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38화
대표가 되면서 만나는 사람의 격도 달라졌다.
극동일보를 처가로 삼고 서청수 회장의 후계자로 최종낙점 된 다음부터는 더 그랬다.
품위를 위해.
혹은 인맥관리를 위해.
혹은 더 큰 규모의 비밀스런 작업을 위해.
안전하고 비밀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이 필요한 명분은 얼마든지 있었다.
월급사장의 봉급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그러니 도진석 전무의 말에 귀가 쫑긋 설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 이거 우리 말고도 업하우스나 위마트, 샬롯마그넷 가릴 것 없이 다 하고 있는 일입니다.”
“…….”
“이미 대법원판결도 나와 있습니다. 샬롯마그넷 대표가 같은 방법으로 수작을 부렸지만 무혐의 처분 받았습니다. 아무 타격이 없다고요.”
“…….”
서원웅은 계속 침묵했다.
도진석 전무는 이를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했다.
할 마음이 없으면 딱 잘라 거절하면 그만이다.
자꾸 침묵하는 건, 확실히 구미가 당기지만 여전히 찜찜하다는 뜻이었다.
빨리 이 찜찜함을 해소할 정도의 타당한 논리, 달콤한 조건을 더 들이밀어보라는 뜻이었다.
도진석 전무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미 우리 경쟁사들이 이런 방법으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안 하는 놈이 바보 되는 판입니다.”
“…….”
“이 회사들이 윤리경영을 위반했니, 어쩌니 하면서 불매운동이라도 벌입니까? 소비자들이 우리 회사에서 물건 사가고 그럽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이게 공론화되는 경우에는 자칫 내 위상 자체가 흔들릴 수 있어요.”
도진석 전무는 하하 웃었다.
서원웅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웃으십니까?”
“너무 걱정이 많으셔서요.”
“걱정이 안 될 수가 있나요.”
“대표님의 위상이 흔들리려면 공론화되는 정도로는 어림없습니다. 공론화돼서 대표님이 법정에 서서, 유죄판결을 받으면 좀 위험해지시겠죠.”
“그럴 가능성이 제로라고 장담할 순 없습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세 번 연속으로 통과하는 일만큼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나는 그 희박한 가능성마저 용납하고 싶지 않습니다.”
“설령 그렇게 되어도, 대표님이 필래의 대권을 이어받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겁니다.”
“어째서죠.”
“대표님을 후계자로 만드는 건 소비자가 아니라 서청수 회장님입니다. 이 정도 흠결로 대표님을 낙마시킬까요?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
“저도 회삿밥 깨나 먹은 사람입니다. 회장님께서 냉철하게 변모하신 대표님을 높이 쳤으면 쳤지, 실망하진 않으실 겁니다.”
서원웅은 도진석 전무의 사탕발림을 듣기만 했다.
도진석 전무는 말을 이었다.
“윤리경영 노선은 언제든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윤리적인 기업은 있을 수 있어도 윤리적인 대기업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서원웅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일단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심사숙고하죠.”
도진석 전무는 그를 더 채근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신 물러나면서 서원웅의 뇌리에 내내 맴돌 말을 던졌다.
“어떤 판단을 내리든 저는 대표님께 결정을 강요할 의사도, 자격도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그 누구도 그럴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혹여 주제넘은 누군가 그렇게 말해도 홀라당 현혹되실 분이 아니시란 것도 잘 알고 있고요.”
그 누군가가 누군지, 서원웅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대찬이었다.
서원웅은 살짝 불쾌감이 번진 얼굴로 도진석 전무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대답을 듣고 나서야 도진석 전무는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대표실을 나섰다.
홀로 남은 서원웅은 한참을 고심했다.
그렇게 멍한 얼굴로 시간을 죽이는데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액정에는 두려운 네 글자가 떠올랐다.
장인어른.
서원웅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예, 장인어른. 전화 받았습니다.”
홍구완 사장의 쇳소리 같은 음성이 들렸다.
“자네, 쓸데없는 개똥철학에 목숨 걸 생각하지 마.”
대뜸 건네는 소리에 서원웅은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좀 척 하면 척 하고 알아듣질 못하겠나?”
“죄송합니다.”
“자네 하는 사업에 좋은 건수가 있다더구만.”
“아…….”
