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27화
중소기업이 고학력의 학교 후배를 채용한다고 해서 시비를 걸 사람도 없겠지만.
대찬은 다섯 명의 신입 중에 고원대 출신은 두 명으로 제한할 요량이었다.
두 명도 많았다.
지금까지 로튼 프룻츠의 임직원들은 어떻게 보면 정상적인 경로로 합류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민승기가 홀로 창업한 이후, 대찬이 공동대표로 지원사격을 했다.
이어 필래의 공채에 응시했다가 불합격한 맹윤주를 대찬이 추천하는 방식으로 채용했다.
서승학 발 악재에 웜샤인이 폐업하게 되면서 난민 신세가 된 직원들이 로튼 프룻츠에 합류했다.
이것 역시 대찬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합류한 진위생 역시 대찬의 추천.
그렇기에 이번에 채용하는 경력직과 신입들은 로튼 프룻츠가 최초로 정식절차를 밟아 뽑는 인원이었다.
바깥의 때가 묻은 경력직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신입들은 그야말로 로튼 프룻츠의 성골이 될 것이다.
만일 로튼 프룻츠가 지금의 규모에서 그치지 않고 대기업의 반열에 오른다면.
이들 다섯 명의 1기 신입들이 회사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
에피니키온에서 로튼 프룻츠로 넘어와서도 고원대 학벌주의는 계속 명맥을 유지했다.
폐쇄적인 동아리의 울타리 안에서의 학벌주의는 단결과 결속에 도움을 주는 미덕이다.
하지만 로튼 프룻츠는 더 이상 학내 동아리가 아니었다.
온갖 대학 출신들이 버무려져 있는 집단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원대 출신들이 로튼 프룻츠의 실권을 꽉 잡고 있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다.
고인 물이 썩는 건 동서고금의 진리였다.
고원대 후배들을 채용하는 건 동전의 양면처럼 장단점이 공존했다.
손발 잘 맞는 고학력 인재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
학연으로 결부된 든든한 우군이 생긴다는 장점.
그리고 학벌 카르텔의 형성과 갈등의 불씨가 생긴다는 단점.
대찬은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최소화하기 위해 균형을 잡아야 했다.
단순히 열 명의 직원을 채용하는 게 아니라 로튼 프룻츠의 정체성을 정하는 일.
대찬은 채용을 놓고 민승기와 그 어느 때보다 자주 의견을 교환했다.
좋은 직원을 채용하기 위한 과정,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로튼 프룻츠를 노 저어 이끄는 두 뱃사공 사이의 의견이 일치되어야 했다.
물론 이견이야 있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숱한 만남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냉철하게 나은 합의를 내려 둘 사이에 어떤 이견도 남기지 않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대찬은 신입사원 채용에 집중했다.
대찬은 민승기에게 경력직 채용을 전적으로 일임해 놓았다.
일언반구 묻는 말도 없었다.
아무리 일임했다고 해도 그렇지, 경력직 뽑기로 한 걸 까먹은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대찬이 말이 없자 민승기가 얘기를 꺼냈다.
“불안하지도 않아?”
“불안할 건 또 뭐예요.”
“내가 저번에 나 일하던 회사 동료들 뽑겠다고 한 것처럼 헛발질하면 어쩌려고 관심을 안 둬?”
“에이, 선배가 저보다 훨씬 똑똑하신데 두 번째는 어련히 더 나은 방법으로 하시려고요.”
“그래도 신기할 정도로 관심을 안 둔단 말이지.”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회사 위해서 그랬다기 보다는 순전히 절 위해서 그런 거예요.”
“뭐?”
대찬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민승기를 바라보다가 곡절을 설명했다.
며칠 전.
그의 부모님이 오랜만에 남해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어머니는 대찬을 보자마자 퉁을 놨다.
“그렇게 내려오라고, 내려오라고 해도 어떻게 한 번을 안 내려오니?”
“아시잖아요. 요즘 잠도 제대로 못 자는 판이라니까요.”
대찬은 그러면서 아버지의 품에 안긴 강아지 한 마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수찬이구나. 형 닮아서 똘똘하게 생겼네.”
“암튼 잔머리 하나는 똘똘하다. 나한테 잔소리 듣기 싫어서 바로 화제 돌리는 것 좀 봐.”
“아셨으면 그냥 넘어가 주시지.”
“누구 좋으라고 그냥 넘어가니?”
그때 대찬의 아버지가 그를 구원해주었다.
“잠깐 아빠랑 얘기 좀 하자.”
“뭐야, 할 얘기 있음 내 앞에서 하지 뭘 밖으로 나가?”
