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37화
그들은 송희근 과장의 동기들과 있는 자리에서 은근히 말을 흘렸다.
“이야, 이 차장 이제 어떡하나?”
“예? 뭘 어떡해요?”
“당신 값어치가 똥값 되게 생겼어.”
“예에? 똥값이라뇨?”
측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굴비 한 마리가 푹 썩어버렸으니 한 두름으로 묶인 나머지도 똥값 돼야지 별 수 있냔 말이야.”
“아유, 최 부장님, 말씀 좀 쉽게 하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냐니깐요.”
“당신 송희근이 입사동기잖아. 필래유통 17기.”
“네, 그런데요?”
“송희근이가 그 썩은 굴비야. 이제 마트사업부문에 있는 유통 17기는 싹 줄초상 난 거야.”
“…네?”
“송희근이가 도 전무한테 고개 빳빳이 쳐들고 한 따까리 했거든.”
“뭐, 뭐라고요? 그게 사실입니까?”
“못 들었어? 소식이 늦네. 그래서 도 전무님이 자기 관할에 있는 송희근이 입사동기들은 깡그리 쓸어버린다고 웩웩거리시던데?”
송희근 과장의 동기들은 경악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긴. 곽중언이가 당신 기수 에이스였지?”
“네, 그런데요?”
“원래 이번에 매입부장으로 진급할 타이밍이었는데 삐끗했어. 홍태용이가 올라가기로 됐다고.”
“오 마이 갓.”
“정명문이도 기러기 생활 청산하겠다고 미국지사 전보 신청해서 거의 다 된 밥이었는데 코 빠뜨렸고. 그뿐이야, 어디? 자녀 학비지원 혜택도 그쪽 기수부터 없앨까 말까 고민 중이래.”
“아, 그건 안 돼요! 학비지원까지 끊는 건 말이 안 되지!”
도진석 전무의 측근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떡하겠어. 못난 동기 둔 자네들 잘못이지.”
“송희근이가 고집 꺾으면 다 순리대로 돌아가는 거죠?”
“송희근이만 팽 당하고 끝나겠지. 근데 쉽게 고개를 숙이겠어? 그럴 거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지.”
송희근 과장의 동기는 이를 갈았다.
“아오, 그 새끼! 동기 중에 제일 처지는 주제에 물귀신으로 몇 사람을 잡아먹는 거야!”
“그래, 새끼, 진짜.”
도진석 전무의 측근은 흐흐 웃었다.
소문은 삽시에 퍼졌다.
마찬가지로 유통 출신인 송희근 과장의 동기들은 대부분 마트사업부문에 소속돼있었다.
그런 마당에 도진석 전무가 송희근 과장의 입사동기인 필래유통 17기를 깡그리 날려버릴 태세라고 하니, 그들은 사색이 되었다.
송희근 과장은 필래유통 17기 중에서 유일하게 과장 딱지를 떼지 못한 미운오리새끼였다.
그 때문에 피바람이 불게 됐다니 당연히 동기들은 그를 뒤에서 잘근잘근 씹었다.
특히 개중 미국에 가 있는 처자식과 집을 합치려다가 실패한 정명문 차장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새벽 2시에 잔뜩 취해서 송희근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송희근 과장이 졸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쌍욕부터 귀에 때려 박았다.
알코올에 절여진 혀는 잔뜩 꼬부라져 있었다.
“이 새끼야! 네가 사람 새끼야!”
“정명문이, 뭐야 너, 이 시간에.”
“이 개 같은 새끼. 네가 뭔데 내 자식 얼굴도 못 보게 해?”
“도대체 뭔 소리냐고!”
“넌 우리 17기의 수치야, 알아?”
“…….”
“대학도 제일 후진 데 나와 갖고, 능력도 형편없어서.”
“…뭐?”
“너, 우리가 일일이 뒤치다꺼리 다 해줘가면서 여기까지 끌고 온 거 알지? 근데 은혜를 원수로 갚냐, 이 쌍놈의 새끼야.”
“야, 저, 정명문.”
“학벌도 없고 능력도 없으면 제발 눈치라도 있어라, 응? 나 같으면 쪽팔려서 회사 더 못 다녔어. 사표를 냈어도 오만 년 전에 냈겠다.”
“…….”
“아휴, 얼굴가죽은 두꺼워갖고 기어코 사달을 내는구나. 그래, 누굴 탓하겠냐. 너 같은 무능한 사이코랑 입사동기인 내 탓이지. 중림대 나온 새끼나 들어오는 회사에 들어간 내 잘못이지.”
뚝.
정명문은 실컷 쏟아붓고는 멋대로 전화를 끊었다.
송희근 과장은 꺼진 휴대폰을 귀에 댄 채로 멍하니 앉아있었다.
한참 그러고 있으니 잠귀 어두운 아내도 부스스 일어나 송희근 과장의 손을 잡았다.
“여보, 왜 그러고 있어?”
“…아니야. 잠이 안 와서. 나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게.”
