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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47화 (347/556)

난 할 수 있어 347화

하인리히의 법칙이니 뭐니 온갖 걸 들이대도 뚜렷한 실마리가 없으면 모래 위에 지어진 누각에 불과했다.

대찬 역시 스스로의 공상만으로는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장 과장의 귀띔이 도움이 되었다.

그의 귀띔은 완성된 퍼즐은 아니었지만, 대찬이 퍼즐놀이를 시작할 첫 번째 조각 정도는 되었다.

장 과장은 대찬에게 말했다.

“최 부장님도 도 전무와 마찬가지로 월드몰에 계셨어요. 그래서 보고 들으신 게 제법 되거든요.”

“네.”

“도 전무님이 업무분장은 제법 칼 같으신데, 그렇지 않으신 경우가 종종 있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하청업체들이요. 그때 당시에도 상무였는데,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될 몇몇 하청업체 사장들과의 자리에 기를 쓰고 나가시더랍니다.”

“냄새가 좀 나네요?”

“그렇죠.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안 그러시던 분이 그러시는 거엔 다 이유가 있을 거라는 거죠.”

“동감입니다. 그럼 유독 기를 쓰고 만나러 가시던 몇몇 하청업체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장 과장은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거기까진 잘…….”

“알겠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아유, 별 말씀을요.”

“고마워요, 장 과장님.”

대찬은 사무실에서의 일은 감사팀에 맡기고 자신은 오래 호흡을 맞춘 이들과 함께 외곽으로 돌았다.

하청업체들이 있는 평택, 안산, 파주, 이천, 충주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갔다.

갑작스런 본사 직원의 느닷없는 등장에 하청업체는 발칵 뒤집혔다.

직원도 어디 그냥 직원인가.

웬만한 임원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비선실세인 ‘왕부장’이 직접 나셨다.

게다가 그들 역시 필래 비바체에서 터진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다.

자기 회사와 직접 관련이 없다고는 해도 이 시점에 본사 실세의 방문이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사장실에서 골프 자세를 연습하던 사장이 부리나케 앞마당까지 뛰어나왔다.

“아이고, 부장님!”

“안녕하십니까, 비바체 조대찬 부장입니다.”

“이 먼 곳까진 어쩐 일로…….”

“잠깐 안에 들어가서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물론이죠. 어서 들어오십시오. 바깥 공기 찹니다.”

대찬은 옅은 웃음을 보이며 사장을 뒤따랐다.

사장은 대찬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혹시 식전이시면 근처 근사한 곳에서 식사라도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간단히 요기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사장은 그렇게 말하며 대찬의 눈치를 슬슬 살폈다.

대찬이 침묵을 지키니, 사장이 먼저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까진 어쩐 일로…….”

“이 회사가 저희랑 거래 튼 지도 제법 되었죠?”

“그렇죠. 월드몰 때부터 그랬으니까… 그때부터로 치자면 십수 해 됐죠.”

“네, 귀사와의 오랜 파트너십을 저희도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회사를 경영해왔던 사장은 관록이 있었다.

이런 대찬의 심심한 긍정의 말이 마냥 좋은 의도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인사치레만 하려고 오신 건 아니실 테고…….”

“몇 가지 질문 좀 드리려고요.”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사실 귀사의 제품이 타사의 제품에 비해 월등한 질을 담보한다고 할 순 없습니다.”

“그, 그게 무슨…….”

“심지어는 월드몰이 필래마트로 옮겨 올 때, 귀사와 유사한 물목을 취급하면서도 더 퀄리티가 좋은 제품을 생산하던 업체는 우리와의 파트너십 체결에 실패했죠. 사장님 회사는 용케 살아남으셨더라고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말 섭섭합니다. 부장님이 보시기에 못 미더운 제품일지는 몰라도 저희는 정말 최선을 다해 내 자식처럼 만든 제품이거든요.”

“그러시군요. 근데 섭섭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이니까요.”

대찬은 사장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사장은 대찬의 말에 위축되었다.

아니라곤 했지만 대찬의 말이 틀리지 않았으니까.

그는 어설픈 언변으로 어물쩍 넘어가기는 글렀음을 직감했다.

하기야 변죽이나 울리자고 본사의 실세 부장이 직접 이 먼 곳까지 행차하시진 않았을 것이다.

일을 치러도 제대로 치르려고 왕림하셨을 터.

사장은 가타부타 뭐라 말하지 못하고 침만 꼴깍 삼켰다.

갑의 위력으로 사장을 찍어 누른 대찬이 말을 이었다.

대찬은 확보한 데이터로 확인사살을 했다.

“귀사에서 생산하는 밀폐용기는 사면결착방식이죠?”

“…네.”

“그런데 반해 업체 선정에서 탈락한 동호공업에서 생산하는 용기는 한 곳의 잠금장치만 해제하면 나머지 면들의 잠금도 모두 풀리는 특장점이 있더군요.”

“…….”

