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45화
대찬은 송희근의 잔에 소주를 채워주었다.
송희근도 얼른 대찬에게 병을 넘겨받아 잔을 채워주었다.
둘은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대번에 달큰하고 씁쓸한 것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송희근은 쩝, 겸연쩍게 입맛을 다셨다.
“나 때문에 죽을 맛이지?”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죠. 지금 회사가 완전 히로시마, 나가사키예요.”
“미안해.”
“술맛 떨어지게 그런 말씀은 그만 하시고요. 마음 좀 편하게 잡수시라고,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마음이라도 불편해야 내 죄책감이 조금이라도 덜어지지.”
“그건 또 그러네요.”
대찬은 흐흐 웃으면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술맛이 가실 정도로만 안주를 조금 먹으며 말했다.
“정 그렇게 마음이 불편하시면 나중에 우리 팀 사람들한테 거하게 한 턱 쏘세요. 지금 보니까 직장인 월급은 일주일도 안 돼서 쓸어 담겠던데요.”
“아유, 쓸어 담긴.”
“그렇게 빼시면 또 섭섭하죠.”
송희근은 이도 저도 아닌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래, 나중에 일 잘 끝나면 마음 편히 한잔 하자고.”
“네, 나중 되면 이것도 다 추억이죠, 뭐.”
송희근은 쓴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넘겼다.
송희근과 적잖이 술을 마시고 다음날 출근한 대찬의 얼굴은 사뭇 그때와 달랐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서원웅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조 부장.”
“네, 대표님.”
“이번 이슈에 대해서 처리할 모든 권한을 위임할게요. 원하는 범위의 권한, 원하는 만큼의 인력, 자금 지원해줄 테니 해결 좀 부탁해.”
“알겠습니다. 내부적인 일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단, 외부의 이슈는 대표님이 직접 나서서 진두지휘해주셔야 합니다.”
“알았어요.”
대찬은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움직였다.
이슈에 대한 처분을 맡아서 처리하고 있던 건 감사팀이었다.
하지만 감사팀은 미적거렸다.
대표의 의중도 뚜렷하게 두드러지지 않았거니와 상대가 회사의 공식적인 넘버 투인 도진석 전무였다.
그렇기에 서슬 퍼런 칼날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찬은 이번 이슈를 감사팀에 맡기지 않았다.
태스크 포스(TF)팀을 만들었다.
팀의 정식 명칭은 제법 길었다.
팀의 정식 명칭은 ‘개인정보 편취로 인한 당사 신뢰훼손의 건 해결을 위한 태스크 포스’였다.
이름을 ‘개인정보 편취’에 초점을 둔 건 노골적으로 도진석 전무를 겨냥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조치였다.
대찬은 감사팀장을 찾아갔다.
“본의 아니게 일감을 뺏어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유, 별 말씀을요. 솔직히 우리가 사내 저승사자라고 불리지만 저승사자도 머슴 귀신은 잘 잡아가는데 대감 귀신은 잡아가기 껄끄럽거든요.”
“감사팀이 있는데 TF가 뭐 하러 필요하냐, 옥상옥 아니냐는 말도 나올 텐데 모쪼록 팀장님이 잘 무마해주시고요.”
“그것도 못하면 옷 벗어야죠.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감사팀 인원도 좀 빌려주십시오. 우리가 의지는 확실한데 아무래도 감사팀보다 전문성은 떨어지거든요.”
감사팀장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차피 자기가 고생하는 것도 아니고 남의 일손으로 생색내는 것이었다.
대찬은 매머드급 TF를 구성했다.
혁신경영팀의 인원이 다수 TF에 포함되었다.
대찬은 평소 신임하던 한태윤 차장과 유채경, 홍은주를 TF에 소속시켰다.
같은 부서는 아니지만 가깝게 지내던 상품기획부 장 과장도 불렀다.
거기에 더해 고객과 직접 만나는 현장의 의견을 반영하겠다는 명목으로 표성재 점장 역시 불러들였다.
감사팀 인원 다섯과 인사팀 직원 하나를 추가로 포함시켰다.
실무를 처리할 각 부서의 인원도 TF에 차출되었다.
서원웅은 이런 일련의 인원선발을 침묵으로 지원했다.
대인원을 거느린 대찬은 TF팀 발족식에서 선언했다.
“우리 TF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이 사태의 원인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낼 겁니다. 원인제공자를 관련 규정에 따라 엄벌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회사의 기강을 바로잡고 무너진 고객의 신뢰를 회복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TF팀원 여러분은 최선의 노력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럴 겁니다.”
선언과 동시에 TF팀의 업무가 시작되었다.
