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48화
확실한 단서가 없는 탓으로 지금 상황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장님도 장님 나름이다.
촉이 좋은 장님은 코끼리를 보지 않고 만지는 것만으로도 코끼리인지 알아챌 수 있다.
상아를 만진 사람은 무 같다고 하고.
귀를 만진 사람은 키 같다고 하고.
다리 만진 사람은 절구.
등을 만진 사람은 침대.
배를 만진 사람은 항아리.
꼬리를 만진 사람은 새끼줄 같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엉뚱한 답을 내놓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장님인 까닭이 아니다.
그들이 코끼리를 모르는 까닭이다.
코끼리를 모르는 사람은 눈이 멀쩡하여 코끼리를 보고도 코끼리라고 하지 못한다.
코끼리를 알고 감이 좋은 사람은 상아만 만지고도 대번에 코끼리라고 할 것이다.
그보다 둔한 사람도 울음소리를 들으면 코끼리라고 할 것이다.
결국 어리석은 답변은 인지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부족에서 오는 것.
경험이 많으면 인지하지 못할 일이 없다.
대찬의 경험은 사장의 거짓을 간파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안대를 매고도 코끼리를 알아챌 수 있다.
대찬은 사장을 더욱 옭아맸다.
“여기 오기 전에 동호공업 다녀오는 길입니다. 그쪽 사장님도 마찬가지의 말씀을 하시더군요.”
“…….”
“월드몰이 필래마트로 넘어가면서 한창 재계약 여부를 두고 설왕설래가 많던 때. 실무담당자와 미팅을 하는 줄 알고 식사장소를 설렁탕집으로 잡았더니 도 전무가 나오더라고.”
“동호공업이 잘려 나가면서 악에 받쳤겠죠. 무슨 말이든 못할까요.”
대찬은 사장의 퉁명스런 참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도 전무가 나왔으면 요정을 가든 룸살롱을 가든 알아서 기었어야 했는데, 동호공업은 그런 눈치가 없었더랍니다.”
그런 동호공업이 도진석 전무의 눈에는 코끼리를 못 알아보는 장님으로 보였으리라.
대찬은 다리를 꼬며 말했다.
“설렁탕에서 시작해서 수육에 막걸리로 끝내려고 하니까 도 전무 이 인간 인내심이 바닥이 난 거지. 그걸로 동호공업은 쫑, 사장님 회사는 튼튼한 동아줄 잡고 여기까지 잘 커오신 거고.”
“소설 그만 쓰시죠.”
“이렇게 정황이 뚜렷한데도 끝까지 버티시겠다고요? 그냥 진실을 실토하면 이전처럼 관계가 쭉 유지될 텐데.”
“내가 조 부장이 튼튼한 동아줄인지 삭은 동아줄인지 어떻게 압니까?”
“아, 도 전무 동아줄이 질기고 튼튼한 건 아시고?”
“…….”
“나도 행세도하는 데는 별로 취미 없는데요. 회사를 위해서라도 사장님하고는 더 일 못하겠네요. 우리는 귀사와 재계약하지 않을 겁니다.”
대찬이 그렇게 단정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장은 입이 바싹 말랐다.
이러다 정말 필래에서 잘려버리는 게 아닐까.
대형마트에의 납품은 이런 영세한 업체에서는 빛이요 소금이요 물이요 산소다.
대형마트에서 자체적으로 소화하는 물량부터가 어마어마하다.
거기에 더해, 대형마트에 납품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대단한 품질보증서였다.
정말 저 젊은 부장의 말이 허장성세가 아니라 진심이라면.
‘정말 일을 망치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덜컥 굴복할 수도 없었다.
우선 당장 굴복한다 해도 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은 부장 놈팡이가 재계약을 해줄까.
단물만 쪽 빨리고 내팽개쳐질 확률이 더 높았다.
게다가 이 건이 도진석 전무 몰락의 뇌관이 돼버린다면.
도 전무의 자폭에 스플래시 데미지를 입어 함께 폭사하고 말 터.
사장의 눈알이 빠르게 굴러갔다.
그는 대찬에게 말했다.
“부장님, 잠깐만요.”
“왜요? 얘기 끝났어요.”
“그래도 이런 일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속전속결로 끝내기에는…….”
“사장님이 솔직하게 대답을 안 하시니까 말이 길어지고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붙는 겁니다. 진심만 얘기하면 속전속결로 안 끝내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번갯불에 콩 튀기는 시간도 길죠.”
“…….”
“자, 그럼 얘기 끝난 겁니다. 수고하세요. 이쪽에서 허탕 쳤으니 저쪽에서 건수 잡아야 되거든요.”
