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51화
로튼 프룻츠가 여러 방면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어느 정도 근거 있는 자신감을 확보했다.
이제는 마냥 남의 밑에서 월급만 차곡차곡 받는 생활은 슬슬 청산해야 했다.
아주 청산하진 않더라도, 언제든 사업에 열중할 수 있는 여지는 남겨두어야 한다.
필래맨으로 시작해 필래맨으로 인생을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손에 과중한 권력이 쏠리는 것도 경계해야만 했다.
보름달이 차면 기우는 법.
지금 필래 비바체의 비공식적인 2인자 자리도 숱한 견제에 시달리는 마당이었다.
그게 공식화되기까지 하면 도진석 정도는 ‘따위’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심한 압박이 들어올 것이다.
특히 극동일보 쪽에서의 위협이 두려웠다.
그쪽과의 싸움은 최대한 회피해야만 했다.
피할 수 없다고 해도 최대한 뒤로 미뤄야 했다.
지금 서원웅이 내미는 건 그야말로 독이 든 성배였다.
대찬은 서원웅에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혁신팀장 자리만 해도 버거워요. 끈 떨어진 경력 많고 능력 쓸 만한 50대 아저씨들 길거리에 차고 넘쳐요. 개중 하나만 골라 써도 저보다 나을 겁니다.”
“어느 길거리를 가야 그런 아저씨들을 만날 수 있을까?”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저는 아니에요. 새로운 사업을 마구잡이로 벌일 타이밍이라면 절 써도 좋아요. 근데 이제부터는 안정적인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에요. 겸손 떠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도 아쉬워.”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거기에 저 앉히면 바로 사표 낼 거예요.”
대찬이 단호하게 못을 박자 서원웅도 더 권하지 못했다.
결국 마트사업부문장 자리는 외부에서 수혈되었다.
대찬이 말한 대로 마침 오너의 눈 밖에 난 경쟁업체 임원 출신이 마트사업부문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필래마트와 경쟁관계에 있는 위마트에서 상무를 지내다가 한번 삐끗하는 바람에 영영 나가떨어졌다고 했다.
인품과 능력에 대한 후문은 좋은 편이었다.
서원웅은 여러 후보들을 두고 고심하다가 그를 필래 비바체의 마트사업부문장으로 선임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호인의 인상을 한 그는 임원들 앞에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김풍호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임원들은 김풍호가 고개를 숙인 만큼의 각도로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대찬은 임원이 아닌 관계로 임원들끼리의 상견례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풍호 전무는 굳이 혁신경영팀 사무실에 방문하여 대찬을 찾았다.
그는 임원들 앞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조 부장님,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고견 많이 청하겠습니다.”
김풍호 전무의 정중한 인사에 도리어 대찬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첫인상만큼은 도진석과 정반대였다.
“고견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저와 저희 팀원들은 전력으로 부문장님을 보좌해서 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제 관할 업무가 모두 조 부장님의 손끝에서 시작된 건 바깥에 있던 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우리 둘이 손발이 잘 맞아야 할 겁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반 발짝 뒤에서 부문장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이렇게 깍듯하신 분께 제 전임자는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을까요. 큰코다쳐도 싸군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하… 제게 못되게 굴어서 큰 코가 다치셨다기보다는 다 본인의 과실이죠. 오늘 부문장님을 뵈니 이런 불미스런 일이 재발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요. 제가 능력은 좀 딸려도 그렇게 장난은 안 치는 스타일이라.”
대찬과 김풍호 전무는 악수를 나누며 의기투합했다.
김풍호 전무가 선임된 이후, 대찬은 확실히 2선으로 빠졌다.
도진석이 부문장으로 재임하던 때와는 달리 어떤 보고서도 반려되지 않았다.
고속도로 하이패스처럼 대표 서원웅에게 바로 전달되었다.
대찬이 그리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새로 들어온 김풍호 전무에게 잘 지내보자며 대찬이 먼저 손을 내민 격이기도 했고, 김풍호 전무의 일 처리가 도진석 이상으로 꼼꼼하고 정석적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미 주요 보직에 자신의 사람들을 포진시킨 마당.
한동안 존재감을 지워 주위에서 찧어대는 입방아를 피하고자 함이기도 했다.
수더분해 보여도 눈치가 보통 이상은 되는 김풍호 전무는 그런 대찬과 따로 만나 술자리를 베풀었다.
“조 부장님, 배려해줘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상부상조하면서 잘해봅시다.”
“별말씀을요.”
대찬은 웃으면서 김풍호 전무와 잔을 부딪쳤다.
