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30화
새로운 얼굴들이 합류하면서, 대찬은 업무환경의 변화에도 신경을 썼다.
복장은 최대한 간편하고 자유롭게 입도록 했다.
업무에 지장이 갈 정도의 복장만 아니라면 되었다.
예를 들면 보는 사람까지 숨 막히게 만드는 무스탕을 히터 빵빵한 사무실에서 입고 있는다든지.
혹은 다른 의미로 보는 사람 숨 막히게 만드는 탱크탑을 입고 있는다든지.
그렇게 상식을 뛰어넘지만 않으면 되었다.
이런 건 윗물부터 솔선수범해야 아랫물도 눈치 보지 않고 따른다는 걸 대찬은 잘 알았다.
대찬은 업무시간에 필래에 있는 탓에 솔선수범하는 윗사람의 면모를 보여줄 기회가 거의 없었다.
때문에 대찬은 자기 대신 민승기에게 강제로 캐주얼한 복장을 입혀 출근하도록 했다.
그런 대찬을 향해 민승기는 볼멘소리를 했다.
“네가 이렇게 극성 안 떨어도 캐주얼하게 입고 가려고 했거든?”
“선배는 다 좋은데 패션센스가 꽝이에요.”
“왜 갑자기 시비세요.”
“선배가 아무리 캐쥬얼하게 입어도 다른 사람 눈에는 언캐쥬얼하게 보인다니까요. 저한테 고마워하셔야 돼요.”
“야, 그러는 너는 얼마나 패션센스가 탁월하신데?”
대찬은 어깨를 으쓱했다.
“명실공히 대한민국 탑배우 윤이영이 인정한 센스거든요.”
“그게 네가 옷 잘 입어서 인정해준 거겠냐? 고슴도치가 제 새끼 함함하다 한 거지.”
“억울하면 선배도 윤이영 남친 하세요.”
“아, 재수 없어.”
민승기는 대찬의 시선을 외면했다.
복장부터 해서 이것저것을 대찬은 살뜰히 살폈다.
대찬이 이렇듯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부분까지 신경 쓰는 까닭은 시스템을 잘 닦아놔야 나중의 수고를 덜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대찬이 뿌리를 박고 명운을 건 곳은 로튼 프룻츠보다는 필래 비바체였다.
조지아에서 와인이 들어온 이후 낮에는 필래, 밤에는 로튼 프룻츠로 보낸 날이 제법 되었다.
그러나 그런 강행군을 언제까지고 지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시스템을 잘 닦아놓고 가뿐한 기분으로 필래의 일에 집중하고자 했다.
* * *
“요즘 몰골이 말이 아니세요.”
허운은 대찬의 책상 위에 자양강장제 한 병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대찬은 고단한 눈을 비비고 허운을 향해 웃었다.
“와, 그래도 날 챙겨주는 건 허 형밖에 없네.”
“오죽하면 제가 이런 간질간질한 선물까지 해주겠어요. 그러다 진짜 몸 상해요.”
대찬은 뽀드득, 기분 좋게 뚜껑을 열고 자양강장제를 그대로 식도에 들이부었다.
“안 그래도 이제 당분간 부업은 쉬기로 했어. 나 없어도 잘 굴러가게 마지막 공들이고 나왔거든.”
“에, 벌써요?”
“뭐야, 그 반응은? 나 좀 쉬라고 걱정해주는 거 아니었어?”
“아뇨, 이거 드시고 더 힘내라는 뜻이었는데요.”
“와, 진짜 너무하네.”
그러자 송희근 과장이 킬킬 웃으면서 말했다.
“허 과장 요새 아주 살 판 났었거든요. 조 팀장님이 옆 동네 신경 쓰느라 좀 헐렁해지셨다고, 요즘 회사 다닐 맛 난다면서.”
송희근 과장의 고자질에 허운이 이를 악물고 항의했다.
“그걸 고대로 일러바치시면 어떡해요!”
“그럼 입조심 했어야지, 안 그래? 흐헤헤헤.”
대찬은 미소를 머금으며 송희근 과장에게 물었다.
“과장님, 요즘 뭐 좋은 일 있으세요?”
“아뇨? 그냥 그런데요. 왜요?”
“아니, 요새 자주 웃고 다니셔서.”
“아, 너무 경박스러웠나요.”
대찬은 그의 웃음이 다소 그런 측면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굳이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건 아니고요. 보기 좋아서요.”
“흐헤헤, 아닙니다. 별일 없어요.”
“그럼 송 과장님도 제가 요새 사무실 고삐 좀 안 조였다고 허 과장처럼 회사 다닐 맛 나시는 거예요?”
“아유, 그럴 리가요.”
“오늘부로 로튼 프룻츠에 신경 끄고 여기에만 전념할 테니까 송 과장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면 답이 나오겠네요.”
