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29화
나머지 셋의 출신은 골고루였다.
학벌이라는 자격을 과대평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예 괄시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학벌은 초중고 제도권 교육 12년간의 노력과 성취를 어림짐작할 수 있는 쉬운 잣대였다.
교왕과직.
굽은 것을 고치려다가 지나치게 곧아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학벌 타파, 학연주의 해체.
그건 정치인의 이상적인 구호로는 온당하다.
그러나 현장의 기업인이 채택하기에는 입에 닿는 솜사탕이다.
옳은 일을 했다며 잠깐의 달콤한 기분에 취하기야 하지만 이내 현실의 난관 앞에 허무해지는 것이었다.
다섯 명의 신입사원 중 고원대 출신 둘을 제외한 나머지 셋 중에 둘은 수도권 4년제를 나왔고, 나머지 하나는 지방 국립대 출신이었다.
남자 셋, 여자 둘.
대찬은 웃으면서 그들 하나하나와 악수를 나눴다
“저희와 함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잘해 봐요.”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찬은 편하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의 손을 맞잡고 대답하는 신입사원들의 목소리는 그렇지 못했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대찬은 대표의 자격으로 그들과 나누는 악수가 영 어색했다.
발끝이 저절로 오므라지고 아래턱이 간질간질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기업의 사장이라는 것을 잘 체감하지 못했다.
맹윤주, 진위생이야 항상 보던 얼굴들이었다.
나이도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때문에 대찬은 부지불식간에 그들이 대학 선후배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웜샤인 출신 직원들 역시 대찬과 사적인 친분이 두터운 편이었다.
개중 터줏대감인 박 부장하고는 대찬의 신입생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
그렇기에 대찬이 그들에게 권위적으로 구는 일은 없었다.
직원들 역시 사장이 가진 최소한의 권위는 인정해주되 필요 이상으로 어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대찬은 대표로서의 책임감은 느끼고 있었지만 그들 윗사람으로서의 권위의식은 희미했다.
그런데 자기 앞에서 바짝 군기 든 저들을 보고 있자니, 자기가 사장은 사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 회사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오너가 젊다는 거예요. 젊어서 쓸데없이 허례허식 차릴 필요는 없지만, 그만큼 경험과 식견이 부족해요.”
신입들은 대찬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대찬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저를, 그리고 실질적으로 이 회사를 총괄하는 민 대표님을 필요 이상으로 어려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젊은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서 부족한 경험, 식견을 극복해보자고요.”
“네, 알겠습니다.”
신입들은 대찬의 앞에서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했다.
대찬은 그들의 눈빛을 보고 신입 한번 잘 뽑았다는 걸 체감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민승기를 바라봤다.
“민 대표님도 한 말씀 하시죠?”
“응, 조 대표랑 이하동문.”
“쉽게 가시네요.”
“내가 몇 마디 더 얹어봤자 교장 훈화 끝나고 눈치 없이 이어지는 교감 선생님 훈화 말씀밖에 더 돼?”
“굳이 따지면 제가 교감…….”
영양가라고는 곤약만큼도 없는 대찬의 말을 민승기는 뚝 끊었다.
“됐어. 자, 오늘은 일찍 업무 마무리하고 회식이나 합시다.”
민승기의 말에 임직원들은 회식장소로 우르르 몰려갔다.
맹윤주는 유치원 선생님처럼 신입들을 인솔했다.
신입 중 하나가 불안한 목소리로 맹윤주에게 물었다.
“저… 과장님.”
“네.”
“제가 건배사 좀 준비해봤는데, 이상할까봐 불안해서요.”
“건배사요?”
“한번 들어주시고 말씀 좀 해주실 수 있으세요?”
그 물음에 맹윤주는 피식 웃었다.
“어, 들을 필요 없을 거 같은데요.”
“그, 그런가요.”
그 순간 신입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역시 회사는 다 똑같다.
양의 탈을 쓴 늑대다!
깨어있는 척, 오픈마인드인 척하더니 여기도 별수 없다.
이런 건배사쯤은 신입이 알아서 하라고 눈치를 주는 저 젊은 과장의 말본새를 보니 이 회사도 글러먹었다.
순간 신입의 뇌리에는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아직 사회생활에 농익지 않아서 표정에 그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런 그를 보고 맹윤주는 가볍게 웃었다.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거 같은데.”
“네, 네?”
“우리 회식할 때 건배사 이런 거 안 시켜요. 대표님 두 분 다 불과 몇 년 전에 신입시절을 겪으셔서 아주 학을 떼시거든요?”
“아아…….”
그제야 신입의 달뜨던 마음이 얌전히 가라앉았다.
역시 이 회사 오길 잘했어.
신입의 마음은 그렇게 냉탕과 온탕을 순식간에 오갔다.