어머니의 항의에 아버지는 으레 그랬듯 권태로운 눈짓과 고갯짓으로 무마하고 대찬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대찬은 흐흐 웃으며 어머니를 흘끗 보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근데 그런 대찬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차라리 어머니의 잔소리를 계속 듣는 편이 나았다.
아버지는 대찬에게 곤란한 말을 전해주었다.
“얼마 전에 안산 큰고모한테 전화 받았다.”
“아,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신다죠?”
대찬의 조부모가 작고한 이후, 친가의 대장 노릇을 하는 안산 큰고모.
대찬은 자주 보지 못했다.
특히 신입사원 시절 서청수 회장의 선물로 야코가 죽은 이후, 안산 큰고모는 의식적으로 대찬 가족을 피했다.
그 사건 이전에만 해도 대찬의 사촌인 조은찬만 싸고 도는 큰고모였다.
그렇기에 대찬도 영 큰고모를 내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죽 소식이 안 들려서 그녀의 안부가 궁금하기까지 하던 차였다.
“뭐 그 연세에도 정정하시니 잘 지내시는 거지.”
“근데 큰고모가 왜요?”
“어떻게 아셨는지, 참.”
아버지는 말끝을 흐렸다.
대찬은 웃으면서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뭔데 그러세요? 말씀하세요.”
“너희 회사에 경력직 채용한다고 안 했냐.”
“네, 맞아요.”
“그걸 어디서 듣고 오셨는지 자리 하나 내달라고 하시더구나.”
“아무리 저희 회사가 오픈마인드라고 해도 일흔 다 되신 분 자리를 만들 순 없어요. 큰고모가 이쪽 일을 해보셨으면 모를까.”
“아니, 고모가 일하시겠다는 게 아니고.”
“그럼 누구요?”
“은찬이 있잖냐.”
대찬은 싱겁게 웃었다.
“조은찬 삼라물산 다니잖아요. 뭐가 아쉬워서 대기업 때려치우고 여기서 일해요? 제가 굽실거리면서 모셔가려고 해봤자 제 얼굴에 침 뱉을 걸요. 물론 모셔갈 생각도 절대 없지만.”
“관뒀단다.”
“네? 관뒀으면 다른 회사로 이직하면 되잖아요. 안산 큰고모가 어화둥둥 하시던 삼라물산 인사팀이면 어디든 쉽게 재취업 할 수 있을 텐데요.”
대찬의 말은 잔뜩 비꼬는 투였다.
절대로 말이 곱게 안 나왔다.
아버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좀 안 좋게 관두게 됐단다. 채용비리에 연루됐대.”
“허.”
“높으신 분 봐주려다가 그게 들통 나서 혼자서 옴팡 뒤집어썼다는 거야.”
“잘됐네.”
대찬의 말은 무조건반사였다.
아버지가 스읍, 점잖게 그를 제지했다.
그제야 대찬은 어깨를 움찔하며 표정을 단속했다.
“아무리 그래도 네 친척인데 그렇게 말하면 쓰냐.”
“죄송해요. 너무 고소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알음알음 알 만한 회사에는 다 이름이 팔려서 어렵다더라.”
“그래서 저희 회사에 들어오게 해달라고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 된다고 전해주세요.”
“대찬아.”
“절대 안 돼요.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작은 자리라도 괜찮다더라. 그래도 피가 물보다 진하다잖냐.”
“싫습니다. 첫째로 제가 조은찬을 싫어하고요.”
“…….”
“둘째로 조은찬이 저랑 모르는 사이였어도 비리 연루된 사람이면 아무리 잘났어도 걸렀을 겁니다.”
“허, 참…….”
아버지는 내심 대찬이 조은찬을 도와주기를 바랐다.
그러면 집안의 화목이 조금이라도 도모되고, 아버지 자신의 면도 살았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듯 잘 나가는 로튼 프룻츠다.
거기에 조은찬 하나 묻는다고 별일이야 있겠나 싶었다.
물론 아슬아슬하게 회사를 운영해나가는 대찬의 입장으로서는 제3자의 지나친 낙관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대찬의 단호한 태도에 더 권하지 못하고 마른 입술만 달싹였다.
하지만 안산 큰고모의 고집은 아버지보다 더 먹은 나이만큼 더 강했다.
그녀는 대찬에게 직접 전화를 했다.
대찬은 액정에 모르는 전화번호가 그녀임을 알고 절망했다.
알았다면 안 받았을 것이다.
“네, 고모.”
“너는 어쩜 크면 클수록 정이 뚝뚝 떨어지냐?”
“뭐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줄은 알겠는데요. 공사는 구분해야죠.”
“지 애비는 안 그런데 어쩜 사람이 그렇게 쌀쌀맞고 정이 없냐? 지 애미를 닮아서 그런가.”
