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333화 (333/556)

난 할 수 있어 333화

민승기는 대찬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야, 너는 팔자가 일 한번 끝장나게 해야 되는 팔자인가 보다.”

“그러게요. 나는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그럴 팔잔가 봐.”

“그런 모양이다.”

대찬의 말은 진담이었으나 민승기는 그게 진담이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중간에 줄리아 한번 보고 오려는데, 뭐 선물 줄 거 없어요?”

“어, 잠깐만. 줄리아 한국 왔을 때 좋아했다던 간식 좀 많이 챙겼다. 마을 애들하고 나눠 먹으라고.”

“마음 한번 따뜻하셔라.”

“너는 먹지 마, 알았어?”

“참 나, 내가 애들 간식이나 뺏어 먹을 사람으로 보여요.”

대찬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대찬은 다시 파푸아뉴기니로 떠났다.

윤이영은 자기가 만든 쿠키를 꼭 줄리아에게 전해주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어디 공장에서 떼어오기라도 한 건지 그것도 한 짐이라 공항에 온 대찬의 모습은 보부상을 방불케 했다.

그렇게 대찬이 파푸아뉴기니로 떠났다.

호랑이 없는 골엔 토끼가 선생노릇을 하고 대찬 없는 사무실에서는 송희근 과장이 대빵 노릇을 했다.

직급 상으로는 한태윤 차장이 위였지만 그는 선선히 송희근 과장이 대찬을 대리하도록 했다.

오랜만에 맞이한 자유에 상석을 양보할 정도의 아량은 충분히 있었다.

혁신경영팀 직원들에게는 황금연휴였다.

이른바 없을 무, 머리 두, 무두절 연휴였다.

대찬이 쪼아대는 스타일의 상사는 아니었지만 부하직원들은 그 존재만으로 필연적인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다.

송희근 과장은 콧노래를 절로 흥얼거리며 일했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김산호 역시 기지개를 쭉 켜며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 팀장님 없으니까 어깨가 저절로 펴지는 거 같아요.”

“그치. 김 대리도 이번에 잘 피해 갔어. 원래는 신입 때부터 팀장님 출장 짝꿍이었잖아.”

“그러게요. 와, 이렇게 좋은 걸 저만 모르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 옆에 있는 허운은 쯧쯧 혀를 차며 둘에게 퉁을 놨다.

“아, 너무 대놓고들 좋아하시는 거 아닙니까? 팀장님이 들으면 섭섭하시겠… 흐흐흐.”

허운은 짐짓 엄한 체를 하려다가 실패했다.

웃음이 부지불식간에 터져 나온 까닭이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셋은 천치처럼 헤헤 웃었다.

그때 홍은주 대리가 그들의 좋은 기분을 대번에 구겨버렸다.

“팀장님이 출장 가시면서 업무 할당해두시고 가셨어요. 메일로 보내놨으니까 참고해주세요.”

“아…….”

잠깐의 단잠에서 깨어버린 셋의 얼굴이 동시에 시무룩해졌다.

홍은주 대리가 보낸 메일을 확인하던 송희근 과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고개를 파티션 위로 살짝 내밀면서 홍은주 대리를 바라봤다.

“홍 대리.”

“네, 과장님.”

“나한테는 파일 잘못 보낸 거 같은데?”

“아, 과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거라고 팀장님이 미리 말씀하셨어요.”

그 말에 송희근 과장은 자기가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굴려지는 손오공이 된 기분이었다.

찜찜한 얼굴로 그는 홍은주 대리에게 물었다.

“이게 맞다고? 정말 이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한태윤 차장이 홍은주 대리 대신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팀장 대리님.”

대찬이 송희근 과장에게 남긴 문서는 아홉 자로 이뤄져 있었다.

‘팀장 부재 시 업무 대리.’

송희근 과장은 그 글자를 한참 바라봤다.

한태윤 차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팀장님이 출장 가시면서 그러셨어요. 팀장 대리는 저보다는 과장님이 적격이라고요.”

허운이 옆에서 거들었다.

“역시 그래도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있으니까.”

“그, 그래?”

송희근 과장은 어흠, 헛기침을 했다.

말 몇 마디나마 인정을 해주니 어깨가 조금 올라가기는 했다.

송희근 과장의 영상을 본 대찬이 내어주는 작은 배려였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깊은 한숨 쉬며 회한을 토로하던 걸 생각하니 감투 한번 씌워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약간의 미안한 감정을 갚기 위해.

영문을 모르는 송희근 과장은 호랑이 없는 굴에 공식적으로 왕관을 물려받았으니 기분이 흡족할 뿐이었다.

송희근 과장은 의욕을 가지고 대찬의 빈자리를 메우고자 했다.

혁신경영팀의 업무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아, 영 노는 줄만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네.’

