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332화 (332/556)

난 할 수 있어 332화

허운은 바로 송희근 과장을 회의실로 불러냈다.

대찬은 멀찍이 서서 둘의 대화를 듣지는 못하고 바라만 봤다.

허운의 말에 송희근 과장은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안 놀랄 수가 없겠지.’

제 딴에는 보안에 만전을 기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러다 완곡하게 방송을 그만두시라 권하는 허운의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허운의 권유가 계속될수록 송희근 과장의 얼굴은 비 맞은 강아지 꼴이 되어가고 있었다.

모처럼 지루한 일상에 활력소를 찾았다.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

그걸 하루아침에 포기하라니, 입이 메마른 채로 오아시스를 지나치라니 실망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둘의 대화는 뒷맛이 개운치 않은 채로 끝났다.

송희근 과장이 먼저 자리를 떴다.

회의실에 혼자 남은 허운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걸 대찬은 깊은 한숨을 쉬며 보았다.

허운의 권유를 그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대찬은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허운으로는 안 되니 대찬은 자신이 나서서 쇠뿔을 단김에 뽑으려다가 관뒀다.

사람의 마음이 그랬다.

전 방위로 몰아붙이면 오히려 오기가 생긴다.

대찬까지 나서서 송희근 과장에게 쏘아대면 도리어 엉뚱한 곳으로 튀는 수가 있었다.

‘하루 날 잡아서 잘 달래면서 말해야겠네.’

대찬은 일단 보류했다.

그날 밤.

송희근 과장은 답답한 마음에 라이브 방송을 켰다.

그는 보통 돌발 변수를 없애기 위해 편집된 영상을 주로 올리고 라이브 방송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오랜만에 라이브 방송을 켜자 사람들이 제법 몰렸다.

송희근 과장은 한숨 섞어서 말했다.

“아, 동료한테 방송하는 거 들켰어요. 착잡합니다.”

남의 슬픔은 나의 기쁨.

시청자들은 키읔으로 채팅창을 도배했다.

“웃지 마요, 진짜. 난 심각하다니까? 채널 폭파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쏭과장의 진중한 표정에 텍스트로 웃고 떠들던 시청자들의 분위기도 착 가라앉았다.

“아니, 어떻게 알았지? 얼굴도 가리고 이름도 안 밝혔는데 참 나. 사람 일이 안되려니까 이렇게 안 되네요. 방송 시작한 지 2년 만에 구독자도 늘고 빛 좀 보나 싶었는데.”

송희근 과장이 탄식하면서 말하자 이제 키읔의 물결은 ‘ㅠ’의 물결로 바뀌었다.

그때 쏭과장TV의 ‘큰손’으로 불리는 한 시청자가 나섰다.

-월300님이 5만 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쏭과장 40대 중반까지 과장이면 얼마 안 남았는데 그냥 시원하게 지르고 사표 쓰자.’

그 말에 송희근 과장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굴을 했다.

“월300님, 5만 원 후원 감사합니다. 그래도 처자식이 있는데 어떻게 사표를 씁니까.”

-월300님이 2천 원을 후원하셨습니다.

‘구독자 15만이면 과장 월급만큼은 아니어도 처자식 먹여 살릴 정도는 되잖아? 그리고 이 추세면 금방 20만, 30만 찍을 텐데.’

열혈 시청자 월300의 거듭되는 말에 송희근 과장은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망설였다.

“아유, 내가 홀몸이었으면 그랬겠는데 그래도 좀 그래요. 내년에 아들 중학교 들어가는데.”

-월300님이 5천 원을 후원하셨습니다.

‘누가 지금 당장 그만두래? 계속하다가 들키면 시원하게 지르고 퇴사하라는 거지. 사표 낼 때 몰래 촬영해서 올리면 레전드 영상 각이다, 진짜. 사표 내면 나도 200 쏜다.’

송희근 과장은 피식 웃었다.

“월300 벌면서 무슨 200을 쏜대요?”

-월300님이 2천 원을 후원하셨습니다.

‘후원금으로만 월 300 쓴다는 건데?’

송희근 과장은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목소리에 각을 잡았다.

“어휴, 충성.”

-월300님이 1만 원을 후원하셨습니다.

‘가늘고 길게 살아도 몸부림은 한번 쳐보겠다며. 방송 그만두지 마. 명퇴도 몇 년 안 남았는데 회사 나오면 치킨이나 튀기다가 빚더미 앉을 셈이야?’

송희근 과장은 가만히 침묵하다가 말했다.

“새겨들을게요. 만 원 후원 감사합니다.”

그는 어영부영 시간을 더 때우다가 방송을 껐다.

