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28화
대찬은 허점을 물고 뜯어 그가 더 이상 억울해하지도 못하게 만들고자 했다.
“높으신 분들한테 청탁이 들어오면 일단 인사 쪽에서는 성의라도 보여야 돼. 근데 윗대가리들이 잔대가리만 커가지고 자기 책임을 아주 기깔나게 회피한다니까?”
“…….”
“괜히 날 불러놓고 내 앞에서 높으신 분하고 통화를 해. 스피커폰으로. 그러면서 슬쩍 나한테 눈빛을 보내. 알아서 해라 이거지.”
“…….”
“그럼 우리는 또 알아서 기어. 근데 이게 불거지면 윗대가리들은 오리발 내민단 말이야. 자긴 시킨 적 없다고. 그럼 알아서 긴 아랫것들만 독박 쓰는 거라니까.”
“그래서 너도 그 케이스다?”
“어. 네가 나라도 억울하지 않겠냐?”
“뭐가 억울해? 어쨌든 네 손으로 청탁 받아준 거 아니야. 네가 가만히 있었으면 이 꼴 나지도 않았겠지.”
“어떻게 가만히 있냐? 그럼 내 모가지 날아가는데.”
대찬은 피식 웃었다.
“여기가 면접 자리였어도 그렇게 말할래?”
“…어?”
“윗대가리 농간에 등신같이 놀아난 멍청이입니다. 부당한 지시에 제대로 들이받지도 못하고 알아서 긴 쪼다입니다. 남의 큰 잘못 뒤에 숨어 자기 작은 잘못은 잘못도 아니라고 뻔뻔하게 우기는, 최소한의 반성도 못하는 파렴치한입니다. 그렇게 얘기할래?”
“말이 좀 심하다?”
“자기 잘못 좀 들췄다고 바로 얼굴 붉히면서 말이 심하네 어쩌네 따지기부터 하는 좀생이입니다, 그렇게 얘기할 거냐고.”
조은찬은 탁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야, 조대찬!”
“멍청이. 쪼다. 파렴치한. 좀생이.”
낱말 하나하나 씹어뱉는 발음이 조은찬의 얼굴에 침처럼 튀었다.
조은찬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그와 반대로 대찬은 잔잔한 눈동자로 국밥을 바라보며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이 회사에 들어오고 싶으면 사장 앞에서 어떻게든 자기 PR 잘 하려고 애쓰는 게 정상 아니냐? 말마다 스스로 수렁에 빠지는 자충수만 두는 지원자를 내가 왜 뽑아야 되냐.”
“젠장, 좁쌀 같은 회사도 회사라고, 꼴에 사장은 사장이라고 졸라 같잖게 구네.”
“내가 너였으면 이렇게 빨리 밑천 드러내진 않았을 거다.”
“꺼져, 이 새끼야. 내가 너 아니면 먹고 살 데 없을 줄 알아? 이게 좀 굽실거려주니까 주제도 모르고 날뛰네.”
“주제 모르는 건 너고.”
“이 새끼가 진짜……!”
“자, 이걸로 면접 끝내자. 핏줄이 뭐라고 무슨 말 하나 들어나 보자고 한 내 잘못이지.”
대찬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반도 못 먹은 국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푸념했다.
“국밥 남기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네. 나 국밥 참 좋아하거든.”
“뭐?”
“조은찬 너 사람 밥맛 떨어지게 하는 데는 소질 있는 거 같다. 아는 제약회사에 소개해줄까? 요즘 식욕억제제 만드느라 생고생하던데. 너 거기 가면 잘하겠다.”
“이 개새끼야!”
“욕 좀 그만해. 자꾸 이러면 큰고모도 네 편 못 들어주겠다.”
대찬은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면서 계산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국밥 한 그릇 정도는 사줄게. 그래도 피는 물보다 진하니까. 모아둔 돈 아껴 써. 너 재취업하려면 한참 걸리겠다.”
대찬은 식당 종업원에게 돈을 건네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조은찬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얘기를 다 들은 민승기는 피식 웃었다.
“우리가 그래도 크긴 컸나 보다. 인사청탁이 다 들어오고?”
“그러게요. 그래서 그 이후로 일절 경력직 채용 관련해서 입도 벙긋 안 하는 거예요.”
“그래, 그럴 만하다.”
“근데 막상 얘기 꺼내시니까 궁금해지네. 어떻게 뽑을 생각이세요?”
“고등학교 동창 중에 헤드헌터로 일하는 애 있어. 얘는 그래도 실력이 확실해. 그 친구 통해서 수급할 거야, 경력직은.”
“아, 그럼 됐네요. 빨리 뽑아버려요. 큰고모가 또 억지 쓰기 전에.”
민승기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자, 그럼 이제 남은 건 신입들인데.”
“핵심은 졸업생 후배들이야. 잘 골라야 되거든.”
대찬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곤 말했다.
“지금 졸업예정자 후배들 중에서 우리 회사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후배들이 종잡아 열 명은 된대요.”
