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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35화 (335/556)

난 할 수 있어 335화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나 하는 얘기야? 나 파푸아뉴기니에 있거든요.”

“정확히는 파푸아뉴기니 호텔 스위트룸에 계시죠.”

“아니 그럼 출장 중인 사람한테 본사 일까지 보라는 거야?”

“팀장님은 우리만 믿고 맘 편히 거기서 두 다리 뻗고 주무실 수 있으시겠어요?”

“못할 건 뭐야?”

“정말 이 허운이랑 김산호를 믿고 그러실 수 있으시겠어요?”

허운과 한 데 묶인 김산호가 항의했다.

“과장님, 왜 제가 과장님하고 덤앤더머로 묶여야 돼요?”

“시끄러. 가만히 있어 봐.”

대찬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

“이러다 우리가 망치면 팀장님이 독박 쓰시는 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난 살다 살다 자기 무능함을 협박 도구로 내세우는 사람은 처음 봤어.”

“오죽하면 이러겠어요, 제가?”

그러자 좀체 허운과 죽이 맞는 일이 없던 홍은주도 나서서 그와 공동전선을 펼쳤다.

“팀장님, 비상상황이에요. 도와주세요.”

대찬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어요. 어차피 이 나라 도로사정이 안 좋아서 길에서 버리는 시간 많으니까 그렇게 하죠. PDF로 파일 만들어서 보내요.”

“감사합니다, 팀장님!”

대찬은 흐흐 웃었다.

“우리 송 과장님 저 돌아오면 벽제관 갈비 한 번 더 쏘셔야겠는데요.”

그 말을 송희근 과장이 덥석 물었다.

“벽제관이 문젭니까! 백제호텔 칠선이라도 쏘겠습니다!”

오, 역시 부업이 짭짤하시니까 통이 커지셨네.

대찬은 하마터면 비밀을 누설할 뻔했다.

“저도 제 몫은 해낼 테니까 우리 수고합시다. 회사를 위해 이러는 게 아니라 우리 지키려고 이러는 거니까 눈에 쌍심지 켜고 해보자고요.”

대찬의 말에 오다혜가 말을 얹었다.

“그리고 도 전무도 물 먹이고요!”

“참, 그런 말은 마음속으로만 하고.”

혁신경영팀 직원들은 잔잔하게 웃었다.

대찬이 가세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고무되었다.

대찬은 파일을 전달받자마자 빠르게 서류들을 훑기 시작했다.

잔챙이들은 저만치 치워두고 중요한 건더기들만 골라냈다.

그리고는 호텔 프론트로 가서 말했다.

“혹시 인쇄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어… 한 A4용지로 500장……?”

그러자 프론트 직원은 난색을 표했다.

개중에 좋은 곳에 방을 잡기는 했지만 나라의 사정 자체가 열악했다.

“그렇게 많은 양을 서비스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대답을 이미 예상한 대찬은 지폐 뭉치를 턱 프론트에 내밀었다.

“이거면 되겠죠?”

“각 한 부씩만 필요하십니까?”

대찬은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부씩이면 됩니다.”

그렇게 원격으로 업무에 참여한 대찬을 포함해 혁신경영팀 직원들은 마트사업부문에서 넘어온 서류를 싸매고 낑낑거렸다.

오다혜가 말했듯 이 업무는 다분히 사내정치를 위한 포석이었다.

도진석 전무가 짜증과 으름장으로 은폐하려던 걸 들춰내야만 했다.

대찬은 자기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느물거렸지만 실은 그럴 일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괜히 헛발질을 했다가 도진석 전무가 푸닥거리 할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푸닥거리를 할 때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한다.

닭이나 오리 대가리를 잘라 올려놓지는 않는다.

결국 일이 잘못되면 직접적인 타격을 입는 건 대찬이었다.

대찬이 프론트에 상반신을 기댄 채로 인쇄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

필래에너지 직원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조 부장님, 1시간 뒤에 광산으로 출발한답니다. 준비하십시오.”

“아, 네, 알겠습니다.”

대찬은 열심히 인쇄하고 있는 프론트 직원 쪽에다 대고 속닥거렸다.

“Faster, please.”

그러면서 지폐 여러 장을 슬쩍 내밀었다.

효과는 굉장했다.

이 호텔의 전부인 프린터 2대가 동시에 돌아갔다.

