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52화
대찬은 웃으면서 그에게 응수했다.
“저희도 클로빌 때문에 간담이 서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여전히 경계대상 1호입니다.”
“과한 예의는 도리어 예의가 아니라고 했어요. 아주 깔보는 것처럼 들린단 말이에요.”
“그랬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실인 걸요.”
“립 서비스도 어쩜 그렇게 얼굴색 하나 안변하고 천연덕스럽게 하시는지.”
“립 서비스가 아니니까 이러는 겁니다. 회장님 눈을 어떻게 속이려고요.”
그러자 쵸 후쿠히로는 기분 좋게 웃었다.
“괜히 말꼬리 잡아봤자 나만 손해겠군요. 아무튼 우리도 필래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동시에 조대찬 부장, 당신도 예의주시할 겁니다.”
“감사한 일이지만 저는 그 정도의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서원웅 대표라면 모르겠지만요.”
“조 부장의 가치가 있고 없고는 내가 판단합니다. 그것까지 개입하진 말아요. 필드업도 조 부장 아이디어라면서요?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좋은 수였어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언젠가 꼭 조 부장과 함께 일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필드업이 성공하면 그 욕심은 더 커지겠죠.”
대찬이 쵸 후쿠히로와 처음 보던 날.
그때도 쵸 후쿠히로는 비슷한 얘기를 대찬에게 건넸다.
그때의 대찬은 예의를 차리면서도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찬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쵸 후쿠히로는 씩 가로로 벌어지기만 하고 가타부타 얘기하지 않는 대찬의 입술을 흘끗 보고는 미소를 머금었다.
“자,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또 볼 일이 있겠죠.”
“예, 또 뵙겠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쵸 후쿠히로는 대찬에게 한 번 더 악수를 청했다.
대찬은 그의 손을 잡았고, 대찬의 옆에 있던 윤이영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쵸 후쿠히로는 윤이영을 보고서도 한 마디 남겼다.
“윤이영 씨, 팬입니다. 꼭 나중에 제가 투자한 영화에 모시겠습니다. 절대 거절 못할 개런티를 걸고 말이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회장님.”
윤이영도 얌전히 미소를 지었다.
쵸 후쿠히로는 느끼하게 찡긋 윙크를 했다.
대찬, 윤이영, 쵸 후쿠히로.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은 흔치 않은 광경에 탄성을, 개중에 주책맞은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게 필드업 하남은 환호성 속에서 영업을 개시했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소위 ‘오픈빨’을 감안하더라도 쾌조의 스타트였다.
주말에는 주차장에 차 대는 것만 해도 한세월이었고, 평일에도 인파로 북적였다.
이대로라면 현재 추진 중인 다른 지역의 필드업 2호점, 3호점도 급물살을 타고 추진해봄직 하다는 그룹 경영진단실의 평가도 있었다.
서원웅은 대찬을 불러 자축했다.
“다 네 덕이야. 이걸로 회사가 한 차원 더 발전했어. 말 그대로 2.0이야.”
“아직 그렇게 확신하긴 일러요. 1년 정도는, 길게는 5년까지는 두고 봐야 하니까.”
서원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래도 이 정도면 자축의 샴페인은 아니어도 안도의 한숨 정도는 내쉬어도 괜찮잖아?”
“그건 그렇죠.”
“내심 불안한 마음이 있었거든. 한두 푼 들어가는 사업이 아니었으니까.”
“사실 이거 쫄딱 망했으면 저 옷 벗는 정도로 안 끝났죠. 회사가 기우뚱거렸을 테니까. 아마 단순히 회사에 피해 끼친 걸로만 치면 도진석 그 이상이었을 거예요.”
“조 부장만 옷 벗었겠어? 나도 휘청거렸겠지. 잘된 마당에 쓸데없는 가정이긴 하지만.”
“그건 그래요.”
대찬은 서원웅의 말처럼 당장의 호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안주할 생각은 없었다.
유통업계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가 점점 뚜렷해지고 있었다.
그 뚜렷해지는 양상은 온라인 시장의 성장에 기인했다.
지금까지의 온라인 시장은 아기 같았다.
포대기에 싸여 엄마 등에 업힌 아기.
근데 그 아기가 포대기에서 내려와 걸음마를 떼더니 훌쩍 자라났다.
키가 엄마 어깨만큼 자랐다.
잘 먹고 자란 아이는 적어도 어머니와 비슷하게 자랄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보다 훌쩍 더 커질지도 몰랐다.
필드업의 성공은 오프라인의 성공이지 온라인의 성공이 아니었다.
대찬은 자세를 조금 편하게 하며 서원웅에게 말했다.
“이걸로 우리가 위마트, 샬롯마그넷, 업하우스보다는 최소한 한 보 앞서게 됐어요.”
