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53화
“한번 논의해봄직한 의견입니다. 위마트와 손을 잡는 건 다소 위험할 수 있습니다만, 샬롯마그넷과 업하우스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거든요.”
“네, 저도 긍정적입니다. 위마트와 달리 두 회사는 오프라인 대형마트 사업에 집중하기도 버거워하고 있으니까요.”
“온라인에서 파이가 커진다 한들 우리를 제치긴 어려울 겁니다.”
대찬은 김풍호 전무의 말에 공감했다.
“우리는 택배사업부도 보유하고 있어서 인프라 측면에서 이미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샬롯, 업하우스가 온라인 시장을 아예 저버릴 순 없는 입장.”
“우리 제의를 확 뿌리치기도 어렵겠군요.”
김풍호 전무는 자신의 말을 제깍제깍 알아듣는 대찬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나이 차이가 차이니만큼 흡사 아들을 대견스러워 하는 아버지 같기도 했다.
“그럼 이 건, 제게 일임해주시는 겁니까?”
“아유, 무슨 말씀을. 전무님이 하시겠다면 하시는 거죠. 저는 어디까지나 보조입니다.”
“최종결정은 대표님이 하시겠지만 지금까지 조 부장 말을 거스르진 않으셨잖아요. 조 부장 뜻이 대표님 뜻이지.”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그렇다고 하기엔 당장 전무님이 여기 오시게 된 것도 제 의견 무시하고 밀어붙이셔서 도 전무가 날아간 결과라.”
“그래도 이 건에 있어서만큼은 조 부장을 전적으로 신뢰하실 겁니다. 그럼 조 부장이 오케이 사인 줬으니 추진은 해보겠습니다.”
“좋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한참의 대화 끝에 결론이 나자, 동석한 마크 콜먼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둘에게 물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신 겁니까? 하나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제야 대찬과 김풍호 전무는 푸른 눈의 외국인을 앞에 앉혀놓고 한참을 한국어로 떠들어댔다는 걸 인지했다.
둘의 머쓱한 웃음만 보고도 마크 콜먼은 상황을 인지했다.
“한국어 과외선생을 구해야겠군요.”
그렇게 CTO의 의견을 구하지도 않은 채 중차대한 일이 결정되었다.
대찬은 김풍호 전무의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전술은 대찬에게도 낯설지만은 않았다.
대찬이 수유점 점장으로 근무했을 때 구사했던 것과 본질은 같았다.
대찬은 당시 위마트와 손을 잡고 경쟁업체인 업하우스를 압박하여 마침내 점포를 철수시킨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김풍호 전무의 생각에 논리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김풍호 전무는 행동력이 좋은 편이었다.
그는 바로 샬롯마그넷, 업하우스 측과 접촉했다.
둘 중 먼저 필래 비바체의 손을 잡은 건 업하우스였다.
업하우스의 대표는 차재원.
그의 임기는 2년이 채 안 남아있었다.
필래 비바체와의 제휴는 당장 모양새 좋은 파격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
그게 장기적으로 이득이 될지 손해가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까놓고 말하자면 고작 임기가 2년 남은 차재원 대표에게는 알 바 아니었다.
그의 지상과제는 임기 만료 후 더 높은 연봉을 받고 다른 회사로 이직하는 것.
필래 비바체의 제안은 좋은 조건의 재취업만을 노리는 차재원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결과가 드러날 때쯤이면 이미 차재원 대표는 이직에 성공해있을 테니까.
업하우스가 움직이자 샬롯 마그넷도 부랴부랴 필래 비바체의 손을 잡았다.
이미 춘추전국시대 같은 대형마트 시장에서 후순위로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도토리 키 재기로 아웅다웅하던 업하우스가 필래 비바체의 등에 업히기로 결정했다.
그러니 샬롯 마그넷 역시 시류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협상의 성공에는 김풍호 전무의 개인기도 한몫했다.
전 직장에서 ‘친일파’ 같은 모욕적인 별명으로까지 불릴 정도로 타사와의 제휴에 적극적이었던 그였다.
그런 만큼 경쟁업체 요인들과의 교분이 제법 두터웠다.
김풍호 전무는 차재원 대표와 커피 한 번, 술 한 번 마시고 제휴를 성사시켰고 샬롯 마그넷과는 밥 한 끼에 성사시켰다.
클로빌의 떡잎을 밟기 위한 반 클로빌 연합이 결성되었다.
일이 결정되자마자 차재원 대표는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 버릇 남 못 주시네.”
“대표님, 억울하네요. 제 아이디어가 아니라 김풍호 전무님 아이디어입니다.”