한동안 풍파에 시달리던 때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달콤한 허니문이었다.
2016년 3월 말.
꽃샘추위가 슬슬 물러가는 시점.
필래 비바체의 오랜 숙원 하나가 해결되었다.
몇 년 전, 대찬이 확보한 하남의 너른 부지에서 첫 삽을 뜬 복합쇼핑공간 필드업이 마침내 완공되었다.
그 규모에 맞게 성대한 개장식이 열렸다.
대찬은 리본 커팅식에 서원웅과 나란히 선 채로 참석했다.
리본을 싹둑 자르고 대찬은 박수를 치며 등 뒤를 흘끗 돌아봤다.
그야말로 웅장하고 눈부신 자태.
대찬은 잠깐 뿌듯한 눈으로 한눈에 담기지 않는 건물을 바라보고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본 커팅식이 끝난 후, 서원웅은 필드업의 첫 번째 매장 앞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저희 필드업의 그랜드오픈을 축하해주시기 위해 바쁘신 와중에도 참석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서원웅은 고루한 인사말을 마친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 필드업의 준공은 작은 걸음이지만, 우리나라 유통산업에 큰 족적을 남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 적잖이 서본 서원웅에게 이제 초보의 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가 힘 있게 울렸다.
“저는 올해를 기존의 유통 패러다임을 깨고 대한민국 유통 2.0 시대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싶습니다.”
그는 원고를 읽지 않는 여유마저 보였다.
“필드업을 중심으로 한 복합쇼핑공간을 오프라인 시장의 축으로, 그리고 대동맥을 흐르는 필래택배와 모세혈관을 흐르는 필래 인 마켓의 조합을 당일배송의 온라인 시장의 축으로 삼을 것입니다. 더욱 적극적인 기술혁신으로 유통혁명의 선봉에 서겠습니다. 오늘은 그 작은 첫걸음의 순간입니다.”
서원웅이 말을 마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대찬은 서원웅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제 서원웅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유통업계의 거물이 되었다.
개장식이 치러지자마자 필드업 하남점은 영업을 시작했다.
필드업의 주역은 누가 뭐래도 대찬이었다.
필드업의 기안자이자, 답이 보이지 않아 전전긍긍하던 부지 확보의 건에서도 톡톡히 공을 세운 장본인이었다.
서원웅도 그런 대찬에게 공을 돌리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악수할 사람이 자꾸만 늘어났다.
손아귀가 저려올 정도.
부단히 악수를 나누느라 지쳐가던 대찬은 누군가를 발견하고 그에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이번에는 대찬이 기꺼이 먼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어르신, 와주셨군요.”
“어, 땅 도둑놈 왔구만.”
대찬이 어르신이라고 부른 이는 대찬과의 인연으로 필드업 부지를 넘겨준 심형수였다.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제값 다 쳐드렸는데 도둑놈이라뇨. 억울합니다.”
“팔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너무 싸게 줬더라구. 지금 와서 제값이라고 입 싹 닦는 거 보니 도둑놈 맞구만.”
“하하, 건강히 잘 지내셨죠?”
심형수는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썩을, 주기적으로 노인네 살았나 죽었나 확인하러 왔으면 잘 지내냐고 물어볼 일도 없잖은가.”
“죄송합니다. 신경을 쓴다고 썼는데 마음만큼 여유가 나질 않더군요.”
심형수는 눈을 흘겼다.
“흥, 화장실 들어올 때랑 나갈 때 다른 셈이지. 나한테 급한 똥을 한 무더기 싸놓고 나니까 별 볼 일 없어진 게지.”
“아휴, 죄송합니다. 앞으로 더 성실히 모시겠습니다.”
심형수는 대찬과 악수하던 손을 휙 뿌리치며 심술을 부렸다.
“됐어! 암튼 넥타이 맨 것들 혓바닥에 설탕만 잔뜩 쳐서는. 이래서 믿을 게 못 된다는 거야.”
“아이고, 한 번만 봐주십시오.”
“다음번에 하남 올 일 있으면 얼굴이나 비춰. 막걸리 한 통만 달랑 들고 오면 용서 없어.”
“아무렴요. 꼭 그러겠습니다. 손주분은 요즘 어르신께 고분고분하세요?”
“제깟 놈이 어쩔 거야. 돈줄 콱 틀어쥐고 있으니 속으로 켕겨도 겉으로는 실실거려야지. 요즘에는 나랑 둘이서 목욕도 간다니까.”
“그거 잘 됐습니다. 원래 몸과 마음은 통하는 거잖습니까. 그게 버릇이 되면 마음도 자연히 따라갈 겁니다.”
