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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36화 (336/556)

난 할 수 있어 336화

“유감스럽게도 저는 팀장님께 권한을 받지 못해서요. 어디까지나 지금 팀장 대리는 과장님이세요.”

“으으…….”

“자, 결정해주시죠.”

송희근 과장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눈 딱 감고 무사통과 시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이미 도진석 전무에게 날린 박치기 한 방이 무가치해지고 만다.

게다가 이미 직원들 전부가 저 기안서가 수상하다고 지목한 판.

여기서 물렁하게 넘어가면 출장에서 돌아온 대찬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훤했다.

조대찬의 믹서기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만 할 것이었다.

나아가면 도진석 전무가 맹수처럼 발광할 것이고, 물러나면 조대찬 부장이 발광할 것이다.

문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다.

이럴 때에는 책임을 분산하는 게 좋았다.

송희근 과장은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직원들에게 말했다.

“우리 투표할까? 민주적으로…….”

직원들을 공범으로 만들어 책임감을 n분의 1로 줄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송희근 과장은 홍은주와 눈빛이 마주쳤다.

홍은주의 눈빛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

그 눈빛을 보고 있자니 송희근 과장은 자신이 했던 말을 거둬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좋아, 내가 결정하지. 나 담배 한 대만 태우고.”

송희근 과장은 옥상으로 올라가 여러 대를 태웠다.

머리가 띵하고 입안이 바싹 메마를 정도로 담배를 피웠다.

담배 한 개비 태우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직장생활도 금세 끝이 나버릴까 두려웠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꾸 다음 개비에 불을 붙였다.

한참 뒤에 사무실에 돌아온 송희근 과장의 몸에서는 담배 쩐내가 매캐했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호흡기가 민감한 오다혜가 기침을 콜록거릴 정도였다.

한태윤 차장은 책상을 짚고 비스듬히 선 채로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

송희근 과장은 대답을 잠깐 보류한 채로 기안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한태윤 차장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반려합시다.”

“…알겠습니다.”

송희근 과장은 둘 수 있는 수 중에서 초강수를 골라 뒀다.

의사표시를 분명히 하면서도 마찰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존재했다.

온건한 투로 혁신경영팀장의 소견을 첨부하여 대표인 서원웅에게 올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송희근 과장은 아예 반려 도장을 콱 찍어 마트사업부문으로 기안서를 되돌려 보냈다.

이건 아예 도진석 전무의 멱살을 틀어쥔 것이나 다름없는 조치였다.

송희근 과장을 잘 안다고 자부했던 혁신경영팀 직원들에게도 이건 뜻밖의 조치였다.

허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그에게 물었다.

“과장님, 괘, 괜찮으시겠어요?”

“…….”

“도 전무한테 본때를 보여주려면 아예 기안서를 깔고 앉아서 팀장님 오실 때까지 버티는 방법도 있어요.”

송희근 과장은 허운을 바라봤다.

“아니야. 반려해.”

그의 목소리에는 의지가 또렷이 담겨 있었다.

허운도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반려의 효과는 바로 드러났다.

저 멀리, 유리문 밖으로 도진석 전무가 성큼성큼 걸어오는 게 보였다.

허운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송희근 과장에게 말했다.

“…옥 상무님이라도 부를까요? 그래도 옥 상무님이 계시면 그나마…….”

“됐어.”

송희근 과장은 손을 들어 허운의 뒷말을 막았다.

그는 넥타이를 꽉 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진석 전무가 유리문을 확 젖히고 들어왔다.

조폭 두목처럼 자기 측근들을 몇몇 거느린 채였다.

도진석 전무와 송희근 과장은 똑같이 주먹을 꽉 쥔 채로 부르르 떨었다.

한 사람은 분노 때문에, 다른 한 사람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너 뭐 하는 놈이야.”

그렇게 말하는 도진석 전무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듣는 이에게는 그게 더 공포스러웠다.

송희근 과장은 도진석 전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도진석 전무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본 달래서 줬더니, 이젠 아예 반려까지 해? 야, 네가 내 상사냐?”

“…….”

“무슨 말이라도 좀 해보지?”

“다른 서류들은 다 의견 첨부 없이 대표님께 전달했습니다. 다만, 기안서 하나가…….”

“하나가 뭐.”

싸늘한 목소리에 송희근 과장은 당장이라도 오줌을 질질 흘릴 것만 같았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그는 말을 이었다.