“그래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랐지 뭡니까. 크게 데인 경험이 있어가지고.”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도 지금은 자라든 솥뚜껑이든 대표님이 이쪽이십니다.”
“필래에서 뺨 맞고 클로빌에 화풀이하겠네요.”
“화풀이를 하실 거면 확실하게 하셔야죠. 적극적으로 연대했으면 합니다.”
“어차피 큰 떡은 필래가 먹고 우리는 콩고물이나 손가락으로 찍어 먹는 수준이라. 큰형님인 필래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죠.”
“업하우스가 큰형님이라고까지 해주시니 감사합니다만, 저희도 그냥 원 오브 뎀일 뿐입니다. 다만 저희가 먼저 제안한 만큼 성의 표시는 확실히 하겠습니다.”
“잘해보자고요.”
“예, 대표님.”
* * *
마크 콜먼 CTO와 업하우스, 샬롯마그넷의 기술총괄이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손을 맞잡았다.
명목상은 세 회사의 상생을 도모하고 고객에게 더 편리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제휴였다.
그러나 그걸 간판 그대로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위마트는 티끌 모아 티끌이다, 콧방귀를 뀌며 애써 외면했다.
그들은 온라인 시장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진 못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오프라인에서의 탄탄한 입지를 기반으로 저 불미스러운 연합을 돌파해내겠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위마트와는 달리 클로빌은 바짝 더듬이를 세웠다.
필래를 필두로 한 세 회사의 연합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클로빌은 갈 길이 멀었다.
위마트야 애초에 본진이 오프라인 시장에 있었다.
덕분이 온라인 시장에서 고군분투하지 않아도 사정이 좀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클로빌은 온라인이 전부였다.
온라인 시장의 차원을 높여 무주공산에서 뛰어놀겠다는 계획이었는데, 대뜸 필래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쵸 후쿠히로에게 구애의 춤을 추며 자금을 공급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서로 제 갈 길만 봐도 바쁜 와중에 필래가 발목을 낚아채고 나서니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클로빌에도 비상이 걸렸다.
지금껏 언론을 전혀 활용하지 않던 그들은 3사의 데이터 공유 선언에 즉각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독과점 기업들이 후발주자의 진입을 막은 실질적인 담합행위, 소비자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 생각보다 반응이 센데요?”
허운이 클로빌 측의 보도자료를 입수해 대찬에게 내밀었다.
대찬은 그걸 받아 몇 줄 읽지도 않고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저만치 밀었다.
허운의 입으로 전달된 내용만 해도 클로빌의 입장이야 충분히 짐작했다.
대찬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으니까. 이 정도면 얌전한 축이지, 뭘.”
“그래도 대응을 하긴 해야죠?”
“어쨌거나 대중의 시선에서 보면 우리는 대기업이고 클로빌은 스타트업이야. 법적으로는 당연히 담합이 아니지만 심정적으로는 그렇게 볼 수도 있어.”
“그럼 아무 반응도 내보내지 말자고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저쪽에 장작을 넣어줄 이유는 없지. 다만.”
“다만?”
“이대로 여론이 클로빌 쪽에 긍정적이도록 둘 수는 없어. 매출에 큰 변화가 있지는 않겠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브랜드 이미지도 상당히 신경 쓰는 편이니까.”
“그렇죠.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데요?”
대찬은 허운을 흘끗 바라봤다.
“이번에는 좀 치사하게 하려고.”
“이미 팀장님 치사한 건 도 전무 처리할 때부터 알아봤어요. 그렇게 괜히 찔려서 일일이 말 안 하셔도 된다고요.”
대찬은 입술을 한번 삐죽이고 말을 이었다.
“암튼 그럴 거라고.”
“어떻게 대응하시게요. 회사 홍보실 통해서요?”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건 정공법이지 치사한 수가 아니니까.”
“그럼요?”
“이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허 과장은 신경 끄세요.”
저쪽에서 언론을 이용했으니 이쪽에서도 언론을 이용해주기로 했다.
대단한 비리나 꽁꽁 감춰두었던 비밀을 들춰낼 것도 없었다.
저쪽에서 필래 이하 3사를 싸잡아 부도덕한 기업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따지자면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반론할수록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차라리 나쁜 놈이라는 걸 인정하고 상대방도 똑같은 놈으로 만드는 편이 편리했다.
2019년까지 살아왔던 대찬은 클로빌의 맹점을 알고 있었다.
구태여 필래유통에 몸담으면서 클로빌을 연구했던 걸 써먹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당시 언론에서 회자되던 것만 몇 개 툭툭 던져주면 그만이었다.
그 정도로만 해도 고결한 학처럼 구는 클로빌의 하얀 티셔츠에 흙탕물을 튀길 수 있었다.
