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25화
극동일보 편집국장의 얼굴은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미 주필에게 불려가 한바탕 야단이 난 상태였다.
물론 그 전에 주필은 사장 홍구완에게 걸러지지 않은 상욕을 얻어먹고 난 다음이었다.
욕설은 위에서 밑으로 내려갈수록 격하고 야박해졌다.
한바탕 거친 욕설을 쏟아낸 뒤, 편집국장은 부들부들 떨리는 눈빛으로 구본진을 바라봤다.
“야, 제대로 물 먹일 수 있다며.”
“그게…….”
“물 먹인다는 게 우리 회사에 먹인다는 뜻이었냐?”
“죄송합니다, 국장님.”
“죄송하다고 하면 다야?”
“…….”
“어쩔 거야, 이 사태를. 괜히 잠잠해진 건만 다시 들쑤셔 놨잖아!”
“제가 어떻게든 다시 기사를 내보내서…….”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편집국장의 성마른 목소리가 국장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구본진은 입술을 악문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기자 완장 차고 이곳저곳을 누비면서 참 많은 사람들의 뒤통수를 후리고 다녔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대찬 역시 그 참 많은 사람들에 포함됐어야 했다.
그런데 자기 뒤통수가 후려질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구본진의 마음속에서 가장 우세한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허튼 말과 글로 생사람을 잡으려던 건 수치스럽지 않았다.
그건 으레 해오던 일이었다.
기자는 펜대로 사람 잡는 직업이다.
과실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의 머리채를 붙잡아 장대 위에 걸고, 그걸로 대중의 이목을 끌었으면 기자의 직분은 다했다고 생각했다.
구본진이 수치스럽게 여기는 건 그 사람 잡는 작업에 실패했다는 점이었다.
도리어 자기가 펜대에 잡혀 정육점에 대롱대롱 매달린 돼지고기 신세가 되었다.
견딜 수 없이 수치스러웠다.
극동일보도 그런 무력한 칼잡이를 더 키워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잖아도 구본진이 속한 문화부 자체가 한가한 부서였다.
출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구본진의 신세는 끈 떨어진 뒤웅박보다도 못하게 되었다.
이 일이 있고 난 이후로, 극동일보 내부적으로 조지아, 와인 등 몇몇 낱말이 암묵적인 금칙어가 되었다.
한창 치고 박고 싸우던 로튼 프룻츠와 극동일보의 싸움은 일단락되었다.
대찬이 로튼 프룻츠에 존재하는 한 이건 일시적인 휴전에 불과했다.
필시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맞붙을 이슈가 생기면, 둘 다 싸움을 피하지 않을 것이었다.
로튼 프룻츠는 일단의 판정승으로 상당히 고무되었다.
극동일보를 상대로 무사한 개인이나 집단은 흔치 않았다.
그 중에서도 역으로 극동일보를 물 먹인 개인이나 집단은 더 흔치 않았고,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좋았다.
그리고 그 장본인이 힘도 없고 빽도 약한, 그나마 있는 빽도 극동일보와 혼맥으로 얽혀 무력화된 대찬과 로튼 프룻츠였다.
대찬은 불행을 피해간 것이지, 회사에 큰 이득이 되는 행운을 만난 건 아니라고 직원들에게 강조했다.
괜히 들떠서 자축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기뻐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진위생이 흐흐 웃으면서 대찬에게 따졌다.
“사자임, 좋으면 좋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님까? 표정하고 말씀하고 따로 놀기요.”
“내 표정이 뭐가 어때서요?”
“거울 한번 보지 말임다. 웃는 입꼬리가 좌우로 확 벌이진기 빨간 마스크 같고 섬뜩함다.”
대찬은 그 말에 무심결에 거울을 들여다봤다.
진위생의 말대로 대찬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잔뜩 어려 있었다.
대찬은 억지로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직원들은 맘 놓고 웃으며 팡파레를 터트렸다.
로튼 프룻츠는 극동일보의 성가신 방해공작을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대찬은 극동일보와의 한바탕 싸움이 용케 불행하지 않도록 풀린 것이지 행운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의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극동일보의 공작이 로튼 프룻츠에는 약이 되고 행운이 되기도 했다.
극동일보가 연일 푸닥거리를 해준 덕분에 마마와 멜로티, 로튼 프룻츠는 공짜 광고를 한 셈이 되었다.
단순히 유명세를 얻은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골이 직접 한국으로 찾아와 극동일보에 맞불을 놓았다.
그 덕에 극동일보가 개입했던 그리골의 가정사가 한국 대중에게 파다히 퍼졌다.
그러자 사람들은 와인 겉에 붙어있는 디자인을 이해했다.
그리골과 샬바의 그림이 그저 멋 부리기 위해 만들어진 디자인이 아니라는 걸 이해했다.