TF팀이 도진석 전무를 정조준하리란 건 회사사람들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다.
당사자인 도진석 전무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는 사무실 안을 초조하게 빙빙 돌았다.
손톱을 깨물고 가쁘게 숨을 쉬었다.
‘젠장… 서원웅 이 새끼가 이제 와서 뒤통수를 쳐?’
도진석 전무는 이를 갈았다.
이번 일만 잘 되면 서원웅을 대찬의 품 안에서 떼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세기 말, 일본은 조선에 강화도 조약을 강요했다.
조항의 1번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은 자주국가라는 것.
명목상 청나라의 속국인 조선을 청나라의 품에서 떼어냈다.
조선을 자립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잡아먹기 위함이었다.
19세기의 일본과 21세기의 도진석 전무는 상황과 규모는 달라도 품은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서원웅을 대찬의 품에서 떼어내 자신의 숙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곧 서원웅은 후계자수업을 받기 위해 지주회사의 요인으로 발령받을 것이다.
그럼 필래그룹의 알짜 계열사인 필래 비바체를 물려받는 건 자기 자신이 될 것이다.
그게 도진석 전무가 그린 거창한 청사진이었다.
그런데 대뜸 웬 감도 안 되는 과장 때문에 일이 틀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청나라 되놈들이 조선의 상투를 쥐고 자기에게 총부리를 들이댄다.
청일전쟁의 승자는 일본이었지만 대찬과 도진석 전무의 전면전에서 도진석 전무는 한없이 불리한 입장이었다.
서원웅의 변덕이 이번에는 대찬 쪽으로 기울었다.
게다가 도진석 전무는 대찬의 풋내기 시절부터 그의 수완을 봐왔다.
그의 솜씨가 얼마나 야무진지, 그리고 필요에 따라 얼마나 가혹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를 모르는 도진석 전무의 측근들은 철없는 공염불을 외웠다.
“전무님, 이번에 아예 칼을 빼 드세요. 조대찬 뭐 별 겁니까?”
“맞습니다. 이번 일이 잘못되긴 했지만 서 대표의 마음이 백 프로 조대찬에게 없다는 게 증명되었습니다.”
“지금 TF를 꾸렸다고 하지만, 제깟 놈이 검찰도 아니고 무슨 수로 우리 뒤를 캐겠어요?”
“이번 턴만 잘 넘기면 역전의 발판이 생깁니다. 사냥개 조대찬이 빈손으로 제 주인한테 돌아가면 서 대표가 그걸 가만 놔두겠어요?”
“그렇습니다. 우리 쪽으로 턴 넘어오면 송희근이랑 엮어서 조대찬한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습니다.”
측근들이 앵앵거리자 도진석 전무는 신경질을 부렸다.
“조용히 해! 조대찬한테 안 데여본 인간들이 다 아는 것처럼 쭝얼대고 있어.”
“…….”
“당신들 말대로 했다간 바로 내 모가지가 여기 필래타워 옥상에 효수된다고, 알아? 자기 모가지 아니라고 막말하고 있어. 썩 나가!”
상사의 고함에 측근들은 우르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지 위해준답시고 몇 마디 해줬더니 괜히 지랄이야, 개새끼.
누구는 저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아, 사회생활 힘들다.
측근들은 저들끼리 쑥덕거리면서 도진석 전무를 피해 달아났다.
도진석 전무는 손톱에 침 냄새가 배도록 한참 깨물다가 전화기를 들었다.
그는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 부장, 나야. 도 전무.”
“무슨 일이십니까.”
도진석 전무는 최대한 부드러운 투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찬의 대답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잠깐 보지. 내 방으로 와.”
“죄송하지만 지금 뵙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는데, 일단 얘기나 좀 하자고, 응? 어려운 일 아니잖나.”
“알겠습니다. 그러죠.”
대찬은 도진석 전무의 방으로 찾아갔다.
비서가 냉큼 캐모마일 차를 내왔다.
도진석 전무의 방에는 커피와 녹차밖에 구비되지 않았다.
대찬이 즐겨 마시는 캐모마일 차를 공수해왔다는 건 그만큼 신경 썼다는 티를 내고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대찬은 그의 기대를 외면했다.
한 모금도 먹히지 못한 캐모마일 차는 그대로 차갑게 식어갔다.
대찬이 잔을 들지 않자 타이밍을 놓친 도진석 전무도 준비한 커피를 마시지 못했다.
바싹 마른 그의 입에 수분이 공급되지 못해 더 말랐다.
도진석 전무는 제 딴에는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 부장, 힘이 잔뜩 들어갔던데.”
“어쩔 수 없죠. 돼지 잡을 때 오함마에 힘 빡 주고 내리쳐야 단번에 잡는 법이거든요.”