“괜한 말씀으로 피차 감정 안 상했으면 좋겠는데요.”
“두 말 안 하마. 문자로 시간이랑 장소 보내놓을 테니 얼굴이나 보고 얘기하자.”
“더 드릴 말씀 없어요.”
“안 나오면 영영 친가하고 연 끊는 걸로 알겠다. 네 아버지 곤란하게 만들기 싫으면 얼굴이라도 비춰.”
뚝.
안산 큰고모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대찬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결국 그는 바빠서 몸이 갈려 나가는 와중에 약속장소에 나갔다.
더는 청탁의 치읓 자도 나오지 못하게 아예 쐐기를 박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안산 큰고모는 나오지도 않았다.
대신 겸연쩍은 웃음만 짓고 있는 조은찬만 서 있었다.
대찬은 메마른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너 혼자 나왔냐?”
“…어.”
대찬은 대로변에 우두커니 선 채로 말했다.
“어디 들어가서 말할 것도 없어. 무슨 말을 해도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니까.”
“야, 대찬아.”
“솔직히 우리가 한 번이라도 서로 웃는 얼굴로 술이라도 한잔 했으면 나도 고민하는 척이라도 했겠는데.”
“…….”
“우리 사이가 이럴 사이는 아니지 않나?”
조은찬은 침을 꼴깍 삼켰다.
평소 같으면 들이받아도 조은찬이 먼저 들이받았을 것이다.
애초에 이렇게 만나지도 않았을 거고.
그런 조은찬은 입장이 있어서 팔자에도 없는 억지웃음까지 지었다.
그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억울할 따름이었다.
“일단 만났으니까 밥이라도 한 끼 하자, 응? 그래도 고모한테 둘러댈 말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냐.”
“…그래, 알았다.”
대찬과 조은찬은 한 국밥집에 들어갔다.
국밥을 후루룩 마시듯 해치우고 얼른 자리를 뜰 요량으로 한 선택이었다.
대찬과 조은찬은 묘한 분위기 속에 마주 앉았다.
조은찬이 국밥을 시키고 소주 한 병을 시키려고 하자, 대찬이 막았다.
“술은 빼주세요.”
“너, 사장노릇 하더니 더 냉정해졌다.”
“그래, 너는 실직자 되더니 좀 헐렁해졌네.”
“…….”
국밥은 빠르게 나왔고, 대찬은 바로 밥을 말았다.
국밥에 깍두기 국물을 붓는 걸 싫어하면서도 이날만큼은 그렇게 했다.
찬 국물로 얼른 국밥을 식혀서 1초라도 빨리 먹기 위함이었다.
대찬이 전투적으로 숟가락을 움직이는데, 조은찬은 쩝,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야, 나 꽤 유능하다. 아직 꽤 쓸 만하다고.”
“…….”
대찬은 대답 없이 우적우적 국밥만 먹었다.
“대기업 출신이라고 연봉 잔뜩 받을 생각 없어. 상식적으로만 챙겨주면 돼.”
“…….”
대찬이 말없이 듣기만 하자 조은찬은 조금 편해진 얼굴로 조금 더 편하게 얘기했다.
“까놓고 말하자. 네 회사 규모에 서울대 출신을 어떻게 써먹겠냐. 하자가 좀 있긴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잖아. 솔직히 내가 더 아쉽긴 하지만 너도 이렇게 배짱 튕기기엔 좀 아쉽잖아, 응?”
“야, 조은찬.”
대찬의 목소리가 다소 성마르자, 조은찬은 헤헤 웃으며 그를 다독였다.
“그래, 내 말이 좀 심했지? 미안. 그래도 잘 생각해보란 말이야.”
“생각하고 말 것도 없어.”
“나이도 딱 어리바리 안타고 꼰대 기질도 없을 나이야. 일 시키기 딱 좋다니까. 나 삼라에 있었을 때도 에이스 소리 들었다고.”
“난 너 쓸 생각 없어.”
“알았어. 이 자리에서 덜컥 뽑아달라고 안 할게. 나도 국밥집에서 붙기는 싫거든. 그럼 면접만 보게 해줘, 응? 그 정돈 해줄 수 있잖아.”
탁.
대찬은 숟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놨다.
그리고는 조은찬을 빤히 바라봤다.
“너, 인사청탁 연루돼서 잘렸다며.”
“나 억울해. 나 완전 뒤집어쓴 거라니까.”
“비리 저지른 인간 치고 안 억울하다는 사람 못 봤어.”
“아니야. 나는 진짜 결백해. 네가 인사팀에 안 있어봐서 그런 거야.”
“…….”
대찬은 침묵으로 조은찬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그를 측은히 여긴 탓이 아니었다.
그의 발언에는 필연적으로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