“아니래도 그러시네.”
송희근 과장은 나사가 두 개쯤은 빠진 웃음을 계속 흘렸다.
‘뭐야, 애인이라도 생겼나.’
대찬은 그의 웃음이 영 찜찜했다.
송희근 과장의 괴상한 웃음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대찬은 얼마 지나지 않아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집에서의 저녁식사는 대찬이 오랜만에 맞는 호사였다.
낮에는 필래, 밤에는 로튼 프룻츠, 이른바 ‘주필야로’로 하루를 온통 써버렸다.
집에 들어가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대찬은 오랜만에 되찾은 저녁을 혼자만의 시간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이게 얼마만이야.’
대충 셈 해봐도 족히 삼 개월은 되었다.
대찬의 4/4분기는 그야말로 폭풍처럼 지나갔다.
돌이켜보면 그 모진 업무들을, 그것도 스스로 어떻게 해냈는지 놀라웠다.
대찬은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기특했다.
그런 자신에게 오랜만에 확보한 저녁 자유시간은 큰 포상이었다.
‘오늘은 철저히 혼자서 보낼 거야.’
술이나 한잔하자는 허운의 제안을 뿌리쳤다.
여유가 생긴 김에 학창시절의 추억을 되새겨 PC방에 한 번 들러보자던 최재한의 제안도 뿌리쳤다.
미안하지만 윤이영도 이날만큼은 자신을 방해할 수 없었다.
대찬은 윤이영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갖겠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윤이영의 쿨한 답장이 왔다.
-나도 오늘 오빠랑 놀 생각 없었거든? 김칫국 마시기는.
대찬은 빙긋 웃으면서 휴대폰을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혼자서 뭘 하면 좋을까.
뭘 해야 혼자서 기가 막히게 잘 놀았다고 소문이 날까.
대찬은 로튼 프룻츠의 미래를 고민하던 것보다 더 심각하게 고민했다.
꼭 이런 날은 폼 잡으면 오히려 그르치고 만다.
소박하되 내실을 기하는 편이 좋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묵혀놨던 영화 한 편을 틀어놓자.
그리고 네 캔에 만 원 하는 편의점 맥주를 사자.
거기에 소박한 안주를 곁들이자.
대찬은 그렇게 결심했다.
그는 다시 또 무엇을 소박한 안주로 삼을 것이냐를 두고 한참 고민했다.
그렇게 회사에서 잠실역까지 코트에 손을 찌르고 천천히 걸어가는 길.
대찬의 시선에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아, 저게 있었지.’
모든 게 도회적인 이 주변에서 유일하게 정겨운 곳이었다.
떡볶이랑 순대, 튀김 따위를 파는 포장마차였다.
으레 만날 수 있는 포장마차였지만 대찬의 입맛에 잘 맞아서 종종 이용했다.
별것 없는 분식인데도 이상하게 당기는 맛이었다.
덕분에 푸짐한 몸매만큼이나 인심 좋은 주인아주머니도 대찬을 알아봤다.
뻑뻑한 돼지 간을 떡볶이 양념에 찍어 먹고 시원하게 맥주 한 캔을 들이켤 생각에 벌써부터 군침이 돌았다.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대찬이 포장마차의 장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주인아주머니보다 먼저 눈에 띈 이가 있었다.
송희근 과장이었다.
그는 포장마차 한 구석에서 이쑤시개로 열심히 떡볶이와 어묵을 먹고 있었다.
대찬이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려다가 멈칫했다.
송희근 과장은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와, 여기 증말 맛있거든요? 여러분이 와서 드셔보셔야 돼.”
‘뭐야,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대찬은 혹시 통화 중인 건 아닌지 슬쩍 살폈다.
그런데 통화 중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통화 중인 사람을 여러분이라고 부르는 정신 나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송희근 과장은 계속 중얼거렸다.
“여기 떡볶이 밀떡으로 만들어서 진짜 맛있고. 양념이 입에 착 달라붙고. 이거 어묵은 무조건 부산어묵이다. 사장님, 이거 부산어묵 맞죠.”
“부산어묵 아닌 데도 있나?”
“그럼요. 부산어묵은 고급 어묵이죠.”
혼자서 막 중얼거리는 송희근 과장을 보고 대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 송희근 과장의 팔을 살짝 잡았다.
“과장님, 여기서 뭐 해요?”
송희근 과장은 대찬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티, 팀장님.”
대찬은 송희근 과장의 손에 들린 카메라를 바라봤다.
제법 고가의 장비인 듯했다.
“송 과장님이 카메라에 취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네요.”
“아, 이거요? 하하…….”
송희근 과장은 머쓱하게 웃으며 슬그머니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근데 무슨 혼잣말을 그렇게 하세요?”
“나, 나이를 먹으니까 혼잣말이 는 거 있죠.”