“사업하는 사람이 돈 벌 구멍이 있으면 열 일 제쳐놓고 뒤져야지. 꽁생원처럼 뒷짐 지고 고민만 하나?”
소식도 빠르다.
도진석 전무의 제안이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홍구완 사장의 귀에 들어갔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지만 이럴 순 없다.
그렇다면 도진석 전무가 홍승연을 통해 바로 고해바쳤다거나 하는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원웅은 뻣뻣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다방면으로 고려하고 있습니다.”
“자네, 아직 촌빨 날리는구만. 운동권식 낡아빠진 정의론을 아직도 단물 빠진 츄잉 검처럼 씹고 있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됐고, 주말에 시간 내지. 세상 살아가는 법 과외 좀 받아.”
“…알겠습니다.”
주말, 그는 장인어른, 홍구완 극동일보 사장과 점심을 함께했다.
홍구완 사장은 뻣뻣한 얼굴로 사위와 마주 앉았다.
여전히 지난 일의 앙금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장인의 얼굴이 굳어있는 만큼, 서원웅의 마음도 가시방석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홍구완 사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진행되는 인생 강의를 강제로 수강했다.
아주 일리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오로지 개인의 영달과 이익만을 염두에 둔다면 홍구완 사장의 말이 진리요 정답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기까지 서원웅을 키운 건 8할이 대찬이었다.
홍구완 사장의 말은 그런 대찬의 지론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설명이었다.
그러니 서원웅은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홍구완 사장은 그런 서원웅의 표정을 바로 간파해냈다.
“자네, 한 번뿐인 인생을 남을 위해 살 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네를 위한 길일지 잘 생각해보게. 자네는 지도자가 될 사람이야. 지도자의 첫 번째 덕목이 뭔가.”
“…….”
“용인술이야. 쓸 용에 사람 인, 사람을 쓰는 기술이라고. 사람을 쓰기 전에 쓸지 말지 결정하는 것부터가 용인술의 시작이야, 알겠나?”
“예, 장인어른.”
“자네, 돌칼 한 자루 들고 지금까지 잘 싸워왔어. 근데 이제 청동기시대가 끝나고 철기시대가 도래했네. 그런데도 계속 손에 하찮은 비파형동검만 들고 있을 셈인가?”
홍구완 사장은 사위의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사위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그렇게 도진석 전무는 혁신경영팀을 바보로 만들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판을 이끌어나갔다.
도진석 전무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던 송희근 과장은 삽시에 거의 폐인이 되고 말았다.
그의 상태는 허운이나 김산호 따위가 술 몇 잔으로 달랠 수준이 아니었다.
입사동기들은 일제히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냥 등을 돌리는 수준이 아니라 저주의 언어를 실컷 퍼붓고 등을 돌렸다.
그는 출퇴근도 간신히 해냈다.
회사에 와서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넋 나간 얼굴로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그의 동료들은 위로가 될 뾰족한 말을 찾지 못했다.
무슨 말로 위로를 할 것인가.
송희근 과장은 하극상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동기에게서 버림받은 그는 회사에서 빠르게 소외되었다.
도진석 전무는 영리했다.
혁신경영팀 전체를 표적으로 하지 않았다.
철저히 핀 포인트로 송희근 과장만 노렸다.
마트사업부문은 완전히 도진석 전무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중간관리자급 직원들은 월드몰 출신이었다.
이미 월드몰에 있을 때부터 상무였던 도진석 전무였으니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하늘같은 주군.
송희근 과장의 동기들은 물론이고 마트사업부문의 직원들 대부분 역시 송희근 과장을 백안시했다.
몰려가서 린치를 놓는다든지 볼 때마다 얼굴에 침을 뱉는다든지 하는 그런 촌스럽고 노골적인 핍박이 아니었다.
그냥 유령으로 취급했다.
사람이 지나가는데도 꾸벅, 목례 한번이 없었다.
사내 메신저로 자료를 요청해도 묵묵부답이었다.
메일을 보낼 때도 한태윤 차장과 허운 과장에게 참조를 넣으면서 그 중간의 송희근 과장은 쏙 빼버렸다.
“…….”
송희근 과장의 정신은 삽시에 쑥대밭이 되었다.
자신이 고립되는 거야 괴로워도 참을 수는 있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물귀신처럼 주변에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끼치고 있었다.