“디자인이나 내구도 측면에서도 동호공업보다 낫다고 할 수 없죠?”

“밀폐용기가 사실 다 거기서 거기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건 가격 경쟁력…….”

“입찰에서도 동호공업이 더 저렴한 값을 써냈는데도 귀사에 밀려버렸습니다.”

잠깐 생각을 가다듬던 사장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하하… 뭐, 그것만 보면 부장님이 의심하실 만도 하죠. 그런데 이런 계약에는 제품 외에 여러 변수들도 고려되기 마련이지 않겠습니까.”

“여러 변수라면 뭐가 있을까요.”

사장은 물 흐르듯 말했다.

“업력이란 게 있죠. 그때 동호공업이요, 생긴 지 겨우 두 해째 되는 회사였어요. 설비도 부족했고. 제품이 좋으면 뭘 합니까. 주문 들어오는 대로 쭉쭉 찍어낼 줄 알아야지. 그래서 제품 자체는 비교열위에 있지만 신뢰할 만한 저희 회사가 선택된 거고요.”

“그렇군요.”

대찬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사장은 자신감을 얻었다.

그가 대찬에게 위축된 건 갑과 을의 관계에서 오는 위력의 차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꿔 생각해 경험의 차이로 따지자면 우위에 있는 건 본인이라고 생각했다.

사장은 다소 긴장이 풀린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조 부장님이 필드 일은 잘 안 뛰어보셔서 서류에만 지나치게 의존하시는 거, 이해합니다.”

“…….”

“근데 현장 일이 꼭 그렇게만 돌아가는 게 아니라서요. 우리 조 부장님, 어린 나이에 쾌속 승진하신다고 본사에서만 계셔서 잘 모르시는 건 이해합니다.”

사장은 대찬을 띄엄띄엄 봤다.

나이가 어린데 벌써 부장을 달았으니 빡빡한 출세가도 와중에 현장 일선에서의 허드렛일을 할 여유는 없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니 대찬을 순전히 높은 빌딩의 사무실 한 구석에 들어앉아 햇볕도 받지 못하고 자판만 열심히 두드렸을 백면서생이라고 단정했다.

대찬은 그게 재밌어서 가만히 웃기만 했다.

“그런가요.”

“그럼요. 지금이라도 오해가 풀리신 거 같아서 다행입니다.”

“…….”

“헛걸음하신 게 안타깝기도 하고, 저녁에 제가 양주라도 한 병 대접하겠습니다.”

대찬은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왜 멋대로 단정하세요. 오해 아직 안 풀렸습니다. 아마 오해도 아니겠지만.”

“…예?”

“풋내기 책상물림이라고 대충 눙치고 넘어가실 생각이신 거 같은데요.”

“아유, 아유 그럴 리가요!”

사장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대찬은 혓바닥을 더욱 날카롭게 벼렸다.

“오해는 사장님께서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예?”

“점장으로 1년이면 필드에 대한 감을 잡기에는 충분해요. 감이 있으니까 서류를 보고 때려 맞추는 게 가능한 거죠.”

“…….”

“제가 사장님을 억울하게 몰아갔으면 답답해서라도 적극적으로 항변을 하셨을 텐데, 오히려 대충 넘어가려고 하시니까 더 의심이 가잖아요?”

“조 부장님, 생사람 잡지 마세요.”

“제가 생사람 잡았는지 잡을 사람 잡았는지는 더 알아보면 나오겠죠.”

사장은 예상외로 끈질긴 대찬의 태도에 당황했다.

하지만 기왕 오리발을 내밀었으니 계속 일관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섭섭합니다. 뭐 때문에 이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거듭 말씀드리면…….”

“뭐 때문에 이러는지 모르신다니 알려드리죠.”

“…….”

대찬은 사장의 말을 잘랐다.

“사장님께서 우리 회사 돈으로 맛있는 거 많이 드셨더라구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지난주 150그람에 9만원 하는 한우, 저번 달에는 1인 당 15만 원 하는 일식 코스요리, 그 전전 달에는 골프 한번 거하게 치셨네요. 골프만 친 게 아닌 거 같은데.”

그 말에 사장은 얼굴을 붉혔다.

말도 빨라졌다.

“부장님, 그 말씀은 굉장히 모욕적이네요.”

“모욕적이라. 왜요?”

“하청업체는 뭣 빠지게 원청 뒤를 빨아주는데, 우리가 원청한테 접대 좀 받은 게 그렇게 아니꼬우십니까?”

“그럴 리가요. 저도 협력업체 사장님들 많이 뵙고 많이 밥, 술 대접해드립니다.”

“그럼 뭡니까? 조 부장님이 하는 건 원청의 아량 넓은 비즈니스고, 다른 사람이 하는 건 수상한 뒷거래입니까?”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아뇨. 근데 기업이란 게 철저히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집단이거든요. 터놓고 말하자면 귀사는 우리가 그렇게 전력으로 접대할 가치가 없는 회사입니다.”

