 교수의 실력이 출중하다 하여도 필래에서 쌓아놓은 모든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는 없었다.
대학시절부터 해서 십수 년의 세월을 필래에 바쳐왔다.
이룬 공도 많았다.
그걸 홀라당 털어버리고 나오면 남 좋은 일만 시킨 꼴이었다.
필래의 한 자락은 죽기 직전까지 꼭 붙들고 있을 작정이었다.
대찬은 그렇게 하기 위해 서원웅이 아니라 서청수 회장을 찾아갔다.
쵸 후쿠히로 못지않게 바쁜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다.
“어, 웬일로 나한테 독대를 다 청하고.”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안녕했지, 그럼.”
서청수 회장은 대찬에게 우호적인 미소를 띠었다.
대찬은 그에게 인사를 하자마자 곧장 본론으로 직행했다.
“회장님, 사표를 쓰려고 합니다.”
“뭐?”
“로튼 프룻츠 경영만으로도 벅찹니다. 이제는 한쪽을 선택해야만 할 것 같아서요.”
“그런가.”
그렇게 대꾸하는 서청수 회장의 목소리는 개운하지 않았다.
그의 욕심대로라면 대찬은 영영 서원웅의 오른팔로 남아야 했다.
서청수 회장에게 김왕장이 있듯이, 아들에게는 대찬이 있어 주길 바랐다.
셋을 묶어 김왕장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 부를 것도 없이, 조대찬 하나만으로 능히 그 정도 역할을 해내리라.
대찬은 그 정도 잠재력이 충분한 인재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지금 대찬의 말이 더욱 달갑지 않았다.
“왜지? 내가 섭섭하게 대우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욕심이 생겼습니다. 회장님 보시기에 객기일 수도 있지만.”
“그래, 이미 마음 떠난 몸을 붙들어봤자 피차 피곤하기만 해. 자네 결정은 존중하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런데 그 얘기를 굳이 나한테 와서 하는 이유는 뭔가. 자네가 사표를 내야 할 상대는 서원웅이야.”
“알고 있습니다.”
대찬의 말에 서청수 회장의 목소리가 튀었다.
“알아? 그걸 아는 사람이 어딜 내 앞에서 사표를 던지려고 하나. 건방지게.”
“사표 내려고 회장님 뵙자고 한 건 아닙니다.”
“그럼.”
대찬은 침을 한번 삼키고 대범하게 말했다.
그의 입장에서 말한다기보다는 ‘지른다’고 표현하는 쪽이 맞았다.
“회장님 목숨 값을 오늘 정산 받으려고 합니다.”
“뭐야?”
서청수 회장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자세를 편하게 고쳐 앉으며 대찬을 빤히 바라봤다.
서청수 회장은 남은 웃음을 큭큭 마저 웃고 나서 대찬에게 말했다.
“회사 떠나면 더 볼 일 없으니까 남은 외상값도 전부 쳐 가겠다, 그 말인가?”
“그건 아닙니다. 지금 드려야 할 부탁이라서요.”
“좋아. 난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는 사람이야. 근데 자네한텐 그러지 못하겠군.”
“감사합니다.”
“원하는 게 뭔가.”
“말씀 올리겠습니다.”
“편하게 말해. 내가 앉은 회장 자리, 원웅이가 앉은 회장 후계자 자리, 두 개 빼고 다 내주지. 아, 회사 나가는 마당에 자리는 아닐 테고.”
대찬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자리 맞습니다.”
“회사를 나가는 마당에 자리를 달라?”
“예.”
“내 영향력은 필래 안에서만 유효해. 어디 구의원 선거라도 나가려고 이러나? 뭐 그 정도라면 선거자금 정도야 지원해줄 수 있지.”
“아닙니다. 필래 안에서 자리를 구하고자 합니다.”
그러자 서청수 회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장난인가. 빙빙 돌리지 말고 간단명료하게 얘기해봐.”
“필래 비바체 사외이사 자리를 주십시오.”
“사외이사……?”
“네.”
서청수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찬은 이미 그를 찾아오기 전에 골백번도 더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미칠 듯이 광분하는 것부터 빙긋 웃으면서 선선히 응하는 것까지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했다.
그렇기에 그가 어떤 반응을 보여도 미동도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물론 겉으로 미동도 하지 않는 것과 속으로 긴장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
대찬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사외이사라.”
서청수 회장은 시큼털털하게 굳이 사외이사 네 글자를 다시 발음했다.
그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대찬 쪽으로 상반신을 기울였다.
“사외이사가 헐렁한 자리가 아니라는 건 자네도 알 거야. 특히 비바체처럼 핵심 계열사 사외이사 자리는 더욱 그렇지.”
“알고 있습니다.”
서청수 회장의 말대로였다.
사외이사는 회사에 흔하게 널린 전무, 상무, 이사들과는 다른 존재였다.
물론 서원웅이 대찬에게 마트사업부문장 자리를 제안한 일이 있기는 했다.
마트사업부문장은 전무 직급이 맡는 보직이었다.
통념으로 보자면 대찬에게 전무급도 어림없었다.
그러니 하물며 사외이사는 어떻겠냐는 말이 자동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개의 전무, 상무, 이사들은 비등기이사였다.
암묵적으로야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하지만, 경영에 참여할 명시적인 권한은 없었다.
사외이사는 등기이사였다.
이사회의 일원으로서 경영에 책임이 있는 자리였다.
보통 필래 비바체 정도의 사외이사 자리는 소위 저명인사로 분류될 정도는 되어야 맡을 수 있었다.
특정 분야에서 방귀 좀 뀌었던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하여 회사에 유익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야 했다.
이를 테면 이랬다.
이름만 들어도 알 정도로 저명한 대학교수.
규모가 웬만한 기업의 전직 CEO.
후배들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법조인.
정부기관을 방문하면 자동으로 커피 한 잔 대접받을 수 있는 전직 기관장.
이 정도는 돼야 사외이사의 위신에 맞았다.
물론 사외이사가 오너 일가의 일개 거수기 역할만 한다고 비아냥대는 소리도 듣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대찬이 맡겨놓은 물건 찾듯 당연스레 요구할 자리는 아니었다.
대찬도 그걸 알기에 서청수 회장의 목숨 값부터 운운한 것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웃으며 대찬에게 말했다.
“자네가 사외이사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회장님과 그 자격을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음?”
“제가 그럴 자격이 있었으면 회장님의 약속을 들먹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자신이 없으니 약속의 대가로 얻고자 하는 겁니다.”
“그건 그렇지.”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재밌다는 듯 대찬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