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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55화 (355/556)

난 할 수 있어 355화

“죄송 필요 없다고. 아니, 그냥 말이 필요 없어!”

“…….”

“필래가 저렇게 나올 거 예상 못했어?”

“준비한다고 하고 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시답잖은 변명은 대표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화만 더 돋웠다.

“어퍼컷을 못 날릴 거면 잽이라도 날리란 말이야. 잽도 못 날릴 거면 가드라도 올려! 가드 풀린 채로 하루 웬 종일 쳐 맞기만 하는 거 안 지겹니? 난 지겨워!”

“대응책을 빨리 마련하겠습니다.”

“지금 내 앞에 들이밀어도 늦어도 한참 늦은 건데 빨리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니? 염치도 없어라.”

“죄송합니다.”

“너, 나랑 예일대 다닐 때는 그렇게 똘똘했잖아. 근데 여기서는 왜 개판이야? 뭐가 문젤까?”

“…….”

“안 되겠다. 넌 일단 영업 쪽으로 빠져. 아는 인맥, 모르는 인맥 다 동원해서 어떻게 좀 해보라고.”

“…알겠습니다.”

한바탕 화를 내던 대표는 앞머리를 뒤로 넘기고 후, 숨을 깊게 내쉬더니 김 이사에게 말했다.

“아니다. 너 좀 쉬어라. 아무래도 요즘 너무 바빠서 잘하던 것도 못하는 거 같아. 한 사흘 휴가 줄 테니까 쉬다 와.”

“괜찮습니다.”

“쉬다 와. 너 계속 덜 떨어진 폼으로 우왕좌왕하는 거, 오히려 회사에 마이너스야. 재충전하고 돌아와서 빡세게 구르라고.”

“…알겠습니다.”

대표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마른세수를 하고는 휘휘, 건성건성 손짓을 해서 김 이사를 내보냈다.

대표실에서 나온 김 이사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김 이사는 나흘 간 말미를 얻어 고향, 전북 부안으로 내려갔다.

오랜만에 얼굴을 비춘 아들을 부모님은 살갑게 맞았다.

뼈 빠지게 뒷바라지한 보람이 있게, 아들은 예일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마흔도 안 된 나이에 이사님 소리를 듣고 있었다.

김 이사 부모님의 팔불출 아들자랑은 동네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제 자식 자랑만 하는 것도 꼴불견인데 걸핏하면 남의 자식들을 걸고넘어져 비교를 하고 폄하를 했다.

그러니 이웃들도 김 이사 부모가 떴다 하면 슬금슬금 피했다.

부모님은 버선발로 그를 마중하고는 대견한 듯 등을 쓸었다.

“아이고, 바쁜데 어떻게 왔냐.”

“한 사나흘 여기 있을 거예요. 일 잘한다고 포상휴가 받았어요.”

“어휴, 역시 내 아들이다. 세상 어느 직장인이 잘한다고 포상휴가를 받겠어, 군인도 아니고.”

아버지 역시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하다, 장해! 오늘 우리 김 이사 오랜만에 집에 온 기념으로 마을잔치나 열까? 돼지 한 마리 잡아?”

“…아녜요. 그냥 조용히 푹 쉬다 갈게요.”

“그래, 그게 좋겠다. 있어봐. 우리 아들 온다고 해서 아들 좋아하는 클램차… 뭐더라?”

“클램차우더요. 조개 스프.”

김 이사의 ‘스프’ 발음은 미국 물 먹은 걸 증명이라도 하듯 스프가 아니라 ‘수웁’이었다.

“아, 그래. 클램 차우더. 그거 해놨다. 먹고 몸 좀 데워라. 환절기라 아직 쌀쌀하다.”

“어머니가 클램차우더를 어떻게 하셨어요. 통조림이면 안 먹어요. 입맛에 안 맞아.”

“걱정 마라. 통조림 아니다. 직접 만들었어.”

그러자 김 이사는 얕게 한숨을 쉬며 어머니에게 따지듯 말했다.

“어머니가 미국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그걸 끓여요? 미국사람이 김치찌개 끓이면 그게 맛있겠어요? 레서피는 어디서 구하셨을 것이며, 재료는 또 어디서 구하시냐고요.”

“너무 그러지 말아라.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했으니까. 재료는 인터넷으로 시키면 뚝딱이고 조리법도 거기 잘만 나와 있지. 네 동생이 다 해줬다.”

동생 얘기가 나오자 김 이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 새끼 아직도 엄마 집에 빌붙어 살아요?”

“아유, 쟤도 사람이다. 말끝마다 새끼, 새끼 하면 기분이 좋겠니.”

“차라리 가축이었으면 어디다 팔아먹기라도 하지. 저건 밥만 축내고 쓸모가 없잖아요.”