“부장님…….”
“품은 좀 들겠지만 언젠가 꼬리는 잡힐 겁니다. 그럼 사장님 회사도 재계약 불발 정도로 끝나진 않을 거예요.”
대찬은 가방을 들고 정말 나갈 태세였다.
그러자 순간 정신이 아득해진 사장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부, 부장님, 잠깐, 잠깐만요!”
고기가 낚싯바늘을 깨물었다.
대찬은 잠깐 웃고는 서둘러 웃음기를 지으며 뒤돌아 사장을 바라봤다.
“뭡니까?”
“시간을 조금만 더 내주십시오. 조금만, 조금만.”
“그럼 뭐가 달라집니까?”
사장은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애원했다.
“제가 아는 걸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시간을 허락해주세요.”
“좋습니다. 그럼 화장실 잠시 다녀올 테니 생각 좀 정리하고 계시죠. 이번에는 속전속결로 해주셔야 합니다.”
대찬의 말에 사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착석했다.
화장실로 향하는 대찬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사장이 입을 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스스로 입을 열겠다고 결심한 게 아니라, 대찬의 겁박과 위협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당장의 위기를 모면할 최소한의 것만 발설할 것이다.
‘어떻게 낚은 대언데.’
대찬은 사장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청새치의 꼴이 되도록 둘 생각이 없었다.
간만의 월척이 덩그러니 대가리만 남은 채로 끌어올려지는 게 아니라, 온전한 채로 올려지기를 바랐다.
대찬은 화장실에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 메시지를 홍은주가 받았다.
* * *
“큰일 보셨나 봅니다.”
“아, 예. 언짢은 대화를 하다 보니 속이 안 좋아져서. 뭘 그런 걸 다 물어보세요?”
“하하…….”
대찬이 농담 같은 말을 진지하게 하자 사장은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대찬은 자리에 앉은 뒤에도 한참 입을 열지 않았다.
전처럼 대답을 재촉하지 않으니, 사장도 무엇부터 말할 것인가 골몰하느라 제법 긴 침묵이 흘렀다.
그러던 중에 사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사장은 전화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
대찬은 그런 그에게 물었다.
“안 받으세요?”
“지금 중요한 얘기 중인데 받으면 안 되죠.”
“어디서 온 전화입니까?”
“예? 아, 모르는 번호…….”
“잠깐 액정 좀 봐도 될까요.”
사장은 순순히 그렇게 했다.
대찬은 액정에 뜬 번호를 발음했다.
“02-412… 이거 서울 전화네요?”
“예? 아, 예…….”
“우리 회사 주변이 웬만하면 4로 시작하던데. 혹시 우리 회사에서 전화 온 거 아닙니까?”
“모르는 번호인데…….”
“받아보세요.”
대찬의 말에 사장은 찔끔 놀랐다.
“다, 다음에 받죠.”
“왜 안 받으세요? 예의 차리시는 거면 됐고요. 혹시 켕기시는 게…….”
“케, 켕기다뇨! 받습니다! 받아요!”
사장은 얼른 전화를 꺼냈다.
그런 그의 손목을 대찬이 붙들었다.
“켕기는 게 없으시면 같이 들어요. 스피커폰으로.”
“그, 그러시죠.”
사장은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은 대찬과 사장 사이에 놓인 탁자의 정중앙에 올려졌다.
“여보세요!”
“참나라실업 배성열 사장님 맞으시죠.”
전화를 건 사람은 사장이 모르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런데요.”
“여기 필래 비바체입니다.”
“…뭐요?”
“비상상황입니다. 도 전무님께서 직접 전하라 하셔서 연락드렸습니다.”
도진석 전무가 언급되자 사장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도, 도 전무님이 직접 전화하시면 되지. 누구신데 당신을 통해서 전하라 한답니까.”
“지금 회사에서 도 전무님 몰아내려고 혈안이 돼 있어요. 통화기록내역도 계속 제출하라고 요구받고 계십니다. 직접 전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해해주십시오.”
“…….”
“도 전무님 몰아내려는 장본인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에요. 직급은 부장인데, 서 대표 라인 타고 호가호위하는 사람입니다.”
그 말에 사장은 대찬을 흘끗 바라봤다.
대찬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직접 도 전무님과 커넥션이 있는 하청업체들을 돌면서 건수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아마 조만간 참나라실업에도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사장의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사장님, 듣고 계세요?”
사장은 대찬의 눈치를 봤다.
대찬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작은 힌트도 주지 말라는 듯 노려봤다.
사장의 오금이 저려왔다.
“듣고 있어요.”
“도 전무님 날아가면 사장님도 안전하지 못할 겁니다. 아시죠?”
