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43화
당사자도 아닌 오윤 전무가 찔끔 놀라면서 그를 만류했다.
“조 부장, 감정적으로 나오면 곤란해.”
“감정적으로 안 나올 수가 없겠습니다. 도진석 전무님, 전무 자리 꿰차고 회사 위해서 벽돌 한 장 놓지는 못할망정 아예 와르르 말아 드시려고 작정하셨습니까?”
“야!”
“시정잡배처럼 야야 거리지 마. 최소한의 품위는 지켜. 어디서 종놈 부르듯이 불러. 당신 그럴 자격 없어.”
대찬은 지금껏 숨겨왔던 포문을 일거에 열어젖혔다.
유례없는 초강수에 서원웅도, 오윤 전무와 옥문영 상무도, 그리고 그 이하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인원들은 아연실색했다.
맞불을 놓는 도진석 전무도 대찬의 저런 태도에 속으로는 크게 놀랐다.
폭발하는 성질머리로는 누구도 따를 자 없는 옥문영 상무마저 화들짝 놀라며 대찬을 만류할 정도였다.
“조 부장, 왜 이래!”
“가만 두십시오. 오늘 사생결단 낼 겁니다.”
“조, 조 부장!”
“안 그러면 오늘 같은 일이 또 발생할 거고, 그럼 진짜 회사 망해요.”
대찬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그는 도진석 전무를 잡아먹을 듯이 쏘아봤다.
“책임지세요.”
“이, 이 새끼가……! 야! 잡을 거면 송희근이를 먼저 족쳐야지! 지금 네 새끼라고 감싸고 도는 거야!”
그 말에 대찬은 주저 없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탁, 탁자 위에 올려놨다.
“송희근 과장 사표입니다.”
“…….”
“이 사람은 회사 관두는 걸로 자기 책임 다했습니다. 그걸로 성에 안 차면 징계위원회 열어서 해고하시죠. 그럼 된 거고요. 도 전무님, 당신도 사표를 내든 뭘 하든 책임을 지란 말입니다.”
대찬이 완전히 배수진을 치고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달려들자 도진석 전무의 기세가 당해내질 못했다.
결국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거 왜 이래, 진짜.”
“송 과장은 절 대신해 혁신경영팀을 지휘하면서 문제의 기안서를 반려했습니다. 그런데 도 전무 당신은 기어코 그걸 관철시켰죠.”
“이건 전혀 위법이 아니야! 합법이라고! 회사 위에서 합법적으로 영리 취할 방법을 올렸는데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거야!”
“이 일의 본질조차 꿰뚫지 못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도 전무 자격 상실입니다.”
“야! 너무 말이 심하잖아!”
“모든 책임지고 공개사과 하세요. 그리고 사표 쓰세요. 그게 도 전무님이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는 일이니까.”
“내, 내가 미쳤다고!”
대찬은 입술을 악물었다.
“싫으세요? 그럼 도 전무님 하나 때문에 회사 전체가 침몰해버리면 속이 시원하시겠어요?”
도 전무는 침을 꼴깍 삼키며 서원웅을 걸고넘어졌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서원웅을 바라봤다.
“대, 대표님! 이건 제가 대표님께 제의 드리고 대표님께서 최종적으로 승인한 일입니다. 지금 조 부장은 대표님의 결정을 저따위로 비난하고 있는 겁니다!”
“…….”
대찬은 서원웅이라고 가볍게 넘어가지 않았다.
“도 전무님 말씀이 맞습니다. 여기에는 대표님 책임도 분명히 있습니다. 대표님도 도 전무와 함께 공개석상에 나서 사과하셔야 합니다.”
“저, 저 새끼 말하는 본새 좀 보십시오!”
도진석 전무는 이제 체면이고 뭐고 아예 서원웅의 그림자에 숨으려고 했다.
오윤 전무가 딱딱한 절차 없이,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자고 한 말이 과하게 실현되었다.
임원회의는 문자 그대로 난장판이 되었다.
서원웅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대찬을 바라봤다.
대찬도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대찬은 이번에는 조금의 양보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대찬이 서원웅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지금껏 보지 못한 면모에 서원웅은 다소 위축되었다.