송희근 과장은 대찬의 역할이 까다로운 것이었음을 새삼 체감했다.

혁신경영팀은 누가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일을 던져주고 그걸 해내는 수동적인 부서가 아니었다.

일감을 알아서 찾아야 했고, 권한이 자유로운 만큼 책임도 무제한이었다.

그런 자율과 책임과는 거리가 먼 송희근 과장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어서 한태윤 차장에게 넌지시 물어보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제 손으로 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다른 부서들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꼼꼼히 검토했다.

대찬이 그랬듯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못할 거라면, 최소한 만들어진 사업이라도 더할 건 더하고 뺄 건 빼면서 제 몫을 해내고자 했다.

그런 그의 열정은 제법 값을 쳐줄 만한 것이었다.

퇴근시간에 이르러 허운이 그에게 물었다.

“과장님, 오늘 팀장님도 안 계시는데 일찍 셔터 내리고 한잔 꺾으실까요?”

“어, 카드 줄게, 당신들끼리 먹어.”

허운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과장님은 안 가세요?”

“난 일 좀 하다 가려고.”

“과장님, 어디 편찮으세요?”

“말짱하다. 허 과장이 뭔 말 하고 싶은 줄은 알겠는데, 괜히 힘들게 말 보태지 말고 술이나 마시러 가.”

“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요.”

허운의 말에 김산호가 굳이 맞장구를 쳤다.

“동서남북에서 다 뜬대도 믿겠어요. 세상에, 송 ‘희’자 ‘근’자 과장님께서 야근을 하신답니다! 그것도 자진해서!”

한태윤 차장은 그들의 등을 툭툭 두드리면서 웃었다.

“일하신다는 분 괜히 심사 비틀지 말고 우리끼리 움직입시다. 과장님, 혹시 생각나면 합류하세요.”

“어어, 알겠어요, 우리 한 차장님.”

송희근 과장은 건성건성 손짓으로 그들을 내보냈다.

홍은주 대리는 역시나 차가운 얼굴로 귀신처럼 그에게 다가갔다.

송희근 과장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홍은주 대리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책상 위에 음료수 한 병을 올려놨다.

“드셔가면서 하세요.”

“어? 어어, 고마워.”

“냉장고에 도시락 사놨어요. 편의점 도시락이긴 한데 출출하시면 드세요.”

송희근 과장은 홍은주 대리의 호의가 얼떨떨하기만 했다.

매번 퉁바리를 놨으면 놨지 어디 그럴듯한 친절 한번 받아본 일이 없었다.

송희근 과장이 어안이 벙벙해서 제대로 감사인사도 못하는 사이.

홍은주 대리는 꾸벅 인사를 올리고 저만치 멀어져가는 일행을 따라잡았다.

송희근 과장은 홍은주 대리의 음료수를 지그시 바라봤다.

‘내가 스스로 짐을 짊어지려니까 이런 호의를 베푸는구나.’

송희근 과장의 혓바닥에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지금껏 작은 인간적인 호의마저 받지 못한 건 홍은주 대리의 성격이 쌀쌀맞은 탓이 아니었다.

송희근 과장 자신이 호의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대찬에게는 사근사근 잘하던 직원들이 자신에게는 왜 그렇게 뚱하고 시큼털털했는지.

송희근 과장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직원들이 아수라백작이거나 직급의 높낮이를 따지는 게 아니었다.

‘그래, 지금껏 나도 참 병신이었다.’

송희근 과장은 잠깐 슬픈 얼굴을 하다가 이내 서류뭉치를 상대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송희근 과장의 야근은 이어졌다.

허운과 김산호는 그걸 두고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썼다.

이제는 조대찬 부장이 영적 능력을 획득해서, 출장 나가서도 직원들의 마인드를 자유자재로 컨트롤하게 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출장 가기 전에 송희근 과장을 불러다 웃는 얼굴로 대차게 조인트를 깠을까.

커피 한 잔과 함께 허운과 김산호는 무가치한 토론을 한참 즐겼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다.

그것처럼 필래 비바체에서 모든 서류는 혁신경영팀으로 통했다.

모든 결재서류는 혁신경영팀에서 한 번 걸러져 회사의 대표인 서원웅에게로 넘어갔다.

물론 대찬의 업무능력이 아무리 탁월하다 해도 모든 서류를 일일이 검토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대찬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보고서의 심상찮은 구석을 탁탁 짚어내서 해당 부서로 되돌려 보냈다.

그렇게 오류의 십중팔구가 대찬의 눈에서 걸러지는 까닭으로 다른 부서에서는 대찬을 일컬어 통곡의 벽이라는 증오 섞인 별명으로 일컫기도 했다.

대찬은 도리어 상사 믹서기보다는 차라리 그게 낫다며 반겼지만.

