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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40화 (340/556)

난 할 수 있어 340화

표성재 점장은 착실히 송희근 과장을 도와주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파일로 만들어 이메일로 전송했다.

이제는 제법 일 눈치도 생겼는지, 회사 이메일이 아니라 송희근 과장의 개인 이메일로 전송했다.

전달된 자료들은 혁신경영팀 직원들이 받아서 분석했다.

실마리를 얻는 데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고객의 개인정보를 취할 수 있는 건’으로 타깃을 한정해놓으니 잘 보였다.

자료를 뒤지던 허운이 잠깐 멈칫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송희근 과장을 천천히 돌아보며 말했다.

“과장님.”

“왜.”

“저 한 건 한 거 같아요.”

그러자 송희근 과장의 좁쌀눈이 살짝 커졌다.

“뭐?”

“이것 좀 보세요.”

허운은 표성재 점장이 보내온 자료 중에 한 이미지 파일을 인쇄했다.

홍은주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잉크 없는데 왜 칼라로 뽑으셨어요. 그냥 흑백으로 뽑으시지.”

“흥, 홍 대리는 항상 자기 일침이 맞는 줄 알지? 이번에는 홍 대리가 틀렸어.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거든? 이번엔 내가 맞아. 칼라로 뽑아야 된다고, 이건.”

허운은 홍은주에게 응수하고는 인쇄물을 들고 송희근 과장에게 갔다.

그러자 철가루가 자석에 이끌리듯 다른 직원들도 우르르 그 주변으로 몰려갔다.

허운에게 인쇄물을 넘겨받은 송희근 과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당첨 확률 100퍼센트 고객감사 이벤트… 응모 안 하면 호구 된다는 전설의 행사가 왔습니다?”

송희근 과장은 읽기만 해도 닭살이 돋는 광고 문구를 또박또박 발음했다.

그러면서 허운을 올려다봤다.

“이게 뭐?”

“보세요. 이름하고 핸드폰 번호 적게 돼 있잖아요.”

“이걸로 개인정보를 수집해서 보험사에 내다 판다 이 얘기야?”

“네.”

“근데 동의를 구하는 문구가 없는데?”

“있어요.”

송희근 과장은 허운에게 인쇄물을 들이밀며 말했다.

“어디 있어? 없잖아.”

“죄송하지만 노안이 오신 분들은 볼 수가 없어요.”

“뭐, 뭣……?”

허운은 혁신경영팀을 OB와 YB로 나눈다면 YB에 속하는 김산호에게 인쇄물을 내밀었다.

“여기 이거, 읽을 수 있겠어?”

“네? 어… 잘 보이지는 않는데…….”

“잘 봐봐.”

“모르겠어요. 저 까만 얼룩 같은 게 글씨인 건 알겠는데, 내용은 모르겠어요.”

그러자 OB의 자존심을 지킨 송희근 과장이 콧방귀를 뀌었다.

“거 봐. 여기서 노안이 왜 나와?”

“여기 돋보기 갖다 대서 보니까 이렇게 적혀 있어요.”

“뭔데?”

“개인정보는 보험사 마케팅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허운의 말에 송희근 과장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덜미를 잡았다.

허운은 씩 웃으면서 말했다.

“사람 머리가 다 거기서 거긴가 봐요. 되게 고전적인 수법이잖아. 난 또 전무 대가리는 좀 다른 대가리인 줄 알았지.”

한태윤 차장은 앉은 채로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말했다.

“도 전무의 꼬리를 밟긴 밟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 아닙니까?”

송희근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대표님 결재까지 떨어진 이상 우리가 함부로 터트리지 못한다는 게 문제지.”

“맞습니다, 과장님.”

송희근 과장은 깊은 숨을 들이쉬고 한태윤 차장에게 말했다.

“그런데 말이지요, 한 차장님.”

“네?”

“그게 문제가 되려면 전제가 하나 필요하잖아.”

그렇게 말하는 송희근 과장의 목소리가 어딘지 예사롭지 않아 한태윤 차장은 의아했다.

“무슨 전제 말씀이십니까?”

“솔직히 서원웅 대표, 도진석 전무, 그 사람들 아랫사람이라야 그 사람들이 무섭잖아.”

“예, 그렇죠. 지금 우리는 그 사람들 아랫사람들이고요.”

“자연인 서원웅, 자연인 도진석은 안 무섭잖아?”

“…….”

“군대에 있을 때 사단장 온다고 하면 며칠 전부터 내무반 미싱하고 별 지랄 다 하지만, 전역하면 그냥 동네 배 나온 아저씨랑 다를 게 없잖아.”

“…예, 그렇죠.”

“그렇지? 그냥 그렇다고.”