“아유, 그냥 누워서 잠이나 더 자! 애들 깨!”
그러자 울컥한 송희근 과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맘대로 밖에도 못 나가!”
“아유, 왜 이래, 진짜! 얻다 대고 소리를 질러, 지르긴!”
“아휴!”
송희근 과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얇은 외투 하나만 챙겨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내는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마누라만 만만하지! 회사에서 치이고 얻다 대고 화풀이야!”
밖으로 나온 송희근 과장은 당장 갈 데도 없었다.
그네에 앉아서 삐거덕삐거덕 힘없이 진자운동을 했다.
그나마도 겨울 공기가 차갑게 식힌 그네 때문에 궁둥이가 시려웠다.
요행히 외투에 구깃구깃한 천 원짜리 두 장이 들어있었다.
그걸로 막걸리 한 통을 받아왔다.
차가운 그네 위에서 병째로 마셨다.
시린 공기 때문에 막걸리가 슬러시처럼 서걱거렸다.
그는 식도를 타고 흐르는 살얼음이 낀 막걸리를 느끼며 울었다.
그 냉기를 어떻게든 가시려는 듯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러나 눈물의 뜨거움도 이내 겨울바람에 증발해버려 지나간 자국이 시리기만 했다.
도진석 전무는 송희근 과장의 동기들을 움직이는 건 물론이요, 갖은 방법으로 그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했다.
하지만 송희근 과장을 핍박하는 건 순전히 화풀이를 위함일 뿐이었다.
딱히 그에게 실익이 있는 건 아니었다.
화풀이에 지나치게 힘을 뺄 필요는 없었다.
그는 자기가 지극히 합리적이고 냉철한 인간이라고 자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그런 자신에 대한 평가를 계속 지키고 싶었다.
실익을 위해 더 분주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그는 혁신경영팀에 수정안을 제출하지 않았다.
수정안 역시 두루뭉술하고 장황해야만 했다.
대찬이 없으면 쉽게 통과될 것이라던 자신의 예상이 빗나갔다.
이렇게 된 이상 차선책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는 서원웅을 직접 찾아갔다.
서원웅과 단둘이 독대했다.
서원웅은 그에게 차 한 잔을 내주며 반겼다.
“전무님이 혼자 대표실에 오시는 건 잘 없는 일인데요.”
“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목소리에 무게감이 느껴지는 걸 보니 중요한 일인가 봐요.”
“네, 맞습니다.”
서원웅은 웃으면서 탁자에 찻잔을 내려놨다.
“무슨 일이시죠?”
“대표님, 백조가 물 위에서는 고고하지만 물 아래서는 부단히 물갈퀴를 젓는 거 아십니까?”
“갑자기 웬 백조 얘기를 하고 그러세요?”
건더기가 큰 말을 덜컥 꺼내기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부담스러운 본론으로 직행하는 대신 종종 쓸데없는 비유로 입술을 뗀다.
서원웅은 제법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그런 경향을 인지하고 있었다.
도진석 전무가 무슨 얘기를 할지 그는 웃으면서 기다렸다.
도진석 전무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입술에 침을 발랐다.
“대표님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기업을 물려받으실 겁니다.”
“예, 중대한 변수가 없다면요.”
“재벌총수가 되시면 물론 대외적인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유지시키는 건 필요합니다. 물 위의 백조처럼요.”
“그런데요?”
“그런데 물 아래에서는 열심히 움직이셔야 앞으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물 아래서 열심히 움직이라는 게 무슨 뜻인가요. 쉽게 풀어서 말씀해주시죠.”
“대통령에게도 통치자금이란 게 있습니다.”
“통치자금이요?”
“네, 아랫사람 용돈 좀 쥐여 주고, 고개 빳빳한 사람들 굽실거리게 만들려면 어느 정도 지갑이 두꺼워야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아예 지갑째로 넘겨줘서 사람 관리했다고 하고요.”
“그러니까 물 밖에서는 고고하게 있으면서도 물 아래서는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는 겁니까? 돈을 살포해가면서?”
도진석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측근한테 먹이고, 언론에도 먹이고, 검찰에도 먹이고, 교수나 시민단체에도 먹이고.”
“됐으니 열거는 그쯤 합시다.”
“예, 어쨌든 한두 푼 들어가는 일이 아니죠.”
“더러운 돈입니다.”
“네, 더럽습니다. 하지만 재벌은 기본적으로 상인입니다. 깨끗한 돈만 만지려면 골방 틀어박혀 선비 노릇이나 해야죠.”
서원웅의 얼굴에는 계속 웃음기가 머물렀다.
“얘기가 자꾸 변두리만 맴도네요. 하고 싶은 말씀을 하세요.”
도진석 전무는 서원웅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대표님, 이번에 제가 좋은 건수를 물어와서요. 말씀 올리려고 합니다만.”
“좋은 건수요?”