“개중 옥석을 가려야 할 텐데.”
“우리가 학교를 떠난 지 오래라 누가 쓸 만한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죠.”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그 친구들 만날 기회야 술자리 몇 번밖에 없지. 그런 자리에서야 잘 웃고 잘 마시면 예쁨 받으니까.”
“업무능력은 판가름할 수가 없죠.”
“그렇지. 뭐 스펙 보고 면접 보고 대충 합격도장 찍어주면 그만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신중을 기하고 싶은데.”
“특히 능력도 중요하지만 조직에 잘 융화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민승기도 대찬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지. 오너랑 학연으로 끈끈하게 맺어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인데, 성격이 오만하면 최악이야.”
“심한 경우 회사를 난파선으로 만들 수도 있어요.”
민승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뱃사공인 우리 둘이 어떻게든 회사 안 망하게 하려고 이렇게 머리 싸매고 전전긍긍하는데 말이야.”
“후배란 놈이 와서 회사 난파시키면 우리 둘 다 제 명에 못 죽죠.”
“그래, 복장 터져서 어디 살겠냐. 뭐 방법 없겠어?”
“여러모로 고민을 해봤거든요. 근데 이것 말고 좋은 방법은 없는 거 같아서.”
“무슨 방법?”
“제가 학교에 심어둔 암행어사가 있거든요.”
민승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찬은 흐흐 웃었다.
대찬이 심어뒀다는 암행어사는 다름 아닌 고수혁이었다.
이제 슬슬 1학년 2학기 기말고사 준비에 여념이 없던 때였다.
모든 게 새로운 경험이라 얼렁뚱땅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그도 제법 학교생활에 적응하고 있었다.
대찬은 기말고사 준비에 눈코 뜰 새 없다는 그를 위해 학교 앞까지 가서 만났다.
아직 공복이라는 고수혁의 말에 대찬은 그를 식당으로 데려갔다.
든든한 식사라도 챙겨줄 요량이었는데 고수혁은 완강히 거부했다.
공부할 시간이 없으니 빨리 용건이나 말하고 가라는 뜻이었다.
대찬은 음식이 천천히 나오는 식당 대신 두툼한 샌드위치를 주력으로 하는 카페로 그를 데려갔다.
대찬은 할 말 빠르게 전하고, 그 사이에 고수혁은 빠르게 끼니를 때우면 됐으니 적절한 선택이었다.
고수혁은 뚱한 얼굴로 대찬과 마주했다.
“무슨 일이세요?”
“좀 웃으면서 반겨주면 안 될까?”
“제 눈 밑에 다크서클 안 보이세요? 어제 오늘 합해서 4시간도 못 잤어요.”
고수혁은 그렇게 말하며 입 안 가득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대찬은 팔짱을 끼면서 웃었다.
“그맘때는 사흘 밤을 새워도 끄떡없잖아? 나 1학년 때도 밤새가면서 벼락치기 하고 시험 끝나고 술 마시러 가고 그랬지.”
“와, 방금 되게 꼰대 같았어요.”
“…….”
“그리고 대학 다니실 때 학점관리 별로 안 하셨다는 거 다 알고 있거든요?”
“어떤 입 싼 놈이 그렇게 말하던?”
“아니라고 못 하시는 거 보니까 학점관리 안 하신 거 맞나보네요.”
“누가 그렇게 말했냐고!”
“제가 그걸 왜 말해요?”
다른 데서는 야무지게 제 할 말 다 하는 대찬도 고수혁 앞에서는 왠지 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다.
고수혁은 역시나 뚱한 얼굴로 대찬에게 물었다.
“그래서 왜 보자고 하셨어요?”
“너한테 비밀임무를 좀 주려고.”
“비밀임무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한 고수혁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로튼 프룻츠에 입사를 희망하는 졸업생 혹은 졸업예정자들.
그러니까 대찬의 후배이자 고수혁의 선배들의 동향을 슬쩍 귀띔해달라는 것이었다.
대찬의 말을 들은 고수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 말 한 마디에 선배들 당락이 결정되는 거겠네요?”
“그렇지.”
“실망인데요.”
고수혁의 말에 대찬의 미간이 꿈틀했다.
“실망? 뭐가.”
“어떻게 대학 신입생 말만 듣고 채용을 좌지우지해요. 실제로는 적격이어도 제가 사적으로 싫어해서 부적격이라고 말하면 어떻게 하실래요?”
“네가 그럴 거 같지는 않은데?”
고수혁은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어떻게 확신해요?”
“내가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은 있어. 네가 그렇게 꿍꿍이속이 시커먼 놈이었으면 진즉 알아봤지.”
“원래 사고는 믿던 놈이 치는 거예요.”
자꾸 말을 물고 늘어지는 고수혁에게 대찬은 입술을 악물고 따졌다.
“아, 그래서 뭐. 진짜 그러려고?”
“그건 아니고요.”
“그럼 뭔데?”