송희근 과장은 슬며시 웃다가 다시 정색했다.

한태윤 차장은 그냥 찜찜하고 말았지만, 송희근 과장을 바라보는 허운의 눈빛은 흔들렸다.

그는 혁신경영팀에서 송희근 과장의 비밀스러운 부업을 알고 있는 두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니 그런 말이 공연한 푸념으로 들리지만은 않았다.

허운은 송희근 과장과 단둘이 있을 때 슬쩍 말을 꺼냈다.

“과장님.”

“응?”

그렇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지난 며칠간의 피폐한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내려놓을 것을 내려놓은 듯, 편안한 목소리였다.

“설마… 아니죠?”

“아니긴, 뭐가?”

“제가 생각하는 거요.”

그러자 송희근 과장은 꿍얼거렸다.

“내가 뭐 독심술사야? 내가 허 과장 생각을 어떻게 알아?”

허운은 찝찝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튼 버티셔야 돼요, 알았죠?”

송희근 과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버텨? 그래, 버틸게.”

“과장님, 그러니까…….”

송희근 과장은 허운의 말을 막았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내가 아무리 찌질하고 한심해도 시시콜콜 허 과장한테 코치 받고 싶지 않아.”

“…알았어요.”

송희근 과장은 피식 웃고 허운의 곁을 떠났다.

그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터덜터덜 걸었다.

그 걸음걸이를 보고 허운은 온갖 상상을 다 했다.

‘뭐야, 왜 저러시는 거야, 진짜.’

허운은 그가 회사를 관두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회사를 관두기만 하면 다행이지. 설마…….’

설마 옥상에 올라가서 투신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생각까지 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얼마든지 그런 무서운 짓을 벌이기 마련이니까.

허운이 그렇게 송희근 과장을 따라나서려는데, 유채경이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채경아.”

“여보, 그냥 송 과장님 알아서 하시게 둬.”

“그러다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도 하시면…….”

“허 과장한테 코치 받기 싫으시다잖아.”

“……그래도.”

유채경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눈빛에 기운은 없어도 총기는 선명하셨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허황된 짓, 안 하실 거야.”

“그렇지 않더라도 회사 그만두시면 어떡해.”

“그럼 그건 과장님 선택이야. 이미 당신이 내세울 논리 정도는 본인도 여러 번 곱씹으셨을 거라구. 당신이 그런 송 과장님 말릴 자격이 있어?”

“…없지.”

“그래, 없어.”

직장 동기이자 부인의 간언에 허운은 쩝, 불편한 입맛만 다시며 송희근 과장의 빈자리를 흘끔 바라봤다.

밖으로 나온 송희근 과장은 무엇엔가 이끌리듯 걸었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마트사업부문장실’.

즉 도진석 전무의 사무실이었다.

사무실 앞에 자리한 비서가 일어나서 송희근 과장에게 물었다.

“전무님과 약속이 잡혀있으신가요?”

비서의 물음에 송희근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 이 시간에요?”

“네.”

“이상하네요. 지금은 부문 소속 부장님들하고 회의 중이신데.”

“아, 그럼 지금 사무실에 계시단 말씀이네요.”

“네? 저, 저기요!”

비서가 그를 붙잡으려고 할 때는 이미, 송희근 과장의 손이 문고리를 열고 안으로 들어간 이후였다.

벌컥.

송희근 과장이 안으로 들어가자 한창 부장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도진석 전무가 그쪽을 바라봤다.

그는 송희근 과장의 얼굴을 확인하고 오만상을 썼다.

“뭐야?”

“전무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자 자리의 부장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송희근 과장과 알고 지내는 얼굴들이 대부분이었다.

“야, 희근아, 이게 뭐 하는 거야.”

“미쳐도 제대로 미쳤네, 저 새끼.”

송희근 과장은 그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도진석 전무에게만 말했다.

“전무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미친놈, 고장 난 인형처럼 똑같은 말만 쭝얼거리네.”

“들어주시겠습니까.”

도진석 전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나랑 얘기하고 싶으면 정식으로 일정을 잡아. 보자보자 하니까 이 새끼가.”

“안 만나주실 거잖습니까.”

“그러든 말든 절차를 지켜야 할 거 아니야!”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듯한 소리에 부장들의 어깨가 손에 닿은 조갯살처럼 움츠려들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송희근 과장은 의연했다.

“경품 행사로 고객 개인정보 유출해서 보험사에 팔아넘기는 거, 추한 짓입니다. 관두십시오.”

“…뭐야?”

도진석 전무는 멈칫했다.

두 가지 때문에 놀랐다.