“아유, 아서라, 아서.”

김 이사는 동생이 있는 방 쪽을 째려보고는 코끝에 스치는 익숙한 향기에 어머니를 바라봤다.

“냄새는 그럴듯하네요.”

“그렇다니까? 앉아라. 뜨끈하게 속 데우고 푹 쉬어.”

정말 어머니가 내온 클램차우더는 김 이사가 유학시절 먹던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김 이사는 그걸 한 술 뜨려다가 어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저 내려온다고 어제 말씀드렸는데 어떻게 재료를 하루 만에 구하셨어요?”

“응? 네 동생이 어제 시켰더니 오늘 왔던데.”

“그래요? 이상하네. 야! 김상혁! 나와봐.”

“아유, 한 그릇 뜨고 부르지, 뭐가 그렇게 급해.”

김 이사는 어머니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목청을 높였다.

“김상혁! 나오라고!”

형의 거듭된 성화에 동생 김상혁은 짜증이 잔뜩 돋친 얼굴로 방에서 기어 나왔다.

겨울잠에서 방금 깬 불곰처럼 어기적어기적 권태로운 걸음이었다.

“아, 왜.”

“너, 이거 어디서 샀어.”

“인터넷에서 샀다고 엄마가 말했잖아.”

“그러니까 인터넷 어디.”

“내가 그런 거 일일이 기억했다가 형한테 말해야 돼?”

김 이사는 틱틱대는 동생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동생과 더 말을 섞지 않았다.

탁, 숟가락을 탁자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가 김 이사에게 물었다.

“왜 안 먹고.”

“잠깐만요.”

그는 동생 김상혁에게 찌릿 눈총을 한번 쏘고 집 뒤편으로 향했다.

재활용품을 모아놓는 자리였다.

그는 거기에 쌓인 상자들을 보고 눈에 핏발이 섰다.

뒤따라온 어머니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저게 다 뭐예요?”

“응? 뭐가 말이냐?”

“상자들이요. 왜 필래 로고 찍힌 상자들이 저렇게 쌓여 있느냐고요.”

아들의 노기가 심상치 않자, 어머니는 급히 둘러댔다.

“상혁이가 시켰다. 난 모른다.”

“야! 김상혁!”

“왜!”

“너 사춘기냐? 반항해?”

“뭐?”

“반항이 아니면 그냥 눈치가 없는 거냐? 나이도 서른 다 처먹은 게 백수질 할 거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내 회사 어딘지 뻔히 알면서 필래에다가 돈을 써?”

그러자 김상혁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엄마가 당장 싸가지 없는 형 새끼 먹일 조개수프 재료 시켜달라는데 어디서 시켜?”

“뭐?”

“이 부안 촌구석에 오늘 시키면 다음 날 갖다 주는 회사가 필래 말고 또 있으면 말을 해봐.”

“…….”

“클로빌은 여기 배송도 안 해주던데. 지네 회사가 일처리 개판으로 해놓고는 누구한테 와서 시비를 털어.”

“이 새끼가…….”

김상혁은 김 이사를 있는 대로 비꼬았다.

“왜 필래가 하는 걸 형네 회사는 못해? 쵸 후쿠히로한테 잔뜩 돈 땡겨 받았다고 광고란 광고는 있는 대로 하더니.”

“필래는 SSM을 전국 각지 재래시장에 쫙 깔아놨어. 이런 촌구석까지 배달해줄 기지를 재래시장 안에 심어놓은 격이라고. 그러니까 필래는 그게 가능한 거고 우리는… 에휴,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 월 200도 못 벌어서 부모님 집에 기생하는 너한테 얘기해 봤자지.”

한 방 맞은 동생 김상혁은 곧바로 응수했다.

“그렇게 잘 알면서 왜 필래한테 맞고만 있어?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입 하나는 잘 털지. 입만 잘 털어서 문제지만.”

“야!”

오랜만에 건수를 잡은 김상혁은 실컷 이죽댔다.

“일 잘해서 포상휴가 받았다고? 인터넷 보면 지금 클로빌 개박살 나고 있다고 하던데 포상휴가 받을 상황인가, 지금이? 형 전략담당이라며. 혹시 회사 잘린 거 아냐?”

“이 새끼가 진짜!”

김 이사는 주먹을 휘둘렀다.

동생도 가만히 맞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두 형제는 갑자기 얽혀서 몸싸움을 시작했다.

공부는 형보다 못해도, 부모님을 도와 농사에 힘을 보탰던 김상혁은 이른바 ‘생활근육’을 갖고 있었다.

형의 기습공격에 주춤하던 그는 이내 형 김 이사를 깔아뭉개고 주먹을 꽂으려고 했다.

그제야 어머니가 급히 달려들어 아들을 떼어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둘이 그만두지 못해!”

