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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44화 (344/556)

난 할 수 있어 344화

회의실을 나서는 대찬의 마음도 복잡했다.

물론 자신이 서원웅을 독점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다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향은 같아야만 한다.

지금껏 대찬이 물심양면으로 서원웅을 지지했던 건, 서원웅과의 물렁한 인간적인 관계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후순위의 요인이었다.

결국 서원웅을 돕는 게 스스로를 돕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원웅을 미천한 재벌가의 서자에서 필래그룹을 물려받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었던 건, 그러는 것이 대찬 자신에게 도움이 됐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런 일련의 과정이 없었다면 남들은 꿈도 못 꿀 고속승진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무럭무럭 자라는 로튼 프룻츠도 없었을 것이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림없는 사업들을 척척 벌여볼 경험의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대찬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천천히 혁신경영팀 사무실로 돌아갔다.

‘지금까지는 그랬는데.’

서원웅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찬의 환경도 빠르게 변했지만 서원웅의 환경이 변하는 속도는 차원이 달랐다.

몇 년 만에 껑충 뛰어올랐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주절대는 사람이 많아진다.

서원웅에게 닿는 대찬의 목소리가 많아진 사람들의 숫자에 비례하여 작아질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

대찬은 홍구완 사장이 서원웅에게 말했던 비파형동검이 자신이란 걸 알았다.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사람을 쇳덩이 취급하고 말이야.”

그러다 이내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청동이니까 쇳덩이도 못 되는구나.”

대찬은 실소를 지었다.

장인어른의 말을 서원웅이 마음으로 받아들였을까.

이제 시간이 지나면, 서원웅과 자신의 신세가 아득히 동떨어지게 되면, 그때가 되면 정말로 나를 도구로 취급하게 될까.

대찬은 우리 원웅이가 그럴 리 없어, 라고 시원하게 자답하지 못했다.

그럼 이대로 도구로 전락해야 하는가.

‘그럴 이유는 없지.’

교토삼굴.

똑똑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파놓는다고 했다.

대찬은 필래에 하나, 로튼 프룻츠에 하나 파 놨다.

하나가 모자라서 똑똑한 토끼는 못 돼도 멍청한 토끼는 면했다.

‘도구취급 하는 순간 다른 굴로 도망간다. 생물의 위대함을 보여줄게.’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직원들은 어미 새를 기다리던 아기 새들처럼 일제히 대찬을 바라봤다.

허운이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일단 어영부영 끝나버렸어.”

“에, 그래도 되는 거예요? 1초라도 빨리 입장표명 하고 치워버리는 게 좋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난리예요, 지금. 기사도 벌써 몇백 개나 나왔다고요.”

“대표님 의중이 그러니까 어쩌겠어. 일단 전달사항. 필래 비바체 전 임직원은 이 이슈에 대한 개별행동이 엄격히 금지된다.”

“그거 하나 결정하려고 임원들 깡그리 모아다 회의한 거예요?”

“응.”

“참 임원 분들도 별 거 없네요.”

허운의 필터링 되지 않은 발언에 대찬은 스읍, 눈치를 줬다.

“큰일 날 소리.”

“근데 맞잖아요. 빨리 사과하고 털고 가야지 이게 뭐야.”

“그러게.”

대찬은 힘 빠진 목소리로 이번만큼은 허운을 꾸짖지 못했다.

오다혜가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개별행동이 금지되는 임직원에 팀장님도 포함이에요?”

“어?”

“대표님 믿을맨이라곤 팀장님 하나뿐인데, 설마 팀장님한테도 꼼짝 마라 하진 않으셨을 거 같아서.”

대찬은 씩 웃었다.

“비밀이에요.”

“역시 뭐가 있긴 있었네요.”

오다혜는 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흐흐 웃었다.

대찬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옥문영 상무는 홍보실에 지시해서 개인정보를 보험사에 팔아넘기는 일련의 조치들을 모두 취소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거국적으로 떠들썩한 이슈가 돼버린 차.

초가삼간이 불타는데 물 한 바가지 부은 꼴밖에는 되지 않았다.

대찬은 표성재 점장에게 연락을 넣었다.

“점장님, 이번에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유, 뭘요. 근데 솔직히 놀라긴 했어요. 송 과장님이 저랑 얘기한 다음에 그렇게 빵 터트릴 줄은 몰랐거든요.”