“하나 불안한 건 있어요. 제가 선배님만큼 사람 보는 눈이 좋지는 않아서요.”
“부담스럽니?”
“네. 괜히 제가 말 이상하게 해서 떨어지면 양심의 가책이 얼마나 심하겠어요.”
“아, 너한테 양심이란 게 남아 있었어?”
“자꾸 절 자극하셔서 좋을 게 없을 텐데요.”
“미안하다.”
대찬은 빠른 사과 뒤 고수혁의 불안감을 해소해주었다.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할 거 없어. 어디까지나 서류와 면접이 우선 기준이니까. 네 귀띔은 조금 더 촘촘한 거름망 하나 더 두는 정도고.”
“그래요? 그럼 부담 없이 말씀드릴게요.”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담 없이. 물론 기말고사 끝나고부터 시작해야 된다. 뭐든지 본업이 우선이야.”
“지금 선배님 보면 그것도 아닌 거 같아요.”
“뭔 말이야?”
“학생 때 학점관리 안 하시고도 이렇게 잘나가시니까.”
대찬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3.5는 꼬박꼬박 맞췄어. 누가 보면 밥 먹듯이 학고 맞아가면서 선동렬 방어율 찍은 줄 알겠다.”
“선동렬이 뭐예요?”
“됐다.”
대찬과 고수혁은 서로를 바라보며 싱거운 웃음만 지었다.
고수혁은 대찬의 비밀임무를 잘 수행해주었다.
로튼 프룻츠 신입사원이 되겠다고 서류를 들이민 고원대 후배들은 열 명이었다.
사전에 들었던 그대로였다.
제출된 서류로는 3명이 탈락했다.
한 사람은 영어성적을 아예 기재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굳이 고수혁을 통하지 않더라도 서류에서 꺼림칙한 면모가 드러났다.
나머지 하나는 로튼 프룻츠 후배면 다른 것 다 제쳐놓고 붙여줄 줄 알았는지 내용 자체가 부실했다.
서류에서 탈락한 사람은 셋인데, 면접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10에서 3을 뺀 일곱이 아니라 다섯뿐이었다.
두 명은 고수혁의 저격을 받고 낙마했다.
인사성 바르고 술자리 예절이 바르다며 대찬이 진즉 감으로 생각했던 녀석이 뜻밖의 공격을 받았다.
고수혁의 조언은 꼼꼼하고 자세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스타일. 후배들에게 매우 권위적. 로튼 프룻츠 경영진이 원하는 인재상에 정면으로 배치됨.
사례 1) 2015년 5월경, 로튼 프룻츠 선배들과 함께한 회식. 선배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붙임성 있는 태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주도.
그러나 재학생끼리 옮긴 자리에서는 고함을 치고 거리낌 없이 폭언을 가함.
한 후배와 논쟁하던 자리에서는 소주병으로 머리를 내려쳐 출혈까지 발생하였음.
사례 2) …….
‘누가 이과 아니랄까봐.’
누가 까맣고 누가 하얀지.
그저 문자메시지 몇 줄로 귀띔해주는 정도면 차고 넘쳤다.
그런데 고수혁의 리포트는 각주와 참고문헌만 안 달려있을 뿐이지, 소논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세했다.
한 사람당 소논문 하나, 지원자가 열 명이었으니 분량만 해도 거짓 좀 보태 책 한 권 수준이었다.
2학기 기말고사를 마친 대학 신입생은 이 땅에서 제일 자유로운 영혼들이다.
개중 별종이야 있다지만 대개는 공부할 궁리는 안 하고 놀 궁리만 하는 치들이다.
고수혁은 대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그런 시류를 거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대찬은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그러는 한편으로 고수혁을 꼭 잘 길러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잘 길러서 은오영 교수의 뒤를 이을 로튼 프룻츠의 이과적 브레인으로 삼을 요량이었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공부에 매진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간 점이나, 이제 겨우 대학교 1학년인데 심층적으로 인간을 연구하고 저렇게 체계적으로 문서를 구성할 정도면 떡잎이야 푸르고 푸르다.
대찬은 고수혁이 적은 내용을 은근슬쩍 재학생 후배들에게 물어 확인했다.
그들은 다 맞는 일이라고 대찬에게 일러주었다.
대찬은 고수혁 덕분에 자칫 로튼 프룻츠를 암초로 이끌지도 몰랐던 잠재적 변수를 예방할 수 있었다.
면접을 거쳐 최종적으로 선발된 인원들은 대찬의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이들이 최종합격했다.
알고 보니 그들이 진흙 속의 진주였고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었다.
고수혁이 아니었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서글서글하게 굴던 녀석, 아이디어가 제법 남달랐던 녀석은 모두 탈락했다.
술자리의 서글서글함은 콩고물 던져줄 윗사람들에게나 보여줬던 것이었고, 남다른 아이디어는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었다.
고수혁이 아니었더라면 그 녀석들이 로튼 프룻츠의 중핵으로 자리매김했을지도 모르는 일.
대찬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수혁의 역할에 다시 한 번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