“사업내용이 불분명하고 파악하기가 어려워 부득이 반려했습니다.”

“불분명하고 파악하기가 어려워?”

“…예. 담당부서에서 조금 더 명료하고 견실하게…….”

도진석 전무는 송희근 과장의 말을 싹둑 잘랐다.

“야, 네가 중림대 나왔던가?”

“…….”

“대답해. 맞지, 중림대?”

“예, 맞습니다.”

도진석 전무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지금도 원서만 쓰면 받아주는 학교 아니야. 그때는 뭐 안 봐도 비디오지. 너 학력고사는 치르고 입학했냐?”

“…예.”

“언어영역 몇 점 나왔어? 학교 다닐 때부터 얼마나 공부를 개판으로 했으면 기안서 하나 제대로 못 읽어?”

“저도 회사생활 할 만큼 했습니다. 기안서 정도는 읽을 줄 압니다.”

“이 새끼야, 회사생활 했다는 놈이 일을 이따위로 해?”

“…….”

“상사 알기를 아무리 개밥그릇으로 알아도 그렇지, 전무가 지시한 걸 일개 과장이 뭐, 반려?”

도진석 전무의 코웃음에는 강렬한 적개심이 어려 있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처음에는 도진석 전무의 기세에 잔뜩 야코가 죽어 있었던 송희근 과장도 자존심에 생채기를 입으니 목소리가 다소 커졌다.

“전무님, 저는 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네 일이 뭔데?”

“…….”

“야, 주제 파악 똑바로 해. 혁신경영팀이니 뭐니 하는 부서가 제대로 된 부서냐? 홍국영 세도 부리듯 조대찬이 후까시나 잡으라고 만들어준 부서잖아.”

“전무님.”

“말 안 끝났어, 이 새끼야. 근데 홍국영도 아니고 홍국영 방자밖에 안 되는 새끼가 설치긴 어딜 설쳐.”

송희근 과장은 가슴을 후비는 굴욕감을 이를 악물며 참고는 문제의 기안서를 도진석 전무에게 내밀었다.

“전무님, 전무님도 한번 읽어보십시오. 아마 읽어보시면 저랑 같은 의견을…….”

“이게 어디서 개수작이야! 치워!”

도진석 전무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기안서를 내미는 송희근 과장의 손을 내리쳤다.

가죽이 가죽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기안서 몇 장이 비둘기처럼 사방으로 날아갔다.

송희근 과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도진석 전무를 바라봤다.

도진석 전무는 콧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던 그의 자제력이 바닥을 드러냈다.

“이 새끼가 어디서 전무랑 맞먹으려고 들지? 내가 여기까지 왔으면 알아서 대가리 박고 시정하겠습니다 해야 정상 아니냐?”

“전무님, 이 기안서는 못 쓴 기안서입니다.”

송희근 과장의 단호한 태도에 도진석 전무의 얼굴이 마구 구겨졌다.

얼굴에 있는 핏줄들이 곤두서고 개구기를 낀 듯 치열이 완전히 드러났다.

도진석 전무가 거느린 측근들이 송희근 과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봐, 송 과장, 진짜 왜 이래, 알 만한 사람이!”

“분위기 험악하게 만들 거야? 뭐 때문에 이러는 거야, 도대체?”

그들은 점잖으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그를 질책했다.

그러나 송희근 과장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더 드릴 말씀 없습니다.”

그러자 측근들은 한 마디씩 하며 장탄식을 뿜었다.

“이 인간 완전히 돌았구만.”

“전무님, 저희가 알아서 잘 말해보겠습니다. 전무님께서 더 힘 빼실 이유 없으십니다.”

도진석 전무는 측근들의 만류를 뿌리쳤다.

“아니야, 여기서 대답을 들어야겠다. 야, 송희근.”

“…….”

“깝죽대면서 문지기 노릇 하지 말고 비켜. 그러다 너 진짜 다친다.”

“저희 팀에서 납득할 수 있도록 수정안이 오면 대표님께 바로 올리겠습니다.”

도진석 전무는 눈을 부라렸다.

“마지막 기회 준다. 그게 네 대답이라 이거지.”

“네, 제 대답입니다.”

“좋아, 네 신세 스스로 망치고 싶다니 그렇게 해줄게.”