“점장님만 놀랐겠어요. 나도 뒤로 나자빠졌지.”

“하긴, 조 부장님은 더 놀라셨겠네요.”

“이번 이슈, 필드에서도 체감되죠?”

대찬의 질문에 표성재 점장은 혀를 내둘렀다.

“아유, 말도 마세요, 난리예요. 오늘도 무슨 강북구소비자연대인가 뭔가 하는 시민단체에서 현수막 들고 구호 외치다 돌아갔다니까요. 일반 소비자들도 캐셔들한테 한 마디씩 툭툭 던져대고.”

대찬은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빨리 조치를 취해서 사태 해결에 노력하겠습니다.”

“에휴, 진짜 회사 수뇌부 너무한 거 아닙니까? 이번에 경영지원부문에서 지침 하달됐는데, 근원적인 해결책은 없고 다 미봉책뿐이에요.”

대찬은 표성재 점장의 지적이 뼈아팠다.

대찬은 표성재 점장의 부점장 시절을 떠올렸다.

그렇게 엉망진창이었던 기억이 대찬의 뇌리에 선명했다.

그랬던 이가 필래 비바체 수뇌를 향해 가감 없이 날선 비판을 날리니, 그 누구의 비난보다도 뼈아팠다.

표성재 점장은 볼멘소리를 이어갔다.

“부장님도 참 어지간하세요.”

“제가 뭘요?”

“이제 보면 이 회사 일은 죄다 부장님만 하는 거 같아요. 시가총액 5조를 헤아리는 회사가 한 사람 힘으로 움직인다는 게 말이 돼요?”

“무슨 아부를 그렇게 대놓고 하세요?”

“아부였으면 목소리나 살랑거리면서 말했죠. 솔직히 사실이 그런 걸.”

“됐습니다. 아무튼 조금만 견뎌주세요. 대표님 옆구리 쿡쿡 찔러가면서 조속히 해결할 테니까.”

“조속히는 이미 물 건너갔어요.”

“점장님도 어지간히 혀가 길어지셨네.”

“부장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으레 그렇게 변하지 않던가요? 다 부장님한테 배운 거지, 뭐.”

대찬은 헛웃음을 지었다.

“끊어요.”

대찬은 전화를 끊었다.

이제 도진석 전무를 향해 칼을 빼들 차례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대찬은 퇴근 후, 마트에 들러 간식거리를 잔뜩 샀다.

배가 빵빵한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어딘가로 향했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까지 우후죽순으로 지어진 아파트의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낡아빠진 아파트의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가정을 찾아갔다.

그 집의 초인종 소리도 요즘처럼 세련된 소리가 아니라 띵동,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였다.

초인종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중년 여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세요?”

“안녕하십니까, 형수님.”

대찬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중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형수님이라고 하니 의아할 따름.

대찬은 웃으면서 자기를 소개했다.

“저, 필래 비바체 조대찬 부장이라고 합니다.”

“조대찬……? 아아, 그 재수 없는… 아, 죄송해요. 우리 그이 상사시구나.”

대찬은 민망한 웃음을 잠깐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는 상사도 아니죠. 송 과장님, 아니 우리 희근이 형님 뵈러 왔습니다.”

“얼른 들어오세요. 아유, 뭘 이런 걸 다 사오셨어.”

“애들 먹으라고요.”

그러자 송희근의 아내는 호호 웃었다.

“애들 좋아는 하겠다. 내가 요즘 맛없는 건강식으로만 차려서 잔뜩 뿔나있었거든요.”

“저 때문에 말짱 도루묵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러라지, 뭐.”

아내는 시원시원하게 대답하고 대찬을 안으로 들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집 냄새가 확 끼쳤다.

집마다 냄새가 다 다른데, 어렸을 적 친구 집을 놀러갔을 때 나던 냄새와 꼭 같았다.

“집이 아늑하네요.”

“비좁다는 걸 예쁘게도 표현하시네.”

“아유, 그런 뜻은 아니고요.”

“앉아요. 커피 드실래요?”

“괜찮으시면 물 한 잔만 얻어 마시겠습니다.”

“그래도 선물을 두 보따리나 받았는데 맹물로 되나. 꿀차라도 한 잔 해요.”

