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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50화 (350/556)

난 할 수 있어 350화

도진석 하나만 튕겨져 나갔을 뿐인데 확대임원회의의 공기가 사뭇 맑아졌다.

특히 대찬의 기분은 아주 후련했다.

시시콜콜 말끝마다 시비를 걸던 녀석이 나자빠졌으니 후련하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서원웅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선 이번 일로 고생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도 전무, 아니 도 전 전무가 기안한 일이긴 하지만 제가 최종승인을 했으니 저도 책임이 적지 않습니다.”

그 말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입을 닫은 채 뭐라 말하지 못했다.

폭탄을 터트린 송희근, 원인을 제공한 도진석은 응분의 대가를 치르고 회사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이번 사태에 중대한 책임이 있는 서원웅이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은 것은 사실.

아니에요, 대표님, 내숭 떨기에는 사건의 사이즈가 좀 컸다.

옥문영 상무는 서원웅에게 어쭙잖은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화제를 전환했다.

“우선 인력확충이 시급합니다. 당장은 비상근무체제로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윤 전무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렇잖아도 벌려놓은 사업이 많으니까요. 당장 외부에서 수혈한다고 해도 즉시 투입하기는 어렵습니다.”

“매뉴얼 숙지에도 꽤 시간이 소요될 겁니다. 기존 직원들하고 손발도 맞아야 하고요. 하루라도 빨리 계획을 마련해야 합니다.”

두 임원의 말에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력직을 채용하는 것도 고려해야 하지만, 우선 비정기인사를 단행해서 내부 인원으로 중요한 자리부터 메우는 게 좋겠죠.”

오랜만에 서원웅의 마음이 대찬과 맞았다.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경력직이라고 해도 우리 직원들보다 업무를 잘 파악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럼 옥 상무님께서 인사팀을 이끌고 명단을 간추려 올려주세요. 그리고 조 부장.”

“네, 대표님.”

“혁신경영팀 역시 인선 작업을 좀 거들어줘요. 인사팀 인력만으로는 힘에 부칠 테니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는 대찬에게 완전히 힘을 실어주는 조치였다.

옥문영 상무는 소위 ‘독고다이’ 스타일이었다.

도진석 전무처럼 자기 라인을 거느리지 않았다.

밑바닥부터 악착같이 올라왔으니 누굴 밀고 당기고 챙겨줄 여력이 없었다.

그러니 회사에서는 옥문영 상무를 조대찬 라인에 넣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한즉 이번 비정기인사를 주도하는 건 옥문영 상무였지만, 실질적으로 옥석을 가려내는 역할은 대찬이 맡게 된 것이었다.

그 소문은 삽시에 퍼졌다.

필래 비바체 직원들에게 지금의 사태는 고난이자 축복이었다.

도진석 전무 이하 임원 몇몇은 물론이고 부·차장급이 무더기로 갈려 나갔다.

더할 나위 없는 승진의 기회였다.

꿀 냄새를 맡은 벌, 나비 따위가 모여들었다.

그래도 그들도 보는 눈 있고 듣는 귀 있었다.

필래 비바체에서 대찬이 대두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찬이 ‘왕차장’으로 떠오를 때 괜한 선물공세를 했다가 오히려 출세가도에서 탈락한 이름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보다는 발전한 양상을 띠었다.

대찬이 아니라 대찬의 주변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그 주변인물 중에서도 출세를 노리는 하이에나들의 표적이 된 건 허운이었다.

대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면서도 헐렁하기가 그지없어 툭 치면 쉽게 허물어뜨릴 수 있다고 여긴 모양.

평소에는 그저 일개미처럼 널린 일개 과장에 불과했던 허운의 주가가 껑충 뛰었다.

“허 과장, 우리 오늘 술 한잔 할까? 허 과장 킹크랩 좋아하잖아. 킹크랩 사줄게.”

“예? 갑자기 왜요?”

“갑자기는 무슨. 우리 알고 지낸 지도 한참인데 술 한잔 따로 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지금껏 술 한잔 따로 해본 적도 없는데 왜 오늘 굳이 술을 사주신다고 그럴까요?”

“으, 으응?”

“선배, 제가 아무리 둔하고 허술하다지만 조 부장 졸졸 따라다니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가락은 있어요. 이러실수록 오히려 마이너스라니까요.”

“아, 그, 그래. 미안, 내가 괜한 소릴 했네.”

“올라가실 만하시면 알아서 올라갈 거예요. 이러지 마세요.”

허운은 그렇게 툭 던지듯 말하고 선배의 앞을 물러나왔다.

그러면서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방금 조대찬 같았다. 대박.”

옥문영 상무는 전적으로 대찬의 의견을 따랐다.