“듣자듣자 하니 참을 수가 없군요!”

“조금만 참으세요. 우리 회사 자체 기준으로 따지면 귀사는 커트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습니다. 꼭 귀사를 기준으로 커트라인을 설정해둔 건 아닌가 하는 오해마저 들게 말이죠.”

“조 부장님!”

사장은 자신이 느낀 모욕감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걸 아예 감정싸움으로 끌고 가는 게 차라리 유리했다.

으레 이런 감정싸움은 누구 말이 맞고 틀리냐를 떠나서 각자에게 반반의 책임이 지워지기 마련이니까.

그럼 무승부였다.

하지만 대찬은 사장이 고삐를 이끄는 대로 끌려갈 생각이 없었다.

대찬의 목소리는 시종 차분했다.

“귀사를 우리 돈을 써가면서 이렇게 호화롭게 대접할 이유가 없어요. 낭비입니다.”

“부장님!”

“자꾸 화나는 척 하지 마세요. 사장님 연기에 소질 없으세요.”

“지금 이게 연기로 보입니까!”

“그게 연기가 아니면 자식 분들 가르치실 때 애 좀 먹으셨겠어요. 누가 봐도 화내는 게 아니거든.”

“이익…….”

대찬은 대화의 주도권을 사장에게 용납하지 않았다.

“회사의 입장에서 별로 가치가 없는 협력업체에 왜 그 많은 돈이 투입되었는가. 이유가 뭘까요.”

사장은 뚱한 얼굴로 대찬을 노려봤다.

자신의 분노가 연기였다는 게 들통 난 마당이다.

여기서 더 화를 내자니 꼬락서니만 우스워질 뿐이었다.

그렇다고 말대답을 해봤자 대찬이 또박또박 받아치고 나설 것이다.

그에게는 선택지라고는 하나뿐.

입을 닫은 채 뚱한 눈으로 대찬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대찬은 사장의 닫힌 입이 흡족해서 살짝 미소를 지으며 할 말을 했다.

“귀사가 우리 회사에는 별로 가치가 없지만 회사 돈을 제 돈처럼 뿌려대는 누군가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억측입니다.”

“그 누군가가 저희 회사 마트사업부문장으로 계시는 도진석 전무님 같은데, 아닌가요?”

“도, 도 전무님이라니, 진짜 조 부장님 큰일 내실 분이네.”

“아닌가요?”

“아니에요! 절대로!”

“그래요? 그래도 도 전무님을 알긴 아시나 봐요.”

“모릅니다.”

“모르는데 도 전무가 누구냐고 묻지도 않으시고 바로 도 전무님이라고 말씀하세요?”

사장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그러니까 제 말은 누군지는 아는데 사적으로는 모른다 이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도 전무 이름을 안 들어봤겠어요? 원청업체 대빵인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아시는 거 맞네요.”

“도진석 전무라는 사람하고 접촉한 적은 없다, 이겁니다.”

“우리 회사에 오래 계셨던 분이 말씀하시더라구요. 사장님이 도 전무님하고 사적으로 아주 친밀하다고.”

기실 확인된 정보는 아니었다.

최 부장의 말이 장 과장의 입을 통해 대찬에게 전해졌지만 도진석 전무가 이래저래 가까이 지냈다던 하청업체 사장들 중에 그가 포함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심증만으로 밀어붙일 만했다.

대찬이 콕 찌르자 사장이 펄쩍 뛰었다.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필래 전무씩이나 되시는 분이 저를 만나주기나 하겠어요?”

“전무씩이나 되는 분이라야 사장님한테 쏟아부은 금액을 눈치 안 보고 투입할 수 있을 텐데요?”

“유도신문 마십시오.”

사장이 계속 잡아떼는 터, 대찬은 칼을 빼들었다.

“사장님, 대답 잘 하세요. 여하에 따라서 우리 회사와의 재계약 여부가 불투명해질 수도 있으니까.”

협박에 가까운 말에도 사장은 위축되지 않았다.

“부장님의 심술 한 번에 저는 물론이고 우리 직원들 수십 명을 길거리에 나앉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별로 신통하지도 않은, 거기에 솔직하지도 않은 하청업체와 꾸역꾸역 어깨동무하고 같이 걸어갈 이유가 없습니다. 직원들 먹여 살리는 건 사장님 책임이고요.”

“아주 치사하시네요.”

“바른대로 고하세요.”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정식으로 항의할 겁니다. 사내정치에 미쳐서 직원들 생계를 인질로 잡기까지 한다고. 언론이 가만있을 거 같아요?”

대찬은 씩 웃었다.

“뭐 얼마나 대단한 건수라고. 이런 일에 관심 가져줄 만큼 대한민국 국민들이 여유롭지가 않습니다.”

“진짜 악랄하시군요.”

“악랄한 건 사장님이죠. 끝까지 오리발 내미시니까.”

대찬이 이렇듯 잔혹하게 사장을 코너로 몰 수 있는 건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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