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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24화 (324/556)

난 할 수 있어 324화

이번엔 그가 전문분야라고 자부하는 와인에 대한 지식을 동원하기로 한 모양.

제목은 ‘안 쓰던 건 안 쓰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왜 그 많은 와인 수입사들이 지금껏 조지아 와인을 수입하지 않았는가.

그건 여타 와인으로 이름난 나라들의 와인이 조지아의 것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는 유소진 기자에게 한번 망신을 당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했다.

그녀의 앞에서 줄줄 읊었던 것을 지면에 재방송했다.

그래도 학습능력이 떨어지지는 않는 듯, 시트러스 향이니 코르키한 냄새니 1꼬달리에 불과한 피니시같이 틀린 진술은 수정했다.

대신 유소진 기자가 정정해준 말을 은근히 나쁜 쪽으로 윤색해서 마마와 멜로티 와인을 폄훼했다.

작정하고 대찬의 사업에 훼방을 놓았다.

구본진은 악에 받친 듯 노골적으로 로튼 프룻츠와 조지아 와인을 공격했다.

그가 뽑은 기사 제목들은 하나 같이 자극적이었다.

-‘6.25 전쟁의 흑막’ 스탈린이 사랑한 와인…굳이 ‘그 와인’이었어야만 했나?

-공산주의 대표 조지아 와인, 왜 지금은 각광받지 못하는가?

-유명 배우 동원한 꼴 사나운 ‘바이럴’…와인에 대한 맹랑한 모독

-교묘한 바이럴과 조잡한 디자인으로 아무리 가려봤자…‘싸구려’의 본질에 관하여

이건 ‘포도주 두 잔’하고는 결이 다른 공세였다.

받아치지 않으면 인정하는 꼬락서니가 된다.

극동일보의 애독자들은 로튼 프룻츠 사무실에 전화까지 넣어서 항의했다.

그런 싸구려 와인을 팔 속셈이었냐고.

적잖이 감정적인 항의였다.

개중 몇몇은 조지아가 스탈린의 고향이고 한때 소련의 일부였다는 걸 걸고넘어졌다.

그런 나라의 와인을 대대적으로 수입하다니.

로튼 프룻츠는 순 빨갱이 회사가 아니냐는 비난까지 들었다.

전화를 받는 직원들은 이 나라가 계속해서 친미적인 행보를 보이다가 2008년에 러시아의 침공까지 받았다는 시사지식으로 무장까지 해서 대응해야만 했다.

물론 그런 구구절절한 장광설을 진득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나라가요. 이천팔……’까지만 말해도 ‘아, 듣기 싫어!’ 신경질적인 외침과 함께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저녁에 필래에서 퇴근해 로튼 프룻츠로 출근한 대찬에게, 직원들은 하소연했다.

“극동일보가 대단하기는 한가 봐요. 되도 않는 개소리에 호응하는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마냥 무시하라고만 하기에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죠.”

“네. 안 그래도 문의전화 많은데 저런 흰소리까지 들어야 하니까요.”

직원들은 부담 없이 대찬에게 하소연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언론들 반응은 어때요? 와인 잡지들이나.”

“대체로 좋아요. 그분들이 나쁘게 평가할 이유는 없죠.”

“그렇죠?”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조지아 와인 질 자체가 크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그분들한테는 우리가 새로운 선택지를 하나 더 제공한 거니까.”

다른 직원도 이에 호응했다.

“특히 윤이영 씨와 디자인 덕분에 대중한테 먹혔다는 게 주효했어요. 포도주 분야에서 우리 제품이 압도적으로 검색순위 1등이라구요.”

“고상하신 구본진 기자님만 우리 가치를 몰라주네.”

“그런 막돼먹은 놈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상관없어요. 그냥 신경이나 꺼줬으면 좋겠는데.”

대찬은 피식 웃었다.

“우리 직원들 불만이 하늘을 찌르네요.”

맹윤주가 나서서 말을 얹었다.

“저희 할아버지가 구독하던 극동일보도 제가 끊어버리라고 악을 썼어요.”

“그래도 가정불화는 안 돼요.”

“그건 걱정 마세요. 요즘 제가 돈 잘 벌어가니까 완전 제 손아귀에 쥐여 사시거든요.”

“조만간 막걸리 받아 가서 할아버님이랑 잔이나 나눠야겠네요.”

“안 그래도 대표님이 코빼기도 안 비치신다고 할아버지 좀 삐쳐 계세요.”

“저런.”

맹윤주는 말할수록 극동일보에 화가 뻗치는지 언성을 높였다.

“겨우 구독 취소만으로는 분이 안 풀려요. 대표님, 어떻게 좀 해주시면 안 돼요?”