송희근 과장은 자려고 침대에 누워서도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졸음기라고는 전혀 없는 맑은 눈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그의 옆에서 아내는 이를 으드득 갈며 곤하게 잠이 들어있었다.

송희근 과장은 그런 아내를 슬쩍 곁눈질로 살폈다.

“그래, 회사에 있어봤자 얼마나 버티겠어. 방송은 잘 되기만 하면 내가 하고 싶을 때까지 할 수 있는 건데.”

제때 차장으로 진급했다면 또 모를 일이다.

그럼 부장까지도 바라볼 수 있다.

그런데 송희근 과장의 유일한 동아줄인 대찬은 자신 대신 한태윤을 택했다.

아마 이대로 가면 부장 자리도 한태윤의 몫일 것이다.

송희근 과장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역시 자신은 한태윤에게 게임이 안 됐다.

송희근 과장은 자의로 방송을 그만두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대찬은 송희근 과장의 그런 마음을 세심하게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세밑한파가 슬금슬금 뼛속 깊이 스며들던 때였다.

대찬은 김태준 사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 잘 지내지?”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장님도 연말 잘 보내고 계신지요.”

“그래, 연말이라 많이 바쁜가?”

연말이라 모임이 많기는 했다.

여기저기 팔려 다니느라 바빴다.

로튼 프룻츠와 필래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니 더 그랬다.

때문에 대찬은 의식적으로 모임에 나가는 빈도를 줄이고 있던 차였다.

“하하, 술 마시느라 간이 좀 고생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럼 술 대신 밥이나 맛있는 걸로 한 끼 할까.”

“사장님과 단둘이 말입니까?”

“그 말은 완곡하게 퇴짜 놓는 건가? 이제 나한테 퇴짜도 놓고 많이 컸구만.”

대찬은 하하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언제든 시간 내보겠습니다.”

“음, 내일 저녁 어떤가.”

“좋습니다.”

“피차 같은 건물에서 일하니까 멀리 갈 것도 없이 근처에서 먹자고. 내일 퇴근쯤에 다시 연락하지.”

“기다리겠습니다.”

다음날, 김태준 사장은 대찬을 회사 근처의 중식 레스토랑으로 이끌었다.

요리가 푸짐하게 차려졌다.

대찬은 그걸 보고 군침을 삼키기 전에 의심부터 했다.

김태준 사장과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니다.

이미 김태준 사장의 레퍼토리야 대찬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잘 차려놓은 식탁을 보고 무작정 반기는 건 하수다.

김태준 사장은 허투루 온정을 베푸는 일이 없다.

꼭 이런 화려한 성찬의 뒤에는 그에 걸맞은 요구가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대찬의 찜찜한 얼굴을 보고 김태준 사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토씨 하나 뱉기 전부터 들켜버린 것 같네.”

“역시 감이 맞았군요.”

“당신 똘똘한 눈빛 보면 아주 질리겠어.”

대찬은 흐흐 웃었다.

“그래도 멍청하게 안 질리는 눈빛보다는 낫죠.”

김태준 사장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이미 들켰으니 터놓고 얘기하지.”

“그러시죠.”

“자네, 장기 출장 좀 가줘야겠어.”

“어디로 말입니까?”

“자네가 파푸아 쪽에 감각이 좀 있잖아. 로튼 프룻츠도 그쪽 농장하고 업무 진행 중인 걸로 아는데.”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럼 출장지가 파푸아뉴기니인 겁니까.”

“그래, 맞아.”

“우리 회사가 파푸아 쪽이랑 관계할 일이 있습니까?”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광물공사랑 필래에너지가 양해각서 체결했거든. 자원공동개발에 관한 MOU.”

“네.”

“첫 삽 뜨는 곳이 파푸아뉴기니에 있는 구리광산이야.”

그제야 대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은체를 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저도 지나가는 말로 들은 것 같습니다.”

“근데 그쪽이 자원은 풍부한데 문화가 독특하다던데? 그 뭐더라? 가리키는 말이 있었는데.”

“원톡이요.”

“아, 그래, 원톡. 거 아주 골 때린다더구만?”

대찬은 M16까지 갈기고 나서야 그들의 마음을 얻어낼 수 있었던 가까운 과거의 기억들을 반추했다.

지금이야 웃으며 말하지만 그때는 참 갖은 고생 다했다.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예, 골 때리는 정도가 아니죠.”

“응, 그래도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했지.”

“그 고기 먹어본 놈이 저란 말씀이시죠.”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천하의 필래그룹에서 파푸아뉴기니 뙤약볕 아래 서 본 인간이 조대찬뿐이라 이거야.”