맹윤주는 신입의 솔직한 표정이 재밌었는지 한 마디 더 얹었다.
“그리고 오늘은 신입 분들 환영회를 겸하는 자리라 빠지면 안 되긴 했지만, 웬만한 회식은 자유롭게 빠지고 싶을 때 빠지면 됩니다. 1차만 끼고 2차는 안 따라가도 되고요.”
“저, 정말인가요?”
신입은 곧이곧대로 믿지 못했다.
저 과장의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실은 자기를 골탕 먹이려는 악마의 속삭임인지 알 턱이 없었다.
“못 믿으시겠어요?”
“아뇨, 못 믿는 건 아닌데…….”
“차차 다녀보시면 알 거예요. 다닐 만해요, 이 회사. 가끔 업무가 미칠 듯이 몰아닥쳐서 흠이지만.”
“아,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교감선생님 훈화 말씀은 사양이라던 민승기는 회식 장소에 가서는 제법 길게 말을 했다.
“다른 대기업처럼 신입연수를 가거나 거하게 팡파레를 터트려주지는 못합니다. 아직은 우리 딴엔 근사한 곳에서 이렇게 회식이나 하는 정도예요.”
애초에 신입사원 다섯 명을 데리고 연수를 갈 것이라고는 신입들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덤덤히 민승기의 말을 들었다.
“아직 모든 게 불안하고 체계가 잡혀있지 않습니다. 벌여놓은 사업들도 중구난방이고.”
그 중구난방의 장본인인 대찬은 지레 찔려 민승기를 흘끗 바라봤다.
민승기도 그 시선을 느꼈는지 슬쩍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우리 손으로 만들어낸 사업들이 일단 순풍을 타고 있으니, 여러분이 열심히 가세해준다면 곧 기반도 탄탄해질 겁니다.”
박 부장이 웃으면서 거들었다.
“대열의 선두에 서려면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죠. 막막한 길을 개척해야 하는 대신 과실은 제일 먼저 맛볼 테니까.”
신입들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승기는 경력직 직원들에게도 말을 건넸다.
“신입사원분들이 제대로 1인분을 해내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겁니다. 그동안은 우리 경력직 분들이 조금 더 힘을 내주셔야 합니다. 신입들에게도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마시고요.”
경력직들은 신입들보다 역시 표정에 한결 여유가 넘쳤다.
“네, 그러겠습니다.”
민승기가 헤드헌터를 통해 채용한 경력직들은 프로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그들은 이를테면 B품들이었다.
B품은 소위 짝퉁과는 다르다.
짝퉁은 진품을 흉내 낸 가품이지만, B품은 잡티 하나 때문에 진품이 되지 못한 ‘사실상’ 진품이다.
정품이랑 다를 게 없는데 한 끗 차이로 어긋나 최종 검수단계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은 B품들이었다.
그들이 몸담았던 회사에서 도저히 용납하지 못했던 자질들을 하나씩 지닌 사람들이었다.
상사에게 사탕발림을 못하고 입바른 소리밖에 못하는 자질.
수당 없는 야근은 못 견디는 자질.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해서 회식에 끌려가는 걸 도살장 끌려가는 것만큼 싫어하는 자질.
그런 자질들 때문에 기존의 회사들은 그들을 품지 못하고 토해냈다.
B품 도장을 찍어 내보냈다.
로튼 프룻츠로서는 대환영이었다.
어디 대기업이 흘리고 간 부스러기가 없나 바닥을 뒤지고 다니던 로튼 프룻츠는 그들을 횡재한 심정으로 모셔갔다.
그런 자질들은 로튼 프룻츠에서 어떤 흠결도 되지 못했다.
도리어 입바른 소리 해서 건강한 소통이 이뤄지니 환영이고, 수당 받은 만큼 야근을 대충 때우는 법이 없을 테니 환영이고, 회식에 끌려가 몸에도 안 받는 술을 진탕 마셔 다음날 업무에 지장이 가느니 차라리 안 마시는 게 환영이었다.
대찬과 민승기는 일당백의 경력직 사원들만 봐도 저절로 배가 불렀다.
민승기는 웃으면서 잔을 내밀었다.
“자, 사설이 길었죠. 술이나 마십시다. 마시기 싫은 분들은 콜라나 사이다 담으시고요. 건배!”
“건배!”
직원들은 손이 닿는 거리에 있는 동료들끼리 잔을 부딪쳤다.
대찬은 직원이라고는 맹윤주만 있을 때, 구석의 테이블 하나를 잡아두고 민승기까지 셋이서 소박하게 잔을 부딪치던 걸 생각했다.
그걸 생각하니 짧은 세월에 많은 게 바뀌긴 했다.
