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326화 (326/556)

난 할 수 있어 326화

이렇듯 로튼 프룻츠의 사업은 순풍에 돛 단 듯 뻗어 나갔다.

대찬의 마음도 든든해졌다.

로튼 프룻츠의 전신은 ‘에피니키온’이었다.

에피니키온이 로튼 프룻츠로 바뀌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는가.

그리고 그 우여곡절의 핵심에는 대찬이 있었다.

대찬이 그 집단에 끼어들기 전.

에피니키온은 우등생, 금수저, 잘난 년놈들의 철옹성이었다.

그들은 잘난 능력으로 자기들끼리 스크럼을 짰다.

그 스크럼은 인맥이니 네크워크니 하는 고상한 이름으로 불렸다.

그들은 잘난 능력을 하나로 뭉쳐 더 잘난 기득권을 형성했다.

대찬은 그런 작태를 머리띠 두르고 주먹 휘두르면서 성토할 의사가 없었다.

그가 에피니키온에 기웃거렸던 것도 그런 기득권의 부스러기를 탐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필래의 오너 가문과 불가분의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기득권의 부스러기가 아니라 왕건이 하나를 꿀꺽 삼킨 격이었다.

대찬에게는 에피니키온을 전복시키고 기득권의 카르텔을 해체할 자격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대찬은 그들의 강력한 결속을 난도질해서 기득권을 해체시켜버렸다.

안두홍을 감방에 처넣었다.

한긍윤이 자신을 일컬어 썩은 과일들 같다고 한 경멸의 말을 조롱했다.

조롱에 그치지 않고 아예 그 말, 로튼 프룻츠를 에피니키온의 새 간판으로 삼았다.

그렇게 선배들이 뿌려주는 기득권의 부스러기를 비둘기처럼 쪼아 먹던 에피니키온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덜 배부를지라도 자기 손으로 먹거리를 해결했다.

처음에는 그야말로 대학생답게 몸으로 부딪치며 악전고투하던 로튼 프룻츠는 이제 어엿한 회사의 기틀을 잡아나갔다.

장기불황으로 오래된 회사들도 줄줄이 문을 닫는 요즘이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여기까지 제법 견실하게 몸집을 키워왔다.

지금까지의 성과만 해도 대성공이라고 자부할 만했다.

늦은 시각, 로튼 프룻츠 사무실은 텅 비어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한바탕 와인 대란 후,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집에서 쉬거나 모처럼의 여행을 떠났다.

모두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때.

대찬은 혼자 로튼 프룻츠 사무실에 있었다.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업무를 봤다.

쩔쩔매면서 매달려야 할 만큼 과중한 업무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직원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이 시점에 돌발적인 이슈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업무를 본다는 것보다는 돌발상황을 대비해 당직을 선다는 쪽이 맞았다.

대찬은 서류를 책상에 쌓아놓고 그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서류를 잡아 슬슬 페이지를 넘기면서 별일 없이 시간이 지나기를 바랐다.

그때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대찬은 읽던 서류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뜻밖의 방문에 대찬은 의아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방문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대찬의 얼굴에는 의아한 빛이 사라지고 옅은 웃음이 머금어졌다.

민승기였다.

“선배, 휴가 안 가셨어요?”

“그러는 너는 왜 여기 있냐. 안 그래도 필래에서 일하느라 더 바쁜 양반이.”

“무슨 일이 있을지 혹시 몰라서요. 어차피 집에서 널브러져서 시간 때울 거 사무실에서 때우자 하고 왔죠.”

“어, 나도 마찬가지.”

대찬은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요? 그럼 전 여기 더 있을 일 없네요. 가야겠다.”

그러자 민승기의 동공이 흔들렸다.

“야, 왜 이래? 정 없게.”

“둘씩이나 사무실에서 죽치고 있을 이유는 없잖아요.”

“섭하네, 진짜. 그러지 말자.”

대찬은 웃으면서 민승기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 맥주나 한 캔씩 할까요?”

“사무실에서?”

“왜, 사무실에서 자유롭게 취식하도록 됐잖아요. 우리도 그 덕택 좀 보자고요.”

“술 마셔도 좋다고는 안 했는데.”

민승기가 시시콜콜 따지자 대찬은 확 미간을 찌푸렸다.

“이래서 모범생은 재미없다니까. 그럼 선배는 드시지 마세요. 저는 일탈 좀 해야겠어요.”

대찬이 매몰차게 말하며 맥주를 사러 나가자 민승기가 다급히 그를 붙들었다.

“야, 나도.”

대찬은 그럼 그렇지, 네가 안 마시고 배기겠냐는 웃음을 지으며 민승기를 돌아봤다.