이미 정기인사에서 승진이 기정사실로 치부되었던 동기 몇몇의 낙마가 유력해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애초에 동기들 사이에서 미운오리새끼나 다름없던 송희근 과장이었다.
송희근 과장의 동기들은 그를 힐난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필래유통 17기들의 모임인 일명 ‘십칠회’ 정기모임에서도 송희근 과장은 초대를 받지 못했다.
동기들은 송희근 과장이 빠진 모임에서 그를 수술대에 올리고 마음껏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다.
송희근 과장은 착잡한 마음으로 퇴근했다.
허운은 어떻게든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흡사 좀비 같은 얼굴에 선뜻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송희근 과장이 퇴근하자 아내가 그를 맞아주었다.
“얼른 씻고 밥 먹어.”
“알았어.”
“여보, 근데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살 붙이고 산 세월이 얼만데 아내가 송희근 과장의 신변에 이상이 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도 당사자가 거푸 아무 일도 없다고 하니 일단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 나이쯤 되면 혼자서 해결하고, 해결이 안 돼도 혼자서 견디고 싶은 일이 있기 마련이니까.
송희근 과장은 아내가 재차 건네는 물음에 약간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다.
“아, 이 사람이 왜 이래? 아무 일 없다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무슨 일 있었으면 좋겠어?”
평소 같으면 어디서 화풀이냐고 왁왁거렸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맞받아쳐서 집안에서까지 불편하게 만들면 정말 남편이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될 것이라는 직감이 있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남편을 달랬다.
“부부는 일심동첸데 왜 내가 당신한테 무슨 일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어.”
“…….”
당연히 따갑게 응수할 것이라 생각했던 부인이 부드럽게 말하자, 송희근 과장도 어깨를 늘어뜨리고 침묵했다.
아내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주물렀다.
“나 당신 동기들 와이프들이랑 계모임 하는 거 알지.”
“…어.”
“근데 이번에 보니까 말도 없이 내 계좌에 곗돈 고스란히 돌려놨더라구. 이자까지 쳐서.”
“뭐?”
“차라리 원금 그대로 돌려놨으면 삿대질하면서 싸움박질이라도 하겠는데 너무 야무져서 그럴 생각도 안 들더라.”
송희근 과장은 아내의 말에 가슴이 쿡쿡 찔렸다.
자신의 객기가 이제는 아내에게도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돈이야 뭐 어떻든 좋지만 내막을 모르겠더라구. 그래서 물어보려고 태성 엄마한테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
“…….”
“그러다 며칠 있으니까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더라. 방콕인 거 같더라고. 근데 정우 엄마 프로필 사진도 방콕으로 바뀌었어. 철웅이 엄마도, 예주 엄마도.”
“…….”
“동기들하고 문제가 있겠다 싶었지. 그래서 요새 저기압이고. 근데 단순히 동기들하고 싸운 수준이 아닌 거 같아서.”
“…….”
“싸웠다 하더라도 술 먹고 주먹다짐 같은 사소한 이유는 아니겠지. 나이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회사 일 때문일 거야, 그렇지?”
송희근 과장의 얼굴은 완전히 구겨져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로 무너지는 댐을 막는 듯 위태로웠다.
아내는 차분한 시선으로 그런 남편을 바라봤다.
“말하기 힘든 일이면 말 안 해도 좋아. 그게 무슨 일이든, 그리고 당신이 무슨 결정을 하든 나는 존중할 거야. 견디기 힘들면, 회사 그만둬.”
송희근 과장의 몸이 천천히 무너졌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꽉 껴안았다.
껴안는다는 것보다는 붙들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아내는 남편을 붙든 채로 말했다.
“굶어죽기야 하겠냐고. 당신 인터넷방송으로 수입 쏠쏠하잖아. 그것도 재능이다? 어느 오십 먹은 아저씨가 인터넷으로 방송을 해. 그것도 월 몇 백씩 벌면서 말이지.”
아내는 따뜻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송희근 과장의 등을 찬찬히 쓸었다.
“우리 나이 이제 오십 바라보는데 편하게 살자. 버릴 거 버리고 편하게 살자고.”
“흐, 흐흐흑…….”
송희근 과장의 입술에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내는 역시나 차분한 얼굴로 그의 등을 천천히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