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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56화 (356/556)

난 할 수 있어 356화

대표의 동공이 흔들렸다.

쵸 후쿠히로의 눈은 그러지 않았다.

평온했다.

이렇게 말할 걸 이미 한참 전에 생각했다는 뜻이었다.

“근데 지금은 재미가 없어. 기무 이사.”

쵸 후쿠히로 회장의 부름에 김 이사는 허리를 곧추 폈다.

“네! 회장님.”

“지금까지 한 말, 인터넷 몇 번만 뒤지면 나오는 거 아니에요?”

“…….”

“똑같은 말을 조금 더 씩씩하게 말한 것뿐이지. 예쁜 PPT 띄워놓고.”

“그, 그게…….”

“그럼 지금 클로빌을 위기에 빠뜨린 필래 역시 이쪽의 전략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요?”

“…….”

“내가 원한 건 큰 거 한 방이었어요. 삼겹살이 어떻다, 기저귀가 어떻다 별로 듣고 싶지가 않아.”

쵸 후쿠히로는 대표 쪽으로 몸을 틀었다.

“대표, 내가 처음 클로빌에 투자를 결정하면서 뭐라고 했었지요?”

“중요한 건 실적이 아니다. 점유율이다.”

“그래요. 그런데 점점 점유율이 떨어져. 나는 몇 년 안에 필래를 쉽게 제치고 이커머스를 평정하겠다는 대표의 말을 신뢰했어요. 그런데 결과는 어떻지?”

“아직 인프라 구축이 완벽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저희가 후발주자이니만큼 더 시간을 주시면…….”

“내가 처음 대표를 봤을 때는 이렇게 구구절절 변명이 없었는데. 명료한 구상만 있었지.”

“…회장님.”

쵸 후쿠히로는 대표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때는 우리 대표 눈이 참 맑았는데. 지금은 하루하루 버티기에 급급한 피로감이 역력해요. 인정해요?”

“…….”

“그때의 총기는 아마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간 듯싶습니다.”

대표는 쵸 후쿠히로의 말에 가타부타 말하지 못했다.

쵸 후쿠히로는 지그시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쩝,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고 당장 자금을 거둔다든지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직 클로빌의 가치는 충분하니까.”

“예…….”

“하지만 거액을 선뜻 맡기기에는 내 신뢰가 조금 희미해졌어요. 마냥 날 원망할 일이 아니란 건 아실 겁니다. 귀하의 책임도 분명해요.”

“예…….”

“4천억 원의 투자를 단행할 겁니다. 그 돈, 소심하게 따져서 대범하게 쓰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내가 아직 대표를 신뢰하는 건, 내 투자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안 하기 때문이에요.”

쵸 후쿠히로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클로빌을 떠났다.

쵸 후쿠히로가 쏘아 올린 4천억 규모의 투자소식은 필래 비바체에도 전해졌다.

그걸 들은 혁신경영팀 직원들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그들을 보고 대찬이 의아한 듯 물었다.

“뭐야, 왜 그렇게 축 처져 있어요?”

그러자 허운이 대답했다.

“아, 그럼 안 처지게 생겼습니까? 이렇게 실컷 때려봤자 뭐합니까. 장복광이가 와서 돈 들이부으면 그만인데.”

대찬은 웃었다.

“뭐, 장복광이 지갑은 화수분이래요?”

“그래도 힘 빠지잖아요. 기껏 신나게 두들겨 팼는데 갑자기 카린이 와서 선두를 주는 격이잖아요. 선두 알죠? 드래곤볼에 나오는 거.”

대찬은 피식 웃었다.

“액수에 집중해봐. 4천억.”

“당장 감도 안 잡히는 거액이죠. 집중하면 뭐, 절망만 더 하지.”

“우리한테야 그렇지만 쵸 후쿠히로한테 4천억은 귀엽지. 이 정도면 반쯤 클로빌 포기했다고 봐야 돼.”

“에?”

“지금까지 쵸 후쿠히로는 클로빌에 대한 투자액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려왔어. 이번에는 못해도 저번처럼 조 단위가 투입되어야 맞는데.”

“참 긍정적이시네요.”

“나는 허 과장이 참 부정적인 거 같은데?”

대찬의 얼굴은 여유로웠다.

그가 한껏 여유로울 수 있는 건, 물론 자신의 이성적 판단이 있는 까닭이었다.

쵸 후쿠히로의 이번 투자는 확실히 한 김 빠졌다는 느낌이 역력했다.

지금까지 쵸 후쿠히로의 투자가 들어오면 북 치고 장구 치며 동네방네 소문을 내던 클로빌도 이번에는 차분하게 사실만 전달했다.

그리 자랑거리가 될 만한 일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4천억이라는 액수 자체도 애매했다.

현상유지나 부분적인 개선은 가능하지만 체질을 확 바꾸거나 필래를 상대로 엎어치기 한 판을 해낼 액수는 절대 아니었다.

대찬은 이런 판단을 뒷받침할 비이성적 증거도 갖고 있었다.