맹윤주의 말에 다른 직원도 한 마디씩 보탰다.

극동일보에 대한 적개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찬은 시비에 휘말리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여겼다.

왜, 사극이나 역사소설을 보면 꼭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장군은 싸우기 싫어한다.

노골적인 도발에 휘말리면 이쪽도 피해를 볼 게 불 보듯 뻔하니까.

그런데 밑의 부장들이나 하급 장교들은 싸우기를 원한다.

겁쟁이처럼 성벽에만 틀어박혀 응전하지 않는 장군을 욕한다.

그때 장군의 선택은 둘 중 하나다.

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성문을 열고 요격에 나서거나.

끝끝내 그들의 청을 물리친 채 버티기로 일관하거나.

명장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대개 후자의 선택을 한다.

그런데 대찬은 스스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장과 같은 반열에 서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직원들의 성화를 들어주기로 했다.

대찬의 마음도 비슷한 까닭이었다.

이대로 대충 몇 대 맞아주고 끝내기에는 극동일보와의 악연이 얽히고설켰다.

받은 대로 돌려주지 않고서야 배배 꼬인 속 때문에 소화불량에 걸릴 것 같았다.

대찬은 최재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재한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약 올라 죽겠지. 나한테 신세한탄 하려고 전화했냐? 다 네가 자초한 거야, 인마.”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하죠, 최 기자님.”

“섭하긴 뭐가 섭해?”

“구본진 바짝 약 올린 장본인은 유소진 기자님이거든요? 그쪽 ONB도 이 사태에 책임이 있다 이 말입니다.”

“기껏 도와줬더니 이제는 우리 발목까지 잡으려고 드네!”

“아, 몰라! 책임져!”

“너 나이 먹어갈수록 점점 무대뽀 기질이 생긴다?”

“우리 인터뷰 하나만 잡아줘.”

“인터뷰라니. 너?”

“나 말고. 조지아에서 그리골 모셔 올 거야.”

“모셔 와서 뭘 어쩌게?”

“우리 한번 긁었으니 극동도 한번 긁어줘야지. 그리골 인터뷰하는 거, ONB도 나쁜 선택은 아닐 텐데.”

극동일보의 도발이 로튼 프룻츠의 사업에 악영향만 미치는 건 아니었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씨에 기름을 확 들이부은 격이었다.

SNS를 타고 젊은 층을 위주로 유명세를 넓혀가던 ‘마마’와 ‘멜로티’는, 극동일보의 맹폭으로 일약 전국구로 성큼 뛰어올랐다.

‘악플’보다 무서운 게 ‘무플’이라고 했다.

극동일보의 악플은 로튼 프룻츠에 무플을 면하는 기회를 허락했다.

거기에 우스꽝스러운 칼럼으로 스스로 장작이 되어 로튼 프룻츠를 띄워줬으니 고맙기까지 했다.

와인 한 병이 이렇게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는가.

이런 차에 당사자인 그리골을 인터뷰한다면, ONB로서도 나쁘지 않은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최재한도 그걸 알기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근데 오래는 못 내보내.”

“괜찮아. 짧게.”

“건의해볼게. 우리 보도본부장님도 저번에 홍승연 씨 건드린 이후로 약간 무대뽀가 됐거든, 너처럼.”

“선재로다.”

대찬은 전화를 끊고 맹윤주에게 말했다.

“맹 과장, 텔라비 와이너리 쪽에 연락 좀 넣어주세요.”

“아, 네, 뭐라고 할까요?”

“메일보다는 전화가 낫겠어요. 전화 걸리면 바로 나 바꿔줘요.”

“넵, 알겠습니다.”

맹윤주는 전화를 걸어 대찬에게 바로 전해주었다.

“초, 잘 지냈소?”

그리골이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안부를 전했다.

“그리골 덕분에 바쁘게 잘 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우리 와인이 반응이 좋다니 나도 기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혹시 한국에 한 번 오시지 않겠습니까?”

“한국엘?”

“예, 요즘 한국이 그리골 와인 때문에 시끌벅적해요. 큰 신문사 하나가 시비를 걸었거든요.”

그 말에 그리골의 목소리에 노기가 깃들었다.

“뭐요! 어떤 놈이 감히!”

“이라클리에게 달콤한 유혹을 했던 바로 그 신문사입니다.”

“때려죽일 놈들! 이라클리한테 선악과를 따먹게 만든 독사 같은 놈들!”

“아, 독사, 정확한 표현이십니다.”

“그래, 내가 한국으로 가면 도울 일이 있겠소?”

“네, 인터뷰를 해주시면 좋겠는데요. 저쪽에서 걸어오는 시비에 맞받아치기 위해서는 저보다는 그리골이 적합해서요.”