“우쭐해야 할지, 아니면 코 꿰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왜, 아주 재수 옴 붙었다고 하지?”

“하하…….”

대찬은 땀을 삐질 흘렸다.

“기왕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아.”

김태준 사장은 그렇게 말하며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자기 접시로 옮겼다.

그는 그러면서 대찬을 바라봤다.

“음식 들면서 얘기하지?”

“아, 이거 먹으면 빼도 박도 못하고 파푸아 가야되는 거 아닌가요?”

“안 먹어도 가야 돼. 사표 쓸 거 아니면.”

“잘 먹겠습니다.”

대찬은 꿀꿀한 얼굴로 음식을 가져왔다.

김태준 사장은 음식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뭐, 자네가 할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야.”

“그런가요?”

김태준 사장은 응,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지 대사관 쪽의 도움을 많이 받겠지만 우리도 영 멍청하게 서 있을 수만은 없지.”

“그러니까 저는 구색 맞추기로군요.”

“그래, 그렇다고 허수아비처럼 서있을 거면 굳이 자네 안 보냈지. 자네가 일 싹싹하게 잘하잖아. 대충 슥 보고도 찜찜한 구석을 짚어내는 능력이 있으니 이렇게 산해진미 대접해가면서 싹싹 비는 거 아니야.”

“높이 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비바체 쪽에서 오케이 한 건가요?”

“서 대표가? 에이, 윙크만 하면 끝나는 걸. 혁신경영팀 별로 할 일 없는 거 다 알고 있어.”

대찬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다녀오죠.”

“고마워. 대신 남는 시간에 자네 개인 비즈니스 해도 좋아. 현지에서 처리해야 되는 일들 여러 건 있잖아?”

“네, 그렇죠. 겸사겸사 체류경비는 세이브했네요.”

“수당도 톡톡히 챙겨줄 테니까 너무 입 튀어나오지 말고.”

대찬은 젓가락으로 음식을 뒤지면서 빙긋 웃었다.

“사장님도 많이 유해지셨습니다?”

“뭐?”

“옛날 같았으면 개인 비즈니스 해도 좋다, 수당도 챙겨주겠다, 이런 말씀 없이 그냥 가라고 하셨을 텐데 말이죠.”

김태준 사장은 음식을 우물거리다가 종업원을 불러 말했다.

“여기 빼갈 하나 줘요.”

그는 주문을 해놓고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유해진 게 아니야. 난 그대로야.”

“예?”

“갓 들어온 코흘리개 말단한테 내가 어르고 달래면서 출장 보내겠어?”

“하하, 그러고 보니 어림도 없겠군요.”

“달라진 건 너지, 조대찬이.”

종업원이 와서 술과 술잔을 건네주었다.

술 없이 밥만 먹자던 약속은 파기되었다.

김태준 사장은 대찬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대찬은 공손히 술을 받았다.

김태준 사장은 그런 대찬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조대찬이는 사탕발림으로 오냐오냐해주고 적지 않은 돈푼으로 매수를 해야만 기꺼이 움직이는 인간이 돼버렸다, 거물이 됐다, 이 말이야.”

“아이고, 거물.”

김태준 사장은 대찬과 잔을 부딪치고 독주를 홀짝이며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하기야 나도 예전보다 성질 많이 죽긴 했어, 그렇지?”

“너그러워지시는 건 좋은 일이에요.”

“좋긴! 조대찬이 같이 새파란 놈들이 바락바락 기어오르기만 하는걸.”

“하하, 제가 안 가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요.”

“그래, 다녀와. 그래도 윤이영 씨랑 크리스마스는 잘 보냈잖아?”

“보냈죠, 뜨겁게.”

대찬은 자기가 그렇게 말해놓고 귀가 살짝 붉어진 채 부끄러운 듯 음식을 집어 먹었다.

그러자 김태준 사장은 쩝, 입맛을 다셨다.

“아, 새끼, 부럽다.”

김태준 사장은 두 번째 잔을 홀짝 들이켰다.

술이 유독 썼다.

대찬은 그렇게 예상 못한 파푸아뉴기니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기간은 약 3주라고 했다.

대찬은 이왕 가는 김에 푹 쉬다 올 작정이었다.

떠나기 하루 전.

그는 로튼 프룻츠 사무실에 들렀다.

김태준 사장의 공식적인 허락이 떨어졌다.

대찬은 당당히 필래의 돈으로 비행기를 타서 로튼 프룻츠의 일까지 해치울 작정이었다.

그는 담당 직원들에게서 현지에서 해결해야 될 일들을 챙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