“…일단 송희근 과장의 사표는 수리하지 않고, 징계위원회를 통해 해고처분을 내리는 방향으로 처리하죠.”
“…….”
“그리고 대외적으로 사과를 할지 말지 여부는 다음 회의 때 결정하도록 합시다.”
이 말에 지금껏 대찬을 만류하던 옥문영 상무 역시 목소리를 높였다.
“대표님! 지금은 긴급회의입니다. 긴급회의의 결론이 중요 사항을 다음 회의 때 결정하겠다는 것이 돼서는 안 됩니다.”
“…압니다. 하지만 신중해야 할 사안이에요.”
“대표님!”
서원웅은 차분하게 말했다.
“도 전무 말씀대로 우리가 위법을 저지르진 않았습니다. 우리가 공개사과를 하면 법정에서 무죄 판결이 나올 게 유죄 판결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자 대찬이 기가 막히다는 듯 서원웅에게 말했다.
“대표님, 만약에 이 일이 법정까지 간다손 쳐도 항소하고 상고하면 몇 년씩이나 걸릴 겁니다.”
“알아요.”
“당장 발등에 불 떨어졌는데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있으십니까?”
서원웅은 덤덤한 얼굴로 대꾸했다.
“지금의 소란은 잠깐일 수 있지만 법원의 판단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으로 돌아옵니다. 냉철하고 종합적으로 판단을 해야 합니다.”
“동의하기 힘듭니다.”
“최종결정권자는 나예요. 의견을 말하는 건 자유롭게 두겠지만 제 결정권을 침해하는 것까진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대찬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놓으며 말했다.
“물론 결정은 대표님 몫입니다. 그 권한마저 침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부디요, 대표님, 꼼수가 아니라 정수로 들이박는 걸 권해드립니다. 진심으로요.”
“새겨 듣죠. 일단 회의는 이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우선 옥문영 상무님.”
옥문영 상무는 여전히 찜찜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경품행사를 통해 수집된 개인정보를 보험사에 넘기는 일은 없을 거라는 입장 먼저 홍보실을 통해 밝히세요.”
“알겠습니다.”
“사과 혹은 유감표명 여부와 사과의 주체, 금전적인 보상방안의 여부는 차후 결정하겠습니다.”
옥문영 상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 회의는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중차대한 이슈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물론, 우리 회사 소속의 직원들 누구도 단독행동은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해사행위로 규정하고 엄정히 징계를 내릴 테니, 이 부분 확실히 고지해주세요.”
“예, 대표님.”
그렇게 다른 임원들은 각자의 사무실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대찬은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서원웅은 그를 흘끔 바라보며 말했다.
“안 돌아가?”
“대표님, 퇴근하고 따로 식사하시면서 말씀 좀 나누시죠.”
“할 말 있으면 지금 해.”
“여기서는 상하관계가 분명해서 할 말 제대로 못하거든요.”
서원웅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계급장 떼고 하고 싶은 말 다 해.”
“그럼 그렇게 할게. 야,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무슨 말 하고 싶은지는 알겠어. 재방송 안 해도 돼.”
대찬은 기가 차서 실소를 터트렸다.
“그렇게 잘 아는 양반이 이런 일을 저질렀어?”
“내가 네 눈치 보면서 결정해야 할 의무는 없어.”
“누가 내 눈치 보래? 소탐대실이야. 도 전무 감언이설에 홀딱 넘어가버리면 어떡해. 우리 팀에서 반려조치까지 했는데.”
“혁신경영팀 의견은 충분히 숙고했어. 그럼에도 이게 회사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해서 결정한 일이야.”
“원웅아.”
서원웅은 대찬을 지그시 바라봤다.
“대찬아, 네 논리, 내 마음 다 알아. 근데 너랑 나는 입장이 다르잖아.”
“입장이 다르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고고한 학처럼 굴기만 해서는 이 서슬 퍼런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결벽증 걸리자는 얘기는 아니야. 정도는 지켜야지. 우리 해온 만큼만 하자고. 지금까지 정도 지키면서 회사 이만큼 키워왔잖아.”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인정해. 그런데 지금부터는 그렇게만 해서는 곤란해.”
“곤란하다?”
“청동기시대가 지났어. 이제 철기야. 언제까지 비파형동검만 들고 철기시대를 누리겠어.”
