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39화
송희근 과장의 고난은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혁신경영팀 직원들도 그런 송희근 과장을 바라보는 것이 힘에 부쳤다.
그렇다고 속 시원하게 발 벗고 나설 수도 없었다.
한태윤 차장이 아무리 강단이 있다고 해봤자.
또 홍은주 대리가 아무리 총명하다고 해봤자, 도진석 전무의 권력 앞에서는 한 줌이었다.
옥문영 상무에게 읍소해볼까도 했지만 그녀 역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도진석 전무가 대놓고 칼부림을 하는 게 아니었다.
뒤에서 헛기침을 하면 아랫것들이 알아서 움직이는 형국이었다.
이 일을 해결할 방법은 하나.
도진석 전무의 유일한 상사인 서원웅이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서원웅은 요지부동이었다.
도진석 전무의 졸개들은 서원웅의 굳게 닫힌 입을 보고 더 활개를 쳤다.
혁신경영팀도 이제는 끈 떨어졌다는 판단 하에 이뤄진 것이었다.
업무를 보던 허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저희가 반려했던 기안서가 우리 건너뛰고 대표님 결재까지 받았어요.”
그 말에 김산호의 눈이 커졌다.
“대표님이 혁신경영팀 권한을 인정하지 않으셨단 말이에요?”
“뭐, 대표님이 인정하셨던 게 우리 팀이 아니라 팀장님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
“그래도 본인이 만든 시스템을 본인이 무력화시킨 거예요, 이건. 솔직히 실망이에요.”
“그것도 맞는 말.”
서원웅마저 혁신경영팀 대신 도진석 전무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소식에 혁신경영팀의 사기는 더 가라앉았다.
송희근 과장의 얼굴은 더 볼만해졌다.
유채경이 손톱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그럼 대표님께서 고객 개인정보를 보험사에 팔아넘기기는 걸 용인했다는 뜻인가요?”
“하, 옛날이 그립다! 코흘리개 서원웅 대리가 보고 싶다.”
허운은 지끈지끈 오르는 두통에 고개를 저었다.
홍은주가 냉철한 상황판단을 내렸다.
“대표님까지 방관이 아니라 도 전무 손을 들어줄 정도까지 왔으면 거의 승산이 없다고 봐야겠어요.”
“…….”
그렇게 육중하게 내려앉은 분위기 속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홍은주 대리가 전화를 받았다.
“혁신경영팀 홍은주 대리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 필래에너지 고응규 차장이라고 합니다.”
“예? 필래에너지요?”
“네, 조대찬 부장님하고 함께 파푸아뉴기니 광산으로 파견된.”
그제야 홍은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은체를 했다.
“아아, 예, 무슨 일로 전화 주셨습니까?”
“제가 잠깐 수도로 돌아가게 돼서요. 조 부장님은 의외로 그쪽하고 할 일이 많아지셔서 저 혼자 왔습니다.”
휴가처럼 다녀오라던 김태준 사장의 말은 순 거짓이었다.
대찬은 광산으로 이동한 순간부터 머리가 빠질 지경이었다.
광산이 있다던 그 지방도 역시나 원톡의 입김이 제도를 압도했다.
사업이 자꾸 진창에 빠지던 것도 모두 다 원톡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도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했다.
대찬이 단기간에 원톡의 일원이 된 경험이 있었다.
때문에 아무래도 어중이떠중이들보다는 나았다.
결국 모든 일이 대찬에게로 쏠렸다.
때문에 담당자인 고응규 차장이 수도로 나오는 와중에도 대찬은 그 지역에 묶여 있었다.
기실 홍은주를 비롯한 혁신경영팀 사람들이 바라는 정보는 대찬이 어디에 있는지가 아니었다.
홍은주는 김샜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러시군요.”
고응규 차장은 슬쩍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제가 수도로 간다니까 조 부장님이 급히 저를 붙들면서 말씀 좀 전해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그제야 홍은주의 귀가 쫑긋 섰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조 부장님이 거의 A4 두 장 분량으로 글을 써놓으셔서요. 그걸 유선으로 말씀드리면 길어지니까 제가 팩스로 보내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홍은주는 전화를 끊자마자 팩시밀리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곧 반가운 기계음과 함께, 더 반가운 대찬의 친필 서류가 도착했다.
홍은주는 그걸 승리의 깃발처럼 흔들며 외쳤다.