“그쪽에서도 부랴부랴 부지 알아보고 삽 뜰 준비를 한다더라구.”
“네, 그쪽도 자본이 충분하고 오프라인 시장에서의 관록이 충분하니까요. 그런데 온라인은 그렇지 않죠.”
서원웅은 팔짱을 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온라인은 오리무중이니까. 양상이 어떻게 될지 선뜻 예측할 수 없어.”
“위마트와 기타 등등도 온라인 시장에 뛰어들긴 했지만 오히려 지금까지 쌓아온 걸 잃을까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하고요.”
서원웅은 대찬이 말하는 바를 눈치챘다.
“온라인에서는 클로빌이 마음에 걸린다는 거지?”
“네, 필드업 개장식에 쵸 회장이 직접 온 거 보셨죠?”
“응, 이쪽을 상당히 신경 쓰고 있다는 신호겠지.”
“필드업 같은 대형복합쇼핑몰은 쵸 회장이 밀어주는 클로빌의 영역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석했다는 건.”
“우리가 온라인 시장에 쏟아부을 실탄을 필드업을 통해 확보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걸 보기 위함이겠죠.”
“그쪽도 대충 감은 잡고 있겠지?”
“네, 이쪽에서 충분한 수익이 창출될 것이고, 그 수익이 클로빌에 맞설 보급물자라는 것까지 파악했겠죠.”
“지금까지 클로빌이 제대로 기를 못 펴왔던 건 사실이야. 근데 지금부터가 문제겠지.”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쵸 회장이 클로빌을 쥐고 있는 이상, 피 튀기는 경쟁은 불가피해요.”
“우리가 클로빌을 확 눌러버리면, 쵸 후쿠히로도 클로빌에서 철수할까?”
“네, 할 거예요. 쵸 후쿠히로가 클로빌을 밀어주는 건 여러 이유가 있다고는 하죠. 그래도 아예 가망 없는 사업을 그 사람도 더 쥐고 있진 않을 겁니다.”
“선택의 기로에 섰네. 자원은 한정적이야. 오프라인과 온라인 양쪽에 모두 주력할 수는 없어.”
“그렇죠.”
서원웅은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만일 클로빌과 진검승부를 벌이겠다면, 지금 올라온 필드업 5호점부터의 계획은 전면 백지화해야 돼.”
“맞습니다.”
“조 부장 의견은?”
대찬은 고민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오프라인 시장은 다 자란 사자들과의 싸움입니다. 온라인은 아니죠. 클로빌은 아직 갈기도 안 난 새끼사자예요.”
“그 새끼사자는 쵸 후쿠히로가 주는 먹이 먹으면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고?”
“네, 갈기 나기 전에 목을 잘라야죠.”
서원웅은 의자의 팔걸이를 주먹으로 가볍게 퉁, 쳤다.
“좋아. 그럼 일단 클로빌부터 고꾸라뜨리고 보자고.”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대찬은 첫 번째 삶에서 클로빌의 목덜미에 갈기가 돋는 걸 지켜봤다.
그가 몸담고 있던 필래유통은 자라나는 사자의 발톱에 제대로 상처를 입었다.
당시 필래유통은 백화점과 택배를 주력으로 삼고 있었다.
백화점은 대형마트에 비해 온라인 시장의 영향을 적게 받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클로빌의 엄청난 성장은 필래백화점이 체감할 정도의 파장으로 다가왔다.
당시의 위마트, 샬롯마그넷, 업하우스는 클로빌의 성장에 맥을 추리지 못했다.
더불어 클로빌이 직접 택배기사들을 직고용해 자사의 제품을 배송하자 필래택배 역시 타격을 입었다.
당시 필래택배는 업계 3위.
그러던 것이 클로빌의 대두로 업계 4위로 한 단계 떨어진 경험도 있었다.
클로빌은 급속 성장으로 업계 공룡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도 감당해야만 했다.
매출은 어마어마한 증가폭을 보였지만 적자의 증가폭 역시 그만큼 어마어마했다.
자칫 그들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듯한 양상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도 성장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쵸 후쿠히로 회장의 전폭적인 자금지원 덕택이었다.
때문에 클로빌의 성장은 곧 클로빌의 적자를 의미했다.
그 당시에도 낙관론과 비관론이 동시에 제기되었다.
대찬은 첫 번째 삶을 2019년까지만 살았다.
그렇기에 클로빌의 종착역이 천당인지 지옥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클로빌의 종말이 어떻든 간에 클로빌이, 정확히는 쵸 후쿠히로가 돈을 쏟아붓기 시작하면 필래도 돈을 쏟아부어야만 하는 처지였다.
쵸 후쿠히로가 조기에 클로빌에서 손을 떼도록 하는 것.
그것이 그런 불상사를 가장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방법이었다.
서원웅은 대찬에게 말했다.