이 아버지와 대머리 속에 숨은 곡절을 알 수 있었다.
험상궂지만 자연에서 포도를 기르고 사냥을 하는 조지아의 소시민은 소비자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포도밭.
그리고 거길 지켜가며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나가는 아버지와 아들, 가족.
스토리텔링이 가미된 디자인은 더 힘을 얻었다.
로튼 프룻츠는 여기에 박차를 가했다.
마마와 멜로티에 이어 ‘데다(დედა)’를 출시했다.
데다는 조지아 어로 어머니를 의미했다.
데다의 디자인은 마마와 멜로티처럼 사람의 형상을 레이블에 입히지 않았다.
데다의 디자인은 너른 포도밭이었다.
일찍이 세상을 뜨고 포도밭에 묻힌 그리골의 아내이자 샬바와 이라클리의 어머니.
목숨이 다하고도 포도밭에서 가족들과 함께하는 어머니.
그리골과 샬바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포도밭을 지키는 이유.
데다 와인은 유독 흙냄새가 두드러졌다.
흙냄새는 전문가와 애호가들에게 어시(earthy)라는 단어로 표현되었다.
숙성이 잘된 와인에서 나는 흙냄새는 애호가들에게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데다 와인은 흙냄새가 두드러지는 한편 씁쓸한 풍미를 내는 탄닌이 상당량 함유되어 있었다.
생각하면 그립고 씁쓸한 기분을 자아내는 포도밭에 잠든 어머니를 상징하는 맛이었다.
그리골은 포장 작업을 마친 첫 번째 데다 와인을 뭉클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는 데다 와인이 아내의 환생인 것처럼 얌전히, 더 없이 사랑스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그리골은 한참을 그렇게 하다가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초, 고맙소. 덕분에 내가 만드는 와인에 더 큰 긍지와 더 깊은 사랑을 갖게 됐소.”
“별 말씀을요. 제가 한 거라고는 그리골이 열심히 만든 와인에 스티커 한 장 붙인 것뿐인데요.”
“그 한 장의 스티커가 내 마음에는 더 없이 소중하게 다가오는군요.”
“그리골이 지켜온 포도밭과 가족이 소중하기 때문에 고작 한 장 스티커가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이겠죠. 오히려 제가 감사드립니다, 그리골.”
“하하, 초는 사람 마음을 참 편하고 흡족하게 만들어주는군요.”
그리골은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의 따뜻해진 마음이 대찬에게도 전해졌다.
대찬의 가슴께도 훈훈하게 달아올랐다.
한창 유명세를 타던 시점에 출시된 데다 와인 역시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2015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마마, 멜로티, 데다 세 와인 중에서 대표 격인 마마가 한 와인 잡지사가 뽑은 올해의 와인 10선에 이름을 올렸다.
물론 절대적인 품질에서 마마는 다른 기라성 같은 와인들과 어깨를 견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친숙하지 않은 와인을 대중적으로 어필한 것과 가격 대비 적절한 품질이 인정을 받았다.
한 여성 잡지는 올해의 ‘잇 아이템’ 30선에 마마, 멜로티, 데다 와인을 선정하기도 했다.
대기업에서 마마 와인을 출시했다면 그저 소소한 성공 정도로 치부됐을 것이다.
하지만 로튼 프룻츠는 소기업이었다.
직원이라고 해봤자 두 명의 공동대표를 합쳐도 스무 명이 채 안 됐다.
그런 난쟁이가 이뤄낸 성과라면, 어마어마한 성공이라고 자평할 만했다.
로튼 프룻츠의 매출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전년 대비 300%의 매출신장이 있었다.
물론 기존의 사업들도 든든한 먹거리가 돼주었다.
원두 수입과 판매 규모가 견실하게 늘어나는 추세였다.
특히 커피 시장이 급격히 자라는 중국 측에서 대량의 원두를 좋은 값으로 들여갔다.
로튼 프룻츠의 중국 측 파트너인 왕핑웨이는 열심히 톈진과 서울을 오가며 열을 올렸다.
처음에는 그저 필래 측의 투자금을 유치하기 위한 명목에 불과했던 사회공헌사업도 제 몫을 해내고 있었다.
박 부장의 수완으로 사회공헌사업을 광고기획 등 다변화를 꾀한 덕택이 컸다.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2015년의 뚜렷한 성장은 조지아 와인이 견인했다.
대찬이 처음 그리골의 와이너리와 접촉할 때만 해도 이런 성적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조지아에서 윤이영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기 뭣한 까닭에 벌였던 일이 뜻밖의 성공을 거두어냈다.
그리골의 와인은 한국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만큼 수요가 대단했다.
아무리 그리골의 와이너리가 큰 규모라고 해도 일개 와이너리에서 감당할 규모가 아니었다.