“팀장님한테서 팩스 왔어요.”
“뭐? 팀장님한테서?”
한창 풀이 죽어있던 직원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허운이 잽싸게 그쪽으로 다가가 그 서류를 받았다.
한태윤 차장도 고개를 기웃거리며 관심을 보였다.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어… 안부인사가 제법 긴데 이건 패스할게요. 정글에서 얼마나 생고생 중이신지 구구절절 길게도 써놓으셨는데, 궁금하세요?”
그러자 직원들 일동은 일제히 고개를 저어 대찬의 안부를 듣지 않겠다는 뜻을 확고히 표했다.
한태윤 차장이 말했다.
“빨리 본론으로.”
“마트사업부문에서 보낸 서류들 중에 ‘금융·보험 관련 기업과의 제휴 및 협력적 관계 모색을 통한 창의적 수익모델 창출의 건’이라는 제목의 기안서를 주목할 것.”
그 말에 일동 고개를 끄덕였다.
오다혜가 일부러 송희근 과장을 향해 말했다.
“과장님이 제대로 짚으셨네요!”
송희근 과장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와중에 제대로 짚고 안 짚고가 무슨 중요한 일이라고.
허운은 계속 대찬의 글을 간추려서 말했다.
“보험사와의 음성적인 거래로 고객의 개인정보를 팔아 금전적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가 매우 농후함.”
“그렇지, 이것도 홍은주 대리가 예측했었죠.”
한태윤 차장의 말에 홍은주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정보의 취급은 법률로 규정돼있을 만큼 까다로운 문제. 그러므로 매우 정교하게 이뤄져야 함. 이를 제안한 도진석 전무 역시 법리 다툼의 여지가 있는 방법을 구상했을 것.”
“그렇지.”
직원들은 대찬의 지적에 공감했다.
이건 자기들끼리의 회의에서도 나온 얘기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해석이 대찬과 궤를 함께한다는 것에 그나마 안도했다.
안도를 넘어 감사한 마음까지 느꼈다.
“열쇠는 도진석 전무가 어떤 방법으로 이걸 관철시키느냐입니다. 그걸 알아내면 얽힌 실타래가 쉽게 풀릴 겁니다.”
직원들의 표정은 급격히 암울해졌다.
“에휴, 팀장님이 이거 하나는 잘못 짚으셨네.”
김산호의 말에 오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대표님이 도 전무한테 판정승 내렸는데 알아내고 말고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오히려 알아내는 게 독이지. 이걸 캐는 건 도 전무가 아니라 대표님까지 찌르는 격인데.”
허운은 그 둘의 눈치를 흘끗 보고 말을 이었다.
“아직 결재가 되지 않았다면 최대한 시일을 미루면서 틈을 찾아보라고 하셨고요.”
이미 결재가 이뤄졌으니 저 말은 전달되자마자 가치를 잃어버렸다.
“일단 기안서가 통과돼서 도 전무의 의중이 실현됐다면 상황은 더 어렵지만 실마리를 잡기는 오히려 더 쉽다.”
한태윤 차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팀장님은 대표님 결재가 떨어진 상황에서도 우리가 계속 이 건을 물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어… 팩스 온 걸로만 보면 그렇네요?”
“대표님하고 대립각이라도 세우시겠다는 생각이신지…….”
허운은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조대찬심리학과 박사학위 소지자인 제가 봐도 무슨 생각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한태윤 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팀장님 지시가 떨어졌으니 하기는 해봐야겠군요.”
“친절한 팀장님께서 가이드라인도 잡아주셨어요. 고객 정보를 취하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이겠죠?”
허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차장님도 석사급은 되시는군요.”
“내가 볼 땐 허 과장이 가짜 학위 소지자 같은데.”
허운은 한태윤 차장의 말을 무시했다.
“온라인 쪽은 오다혜, 홍은주 대리가 단서를 서치해달라고 하셨고요.”
그 말에 오다혜와 홍은주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오프라인 쪽으로는 송희근 과장님이 움직여달라고 하시네요. 나머지는 2선에서 서포트 하면서 원래 업무 소화하고요.”
그러자 풀 죽은 채로 축 늘어져있던 송희근 과장이 허운을 바라봤다.
“내가?”
“네, 과장님께 따로 말씀은 남겨두셨어요.”
허운은 송희근 과장에게 전달하라는 대찬의 내용을 그에게 건넸다.