그대로 속아주기에는 너무 헐렁한 변명이었다.
대찬은 송희근 과장을 흘끔 봤다.
“그래요?”
“…네.”
“그러시군요.”
대찬은 짧게 대답하고 주인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사장님, 저 떡볶이 1인분 하고 순대 2인분하고 튀김 1인분 포장해주세요. 순대는 간 많이 넣어주세요.”
“순대는 1인분만 해. 많이 줄 테니까.”
“에이, 그래도 많이 팔아드려야 나중에 떳떳하게 또 오죠.”
주인아주머니는 피식 웃고는 떡볶이를 뒤적이며 말했다.
“그럼 저 오뎅이나 하나 먹어. 서비스야.”
“그건 감사히 먹을게요.”
대찬은 어묵 국물을 받아놓고 지그재그로 꼬치에 꽂은 사각어묵을 한 입 물었다.
그러면서 송희근 과장에게 물었다.
“괜히 저 때문에 하던 거 못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 아니에요. 제가 뭘 하고 있었다고.”
확실히 송희근 과장은 거짓말에 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거짓말깨나 해본 대찬에게는 더 쉽게 들통났다.
말을 하면서 눈동자는 좌로 우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 눈동자의 움직임이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어차피 물어봐도 개운한 답을 내어줄 것 같진 않았다.
대찬은 어묵을 간장에 콕 찍어 한 입에 넣고는 송희근 과장에게 말했다.
“과장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예, 팀장님도 조심히 들어가십쇼.”
대찬은 주인아주머니가 넘겨주는 묵직한 봉지를 들고 포장마차를 나섰다.
기실 크게 관심 가질 만한 일은 아니었다.
남이사 카메라를 들고 혼잣말을 하든 목탁을 치면서 염불을 외든 무슨 상관인가.
그런데 어째 느낌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그리고 별일 아니라면 스스럼없이 터놨을 터.
굳이 꽁꽁 감추는 까닭이 대찬은 궁금했다.
‘아, 이놈의 오지랖.’
대찬의 두 번째 삶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발전한 것을 하나 꼽자면 오지랖의 넓이였다.
그런데 오지랖을 넓힐 때마다 족족 건수가 터지는 판이다.
그러니 신경을 끄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대찬은 집으로 돌아와 깨끗이 샤워하고 소파에 앉아 맥주 캔을 땄다.
그는 비스듬한 자세로 맥주를 마시면서 허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허운의 목소리는 잔뜩 부어 있었다.
“내가 술 먹자고 한 거 까놓고 무슨 염치로 전화를 다 해?”
공사의 구분이 명확한 대찬과 허운이었다.
퇴근 이후로는 둘의 관계는 친한 형과 동생이었다.
“내가 다음에 살 테니까 꽁해있지 좀 마.”
“꽁하게 만들어놓고는 꽁해있지 말래.”
대찬은 허운의 투정을 외면하고 제 할 말을 했다.
“요즘 송 과장님 이상한 거 못 느꼈어?”
“너 집착 하나는 진짜 알아줘야겠다. 송 과장님이 웃으면서 다니는 게 그렇게 못마땅해?”
“못마땅한 게 아니라. 아까 포장마차에서도 카메라 들고 혼자서 막 중얼거리시잖아.”
“누구랑 통화하던 건 아니고?”
“아니야.”
“카메라를 들고 중얼거렸다고?”
허운은 그렇게 말하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릎을 탁 쳤다.
“알았다.”
“알았어? 뭔데? 뭐야?”
대찬의 다급한 물음에 허운의 고약한 심술보가 발동했다.
“내가 왜 알려드려야 하죠, 조 팀장님?”
“아, 진짜 이럴 거야?”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네? 내가 그렇게 술 좀 마셔달라고 했는데도 조대찬이 튕기니까 내가 했던 말이랑 똑같네?”
허운이 치사하게 나오니 대찬도 마찬가지로 치사해지기로 했다.
“내일부터 진짜 풀 야근 뛰어볼래? 회사생활 힘들게 해줘?”
“와, 진짜 너……!”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말해. 안 그러면 진짜 확 굴려버린다.”
현실의 벽 앞에 허운은 백기를 드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대찬이 원하던 답을 들려주었다.
“내 생각에는 송 과장님, 인터넷방송 하시는 거 같아.”
“…인터넷방송?”
“어. 그렇지 않고서야 카메라 들고 혼자서 중얼거릴 일이 없지. 정말 송 과장님이 정신병 걸리신 게 아니라면.”
“인터넷방송이라…….”
대찬은 허운의 가설이 꽤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오케이, 알았어. 고마워. 끊을게.”
“야! 이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술…….”
뚝.
대찬은 전화를 끊었다.
꺼진 액정너머로 허운의 거친 상욕이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