로튼 프룻츠 직원들도 여기에 대해 저마다의 의견을 제시했다.
회사의 금전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박 부장이 입을 열었다.
“가장 고전적인 방법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충실한 거겠죠.”
민승기가 그 말을 받았다.
“가격을 올리라는 말씀이시죠.”
“네, 사실 이 호시절이 얼마나 갈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일시적인 열풍에 그칠 수도 있죠.”
박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바짝 벌고 떠야죠.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여지가 있지만, 불법도 아니고 회사의 이익을 생각하면 그게 최선입니다.”
그 말에 맹윤주가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요즘 소비자는 예민하고 영리해요. 항상 업자를 예의주시하기 마련이에요.”
“과거에 비해 예민하고 영리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과대평가할 일도 아니야.”
박 부장의 의견에 맹윤주는 고개를 저었다.
“특히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는 제품에 관해서라면 감시의 눈초리는 더 날카로워요.”
민승기도 맹윤주의 말에 살짝 힘을 실어주었다.
“조금 잘 된다고 얌체처럼 가격을 올려버리면 그 사람들,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단칼에 지갑을 닫아버릴 겁니다.”
대찬 역시 이쪽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우린 이미지로 먹고 사는 회사예요. 사회공헌사업도 그렇거니와 와인도 상당부분 이미지 덕을 많이 봤어요. 근데 여기서 가격을 확 올려버리면 소탐대실일 뿐이에요.”
박 부장은 그들의 말에 반대하지는 않으면서도 여전히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줄줄 새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는 것도 기업인으로서 실격입니다.”
“네, 대안이 필요하죠.”
“혹시 생각해두신 대안이 있으십니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민승기를 바라봤다.
“선배, 조지아에 좀 다녀와 주실래요? 제가 가는 게 좋긴 하겠지만 저는 필래에 발이 묶인 신세라.”
“엉? 거기 가면 뭐가 나오나?”
“박 부장님 말씀대로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충실하려고요.”
“무슨 말이야, 그게.”
“수요가 공급을 뛰어넘을 땐 가격이 오르기 마련이지만,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맞추면 굳이 가격을 올리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래, 근데 물량이 달리는 걸 어떡해.”
“그러니까 물량 확보하러 나갔다 오시라는 거예요. 텔라비는 그리골의 와이너리 말고도 도시 자체가 포도밭이에요.”
“그 말은 다른 와이너리하고 조인하라는 뜻이야?”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신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개별적으로 협상을 하는 건 별로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겠죠.”
“그렇지.”
“소비자한테 입질이 왔을 때 미리 그리골에게 말해둔 게 있어요.”
“그게 뭔데.”
“협동조합을 만들자고요.”
민승기의 눈이 살짝 커졌다.
“협동조합?”
“네, 그리골을 필두로 해서 마음 맞는 농장주끼리 협동조합을 만드는 거예요.”
“음.”
“그리고 그 조합이 소속 와이너리들을 대표해서 저희랑 교섭하고요.”
민승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밑그림은 그려져 있나?”
“네, 그리골에게 물었더니 조합 가입을 원하는 와이너리들이 꽤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희 쪽에서 좀 기준을 엄격하게 잡았습니다.”
“그래야지. 당장 물량이 급하다고 필터링 없이 어중이떠중이까지 다 떠안으면 소비자들한테 외면받을 거야.”
“네, 품질 유지에 대한 엄격한 잣대를 설정해두고, 우리 로튼 프룻츠 측의 정기적인 방문과 불시방문까지 허용해야 한다고 언질을 해뒀습니다.”
“알았어. 내가 가서 할 일이 많지는 않겠어.”
“기준은 세워뒀지만 어느 와이너리가 기준에 부합하는지는 두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해야 해요. 선배가 옥석을 잘 가려주세요.”
“오케이.”
민승기는 준비를 마치는 대로 바로 조지아로 떠났다.
그곳에서 와인 협동조합을 출범시키고, 3곳의 와이너리와 추가적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3곳의 물량을 추가한다 하더라도 당장의 수요를 전부 충당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로튼 프룻츠는 무리해서 손을 뻗치지 않았다.
지나치게 많은 물량을 취급하게 되면 영세한 로튼 프룻츠의 인력이 감당하기 어렵거니와, 당장의 열풍이 식어버린 뒤의 일도 생각을 해야만 했다.
지금의 수요는 윤이영의 은근한 SNS 홍보와 극동일보와의 난타전의 영향이 컸다.
이 수요가 이대로 영원히 갈 것이라는 낙관론은 꿀통에 빠져 익사하는 것만큼 위험했다.
향후 조정기를 반드시 거치게 될 것이며, 그때를 고려한 물량을 염두에 둬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