“…….”
“도 전무님과 관계된 일은 절대 함구하셔야 합니다. 이번 일만 잘 넘어가면 무사할 겁니다. 이렇다 저렇다 해명하실 것도 없어요. 묵비권만 행사하면서 모르쇠로 일관하세요. 아시겠습니까?”
“…….”
“사장님!”
“아, 알겠소. 알겠어요.”
“지금 통화기록도 전화 끊자마자 바로 삭제해주세요. 끊겠습니다.”
뚝.
전화가 끊기고, 대찬과 사장 사이에는 적막이 흘렀다.
대찬은 웃음을 흘렸다.
“저것만 들으면 도 전무님하고 아주 밀접한 사이이신 것 같은데.”
“…….”
“도 전무 순장조가 되고 싶지 않으시면 곧이곧대로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미 이 통화만으로도 도 전무 날리기에는 족하니까.”
사장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대찬은 가뿐한 마음으로 참나라실업을 떠났다.
사장은 떠나는 대찬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부장님, TF팀 업무에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그러니 재계약은 반드시 관철해주십시오.”
“적극 협조하겠다는 그 말씀을 일단 신용하겠습니다. 말씀대로 적극 협조하시면 재계약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뭘요. 제가 고맙지.”
대찬은 사장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참나라실업을 떠났다.
떠나면서 그는 홍은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홍 대리님, 연기력이 아주 발군이시네요.”
“팀장님이 짜주신 각본이 워낙 훌륭해서요.”
“옷이 아무리 예뻐도 모델이 좋아야 태가 나죠. 잘하셨습니다.”
“첫 단추가 잘 꿰어졌으니까 다음부턴 쉽겠네요.”
“쉬울 진 모르겠는데 지금까지처럼 막막하진 않을 거예요.”
도미노와 같았다.
참나라실업이 한번 무너지자, 도진석 전무와 관계되었던 업체들의 입에 걸렸던 자물쇠가 와르르 무너졌다.
이미 참나라실업의 증언으로 도진석 전무의 더럽고 치사한 행각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굳이 끈 떨어진 그를 위해 방패를 들어주는 회사들은 없었다.
오히려 대찬이 들쑤시기 전에 먼저 자진해서 제보를 하는 회사들도 있었다.
고객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경위, 금전거래가 있었던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설치된 TF팀은 도진석 전무의 개인비리에 초점을 맞췄다.
삼십육계 중 제13계, 타초경사(打草警蛇).
풀을 두드려 뱀을 놀라게 하라.
뱀이 단단히 똬리를 틀고 결사항전의 태세를 갖추니 뱀을 직접 때리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주변의 풀을 마구 내리쳐 뱀을 놀라게 하고, 그것으로 생긴 빈틈을 파고드는 것.
그것이 대찬의 착수였다.
풀을 열심히 두드리니 뱀이 싼 똥들이 사방으로 마구 튀었다.
대찬은 그 배설물을 손바닥 위에 곱게 담아서 뱀의 앞에 내밀었다.
TF팀은 도진석 전무를 소환했다.
대찬은 좌우를 물리치고 그와 독대했다.
“저간의 사정은 들어서 알고 계실 겁니다, 전무님.”
“…….”
도진석 전무는 빳빳이 고개를 치켜든 뱀처럼 고고하고자 했다.
그러나 가끔 울리는 목울대는 감추지 못했다.
울렁거리는 목울대가 그의 심리상태를 잘 말해주었다.
대찬은 씩 웃었다.
“오랫동안 꼼꼼히 열심히도 해 쳐드셨더군요.”
“조 부장, 최소한의 품위는 지켜.”
“온몸에 똥칠하고 그런 말씀하시기 안 부끄러우세요?”
도진석 전무의 눈이 흔들렸다.
대찬의 노골적인 도발에도 그는 분노하지 못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회사에서 징계 때리고 끝날 수준이 아니신데요. 옷 벗고 바로 죄수복으로 갈아입으셔야 할 수준이에요.”
“이게 다 비즈니스야. 꽃잎 뿌려진 비단길 위에서 노닐던 조 부장이 이런 처절한 비즈니스를 알 턱이 없지.”
대찬은 탁자 위에 엉덩이를 살짝 걸쳤다.
“말은 똑바로 합시다. 그게 어디 회사를 위한 비즈니스였습니까? 전무님 본인을 위한 개인 비즈니스였지. 그걸 형법에서는 배임이라고 불러요, 배임.”
“…내가 지금껏 회사를 위해 수고한 대가로 그 정도는 취해야 수지가 맞지.”
이제 도진석 전무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