심형수는 피식 웃었다.
“말은.”
“시간 괜찮으시면 식사라도 같이 하시겠습니까?”
“이 시장통에서 밥을 먹자고?”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희 매장 안에 전국 맛집들 다 모셔다 놨거든요. 저 황금루 VVIP인데 거기로 모실까요? 어르신 중국음식 좋아하시잖아요.”
그러자 심형수는 대찬의 뒤를 흘끔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중국음식 좋지. 근데 오늘은 영 날이 아닌 거 같은데?”
“예?”
“뒤를 봐.”
대찬이 그의 말대로 뒤를 돌아보자, 윤이영이 웃으면서 서있었다.
심형수는 미련 없이 손을 휘휘 저으며 떠났다.
“꽃띠 애인을 두고 쉰내 나는 노인네랑 밥숟가락 섞고 싶진 않겠지. 나 먼저 감세. 다음에 보자고.”
그는 대찬이 제대로 인사할 짬도 허락하지 않고 훌쩍 떠나버렸다.
대찬은 벌써 멀찍이 가버린 심형수를 흘끗 보고 윤이영을 바라봤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바쁠 텐데.”
“그게 무슨 말이야?”
“응?”
“나 비바체 홍보모델이야. 오늘 같은 날 참석하는 건 당연하지.”
“아아, 그렇지.”
“아아, 그렇지는 무슨.”
윤이영은 싱겁게 웃으면서 대찬의 팔짱을 꼈다.
그러자 삽시간에 주변에 인파들이 둘을 에워쌌다.
윤이영을 알아본 사람들이 웅성웅성 구름떼처럼 모였다.
“하도 집에서만 만나다 보니까 잊고 있었네. 애인이 얼마나 대단한 양반인지를.”
대찬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으며 말하자, 윤이영은 자연스레 선글라스를 쓰며 말했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저는 한낱 일반인이라 절대 익숙해지지가 않는데요.”
“즐겨, 그냥.”
윤이영은 무수한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있음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대찬과의 공개 데이트를 즐겼다.
3초마다 한 번씩 사인 요청, 사진 요청이 쏟아졌다.
웬만한 사람은 5분도 안 돼서 질려버릴 게 분명했다.
그러나 윤이영은 프로였다.
그녀는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모든 요청에 응하면서 동시에 대찬을 살뜰히 챙겼다.
대찬은 이쯤 되니 심술궂은 후회를 잠깐 하기도 했다.
차라리 윤이영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놨던 ‘소풍 가는 날’에 절대 출연하지 말라고 강짜를 부릴 걸 그랬나.
그랬다면 이 사람과의 연애는 또 어떤 형태였을까.
‘그 영화가 아니었어도 윤이영은 저만큼, 저 이상으로 컸을 거야.’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찬은 연거푸 종이에 사인을 휘갈기는 윤이영의 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자신이 악수를 하느라 저린 손아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단할 것이었다.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래도 윤이영에게 묻는다면 지금의 삶을 택할 것이다.
대찬은 웃으면서 윤이영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자 주변의 사람들이 오오오, 호들갑을 떨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윤이영은 피식 웃으며 대찬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이내 환호성은 더 커졌다.
대중 인지도로 따지면 윤이영보다 못하지 않은 인물이 대찬에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한창 바쁘신 와중에 죄송합니다.”
“회장님.”
쵸 후쿠히로였다.
그는 필드업 하남점의 개장식에 참여했다.
분 단위로 일정을 쪼개 사용하는 그였다.
그런 그가 굳이 개장식에 참여하기 위해 시간을 냈다는 건, 필래 비바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는 웃음을 머금으며 대찬에게 악수를 청했다.
대찬은 공손히 그 악수를 받았다.
“아까 서 대표에게도 말했지만, 이 위풍당당한 건물을 등지고 서서 외치는 일성이 제법 간담을 서늘하게 하더군요.”
대한민국 유통 2.0 시대를 견인하겠다는 말이, 관심 없는 이에게는 그저 그런 수사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쵸 후쿠히로에게는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그는 거액을 소셜커머스 신생기업인 클로빌에 밀어 넣은 상태였다.
클로빌을 앞세워 한국 유통업계의 큰손이 되겠다.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업계를 좌지우지하는 수준의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겠다.
그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리던 그도 최근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가장 큰 걸림돌이 필래 비바체였다.
그런 마당에 비바체가 허물을 한 번 더 벗고 기지개를 켰다.
쵸 후쿠히로 회장 입장에서는 그의 말마따나 간담이 서늘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