대찬은 그렇지 않아도 무지막지한 짐에 서류뭉치까지 들고 낑낑거리면서 광산으로 이동했다.

필래에너지 직원은 그걸 의아하게 보며 물었다.

“그게 다 뭡니까?”

“아, 별거 아닙니다. 신경 안 써주셔도 됩니다.”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그는 파푸아뉴기니의 비포장도로를 달리느라 덜커덩거리는 차 안에서 서류를 검토했다.

금액의 사이즈가 큰 사업부터 검토했다.

거짓은 어떻게든 들통 날 수밖에 없다.

명철한 사람의 충분한 의지.

넘치는 노력과 집중.

정신력을 뒷받침할 체력.

그것만 있다면 교묘하게 몸을 숨기고 진실로 위장한 거짓을 얼마든지 잡아낼 수 있었다.

대찬은 입술에 펜을 물고 묵묵히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거짓은 두루뭉술하고 어영부영이다.

떳떳하질 못하니 똑 부러지게 말하질 못한다.

또 거짓은 장황하다.

썩은 고기 냄새를 감추려고 치덕치덕 양념을 바르듯, 구구절절한 미사여구와 불필요한 사족으로 감추려 든다.

두루뭉술하고 장황하면, 그건 빼도 박도 못하는 거짓임이 분명했다.

“잡았다.”

대찬은 물고 있던 펜으로 서류에 밑줄을 그었다.

마트사업부문에서도 도진석 전무가 직접 지휘하는 영업부에서 올린 기안서였다.

제목부터가 두루뭉술하고 장황하기 짝이 없었다.

-금융·보험 관련 기업과의 제휴 및 협력적 관계 모색을 통한 창의적 수익모델 창출의 건

이어지는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기안서는 통상적으로 간결하고 명료한 것이 생명이다.

-습니다, 로 끝나는 완성형의 문장도 지양하는 판이다.

그런데 이 기안서의 내용은 원래의 불문율을 파괴했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마트의 고전적 거래방식을 벗어난 창의적인 수익모델을 연구해야 할…

“마트가 물건 사고 파는 회사인 거 누가 몰라. 쓸데없는 사족 붙었고.”

…금융·보험계의 기업과 협력하여 상생의 방안을 강구하는 건 그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어떻게 협력해서 어떻게 상생할 건데. 두루뭉술하게 알맹이를 숨겼어.”

…이를 통해 약 10~100억, 최대 200억 원의 수익을 창출해낼 것으로 기대…

“범위가 10억에서 200억 사이야? 이건 또 칸딘스키가 울고 갈 정도로 추상적이네.”

그렇게 잡소리의 향연이 이어졌다.

아무 쓸모없는 그래프가 난데없이 등장한다든지, 경제학원론에나 나올 법한 고루한 얘기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아마 이걸 읽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거 참 글 한번 못 썼다 하고 치워버릴 일이었다.

그런데 대찬은 그 대다수에 속하지 않았다.

비열할 정도로 집요했다.

그는 끝까지 그 문서에 매달렸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정글의 풍경이 이런 대찬의 집요한 노력을 도와주었다.

몇 시간 내내 저 우거진 수풀을 보고 있느니 이 재미없는 글을 붙들고 있는 게 훨씬 유익하고 흥미로웠다.

그렇게 노력한 보람이 빛을 봤다.

핵심은 거의 말미에 이르러 발견되었다.

…결론적으로, 우리 회사가 제휴한 금융보험사에게 제공하여도 무리 없는 재화 혹은 서비스를 통해 그들과의 상호 협력적 관계를 수립하여 중장기적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하여 회사의 이익 창출에도 기여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머리 아파.”

대찬은 저 장황한 문장을 명료하게 압축했다.

‘금융보험사에 우리가 넘겨줘도 별로 손해 볼 것 없는 걸 넘겨주면 그쪽하고 친해지고, 돈도 벌 수 있다.’

기안서는 ‘재화 혹은 서비스’라고 했지만 넘겨줘서 손해 볼 것 없는 재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서비스다.

또, 기안서는 금융사면 금융사지 굳이 금융보험사라고 했다.

보험은 금융의 하위개념이다.

굳이 보험사라고 기재했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금융보험사는 보험사라고 봐도 무방했다.

대형마트가 보험사에 무리 없이 제공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서비스.

“잡았다.”