암묵적으로 돼지 취급을 받은 도진석 전무는 일순 얼굴에 분노를 드러냈다가 이내 사그라뜨렸다.
“일을 키울수록 회사만 곤란해져. 이런다고 서 대표가 좋아할 거 같아?”
“서 대표님 좋으라고 하는 거 아닙니다.”
“자네 꼿꼿한 거 인정해. 만만하지 않은 거 인정한다고.”
“전무님, 왜 벌써부터 제 발 저려 하십니까. 제가 전무님 잡아먹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요, 아직.”
“아직? 자네가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발이 안 저리고 배겨!”
대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무님께 아무 잘못이 없으면 아무 영향도 안 갈 겁니다.”
“조 부장.”
“제가 사표 쓰시라고 했을 때 자신 있으니까 안 쓰신 거 아닙니까.”
“…이러면 재미없어.”
“지금까지 재미 있으셨나봅니다. 저는 계속 재미없었는데.”
대찬은 툭 던지듯 말하고는 휙 자리를 떴다.
도진석 전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날뛰어봐라. 누가 다치나 두고 보자고…….”
그는 어느새 모락모락 오르던 김이 사라진 찻잔을 바라봤다.
인터폰을 눌러 비서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당장 찻잔 치워! 캐모마일 티 사온 것도 갖다 버려!”
인터폰이 꺼지고 비서는 중얼거렸다.
“뒤졌으면 좋겠다.”
잠깐의 만남은 선전포고와 다름이 없었다.
이제 도진석 전무도 대찬을 달콤한 말로 어르고 사나운 말로 겁박하는 시도를 포기할 것이다.
대찬이 선을 잡고 대대적인 공세에 들어갈 것이다.
도진석 전무는 열과 성을 다해 방어에 나설 것이다.
한 번의 공격에 명운을 걸어야 한다.
대찬이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하면 역공에 휘말릴 공산이 다분했다.
대찬도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 역시 무결점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논리 하나만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기세와 분위기가 좌우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나중에 지나고 보니 그땐 왜 그렇게 열을 냈었나, 따지고 보니까 그때 그 사람 말이 맞았는데, 하는 경우가 있다.
기세와 분위기에 휩쓸린 결과가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 그들이 각성해 봤자 이미 상황은 종료.
그럼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다음부턴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다짐 역시 알콜처럼 쉽게 휘발되고 마는 것이니, 또다시 휩쓸리고 마는 게 인간의 생리였다.
일단 기세는 대찬이 잡았다.
이대로 쭉 밀고 나가야 했다.
대찬은 혁신경영팀장의 업무를 허운에게 위임했다.
허운은 송희근보다도 미덥지 않았다.
그러나 소위 에이스로 분류되는 한태윤 차장과 유채경, 홍은주가 죄다 TF팀에 차출되었으니 허운 말고는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대찬은 그에게 신신당부했다.
“아무것도 하지 마. 숨만 쉬어. 알았지.”
“아, 진짜 섭섭하네요.”
“섭섭해 하지도 마. 숨만 쉬어.”
허운은 잔뜩 부은 얼굴로 흥, 콧방귀를 뀌었다.
대찬은 익살스럽게 웃으며 허운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TF팀은 제법 큰 회의실 하나를 통째로 사무실로 삼았다.
TF팀 사무실에는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그곳에서는 도진석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논의가 오고 갔다.
이런 분야에는 감사팀이 다른 직원들보다 훨씬 전문적이었다.
대찬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밑그림을 그렸다.
“도진석 전무의 카드 명세서와 통장 사본, 통화기록을 확보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면밀히 분석해 조금이라도 의심될 만한 정황은 즉시 보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팀장님.”
도진석 전무는 TF팀의 요구에 선선히 응했다.
그는 TF팀에서 요구한 서류를 그대로 제출했다.
아무런 저항 없이 내줬다는 건, 내줘도 무방하다는 뜻이었다.
바늘구멍만 한 오류마저 잡아내는 감사팀 직원들마저도 겸연쩍게 웃으며 대찬에게 말했다.
“전무까지 올라간 사람은 다르긴 다르군요. 용변 보고 뒤처리는 깔끔하게 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하지만 꺼진 불도 다시 봐야죠. 검토했던 자료들도 재검토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팀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번 일과 관련돼서 우리 회사와 업무제휴약정서를 체결했던 보험사들 있잖습니까.”
“예.”
“우리 회사와 그 보험사들 주변의 유흥업소들을 샅샅이 뒤져 탐문수사를 해주세요.”
“보험사 관계자와 도 전무가 접촉한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달라는 말씀이시죠.”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