하나는 저 어리벙벙한 놈팡이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가, 의외의 명석함 때문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제 아예 정신이 나가버려서 물불 안 가리고 자기한테 덤비는 만용 때문에.

도진석 전무는 당황과 분노 때문에 떨리는 눈빛으로 외쳤다.

뒤가 켕기는 개는 더 크게 짖는 법이었다.

“어디서 무슨 헛소리를 듣고 와서는 이 난장이야!”

“경품행사를 위장해서 개인정보 수집하기로 한 거 다 알고 있습니다.”

“개길 거면 똑바로 알고나 개겨. 거기 안내문구 다 써 있거든?”

“재보니까 글자 크기가 1mm더군요. 몽골사람도 못 알아볼 겁니다.”

“몽골사람이 알아보는지 못 알아보는지는 네가 구해다 테스트해보고, 아무튼 위법사실 없으니까 쓸데없이 해사행위 하지 말고 꺼져.”

“해사행위는 누가 하고 있습니까? 전무님이 지금 회사를 망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부장들이 나서서 아우성을 쳤다.

“야, 송희근! 전무님이 좋게 말씀하실 때 물러나!”

“당신들도 부끄러운 줄 알아! 그저 단물 나올까 도진석 똥구멍이나 빨아대고 있는 걸 부끄러운 줄 알라고!”

“뭐, 뭐얏! 이 새끼가! 비서! 뭐 하고 있어! 당장 내보내!”

비서가 부른 보안업체 직원들이 우르르 도진석 전무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거칠게 송희근 과장의 두 팔을 억센 팔 근육으로 결박했다.

송희근 과장이 도진석 전무를 향해 꽥꽥 소리를 질렀다.

“보험사한테 손님들 개인정보를 팔아넘겨? 그걸 사람들이 알면 가만히 있을 거 같아!”

분노로 얼굴이 벌게진 도진석 전무가 송희근 과장보다 더 큰 목소리로 항변했다.

“정상적인 비즈니스다, 이 새끼야! 업무제휴약정서 쓰고 다 하자 없이 처리했어! 가만히 안 있으면 어쩔 건데!”

“개새끼야!”

“개새끼는 너고!”

나이답지 않은 유치한 욕설로 공방전이 마무리되었다.

밖으로 끌려 나가는 송희근 과장을 향해 아직 분이 덜 풀린 도진석 전무가 소리를 질렀다.

“내가 너 진짜 옷 벗겨줄 테니까 각오하고 있어!”

쾅.

신경질적으로 사무실의 문이 닫혔다.

광분한 도진석 전무를 부장들이 살살 기며 달래는 목소리가 문이 닫히는 틈새로 들렸다.

송희근 과장은 그대로 사무실 밖에 내동댕이쳐졌다.

송희근 과장의 가슴이 벌렁거렸다.

퇴근길.

혁신경영팀 사무실을 나서 사옥의 바깥으로 빠져나가기까지의 짧은 여정.

스쳐 지나는 직원들마다 송희근 과장을 흘끔거렸다.

그의 남루한 꼬락서니가 필래 비바체는 물론, 사옥에 입주한 필래그룹 계열사 전체로 알음알음 퍼져나간 듯했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 중에는 동정도 있었고 조롱도 있었다.

동정과 조롱은 별개의 감정이었지만 그 감정의 근원은 같았다.

과장 주제에 전무한테 들이받더니 불쌍하게 됐네.

과장 주제에 전무한테 들이받더니 꼴좋네.

송희근 과장은 거기에 그들이 품지 않았을 생각마저 상상력을 동원해 얹었다.

동기한테도 따 당한다며?

마누라도 계모임에서 쫓겨났대.

8년 지나도 과장 딱지 못 벗은 이유를 알겠네.

직장생활 물 건너갔네, 저 사람 반겨줄 데는 한강밖에 없겠어.

송희근 과장은 귓전에서 웅웅 울리는 환청을 느꼈다.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는 잰걸음으로 사옥을 탈출했다.

그러다가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서울 어디에서든 보인다던 필래그룹의 자랑, 필래타워를 등지고 가만히 서 있었다.

필래타워는 마천루, 하늘에 닿는 건물이라는 이름 그대로 위용이 넘쳤다.

그 앞의 송희근 과장은 너트 볼트 하나 정도도 안 되는 초라한 존재.

송희근 과장은 필래타워를 등졌던 몸을 천천히 돌렸다.

그는 정면으로 필래타워를 바라봤다.

머리를 뒤로 확 젖혀도 꼭대기가 보이지 않았다.

헬기더러 피해 가라고 점멸하는 붉은 조명이 괴물의 안광처럼 고압적이었다.

“…….”

그는 한참을 붉은 조명과 눈싸움을 하다가 다시 사옥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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