김상혁은 형에게 눈을 흘기고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김 이사는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쌕쌕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무너진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진득한 침을 마당에 뱉었다.

‘젠장, 필래 이 개 같은 놈들이 이제 남의 집구석까지 망치네.’

그는 한참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김 이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 받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대표의 번호가 찍혀 있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전화를 받았다.

받자마자 대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너 지금 어디야.”

“예? 지금 본가에 와있는데요. 부안.”

“에이 씨, 언제 그렇게 또 멀리 갔어!”

“왜 그러세요?”

“당장 올라와!”

이런 미친놈이!

김 이사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던 험한 말을 간신히 삼켰다.

누구 똥개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 기껏 휴가를 줬다가 하루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오란다.

김 이사는 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

“무슨 급한 일 생겼습니까?”

“없으면 이러겠냐. 다섯 시간 후에 쵸 회장 온단다. 바로 PT 준비해야 돼.”

“예? 쵸 회장이요? 한국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들어옵니까?”

“낸들 아냐. 산신령 같은 인간이라. 암튼 빨리 와. 네가 PT 맡아서 해야 돼.”

“제, 제가요?”

“이 회사 제일 잘 아는 게 김 이사 아니야. 막 교체된 사람이 뭘 알겠어. 중요한 PT야, 알지.”

“…네.”

“긴말 할 여유 없어. 바로 올라와.”

대표는 그렇게 이르고 전화를 끊었다.

김 이사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게 말이나 되냐고 투정부릴 계제가 아니었다.

회사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

쵸 후쿠히로 회장의 지갑에서 최대한 많이 뜯어내는 것만이 능사였다.

그러려면 그에게 클로빌의 확실한 비전을 보여줘야만 했다.

자신의 어깨가 무거웠다.

김 이사는 바로 집으로 들어가 외투를 챙겼다.

“어머니, 아버지, 저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바로 올라가야 돼요.”

“뭐? 얘, 밥이라도 한 술 뜨고 가라.”

“그럴 시간 없어요. 또 올게요.”

김 이사는 그렇게 말하고 바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어머니는 힘없이 집 안으로 들어와 식을 대로 식어 거의 찹쌀 풀처럼 엉겨 붙은 클램차우더를 떠먹었다.

김 이사는 급거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쵸 후쿠히로 회장이 도착하기까지 겨우 20분 남짓 남은 상황이었다.

클로빌 직원들은 초긴장 상태였다.

대표는 김 이사의 어깨를 급히 붙잡았다.

“오늘 자리 중요한 거 말 안 해도 알지.”

“예, 알아요.”

“그래, 잘하자.”

대표는 그렇게 말하고 쵸 후쿠히로 회장을 영접하기 위해 본사 1층으로 급히 내려갔다.

그의 등 뒤로 임직원들이 우르르 따라붙었다.

명색이 스타트업인데, 의전만큼은 삭고 삭은 대기업을 그대로 흉내 냈다.

김 이사는 한숨을 한번 쉬고 부하 직원에게서 발표자료를 넘겨받았다.

많지도 않은 자료를 숙지하고 또 숙지했다.

그러는 사이, 쵸 후쿠히로 회장이 탄 차량이 빌딩 앞에 멈춰 섰다.

그는 대표의 환대를 받으며 하차했다.

간단히 목례만 하고,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뒤를 따르는 대표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이 말 저 말 걸어봤지만 쵸 후쿠히로는 묵묵히 엘리베이터의 올라가는 층수만 바라봤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띵,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쵸 후쿠히로는 저벅저벅 대회의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체구가 작음에도 존재감만큼은 어느 누구보다 컸다.

클로빌 임직원 전원이 쵸 후쿠히로를 중심으로 해서 부채꼴로 도열했다.

쵸 후쿠히로는 짧은 한국어로 말했다.

“클로빌이 큰 어려움에 직면해있어요. 맞죠?”

“예, 그러나 이건 단기적인 위기에 불과합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저희가 기술혁신과 유연한 사고를 통해…….”

대표의 말이 길어지려고 하자 쵸 후쿠히로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는 짧게 지시했다.

“봅시다.”

그러자 대표가 김 이사에게 눈짓을 했고, 김 이사는 부랴부랴 연단 위로 올라섰다.

쵸 후쿠히로는 손을 가만히 모으고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로 김 이사의 발표를 들었다.

김 이사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는 최선을 다했다.

발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논거는 합리적이었다.

이거라면, 쵸 후쿠히로의 지갑을 쉽게 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발표가 끝나고 돌아오는 쵸 후쿠히로의 말은 그의 바람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재미가 없습니다.”

“…….”

“내가 클로빌에 투자하기로 결정한 건 재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쵸 후쿠히로는 옆에 앉은 대표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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