그런데 그런 면모가 대찬이 있을 때는 빛을 발했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도리어 독으로 작용했다.

대찬이 장기간 자리를 비우자 각 부서들이 이때다 싶어 서류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송희근 과장부터가 대찬보다 실력이 부족하다고 자인했다.

그는 갑자기 봇물 터지듯 밀려들어오는 서류에 정신을 못 차렸다.

2인분을 하자고 야근을 자청했는데, 야근을 해야 간신히 대찬을 기준으로 0.7 내지는 0.8인분 정도를 해내는 게 고작이었다.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품앗이에 나섰는데도 그랬다.

그러던 차, 마트사업부문에서 혁신경영팀으로 보고서가 넘어왔다.

오다혜는 송희근 과장에게 마트사업부문의 서류를 넘기면서 웃었다.

“그래도 여기는 꽤 양심적이네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이것 보세요. 다른 부서보다 서류가 훨씬 얇잖아요.”

“어, 그러네? 여기가 사업부문 네 개 중에 가장 바쁜데 왜 분량은 가장 적은 거지?”

오다혜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친절하게 요약본만 보냈더라고요. 요약본 확인하시고 의아한 부분이 있으시면 그 부분만 풀 버전으로 보내드리겠대요.”

“…그래?”

오다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그래도 업무 넘치던 차에 잘됐죠, 뭐.”

“그러네.”

송희근 과장은 평소처럼 대답하다가 멈칫했다.

이건 송희근 과장 본인의 언어였다.

그런데 원래 이 자리에 앉아있던 대찬이었다면.

그였어도 똑같이 그러네, 말하고 관뒀을까.

송희근 과장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답을 찾았다.

‘아니야, 그렇게 물렁하게 넘어갔을 리가 없지, 그 독종이.’

대찬과 송희근 과장의 차이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무언가 꺼림칙한 걸 알면서도 귀찮아서 그냥 넘기는 것.

그리고 파봤자 별 게 없을 거 같으면서도 굳이 한번 뒤집어보는 것.

그 둘의 차이.

갯벌의 구멍에 낙지가 있을 확률이 적다고 다 지나쳐버리면 한 마리도 못 잡는다.

그러나 확률이 1%에 불과하더라도 구멍마다 다 뒤져보면 어느새 소쿠리 가득 낙지가 구물거리게 되는 터.

송희근 과장은 대찬의 길을 택하기로 했다.

“오 대리.”

“네?”

“마트사업부문에 연락해서 원본 보내라고 해.”

“아, 네. 근데 괜찮으시겠어요?”

오다혜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아 송희근 과장은 되물었다.

“괜찮겠냐니, 뭐가?”

“개별 부서도 아니고 마트사업부문에서 통째로 이렇게 한 걸 보면, 도 전무님 지시사항인 거 같은데…….”

오다혜의 말이 맞았다.

무슨 부, 무슨 부에서 혁신경영팀을 배려한답시고 이렇게 했다면 모를까.

필래 비바체의 3대 축 중에 하나인 마트사업부문 전체가 그런 방침으로 움직였다.

게다가 그 마트사업부문의 부문장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사내에서 대찬을 가장 미워하는 장본인이자 직급과 연차를 따지면 공식적인 넘버 투였다.

송희근 과장이 대적하기에는 다윗과 골리앗의 비교로도 부족했다.

오다혜의 말에 송희근 과장은 잠깐 오금이 저렸다.

오다혜도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권했다.

“그냥 저쪽에서 하자는 대로 해주는 게 어떨까요? 그게 저희한테도 편하잖아요.”

송희근 과장은 잠깐 갈등했다.

대찬쯤이나 돼야 겨우 맞먹는 도진석 전무의 성질머리였다.

송희근 과장쯤이야 한 주먹거리도 안 되었다.

송희근 과장은 침묵 속에서 답변을 유보하다가 눈을 빛내며 오다혜를 직시했다.

“아니야. 다 원본으로 달라고 해.”

“…알았어요.”

오다혜는 살짝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송희근 과장의 선택은 자기 동료들에게도, 마트사업부문에게도 인심을 잃을 일이었다.

그래도 송희근 과장은 밀어붙였다.

‘조대찬 코스프레 할 거면 이번에 제대로 해봐야지.’

오다혜는 마트사업부문에 송희근 과장의 뜻을 전달했다.

그러자 2분도 되지 않아 송희근 과장의 자리에 전화가 울렸다.

송희근 과장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혁신경영팀 송희…….”

“야! 너 뭐야!”

송희근 과장이 직급은 고사하고 자기 이름 석 자도 다 말하기 전에 불호령이 떨어졌다.

송희근 과장은 어깨를 움찔했다.

“누, 누구십니까?”

“에이 씨, 내 목소리도 몰라!”

“저, 전무님.”

도진석 전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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