“조 부장, 나는 사람 보는 눈도 없고 끌어당겨 줄 예쁜 후배도 없어. 그러니까 조 부장이 알아서 하도록.”

“사람 눈이야 매한가지죠. 확실한 사람들만 추천하고, 나머지는 인사팀에 맡기겠습니다.”

“확실한 사람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차장급으로 올릴 만한 사람으로는 저희 팀의 한태윤 차장, 그리고 상품기획부의 장영일 과장, 마트 수유점의 표성재 점장. 이 셋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옥문영 상무는 흐흐 웃었다.

“너무 노골적인 코드인사 아니야?”

“확실한 사람들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사람 확실하게 알 정도면 가까울 수밖에 없으니까요.”

“음, 하기야 한 차장이야 나도 이견 없고, 상품기획부 장 과장도 능력, 평판 나쁘지 않고. 조 부장이 수유점 떠난 뒤로도 계속 잘 나가는 거 보면 표성재 그 사람도 쓸 만하겠지.”

“네, 특히 세 분은 지금 진행되는 일련의 사업에 이해도가 매우 높습니다. 적절한 인사라고 생각합니다.”

옥문영 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차장급 밑으로는 추천해줄 만한 사람 있어?”

“홍은주 대리요. 홍 대리 말고는 딱히 추천하고 싶은 사람 없습니다.”

“좋아, 조 부장 의견은 거기까지야?”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았어. 즉각 반영하지.”

옥문영 상무는 대찬의 의견을 전적으로 반영하여 비정기인사를 단행했다.

한태윤 차장은 부장으로 승진하고 마트사업부문의 영업총괄팀장이 되었다.

상품기획부 장 과장은 차장으로 승진하고 상품기획1팀 팀장이 되었다.

표성재 점장은 드디어 본사에 입성, 수도권영업본부의 부장급 요직을 꿰찼다.

홍은주는 과장으로 승진했다.

도진석 라인이 몰락하고, 소위 조대찬 라인이 대약진했다.

이번 비정기인사에서 대찬의 입김을 타고 승진한 사람들은 연차로만 따지면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것이었다.

한태윤은 송희근을 제치고 차장 직함을 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부장으로 파격 승진했다.

상품기획부 장 과장 역시 마찬가지, 대찬과 비슷한 연배이니 과장 자리도 용하다고 할 텐데 차장이 되었다.

표성재 점장은 나이로만 치면 충분히 부장급에 앉을 만했다.

그러나 매장 출신으로 본사에 입성한 것도 흔치 않은 일이거니와 대찬을 만나기 전까지는 한심하다는 공공연한 평판을 들었던 신세를 생각하면 상전벽해였다.

홍은주 역시 고졸계약직으로 들어와 계약만료를 앞두고 있던 신세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고 대리에 과장까지 달았다.

제2의 옥문영 상무도 꿈이 아니게 되었다.

이번 인사를 두고 수군거리는 말들이 많았다.

어느 때보다 때 이른 승진의 가능성이 높았던 기회였다.

점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불만은 오히려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대찬의 의지에 따라 중용된 사람들에 대한 뒷공론이 끓었다.

하지만 단순한 트집 잡기 식의 비난은 가능했지만, 논리적인 비판은 할 수 없었다.

대찬이 추천한 사람들은 모두 성과가 확실한 인재들이었다.

대찬 역시 능력에 대한 보증 없이 단순히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띄워줄 의사가 전혀 없었다.

도진석이 사라진 건 반길 만한 경사였지만 대찬의 마음 한 구석에 불안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도진석은 대찬의 독주를 유일하게 견제하던 위인이었다.

그런 그가 사라졌으니 앞으로는 서원웅 본인이 대찬의 앞을 가로막는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런 마당에 하자가 있는 인물을 시시덕거리면서 띄워주면 그 반대급부를 대찬은 감수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확실한 사람들로만 추려 추천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칼자루를 확실하게 쥔 김에, 자기 라인을 알뜰하게 구축했다.

한태윤 부장, 장영일 차장, 표성재 부장을 요직에 포진시킨 대찬의 입지는 굳건해졌다.

대찬은 웃으면서 한태윤 부장에게 악수를 건넸다.

“승진 축하드립니다, 한태윤 부장님.”

“감사합니다. 차장으로 승진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갑작스런 발탁에 얼떨떨합니다.”

“한 부장님 아니면 누굴 올리겠어요. 잘 맡아서 일해주세요.”

“팀장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승진은 기쁘지만 혁신경영팀 떠나게 된 건 아쉽습니다, 많이.”

“그래도 바로 옆 사무실인데요, 뭘. 다른 부서 가셨다고 저랑 서먹해지시면 안 됩니다?”