도진석 전무는 휙 돌아 성큼성큼 혁신경영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그의 끄나풀들도 송희근 과장과 혁신경영팀 직원들에게 눈빛을 한 번씩 뿌리고는 되돌아갔다.

송희근 과장은 다리의 힘이 탁 풀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혁신경영팀 직원들이 그의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김산호가 그를 부축했다.

“과장님, 괜찮으세요?”

“너는 이게 괜찮아 보이냐?”

“…아뇨.”

허운이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과장님, 어디서 그런 사자의 용기가 솟으셨어요?”

“씨발.”

송희근 과장은 참담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한태윤 차장이 그에게 다가갔다.

“과장님, 멋있으셨습니다.”

“멋있긴 개똥이 멋있어! 한 차장, 잘 있어. 나 먼저 요단강 건넌다.”

“그래도 어정쩡하게 붙느니 차라리 시원하게 들이박는 게 낫잖습니까.”

송희근 과장은 툭 건드리면 왈칵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마티즈로 덤프트럭 시원하게 들이박으면 폐차장밖에 더 가? 아, 내가 왜 이랬지.”

“걱정 마십시오. 그래도 우리가 파워 없는 부서는 아니잖아요. 자, 담배 한 대나 태우러 가시죠.”

한태윤 차장은 송희근 과장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한태윤 차장도 걱정 말라고 말하긴 했지만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제대로 불을 댕겼다.

얼렁뚱땅 넘어가기는 글렀다.

사무실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반려된 기안서는 다시 혁신경영팀에게로 넘어오지 않았다.

혁신경영팀 직원들은 의아했다.

두루뭉술하고 장황한 말로 열심히 내용을 감춰왔다.

그렇게 공을 들일 정도라면 도진석 전무의 입장에선 무슨 이유에서든지 반드시 관철시켜야 할 사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수정안을 보내오지 않는가.

혁신경영팀의 오케이 사인을 받지 않고 사업이 성사될 수는 없다.

여태 수정안이 올라오지 않는 걸 보고 직원들은 혹시 도진석 전무가 제풀에 지쳐 뜻을 꺾은 건 아닐까, 희망 섞인 관측을 내놨다.

그렇게 유야무야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도진석 전무는 늪지대에 몸을 숨긴 악어처럼 한동안 침묵했다.

수정안을 올리지 않은 채로 잠잠했다.

수정안은 계속 붙들고만 있었지만, 송희근 과장의 신세를 망치게 해주겠다던 도진석 전무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도진석 전무도 이렇게 한바탕 난리를 친 이상 자신의 말을 철저히 이행해야만 했다.

이런 난리를 치고도 가만히 있으면 요란한 빈 수레라는 조롱이 뒤따를 테니까.

송희근 과장도 그걸 알고 하루하루를 근심 속에 보냈다.

그런 상사를 위해 허운과 김산호가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해봤자 같이 소주나 맥주를 퍼마셔주는 일뿐이었다.

한태윤 차장도 그들에게 카드를 슬쩍 찔러주며 술로 그를 달래주라는 무언의 권유를 했다.

허운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송희근 과장의 잔을 채워주었다.

“과장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주름 안 펴져요.”

“지금 주름이 문제냐.”

“지금이야 우리 조 부장님 없어서 불안하지만, 돌아오시면 다 알아서 해주실 거예요.”

“조 부장 능력에도 한계가 있어. 도 전무가 작정하고 덤비면 조 부장도 힘들어.”

김산호가 송희근 과장의 접시에 안주를 담아주며 말했다.

“우리가 뭐 죄 지었나요. 할 일 했을 뿐인데요. 큰일은 없을 거예요. 당장 수정안도 안 올라오는 거 보세요.”

“폭풍전야다, 폭풍전야.”

송희근 과장은 건배도 하지 않고 쓴잔을 대번에 죽 넘겼다.

역시 구내식당 밥 한 끼라도 더 먹어본 사람이 정확했다.

송희근 과장의 말대로 잠깐의 고요는 폭풍전야일 뿐이었다.

도진석 전무는 송희근 과장을 점점 옥죄기 시작했다.

그는 교묘했다.

회사에서 잔뼈가 굵으면서 얻은 경험과 노하우를 총동원해서 송희근 과장의 목을 졸랐다.

누군가를 괴롭힐 때 그 당사자를 괴롭히는 건 하수다.

그 당사자가 최소한의 양심과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의 주변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도진석 전무의 측근들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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