“알았소. 내 바로 한국으로 가지! 나쁜 놈들! 혹시 한국도 총기 소유가 허락됩니까?”

“그건 갑자기 왜…….”

“샬바를 데려가서 그 망할 놈들 이마에 예쁜 구멍 하나씩 뚫어주려고!”

“유감스럽게도 총기 소유는 불법입니다.”

“거 참 아쉽구만!”

“제가 항공권을 보내드릴 테니…….”

“됐소! 지금 당장 공항으로 가겠소. 서울에서 봅시다!”

그리골은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당장 공항으로 가겠다는 그의 말이 허언은 아닌 듯했다.

그는 24시간이 채 되지 않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필래 비바체 사무실에서 근무해야만 하는 대찬을 대신해 민승기가 그의 마중을 나갔다.

그와 접촉한 민승기는 대찬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골 씨 지금 완전 스탈린 모드…….

대찬은 그 문자를 보고 피식 웃었다.

인터뷰 일정은 바로 잡혔다.

그리골의 인터뷰가 정시뉴스에 나오는 일은 없었다.

대신 문화부 유소진 기자가 진행하는 대담 프로그램, ‘사람, 그 사람’에 그리골이 출연했다.

유소진 기자도 당연히 구본진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만큼,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리골 씨, 최근 한 한국의 언론에서 그리골 씨가 제조하는 와인 품질이 좋지 않다는 비판을 했는데요.”

유소진 기자의 질문만큼이나 그리골의 대답도 직설적이었다.

“와인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헛소리요! 나는 내 와인 품질에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비판을 제기한 언론이 일전에 그리골 씨와 악연으로 엮인 적이 있었는데요.”

“그렇지! 형편없는 언론사요! 정신 상태가 글러 먹은 언론이지. 두뇌부터가 비정상이니 혓바닥이 제대로 기능할 거란 기대는 진즉에 버려야지.”

“하하, 강하게 말씀하시네요.”

“강하긴요! 방송이니까 그나마 체면 챙기면서 말하고 있소!”

발언은 자극적일수록 이목을 끈다.

유소진 기자는 그리골의 저돌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계속 그리골이 불타오르도록 장작을 집어넣었다.

“그 사건이 한국에서도 적잖이 회자되었는데요. 당사자의 입장에서 들어볼 기회는 없었습니다. 그때 상황을 한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참 가슴 아픈 기억이요.”

“그러시겠죠.”

유소진 기자는 감정을 끌어올려서 최대한 안쓰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호응하듯 그리골의 얼굴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할아버지로 변했다.

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부자 사이를 이간질하는 일은 정말이지 법의 잣대로 심판할 순 없어도, 도덕의 잣대로는 엄준히 심판해야만 하오.”

“아픈 기억이시겠지만 그리골 씨의 육성으로 직접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예, 그러죠…….”

그리골은 구구절절 가슴 아픈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둘째 아들이 원래 그런 애가 아니었는데.

웬 기자의 꾐에 넘어가서는.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억장이 무너진다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가 맨 마지막에는 정말 울어버렸다.

조지아가 있는 코카서스 산맥은 백인의 뿌리다.

백인의 이목구비는 동양인과 다르게 입체감 있었다.

그 이목구비로 울기 시작하니 감정이 더 풍부하게 드러났다.

흰 피부는 울음으로 붉어진 홍조를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그리골은 할 말 다 해놓고 끅, 끄윽, 울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목 놓아 울어버렸다.

서럽게 우는 그를 유소진 기자가 다가갔다.

그녀는 그리골의 어깨를 매만지고 등을 쓸면서 위로했다.

그걸로 인터뷰는 종료되었다.

잠잠해져 가던 극동일보의 패륜 행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포도주를 두고 품질이 어쩌고 하는 얘기가 천륜에 관한 얘기를 이길 도리가 없었다.

구본진의 날 선 비판은 어느새 수면 아래로 꺼졌다.

그리고 그리골의 인터뷰가 극동일보를 향한 여론의 질타에 힘을 실었다.

흠씬 두들겨 맞은 극동일보는 으레 이런 일이 있으면 내밀던 오리발로 사태를 매조지려고 했다.

여론의 질타가 지속적으로 이어지자, 극동일보는 신문에 한 줄 입장문을 발표했다.

-해당 사건은 전직 기자의 개인 일탈로 본사와는 관계없음을 알려드립니다. 해당 기자는 퇴직하였습니다.

극동일보는 그렇게 말하고 쩝, 궁색한 입맛을 다시며 더 거론하지 않았다.

결국 이 사달을 일으킨 구본진은 편집국으로 소환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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