대찬의 눈이 커졌다.

그는 서둘러 이를 혁신경영팀 직원들에게 전달하려고 했다.

열심히 휴대폰을 뒤지던 대찬은 멈칫했다.

“아…….”

지금껏 망각하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고 절망했다.

그는 동승한 필래에너지 직원에게 물었다.

“고 차장님, 혹시 지금 가는 지역에 인터넷 터집니까?”

대찬의 질문에 필래에너지 직원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조 부장님, 이 나라 몇 번 오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

수도인 포트모르즈비면 모를까 밀림을 헤치고 등장하는 광산지대에는 전기도 자가발전으로 해내는 판이다.

인터넷이라니, 쌀이 없으면 고기로 죽을 쑤어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보다도 더 사치스럽게 들렸다.

대찬은 머리를 싸쥐었다.

이보다 답답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시험문제를 다 풀고 OMR카드에 마킹을 하려는데 컴퓨터용 사인펜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0점 처리를 당해야 할 판.

대찬의 복장이 뒤집어졌다.

“본사에 연락 취할 일이 있는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무전을 통해서 간단한 메시지 정도는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것으로는 턱도 없었다.

대찬은 머리를 싸쥐었다.

그러나 그런 대찬의 생각과 절망은 오만이었다.

자기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해낼 수 없다는 오만.

그 시각.

송희근 과장 역시 대찬만큼이나 눈이 빠져라 서류를 검토했다.

그 역시 이 일에 자신의 명운을 걸었다.

이 일이 철저히 망해버리면 자신의 얼마 되지도 않은 부스러기 같은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니 몸이 녹초가 되는 한이 있어도 손에 든 서류를 잠시도 놓을 수가 없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걸까.

무수한 문장들 중에서 송희근 과장의 눈에 걸리는 지점이 있었다.

그건 대찬이 보았던 것과 동일했다.

송희근 과장의 눈빛이 떨렸다.

“하, 한 차장.”

그의 부름에 한태윤 차장이 몸을 일으켰다.

“네, 과장님.”

“이것 좀 봐 봐요. 너무 수상하지 않나?”

한태윤 차장은 송희근 과장의 곁으로 가서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 부분 그냥 넘어갔었습니다. 너무 솜씨가 서툴러서. 그런데 지금 보니까 오히려 서툴러서 수상하네요.”

한태윤 차장의 말에 다른 직원들이 송희근 과장의 주변으로 웅성웅성 몰려들었다.

그걸 본 그들도 역시 수상하다며 한 마디씩 보태고 나섰다.

그러나 수상하긴 한데 뭐가 수상한지 딱 짚어내는 사람이 없었다.

등허리가 가려운데 어디가 가려운지를 몰라 애먼 곳만 벅벅 긁어대는 꼴이었다.

그때 홍은주가 정곡을 찔렀다.

“이거 개인정보 팔아넘기겠다는 소리 같은데요.”

“어?”

직원들은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보험사에 마케팅용으로 개인정보를 팔겠다고?”

“네, 그거밖에 없어요. 우리 쪽에서 밑지는 일 없이 보험사에 편익을 제공하는 방법은.”

“자, 잠깐만, 그거 불법이잖아?”

송희근 과장의 말에 홍은주는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놓고 범법행위 자행할 수는 없겠죠.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아슬아슬 줄타기하는 방법을 생각했을 거예요.”

한태윤 차장은 자못 심각한 얼굴로 송희근 과장에게 말했다.

“과장님, 홍은주 대리 말이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래도 한번 짚고 넘어가긴 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 그렇지? 이상하긴 하니까.”

“혁신경영팀장 대리 자격으로 의견을 첨부해서 대표님께 올리시든지, 아니면 마트사업부문으로 반려시키면 될 것 같습니다.”

송희근 과장은 큼큼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팀장님한테 여쭤보고 결정하는 게 좋겠지?”

“네, 그 편이 안전하죠. 제가 걸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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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태윤 차장은 대찬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가 걸리지 않는 걸 보고 그제야 상황을 인지했다.

“아, 신호 안 잡히는 곳으로 가신 거 같습니다만…….”

“하필 이럴 때!”

송희근 과장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한태윤 차장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꼼짝없이 과장님이 결정하셔야겠는데요.”

“우리 한 차장님이 정해주시면 안 될까?”

한태윤 차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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