“한 캔이요?”

“두 캔.”

“치킨은 선배가 사실 거죠?”

“그래.”

대찬과 민승기는 오랜만에 고요해진 사무실에 둘만 둘러앉았다.

둘은 편하게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옛날 일을 곱씹었다.

로튼 프룻츠가 탄생한 역사가 옛날씩이나 들먹일 정도로 오래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간 겪은 일을 생각하면 옛날도 아주 오래된 옛날처럼 느껴졌다.

맨 처음 민승기의 1인 기업으로 출발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의 모습은 상전벽해였다.

대찬은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선배, 지금까지 수고 많으셨어요.”

“새삼스럽게.”

“선배가 회사 관두고 사업 시작한다고 하실 때, 사실 불안하긴 했거든요. 혹시 잘 안 되면 제 책임도 분명히 있는 거니까.”

“네 책임이랄 게 뭐 있어. 내가 선택한 건데. 나도 불안하기야 했지만 다 잘 풀렸으니 됐지, 뭐.”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까지 나쁘진 않았어요, 그렇죠?”

민승기는 대찬을 보며 웃었다.

“나쁘지 않기는. 이 정도면 더할 나위 없었어.”

“앞으로도 잘 돼야 할 텐데요.”

“잘 될 거야. 지금껏 조대찬이 손대서 말아먹은 적, 한 번도 없었잖아.”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얕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조금 불안해요.”

“여태 잘 해왔으면서 왜.”

“덩치가 커지면 저항도 많이 받는 법이지만, 이제는 스케일이 다르잖아요. 극동일보부터 해서.”

대찬은 지금껏 누구에게도 잘 터놓지 못했던 걸 민승기에게 털어놓았다.

불안했다.

지금껏 대적해왔던 적수와는 차원이 달랐다.

직장 안에서의 기 싸움이나 거래처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이긴 했다.

그러나 지금의 위협에 비하면 귀여운 정도였다.

그리고 그때는 필래 서씨를 뒷배로 둬서 덕을 본 일이 많았다.

그런데 극동일보를 상대해서는 그럴 수도 없었다.

서씨의 마음이 대찬에게서 떠난 건 아직 아니었다.

그들은 대찬에게 무슨 변고가 발생하면 발 벗고 나서줄 것이다.

단, 극동일보와 엮이지 않은 경우에.

필래와 극동일보는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마냥 대찬을 감싸고 돌 상황이 아니었다.

극동일보는 이후로도 로튼 프룻츠를 핍박할 것이다.

단순히 극동일보만의 힘이 아니라 온갖 수단을 동원할 수도 있었다.

국세청을 들쑤셔 세무조사를 받게 한다든지.

억지 트집을 잡아 경찰서나 심하면 검찰청을 들락거리게 한다든지.

대찬 개인만을 조준하면 이렇게까지 불안해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딸린 사람들이 많았다.

가족이야 말할 것도 없고, 구설수에 가장 치명적인 직업을 갖고 있는 윤이영, 그리고 로튼 프룻츠에 딸려있는 직원들까지.

모두 대찬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었다.

대찬의 복잡한 얼굴을 보고 민승기는 미소를 지었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 지금까지 잘해왔어.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하면 돼.”

“알았어요, 그럴게요.”

“그리고 인마, 너 혼자 그렇게 심각해지면 내가 뻘쭘하잖아.”

“선배가 왜요.”

“이 회사가 네 혼자 만든 회사야? 나도 대표야, 공동대표. 잘못되면 나한테도 책임이 있다고.”

“아, 물론 그렇지만…….”

“네가 제멋대로 칼 휘두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다 나랑 의논하고 직원들하고 의논해서 결정한 거야.”

“…….”

“그러니까 책임도 N빵 해야 되는 거다. 너도 딱 그만큼 책임감만 가지면 돼. 그 이상 짊어지려는 건 월권이야. 내 권위를 무시하는 거고, 직원들을 단순히 네 수족으로 취급하는 거야.”

대찬은 잠자코 민승기의 말을 듣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말씀이 맞아요. 그럴게요.”

“N분의 1만큼의 책임감도 무겁다면, 더 마음 홀가분해질 방법이 하나 있지.”

“뭔데요?”

“N의 크기를 키우면 돼. 분모가 커지면 값이 줄어들잖아.”

대찬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직원들 더 뽑자는 말씀이세요?”

“그래, 바빠지기 전에 미리, 직원들한테 약속한 것도 있으니.”

“그렇잖아도 견적은 나와 있죠, 인력이 얼마나 더 필요할지.”

“빨리 진행해야겠어. 네 볼멘소리도 그만 듣고, 업무도 좀 줄이고.”