그 누구도 아니고 자신만 갖고 있는 증거였다.

대찬의 첫 번째 삶.

쵸 후쿠히로는 클로빌에 2조 원을 밀어 넣었다.

그게 이 즈음이었다.

한창 폭발적인 매출증가세를 보였으니 쵸 후쿠히로도 믿음을 갖고 자본을 투입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삶, 쵸 후쿠히로는 4천억 원을 투입했다.

액면만 놓고 보면 물론 거액이었지만 2조에 비하자면 ‘겨우’ 4천억이었다.

단순히 산술적으로만 계산해도 클로빌을 향한 쵸 후쿠히로의 신임이 4분의 1로 줄었다.

쵸 후쿠히로의 압도적인 자금지원에도 클로빌의 한국 유통업계 평정은 가능성이 반반이라는 얘기가 나오던 판이었다.

이 정도라면 클로빌의 성장판은 거의 닫혔다고 봐도 무방했다.

적어도 클로빌이 한국 시장을 독식하네 마네 하는 얘기는 쑥 들어가게 될 터.

산기슭에서 아웅다웅하는 업하우스나 샬롯마그넷이라면 모를까.

필래는 이미 한참 전부터 인프라를 다져 산 정상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적어도 당분간 필래에만큼은 클로빌이 큰 위협은 되지 않을 터였다.

우선 필래는 클로빌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던 태세를 조금 완화했다.

그간 필래 비바체 역시 그들 나름대로 무리를 하느라 상당히 지쳐있던 차였다.

대찬을 대신해 모든 잡무를 처리하던 허운의 얼굴이 점점 노랗게 뜨는 것만 봐도 알만 했다.

대찬은 이제 클로빌과의 공방전을 포함한 온라인 영역의 모든 업무를 다시 마트사업부문에 일임했다.

허운 역시 그동안 과중한 업무로 찌뿌듯해졌던 몸을 쫙 폈다.

“그래도 이제 한시름 놓은 거죠?”

“응,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따돌렸지. 비바클럽 회원수도 클로버클럽 회원수를 제법 큰 격차로 따돌렸고.”

“특히 비수도권에서 격차가 어마어마해요.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겠죠?”

“당연히.”

허운의 말대로 방심은 금물이었다.

하루아침에도 고꾸라지는 냉혹한 자본주의의 살얼음판이다.

그 판에서 영원한 안식을 기대하는 건 물 밖에 나온 물고기가 계속 숨 쉴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만큼 안일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물 밖에 건져진 무수한 고기들 중에 없던 폐를 만들어 폐호흡을 하는 수준의 기똥차게 대단한 고기가 아니면 모두 죽고 만다.

게다가 쵸 후쿠히로는 클로빌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클로빌의 명줄을 부지해놓다가, 필래가 삐끗하는 순간 바로 그 공백을 차지하려고 들 것이다.

긴장의 끈은 항상 명줄처럼 붙들고 있어야 했다.

그 긴장의 끈을 꼭 대찬 혼자서 쥐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대찬은 자신 몫의 긴장까지 슬그머니 마트사업부문에게 넘겼다.

허운도 그런 기색을 용케 눈치 챘는지, 대찬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준태 풀렸으니까 기념으로 한잔 하실래요?”

“으음…….”

대찬이 뜸을 들이자 허운이 눈을 흘겼다.

“솔직히 오늘은 갖다 댈 핑계도 없으시잖아요. 그냥 얌전히 한 잔 해요.”

대찬도 이날만큼은 만사 제쳐놓고 술이나 편하게 마시고 싶었다.

그는 허운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다.

그 찰나, 대찬의 휴대폰이 울렸다.

대찬은 대답을 미뤄놓고 허운에게 눈짓을 했다.

“잠깐만.”

그는 자리를 떠 조용한 곳으로 간 뒤에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필래와는 관련이 없는, 로튼 프룻츠에 관련된 전화인 까닭이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은오영 교수였다.

그는 서울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중림대 연구실에서 푹 썩어가고 있던 차였다.

오랜만의 연락에 대찬의 목소리에도 반가움이 묻어 나왔다.

“교수님, 오랜만이네요.”

“예, 잘 지내셨죠?”

“물론이죠.”

대찬의 귀에 들리는 은오영 교수의 목소리에 일견 고양된 기색이 있었다.

대찬은 그가 무엇이든 희소식을 전해줄 거란 기대감을 품었다.

그의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다.

“오늘 서울 올라가겠습니다.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오늘이요?”

갑작스런 말에 대찬의 동공이 커졌다.

“네, 선약 있으시더라도 오늘 뵙고 싶은데요. 가능하겠습니까?”

은오영 교수는 평소 대찬에게 절절매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그가 전례 없이 당당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그만큼 당당할 수 있는 건수가 있다는 뜻이었다.

대찬은 그 순간 허운과의 간단한 술 약속을 망각해버렸다.

“물론, 당연하죠. 시간 많습니다. 저녁에 뵙죠.”