대찬은 최재한을 통해 클로빌에게 흙탕물을 묻혔다.
대찬이 최재한을 여러 해에 걸쳐 하도 못살게 군 탓으로, 이제는 최재한의 이름으로 마냥 기사를 내보내기 머쓱한 상황이었다.
이제는 최재한도 어엿한 중견급의 기자였다.
거느린 후배도 많았고, 각 언론사, 방송사에 알고 지내는 얼굴들도 당연히 많았다.
최재한은 대찬의 부탁을 초과달성해주었다.
대찬은 가벼운 단신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런데 최재한에게서 아이템을 얻어간 한 종편기자가 이를 제법 거하게 다루기로 했다.
그는 아예 시간을 뭉텅이로 빼서 앵커 대담 코너에까지 아이템을 올렸다.
제목은 ‘온라인 유통대전, 빛과 그림자’ 정도로 잡았다.
앵커와 기자가 말을 주고받았다.
-클로빌이 강점으로 내세우는 빠른 배송.
그 비결은 바로 물건을 직접 배송하는 것입니다.
다른 온라인 유통업체들처럼 택배업체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택배업체의 역할까지 소화해냅니다.
전국 각지에 배송기지를 건설하고, 택배원들도 직접 고용하고 있습니다.
클로빌이 직고용한 택배원들은 ‘클로버’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클로빌은 이 클로버들이 고객에게 누구보다 빨리 행복을 전하는 전령사라며 광고합니다.
그러나 이 편리함의 이면에는 클로버들의 고충이 있습니다.
네잎클로버를 찾느라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세잎클로버처럼 그들의 삶은 막중한 노동의 무게에 짓눌려 있습니다.
뉴스는 클로빌의 택배원들이 얼마나 모진 고초를 겪고 있는지 구구절절한 사연을 화면으로 내보냈다.
“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되는데.”
화면을 보던 대찬은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종편은 서비스 정신이 투철했다.
그들은 모자이크를 하고 음성변조를 한 현직 클로버의 입을 통해 필래를 한 번 띄워주기까지 했다.
-필래도 익일배송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지만, 여기보다는 형편이 좀 나아요. 대기업이라 그런가…….
그렇게 말하는 클로버의 목소리가 어색했다.
기자의 코치를 받은 게 분명했다.
대찬은 그걸 보고 기쁘기보다는 되레 불쾌했다.
‘촌스럽잖아.’
무엇이든 은은하고 은근해야 하는 법이다.
밥 한 끼를 사고 술 한 잔을 사는 일만 해도 그렇다.
산다, 산다 호들갑을 떨면서 그러는 것과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일어나 몰래 계산을 하고 오는 것은 천지차이다.
저 기자는 청탁을 들어주긴 들어주되 온갖 호들갑을 다 떨고 있었다.
다음부터는 이용하지 말아야겠다고 대찬은 생각했다.
그래도 종편의 저 촌스러움이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다.
적어도 클로빌이 필래 이하 3사에게 왁왁거리면 ‘너는 뭐 얼마나 깨끗하고 잘났다고 그러느냐’, 하며 피장파장으로 무마할 수준은 되었다.
샬롯마그넷, 업하우스와의 데이터 공유.
그리고 애들 흙 던지기 같은 소소한 여론전.
대찬은 그런 국지전으로 클로빌과의 전쟁에 임할 생각은 아니었다.
전초전에 불과했다.
필래와 클로빌의 전운이 무르익자 대찬은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섰다.
대찬은 김풍호 전무와 마주 앉았다.
“우리가 클로빌보다 몇 해 앞서서 지금의 상황을 준비했기 때문에, 인프라와 노하우 면에서는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대찬의 말에 김풍호 전무도 공감했다.
“현재 상황으로는 그렇죠. 쵸 후쿠히로 발 자금이 얼마나 유입되느냐가 변수긴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우리가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 있어요.”
“네, 그래도 클로빌이 앞선 부분들도 있죠. 저는 이 부분마저도 모두 따라잡고 싶습니다. 우위를 점하진 못해도 최소한 동급은 되게요.”
“데이터 활용 측면에서는 이미 손을 썼고, 여론전이야 미풍에 불과하니 제쳐놓고.”
“재밌는 시도들을 많이 하던데요. 그거 죄다 베껴올 생각입니다.”
“미투(me too) 전략인가?”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샅샅이 다 베낄 거예요.”
“미투 전략은 이제 고전 반열에 들 정도로 안 하면 이상한 게 돼버렸지만 조 부장 입에서 나오니까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는데요?”
“예? 왜요?”
김풍호 전무는 푸근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