“팀장님하고 서먹해져서 좋을 게 하나 없는데 그럴 리가요.”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서 홍은주 과장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홍 과장님, 축하해요.”

“감사해요, 팀장님.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누가 들으면 능력도 없는 사람 승진시켜줬다고 오해하겠어요. 홍 과장님은 충분히 자격이 있으니까 누가 신경 써줬다느니 그런 말 할 필요가 없어요.”

“하하…….”

대찬은 홍은주와 악수를 나누고 김산호, 오다혜에게 말했다.

“우리 두 대리들은 홍 과장 승진에 불만 없죠?”

“아유, 당연하죠! 내심 불편했다고요. 홍 과장님 입사일로만 따지면 저희보다 2년은 더 빠른데.”

대찬은 흡족하게 웃었다.

그렇게 내부인사를 영전시키고 경력직을 대거 채용해, 대부분의 빈자리는 채워졌다.

그러나 가장 큰 자리는 아직 공석이었다.

마트사업부문장.

도진석이 퇴사하기 전 꿰차고 있던 자리.

대표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자리라고 해도 무방한 그 자리는 여전히 비어있었다.

중요한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비바체 임원들 중에 그 중임을 맡길 만한 인재가 없었다.

오윤 전무는 이미 면세점 사업을 총괄하는 데만도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직장생활의 대부분을 필래호텔에서 보내 유통업에 대한 이해는 탁월하다고 볼 수 없었다.

옥문영 상무 역시 도진석만큼의 통찰력을 담보할 수 없었다.

마트사업부문에 있던 몇몇 임원들은 함량 미달이었다.

모두 도진석의 열화판에 불과했다.

그러던 차에 서원웅이 대찬을 불렀다.

대찬은 그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커피 한 잔 나눌 여유도 없이, 서원웅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네가 부문장 해라.”

그 말을 듣자마자 대찬 역시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안 해요.”

그러자 서원웅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최소한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안 돼?”

“제게 적합한 자리가 아니에요.”

“왜? 능력으로 보면 스스로도 도진석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진 않을 테고. 연차야 솔직히 부장 올라갔을 때부터 무시했잖아.”

“저는 개인플레이 즐기는 사람이지 좌우로 사람들 우르르 거느리는 보스 체질은 아니에요.”

그러자 서원웅은 소파에 몸을 묻으며 툴툴거렸다.

“그런 사람이 로튼 프룻츠에서는 열 명, 스무 명 부하직원을 거느리고 있어?”

“그러니 민승기 선배랑 공동대표 체제를 고수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회사를 맡기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마트사업부문만 맡아달라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

“지금까지 비공식적으로 2인자 노릇을 했으니 공식적으로 하라는 건데. 그 편이 너에게도 더 편하잖아?”

대찬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너 아니면 내가 누구한테 저 큰 덩어리를 맡겨. 솔직히 말하면 외부 영입할 만한 인간들 중에 십중팔구는 도진석보다도 못해.”

대찬은 서원웅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했다.

만약 대찬 자신이 서원웅이었어도 자신을 택했을 것이다.

대찬은 서원웅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고, 능력도 지금까지의 경력을 통해 증명해냈다.

이미 대찬을 향한 필래 비바체 임직원들의 신뢰는 두터웠다.

그렇기에 나이가 어려 조직을 통솔하기 어렵다는 점도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필래마트의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대찬의 손끝이 닿지 않은 사업이 없었다.

그러니 지구상에 필래마트의 업무에 대해 대찬보다 이해도가 높은 사람은 없었다.

서원웅이 내밀 수 있는 카드 중에 대찬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대찬은 그걸 알고도 극구 사양했다.

그건 회사를 위한 사양이 아니라 다분히 본인을 위한 것이었다.

이 제안을 덥석 받는 순간, 대찬은 필래에 완전히 종속되고 만다.

대찬이 두 번째 삶을 시작한 이후 필래를 선택했다.

왜 필래를 선택했나.

첫째는 지금은 기억의 다락방 속에 처박힌 유백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그때의 대찬이 가진 시야가 딱 그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삶의 대찬은 철저히 실패한 샐러리맨이었다.

두 번째 삶을 막 시작했을 시점의 대찬이라고 해서 대단한 통찰력을 지닌 건 아니었다.

그저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절치부심의 각오.

그리고 실패를 통해 얻은 경험과 지식.

그게 당시 대찬이 쥐고 있던 무기의 전부였다.

다시 샐러리맨의 생활을 택한 건 그게 대찬이 유일하게 가본 길이었고, 그 때문에 실패의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대찬과 지금의 대찬은 또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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