“네, 오늘은 좀 비싼 데서 먹어요.”

은오영 교수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대찬의 가슴이 윤이영을 만난 이후로 오랜만에 설렜다.

대찬이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허운이 하던 말을 마저 했다.

“그럼 오늘 어디서 먹을래요? 해물찜에 소주 어때요. 다 먹고 밥 볶아서 마무리까지 크.”

“미안, 오늘 약속 있어.”

대찬의 야멸찬 말에 허운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약속이 없었는데요, 지금은 있어요.”

“지금 사람 놀려요?”

허운의 눈이 이글이글 불탔다.

대찬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건 아닌데. 암튼 오늘은 안 돼.”

“그래요. 그렇게 날 찬밥 취급 해. 나는 뭐 팀장님 아니면 술 한 잔 마실 사람 없는 줄 알아요?”

허운은 악에 받친 듯 말하고는 혁신경영팀 직원들을 향해 외쳤다.

“오늘 나랑 술 먹을 사람! 1차부터 n차까지 내가 쏜다!”

“…….”

너무나도 고요한 적막에 대찬이 다 민망해질 정도였다.

허운은 기세 좋게 들었던 손을 스르르 힘없이 내렸다.

“그냥 일할게요.”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의자를 책상 가까이 붙였다.

그런 처량한 모습에도 대찬은 끝끝내 동정심을 베풀지 않았다.

은오영 교수와 회포나 풀 요량이었다면 동석해도 무방했지만, 이 자리는 그런 단순한 자리가 아니었다.

로튼 프룻츠 대표의 입장에서 보자면 허운은 엄연한 외부인.

출입엄금이었다.

그날 저녁.

대찬은 급히 서울로 올라온 은오영 교수를 만났다.

그는 웃으면서 은오영 교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교수님, 아주 폭삭 늙으셨네요.”

“이게 다 누구 덕인데요.”

“누구 덕인데요?”

“우리 조 대표 덕이지.”

대찬은 피식 웃었다.

“그게 왜 저 때문이에요.”

“연구실에 틀어박혀 일만 하니까 사람이 이렇게 늙죠.”

“제가 시켰나요. 교수님이 자진해서 연구에 열중하신 거지.”

“아니, 이게 다 조 대표 때문이에요.”

대찬은 피식 웃었다.

“왜요?”

“어떻게 일탈 좀 해볼까 싶으면 서울에서 뭐가 자꾸 와. 새 장비가 오고 새 의자가 오고, 간식은 말할 것도 없고. 침대도 기가 막힌 걸로 보내셨대요?”

“집에 가지 말고 아예 연구실에서 살라고.”

“봐봐, 저런 말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하는 것 봐. 이런 악덕업주 같으니. 나중에 오동나무 관짝까지 짜주려나 몰라.”

“짜달라고 하면 짜드리고요.”

“어이구.”

은오영 교수의 어이구에는 진심이 묻어 나왔다.

대찬은 흐흐 웃으며 은오영 교수의 잔에 꼴꼴 소주를 부었다.

“근데 정말 소주로 되겠어요? 교수님 말씀하시는 거 들어보면 푹 묵은 양주라도 하나 까야 될 것 같던데.”

“난 입맛이 싸구려라 비싼 양주 줘도 맛 몰라요. 소주면 돼.”

“오호라, 그래도 양주 자실 정도의 희소식은 된다는 말씀이시네요.”

은오영 교수는 대찬을 보며 씩 웃었다.

그는 먼저 말없이 잔을 내밀었다.

챙, 잔을 부딪치고 쓰고 단 것으로 속을 한번 저릿하게 만든 다음에 그는 입을 열었다.

“연구실 입봉작이 나왔습니다.”

“입봉작이라니.”

은오영 교수는 대찬을 흘끗 보며 잠깐 웃고는, 상자 하나를 꺼냈다.

작은 상자에는 아이스팩이 들어 있었고, 그 아이스팩들은 붉은빛의 물체를 감싸고 있었다.

붉은빛의 물체는 고기였다.

척 봐도 선홍빛이 선명한 쇠고기였다.

대찬의 눈이 커졌다.

“설마.”

“네, 설마가 그 설마입니다.”

“성공하셨어요? 실험실 고기?”

“네, 일단 당장의 이 100g이 전부이지만요.”

대찬은 은오영 교수가 가져온 쇠고기 100g을 감격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봤다.

“이야, 이게 실험실에서 만든 고기란 말이죠. 사료도 없이, 도축도 없이 그냥 세포에 전기 자극을 줘서 만든.”

“예, 맞습니다. 드셔 보시렵니까?”

“그래도 돼요?”

“물론이죠. 항생제 걱정도 없는 진짜 청정육입니다. 즉석에서 육회로 썰어 드시죠.”

“근데 이거, 여기서 우리 둘이 먹어도 괜찮은 거예요? 귀한 건데.”

“먹어도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대표님이 드셔야 할 고기입니다.”

대찬은 은오영 교수의 말이 고마워서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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