“예, 그런데 혁신경영팀에서 감 놔라 배 놔라 극성을 떠는 통에 직접 보고 드리려고 온 겁니다.”
“지금 조대찬 부장도 부재중인데 혁신팀에서 도 전무님께 그랬단 말씀입니까?”
송희근 과장 앞에서는 실컷 으르렁대던 도진석 전무는 서원웅의 앞에서는 고자질해대는 초등학생처럼 유치했다.
“예, 감히 말이죠.”
“혁신팀에서 그 정도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만류했다면 그만 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쪽에서 파워 게임을 하고 있는 겁니다.”
“단순히 도 전무님과 감정이 좋지 않기 때문에 나와 전무님 사이를 가로막는다?”
도진석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유치한 수작이죠.”
“말씀해보시죠. 제가 듣고 제 기준에 따라 판단하겠습니다.”
“우리가 확보한 개인정보를 보험사와 공유하고 그 대가를 취하는 겁니다.”
서원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법이잖아요, 그거. 개인정보보호법.”
“퍼미션(permission·허락, 특히 비즈니스에서는 마케팅을 위해 문자 수신, 개인정보 이용 등 고객의 동의를 받는 것)을 받으면 됩니다.”
“요즘 소비자들이 어떤 소비자들인데. 잘 안 해줘요.”
“그게 관건이죠. 가랑비에 옷 젖듯이 동의를 받아낼 겁니다.”
“그럼 불법이라니까요.”
“결례가 안 된다면 대표님을 손님이라 생각하고 퍼미션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해보시죠.”
도진석 전무는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고객님, 2만 원 이상 구매하신 고객님을 대상으로 경품추첨행사 진행하고 있습니다. 성함하고 전화번호만 적어주시면 됩니다.”
서원웅은 그 종이를 꼼꼼히 따져보다가 도진석 전무에게 물었다.
“…개인정보를 마케팅 용도로 사용해도 좋다는 안내문이 없는데요.”
“있습니다.”
“뭐라고요?”
도진석 전무는 종이 한 귀퉁이를 가리켰다.
서원웅은 그쪽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거기에는 깨알보다도 작은 글씨로 뭐라 쓰여 있었다.
서원웅은 눈을 게슴츠레 떠서 어떻게든 읽어보려고 했지만 읽지 못했다.
도진석 전무가 웃으면서 말했다.
“작성하신 개인정보는 상업적 용도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서원웅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기만을 소비자들이 용납할까요? 우리 모토가 윤리경영인 거 잊으셨습니까.”
“대표님, 언제까지 그 허울만 좋은 껍데기를 물고 계실 생각이십니까?”
서원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필래 비바체가 여기까지 온 데는 윤리경영 브랜드의 힘이 큽니다.”
“그럴까요? 비바체가 커온 건 그저 소비자의 요구를 경쟁업체보다 한 발짝 앞서 달성했기 때문입니다.”
“윤리경영이 그 요구에 포함됩니다.”
도진석 전무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봤자 잠깐의 유행 같은 겁니다. 비 오는 날에만 우산 팔면 되지, 연중무휴 쨍한 날에는 우산 대신 부채 팔아야죠.”
“만약 이 일이 여론을 타면 윤리경영이 무너지는 정도가 아니라 회사 이미지가 뿌리째 흔들릴 겁니다.”
“여론을 타는 일이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니거니와, 여론을 타도 실무자 몇몇한테 혐의를 씌워 꼬리를 자르면 그만입니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이게 어마 무시하거든요.”
도진석 전무는 검지와 엄지를 둥글게 말아 보였다.
“이런 걸 기꺼이 감수할 만큼 금액이 크다는 말씀입니까?”
“예, 대체로 보험사에서는 이런 정보를 한 사람의 개인정보를 제공 받는 대가로 2천 원 가량을 지불합니다.”
“몇 건을 확보하느냐에 따라 푼돈이 될 수도 있고 거액이 될 수도 있겠네요.”
도진석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개 이런 경품행사를 진행하면 최소 연간 300만 건 이상의 개인정보를 확보하게 됩니다. 2천 곱하기 3백만 하면.”
“60억.”
“예, 이걸 길게도 아니고 4년 정도 진행하면 약 240억 원의 수익을 거둘 수 있습니다. 이건 최소입니다. 경품행사 기획만 잘하면 몇 배가 될 수도 있죠.”
240억은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특히 전격적으로 성장을 위한 투자에 매진하고 있는 필래 비바체로서는 돈에 목말라 있었다.
240억은 그 갈증을 적잖이 해소해줄 정도가 되었다.
도진석 전무는 덧붙여 말했다.
“용의를 보인 보험사에서 먼저 제의했습니다.”
“무슨 제의요.”
“여러 경로를 통해 금액의 상당부분을 회사 자금이 아니라 대표님의 비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겠다고요. 물론 대표님이 원하신다는 전제하에 말입니다.”
“…….”
비자금의 효용은 굳이 도진석 전무가 설파하지 않아도 점차 피부로 느끼고 있던 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