송희근 과장은 그걸 받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
그는 담배를 문 채로 대찬의 밀지를 읽었다.
-오프라인에서 고객의 개인정보를 취하는 방법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결재가 떨어졌다면 며칠 사이에 움직임이 있을 겁니다.
수유점 표성재 점장은 저와 함께 일하면서 돈독한 사이입니다.
아무래도 필드에 나가있는 사람이니 우리보다 변화를 더 잘 감지할 겁니다.
내 지시사항이라고 하면 표 점장도 잘 협력해줄 겁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거기까지 말한 대찬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대표 결재까지 떨어졌다면 과장님 입장이 퍽 난처해지셨을 겁니다.
괴로우시겠죠.
그런 심리를 제가 겪어보지 않아 안다고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이해하고 어렴풋이 추측은 합니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냉정은 지키셔야 합니다.
과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맡기고 떠나서 죄송합니다.
회사로 돌아가면 과장님하고 소주 한잔하고 싶네요.
송희근 과장은 대찬의 글을 물끄러미 보다가 코를 한번 훌쩍거렸다.
그러더니 손등으로 슥 눈물을 훔쳤다.
대찬은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지금 송희근 과장의 심리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대찬이었다.
혁신경영팀장으로 최일선에서 도진석 전무 같은 사람들을 한 트럭씩 상대해온 대찬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송희근 과장은 도리어 대찬이 측은했다.
‘나는 이거 하나만으로도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데 조대찬이는 이런 일을 예사로 겪어왔구나.’
송희근 과장은 속 깊은 곳에서 한숨을 토했다.
폭염에 녹아내리는 상추처럼 퍼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송희근 과장은 바로 수유점으로 향했다.
표성재 점장을 만났다.
저간의 사정을 얘기하니 표성재 점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네.”
“암튼 조 부장님 가시는 걸음걸음마다 가시밭이고 레고 밭이네요.”
“점장님이 모쪼록 잘 좀 도와주세요.”
“예, 도와드려야죠. 조 부장님 일인데 그러고 말고요.”
“자칫 부담 느끼실 법도 한데, 점장님은 담이 크시네요.”
송희근 과장의 말에 표성재 점장은 그를 빤히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다 풋, 웃음을 터트렸다.
송희근 과장이 까닭을 물었다.
“왜 웃으십니까?”
“아, 아뇨. 담이 크다는 말은 처음 들어봐서요, 태어나서.”
“이번 일, 도진석 전무가 작정하고 덤비고 있어요. 대표님도 묵인하셨고. 불똥이 잘못 튀면 점장님도 귀찮아지실 수 있는데요.”
표성재 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선선히 돕겠다고 해주시니 대담한 게 아니고 뭔가요?”
“그건 제가 대담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뭐 때문입니까?”
표성재 점장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워낙 조 부장님한테 신세진 게 많아서 그런 거예요. 이 정도도 못 돕는다면 짐승만도 못한 거죠.”
“그, 그렇습니까?”
표성재 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보면, 조 부장님이 수유점 점장으로 계실 때 부점장이던 제 모습은 진짜 꼴불견이었습니다. 아마 그 모습 그대로였다면 점장은커녕 벌써 잘리고 어영부영 무르익지도 않은 솜씨로 닭이나 튀기고 있었겠죠.”
“…….”
“조 부장님이 수유점 떠나시면서 절 점장으로 지명해주신 것도 물론 고맙지만, 그 전에 사람 만들어주신 게 훨씬 고마워서요.”
“그러셨군요…….”
“이 정도라도 안 하면 되겠습니까.”
송희근 과장은 이 순간 대찬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표성재 점장은 씩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송희근 과장에게 악수를 청했다.
“과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 네.”
송희근 과장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참, 조 부장님이 수유점 점장으로 오실 때도 상황 암담했죠.”
“아, 그랬던 거 같군요.”
“과장님도 아시잖아요? 우리 점포 모가지 1순위였던 거. 지금은 상위권을 놓치지 않아요. 다 조 부장님 덕이죠.”
송희근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익히 알고는 있습니다.”
“조 부장님이 수유점에서 그렇게 하셨듯, 이번 난관도 잘 헤쳐나가실 겁니다.”
“…그럴 수 있겠죠?”
“믿어보세요. 믿는 자에게 복이 오나니.”
표성재 점장의 실없는 웃음이 송희근 과장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씻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