대찬은 씩 웃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내는 대찬의 앞에 꿀차를 내놓으며 말했다.

“이이 지금 방송 중이라. 빨리 끝내고 나오라고 할게요.”

“아, 괜찮습니다. 이젠 방송이 본업이잖습니까. 다음에 따로 연락드리고 찾아봬야겠네요.”

“아유, 바쁜 사람한테 어떻게 그래요. 조금만 있어 봐요.”

아내는 송희근의 ‘방송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녀를 발견한 시청자들이 열광했다.

-내무부 장관님 등장

-장관님, 후원금 5만 원 쏘면 리액션 해주시나요?

-장관님 오늘 저녁메뉴는 뭔가요.

아내는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 그걸 슥 보고도 외면하며 송희근에게 말했다.

“대충 방송 끝내요.”

-와, 섭섭하다.

-지금 꿀잼 타이밍인데 왜 끝내라고 하세요, 장관님 ㅠㅠ

송희근도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 끝내? 아직 정해진 시간 되려면 한참 남았어.”

“손님 왔어.”

“손님? 누구.”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대찬이 문틈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매의 눈을 가진 시청자들이 약간 나온 얼굴만 보고도 알은체를 했다.

-헐! 윤이영 커피남 아님?

-대박, 오늘 특별 게스트인가요.

그 말에 송희근이 급히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아, 아니 특별 게스트가 아니라…….”

-쏭과장 또 불러놓고 쑈한다.

-빨리 앉혀.

-안 부르면 시청자 한 방에 바로 빠진다.

송희근 과장이 큰 건을 터트린 이후, 시청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본디 이 세계가 그랬다.

흐름을 한번 타면 용이 여의주 물고 승천하듯 대류권을 뚫고 성층권을 뚫고 우주로 날아가는 법이다.

20만이 채 안 되던 구독자는 이제 30만을 헤아렸다.

30만은 잠깐 정차하는 간이역이고 40만, 50만은 우습게 넘길 태세였다.

말 그대로 기호지세, 호랑이에 올라탄 기세였다.

그런데 흐름을 탔는데 잘못 고꾸라지면 그대로 여의주 놓친 이무기 신세가 되고 만다.

자전거에서 떨어지면 발목 삐끗하고 그만이지만 달리는 페라리에서 떨어지면 최소 중상에 목숨도 잃는다.

그러니 송희근은 시청자의 아우성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대충 분위기를 파악한 대찬은 씩 웃으며 송희근의 옆에 착석했다.

그러자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안녕하세요, 조대찬이라고 합니다. 우리 백수 쏭과장 잘 먹고 잘 살게 잘 부탁드립니다.”

-와, 커피남이다!

-쏭과장 어떻게 하다가 잘렸는지 썰 좀.

-솔직히 회사 얘기는 관심 없고 윤이영 얘기나 ㄱㄱ

-다 집어치우고, 윤이영하고 사귀게 된 썰이나 풀어 봐요.

“윤이영 씨랑 어떻게 사귀었는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네요. 얘기 안 할 수가 없지. 그러니까요, 윤이영 씨는 원래 저한테 관심이 없었는데 제가 꼬셨거든요? 어떻게 꼬셨냐 하면…….”

대찬은 정해진 시간까지 한참 송희근의 방송 도우미 역할을 했다.

덕분에 송희근의 방송은 급물살을 타고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 오르락내리락 했다.

밤이 되어서야 방송실의 불이 꺼질 수 있었다.

송희근은 대찬과 함께 거실로 나오면서 말했다.

“바쁘실 텐데 여긴 어쩐 일로 다 오셨어요?”

“에이, 말 놓으라고 했잖아요. 우리 인연 직장 동료로 끝내려고 이러시는 거예요?”

“그건 아닌데…….”

“대찬아, 해보세요. 대찬아.”

“…대찬아.”

송희근의 부름에 대찬은 만족스럽게 웃고는 송희근의 아내에게 말했다.

“남편 분이랑 나가서 소주 한잔 하려고 하는데, 잠깐 빌려도 될까요?”

“아예 영영 데리고 가주면 안 돼요?”

“그건 곤란해요. 아무리 봐도 동거인으로는 송희근 씨보다 윤이영이 백만 배 낫거든요.”

대찬은 흐흐 웃고는 송희근을 데리고 근처 작은 선술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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