“조 부장이 김풍호 전무랑 머리를 맞대고 클로빌 죽이기에 골몰해 봐.”
“클로빌 죽이기, 좋네요. 그리고 한 명 더, 마크 콜먼 CTO도 필요해요. 셋이서 한번 해볼게요.”
“오케이. 나는 필드업 쪽에 주력할게.”
“알겠습니다.”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말한 대로 대찬은 김풍호 전무, 마크 콜먼 CTO와 함께 클로빌을 표적으로 한 온라인 시장 대전에 돌입했다.
대찬이 마크 콜먼에게 말했다.
“웹페이지에서도, 모바일 앱에서도 주력해야 할 건 편리한 인터페이스입니다.”
“네, 인터페이스는 물론이고 고객들의 소비패턴을 분석해서 구입하고자 하는 상품을 개별적으로 노출시키고, 결제시스템을 최대한 간편하게 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문과라 그쪽으로는 머리가 꽉 굳어있어요. 모쪼록 미스터 콜먼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해주세요.”
마크 콜먼은 어깨를 으쓱이며 동의의 표시를 했다.
김풍호 전무가 대찬에게 말했다.
“사실 그런 측면에서 클로빌을 꺾기란 쉽지 않죠.”
“네, 그쪽에서 클로빌, 아니 쵸 후쿠히로는 대가니까요.”
쵸 후쿠히로는 자금 규모가 수십 조 원에 달하는 펀드를 좌지우지하는 존재였다.
그 펀드에서 뿜어지는 막대한 자금으로 세계 곳곳에 유수의 스타트업 기업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대개 그런 스타트업 기업들은 서비스 제공자와 사용자를 연결해주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방대한 데이터가 축적된 것은 물론이요, 그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노하우 역시 갖추고 있었다.
쵸 후쿠히로가 클로빌에 건네는 것은 비단 막대한 자금뿐만이 아니라 그런 무형의 자산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필래는 철저히 내수형 기업이었다.
그런 점에서 데이터를 축적하고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는 그들에 비하자면 우물 안 개구리라 해도 좋았다.
김풍호 전무는 잠깐 고심하다가 대찬에게 말했다.
“이 부분은 저에게 맡겨주시죠.”
“전무님께요?”
김풍호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결할 방법이 생각났습니다.”
“어떻게요?”
“데이터야 모으면 모을수록 정확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자력으로 부족하다면 다른 쪽하고 손을 잡으면 되잖습니까?”
“그렇죠. 그래도 그렇다고 클로빌하고 손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손잡자고 해도 그쪽이 잡아줄 리도 만무하고요.”
김풍호 전무는 씩 웃었다.
“누가 클로빌하고 논답니까.”
“그럼 누구하고 놀아요?”
“이런 말이 있잖아요. 한국사람 일본사람 죽일 듯이 미워하고 싫어해도,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같이 손잡고 막아야 한다고.”
“우리가 한국사람 하기로 하고요. 그럼 일본사람은 누구예요?”
“위마트, 샬롯, 업하우스요.”
“온라인에서는 클로빌이 외계인이지만 오프라인에서는 그것들이 외계인 아닙니까?”
김풍호 전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온라인을 얘기하고 있으니까.”
“전무님 말씀은 그러니까 위마트, 샬롯마그넷, 업하우스하고 데이터를 공유하자는 말씀이십니까?”
“위마트는 어려워요. 일단 오프라인에서 우리와 선두를 다투는 만큼 쓸데없는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으니까. 그리고 하나 더.”
“하나 더?”
“저 위마트에서 잘려서 여기 왔잖습니까.”
“아.”
대찬은 김풍호 전무의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왜 위마트에서 잘린 줄 아십니까?”
“오너의 눈 밖에 나셨다고.”
“예, 왜 오너의 눈 밖에 났냐면, 제가 거기서 친일파였거든요.”
“친일파라뇨.”
“그때 제가 상정해둔 외계인은 필래였습니다.”
“아.”
김풍호 전무의 말에 대찬은 만감이 교차했다.
위마트에 비하면 신생업체와 다름없는 필래 비바체가 저들에게 외계인 취급을 받았다니.
김풍호 전무는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샬롯, 업하우스와 업무제휴를 추진했죠. 그때부터 완전히 오너의 신임을 잃어버렸습니다.”
대찬은 웃음을 지었다.
“오래 다니던 직장에서 소외되었던 의견을 여기서도 피력하시니, 소신 있으십니다.”
“그게 필래의 강점이 아닐까 싶네요. 제 의견이 받아들여질지 기각될지는 모르겠어요. 그래도 적어도 필래에서는 이런 의견을 낸다고 바로 묻어버리진 않으니까.”
“예, 그 부분에서만큼은 위마트와 다르다고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김풍호 전무는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