잔을 부딪치고 신입은 천천히 술을 마시면서 생각했다.
‘진짜 건배사 필요 없었네.’
그러다 신입의 시선이 맹윤주와 마주쳤다.
맹윤주는 거보라는 듯 웃음을 내비쳤다.
신입도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자리가 제법 길어지자 몇몇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님, 저희 피곤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대찬과 민승기는 고개를 꾸벅이며 대수롭지 않게 그들을 보냈다.
신입은 출근 하루 만에 맹윤주의 말을 믿게 되었다.
대찬은 맥주를 홀짝이면서 민승기와 향후 계획을 의논했다.
“지금 사무실은 서른 명 인원을 모두 수용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그렇지. 지금 사무실도 확장한 거긴 하지만 웜샤인 출신 직원들 들어온 이후로는 시장통처럼 북적였으니까.”
“말씀대로 지금까지 우리 회사는 체계가 잡혀있지 않아요. 이제 뉴 페이스들도 들어왔으니 구색은 맞출 필요가 있어요.”
민승기는 천천히 맥주를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둔 게 있어?”
“네, 일단 사업부를 정확히 나누는 게 좋겠어요.”
“커피랑 와인을 하나로 묶고 사회공헌 사업을 따로 하나로 두는 편이 좋겠지.”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까 커피나 와인이나 어쨌건 식품인데, 회사 이름이 썩은 과일이라 어째 좀 거시기하단 말이죠.”
“나도 내내 찜찜했어.”
“그래서 커피랑 와인 취급하는 사업부를 별도 브랜드로 묶는 게 좋겠어요.”
“자회사는 아니지만 자회사처럼 두자는 얘기지.”
“네. 그리고 그게 우리 주력사업이니까 여기 담당 직원들을 기존 사무실에 두고 사회공헌사업을 바깥으로 빼는 게 좋겠어요.”
“너도 잠실에서 왔다 갔다 하려면 커피하고 와인은 여기 남는 게 좋지. 사회공헌은 바깥으로 뺀다고? 바깥이라면?”
“작은 스타트업들이 요즘 공유오피스를 많이 이용하더라고요. 사회공헌사업 쪽도 공유오피스를 이용하면 어떨까 하는데.”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선택이야. 다른 회사들하고 정보도 교류하고 아이디어도 서로 얻어가고 나쁘지 않지.”
“사회공헌사업이 박 부장님이 진두지휘하면서 창의적인 업무들도 많이 벌려놨잖아요. 공유오피스를 이용하면 여러모로 리프레시가 될 겁니다. 어떠세요, 박 부장님?”
박 부장이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대찬과 민승기는 기존 사무실에 남고 자신은 거느린 직원들과 함께 물리적으로 독립하는 꼴이었다.
그럼 두 대표의 간섭 없이 자기가 사업을 자유롭게 주무를 수 있었다.
박 부장은 최대한 벌어지는 입꼬리를 단속하며 말했다.
“회사에 필요하다면, 따라야지요.”
“그냥 대놓고 좋아하셔도 뭐라고 안 해요, 박 부장님.”
대찬이 흐흐 웃으면서 말하자 박 부장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대찬은 민승기를 보며 말했다.
“이렇게 사회공헌사업부를 분리시키면 박 부장님 운신의 폭이 더 넓어져야 하겠죠?”
“그렇지. 부장 직급으로는 아무래도 영이 안 서겠어.”
민승기는 대찬의 말뜻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그렇게 말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 말에 박 부장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대찬은 박 부장의 손을 탁 잡았다.
박 부장의 어깨가 움찔했다.
“박 부장님.”
“네, 네에.”
“박 이사님이라도 불러도 될까요?”
“예! 당연히 저야 좋… 아, 하하… 회사가 그렇게 처분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내숭 떨지 마시라니까.”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민승기는 박 부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이사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네, 대표님. 감사합니다.”
“월급을 확 올려드리진 못해요. 상황 아시죠.”
“그럼요, 알다마다요.”
박 부장은 지금의 월급이 아쉽지는 않았다.
올라봐야 푼돈이었다.
박 부장은 로튼 프룻츠가 승승장구해서 언젠가는 빛을 보리라고 확신했다.
그때가 된다면야 부장에서 이사로 뛰면서 따라오는 월급 인상분 몇 푼이 전혀 아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박 부장은 민승기의 아쉬운 소리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민승기는 박 부장의 손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박 부장이 박 이사가 되고, 사회공헌사업부는 기존의 사무실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공유오피스에 새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커피와 와인을 취급하는 사업은 별도의 브랜드로 묶어 다루기로 했다.
이름은 ‘낮한잔, 밤한잔’으로 정해졌다.
낮한잔밤한잔의 커피와 와인 무역사업은 기존의 사무실에서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