대찬은 피식 웃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뭐?”
“내가 네 장인어른에 좀 관심이 있어서 자서전도 읽어보고 어록도 읽어봤거든. 청동기, 철기 운운하는 게 그 양반 단골 레퍼토리더라고.”
“…….”
대찬은 얕은 숨을 내쉬고 말했다.
“혹시 이런 말도 했는지 모르겠네.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용인술이다.”
“…….”
“용인술은 그 사람을 쓸지 말지 결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구구절절 동감해.”
서원웅은 잠자코 대찬의 말을 들었다.
대찬은 서원웅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도진석 한번 써봤다가 이번에 호되게 당했지. 그럼 판단 선 거야. 쓰지 말아야지. 버려야지.”
“…….”
“아직도 도진석한테 미련이 남았어?”
서원웅은 고개를 저었다.
“미련 남길 정도로 애초에 그 사람을 신용한 적도 없어.”
“그래, 그럼 됐네. 잘라.”
지금껏 대찬이 서원웅에게 했던 말은 권유의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원웅이 고압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단호했다.
대찬은 말을 이었다.
“이미 터진 일 갖고 나도 오래 왈가왈부할 거 없어. 미래를 얘기하자. 도진석 공개사과 시키고 도려내. 그게 올바른 수순이야.”
서원웅은 즉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의 뇌리에는 수많은 말들이 오고갔다.
지금까지는 편했다.
대찬의 말만 들으면 지니의 요술램프처럼 뚝딱 실현되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서원웅의 의사결정에 간섭하는 스피커가 너무 많아졌다.
고려해야 할 상황도 너무 많아졌다.
그렇기에 대찬의 말에 덜컥 오케이 사인을 내리지 못했다.
대찬은 서원웅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입이 바싹 말랐다.
“원웅아.”
“좋아, 알았어.”
서원웅과 대화를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대찬은 그것에 다소 안도했다.
“잘 생각했어.”
“근데 도 전무를 쉽게 뭉텅 잘라내기가 내 입장에서는 힘들어.”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도 전무가 혼자 죽으려고 안 할 테니까. 어떻게든 널 물고 늘어질 거야.”
“그게 문제야.”
“나한테 맡겨.”
“너한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깔끔하게 도려내줄게, 도 전무.”
서원웅은 말로 대답하지 않고 눈빛으로 대답했다.
무언의 승낙이었다.
대찬은 잠깐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뭔데?”
“송 과장님, 징계 없이 그냥 사표만 수리해.”
“오래 알고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편의를 봐줄 순 없어.”
“그런 이유로 봐주라는 게 아니야. 송 과장은 내부고발자야. 제 발로 떠나겠다는 마당에 내부고발자를 끝까지 가혹하게 다루면 우리한테도 결코 좋지 않아.”
“그래도 회사 기강의 문제야. 송 과장님이야 올바른 목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해도, 이번에 무르게 처리하면 다음에 제2의 송 과장님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어.”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그때는 가혹하게 하면 돼. 만일 송 과장님을 해고하면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꼴이 돼. 그러면 사과해도 의미가 없어지는 거야.”
“…….”
“인간의 정리에 이끌려서 하는 말이 아니라 회사의 이익을 위해 하는 말이야. 그냥 사표 수리하는 선에서 끝내.”
“…알았어.”
대찬은 슬며시 웃었다.
“잘 생각했어. 도진석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너는 뒷짐 지고 물러나 있어.”
서원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개운하지는 않지만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대찬은 서원웅에게서 물러났다.
회의실을 나서려는 대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원웅이 그를 불렀다.
“대찬아.”
“어.”
대찬은 뒤돌아 서원웅을 바라봤다.
서원웅은 감정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얼굴로 말했다.
“서운하지.”
“서운한 게 아니라 실망했어. 미래의 재벌총수 입장에서 조금 몸을 더럽혀야 한다는 거, 알고 있어. 그래도 네 본질을 더럽히진 마. 옥의 티는 어쩔 수 없지만 네가 옥이기를 포기하면 안 돼.”
“…알았어.”
대찬은 그대로 회의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서원웅은 고개를 뒤로 휙 젖힌 채로 한참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