대찬은 웃으면서 남은 맥주를 탈탈 마시고는 민승기에게 말했다.

“한 열 명쯤 새로 뽑아야 할 거 같은데. 방식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전원 신입으로 뽑을 순 없어. 충분히 교육시킬 여유도 시간도 없으니까.”

“네, 경력직 다섯 신입 다섯으로 가시죠.”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력직 자리는 탐내는 사람이 많더라. 전에 일하던 카페 프랜차이즈 다니던 동료들 중에서도 관심 보이는 사람이 꽤 돼.”

“그래요? 왤까요.”

민승기는 싱겁게 웃었다.

“왜냐니. 회사에서 견디기 영 힘들다 그거지.”

“그럼 그분들은 왜 선배 퇴직할 때 같이 안 나오셨데요.”

“당연히, 그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이제는 좀 괜찮아 보이니까 은근히 욕심을 내신다는 거죠?”

“그렇지.”

대찬은 두 번째 맥주 캔을 따면서 물었다.

“그 회사, 선배가 다녀보시니까 어땠어요? 정말 견디기 어려우셨어요?”

민승기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느끼는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어.”

“그래요?”

“응. 다만 나는 사업 욕심이 있어서 위험 감수하고 뛰쳐나온 거지.”

“선배는 그분들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안면 있던 사람들이 제 발로 와준다니 뽑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죄송하지만 저는 반대예요.”

민승기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며 물었다.

“왜?”

“로튼 프룻츠에서는 그 회사에서보다 더 치열하게 일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해요.”

“음, 그거야 그렇지.”

“아주 극성맞지도 않은 그 회사를 못 견뎌 해서 이쪽으로 넘어오겠다는 분들은 별로 안 뽑고 싶어요.”

“…….”

“편하고 조금이라도 나은 직장 찾아오는 거야 당연히 그분들 자유죠. 하지만 채용하지 않는 것도 우리 자유예요.”

민승기는 쩝, 입맛을 다셨다.

“그건 그래.”

“선배가 회사 관두실 때 같이 나와서 창립멤버가 돼주셨다면 모를까, 자리 다 다져놓으니 날름 옮기겠다는 분들을 굳이 뽑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 나랑 술잔이나 몇 번 나눈 걸 빼면 채용공고 내고 정식절차 밟아서 뽑는 사람들보다 나을 게 없네.”

민승기는 흔쾌히 대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기실 민승기가 여기서 어깃장을 놔버리면 대찬도 입장이 퍽 곤란해지는 판이었다.

공동대표의 단점이 여실히 드러날 뻔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했는데, 들이든 산이든 어디론가 가기나 하면 다행이었다.

1번 사공은 왼쪽으로, 2번 사공은 오른쪽으로 간다고 하면 조금도 진전하지 못하고 강 한가운데 둥둥 떠 있을 수밖에 없다.

대찬의 반대는 민승기의 입장에서 불쾌하게 받아들이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너는 맹윤주, 진위생 받아오지 않았느냐.

필래 밑에 있던 웜샤인 사람들 덤프트럭째로 받아오지 않았느냐.

그런데 나는 왜 못하게 하냐고 핏대를 세우면.

받아칠 논리는 있지만 받아치는 순간 감정싸움으로 비화된다.

그러면 회사의 방향은 표류한다.

그런 면에서 민승기는 훌륭한 사업파트너였다.

주장을 내세울 때를 알고, 거둬야 할 때를 알았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대신 경력직 채용에 관한 부분은 전적으로 선배께 일임할게요. 어련히 잘 뽑아주실 테니까.”

“그럼 신입이들은 네가 뽑게?”

“적어도 두 사람은 우리 학교 로튼 프룻츠에서 활동하던 졸업반 후배들로 뽑아야 할 거 같은데요.”

로튼 프룻츠 후배들을 위한 안배는 필요했다.

로튼 프룻츠가 에피니키온을 뒤집을 수 있었던 건 재학생 후배들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이었다.

그리고 최저임금만 빠듯하게 맞춰 받아 가면서 열심히 일해준 이들이 있었다.

물론 학벌이 좋아서 이런 중소기업에 투신하겠다는 후배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로튼 프룻츠의 밝은 미래를 점치는 희망자는 분명히 있었다.

그들을 향한 채용 약속이 받는 쪽에서는 영 구미가 당기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대찬과 민승기, 아직은 빈털터리에 가까운 선배들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물론 회사 규모가 커지면 비도덕적이고 음성적인 채용이 되겠다.

하지만 지금은 엄연히 대찬과 민승기의 개인소유였다.

후배를 뽑든 지나가던 요구르트 아줌마를 뽑든 그들의 자유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