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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23화 (323/556)

난 할 수 있어 323화

“지금 날 놀리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구 기자님 개인 의견에 죄송할 이유도 없는 제가 사과까지 하고 있잖습니까?”

“이런 근본 없는 시음회에 참석하는 거부터가 내 잘못입니다. 이만 가죠. 입맛만 버렸습니다.”

“버린 입맛 노근기 셰프님 음식으로라도 달래고 가시지.”

구본진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저도 황금루 안 가본 거 아닙니다. 매스컴이 만들어낸 장인이더군요. 그런 얼치기 음식에 취미 없습니다.”

“그래요? 저는 맛있던데. 입맛은 다 다른 법이니, 어쩔 수 없죠.”

구본진은 유소진 기자와 대찬을 한 번씩 노려보고,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자리를 떴다.

유소진 기자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쯧쯧 혀를 갈겼다.

“전형적인 와인 스노브예요.”

“와인 스노브?”

“겉멋만 잔뜩 든 헛똑똑이라구요.”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부정하긴 힘드네요.”

“저런 사람들이 와인 애호가들 얼굴에 먹칠한다니까요. 고상한 척할 거면 제대로 알기라도 하든가.”

“하하, 유 기자님이 때마침 나서주셨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저 헛똑똑이한테 홀라당 당해버릴 뻔했지 뭡니까.”

“웬만하면 저도 참았겠지만 웬만하지 않았거든요. 아, 근데 이거 어쩌죠.”

“뭐가 말입니까?”

“괜히 제가 구 선배 약을 바짝 올려놔서요. 로튼 프룻츠에 앙심 품고 해코지할까 봐 걱정되네요.”

“지금까지 할 말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멋쩍은 표정 지으시는 거예요?”

“하하… 제가 좀 저돌적이라.”

대찬은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유 기자님 아니었어도 구 기자가 저희를 펜촉으로 따끔하게 찔렀을 테니까요.”

“모쪼록 저희가 도울 일 있으면 도울게요.”

유소진 기자의 말에 최재한이 찜찜한 얼굴로 말했다.

“저희?”

“그럼 선배는 빠져있을 거예요? 극동일보 면전에 똥물 끼얹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발뺌이에요?”

“아, 아니, 내가 언제 또 빠져있겠다고 했나. 넘겨짚긴!”

유소진 기자는 웃으면서 대찬에게 말했다.

“최 선배도 죽을힘을 다해 돕겠다고 하니까요, 힘내세요.”

“야! 죽을힘 다한다고 한 적은 없어!”

“또 무슨 일 터지면 자기부터 발 벗고 나설 거면서 괜히 저래요, 그죠?”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쟤가 원래 저래요. 사람이 쓸데없이 부끄럼만 많아 가지고.”

“아주 그냥 둘이 쿵짝 한번 잘 맞는다!”

최재한의 외침에 대찬은 흐뭇하게 웃었다.

“재한이가 유 기자님 앞에서 아예 힘을 못 쓰네요.”

“야! 그냥 내가 져주는 거지.”

“예예, 어련하시겠어요.”

최재한의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고, 대찬과 유소진 기자는 소리 내서 웃었다.

대찬은 두 기자에게 제안했다.

“자, 시음회도 슬슬 파장 분위기고 직원들 고생해서 회식으로 시달리게 할 수는 없으니 우리끼리 단출하게 술이나 한잔 할까요?”

그 말에 유소진 기자가 단호하게 퇴짜를 놨다.

“안 돼요.”

“에?”

“제가 조 대표님한테 한 잔이라도 얻어 마시면 소주가 됐든 맥주가 됐든 향응 제공 받은 거예요.”

“너무 스스로에게 빡빡하신 거 아녜요?”

“남한테 너그러워도 나한테 빡빡해야 기자 노릇도 오래 하죠. 술은 다음에 하는 게 좋겠어요.”

유소진 기자의 말이 옳았다.

잠깐의 술자리를 위해 감당해야 할 대가가 너무 컸다.

자칫 극동에 이 회동이 들키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그 순간 최재한과 유소진 기자는 대찬의 스피커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오늘은 그럼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어려운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렵긴요. 와인 좋아하는 입장에선 소풍 온 기분이었는데.”

“어려운 선배한테 대들기까지 해주시고요.”

“어려운 선배 아녜요.”

대찬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왜요? 척 봐도 빡빡한 사람이던데. 선배 중에 제일 어려운 유형 아닌가요?”

“그럴 리가요. 저 인간 딱 보면 견적 바로 나오죠? 기자들도 사람이에요. 저런 인간 누가 좋아하겠어요.”

“하긴, 인심 한 점 못 얻고 권위로만 꽥꽥대는 선배만큼 만만한 사람이 없네요.”

“네, 유리로 만든 검이에요. 남 찌르기도 쉽지만 자기도 쉽게 깨지는.”

대찬과 유소진 기자는 가볍게 악수하고 헤어졌다.

시음회는 성황리에 종료되었다.

시음을 위해 마련한 물량 외에 따로 판매하기 위해 비치된 물량도 전량 소진되었다.

참석한 사람들은 1인 2병으로 제한된 분량을 꼭꼭 채워 사 갔다.

빈손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동료가 대신 사달라며 기어코 돈을 쥐여 주었다.

텅텅 빈 박스를 보며 직원들은 잔뜩 고무된 표정이었다.

숱한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몸은 잔뜩 지쳤지만 보람은 있었다.

모든 뒷정리가 끝나고, 박 부장이 보람차게 박수를 치며 직원들에게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오늘 다들 수고했으니 맥주나 한…….”

대찬은 박 부장의 팔을 살짝 잡으며 그의 말을 제지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박 부장도 대찬을 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시간은 퇴근시간을 한참 넘긴 오후 9시였다.

술이 아쉬우면 자기들끼리 어련히 뭉쳐서 먹을까.

적어도 사장 둘과 부장 하나를 머리에 얹고 마시고 싶진 않을 것이다.

대찬은 박 부장의 제안을 제지하는 대신, 그래도 직원 중에 가장 로튼 프룻츠에 오래 있었던 맹윤주를 붙잡았다.

“맹 과장.”

“네! 대표님.”

대찬은 슬쩍 카드를 꺼내 맹윤주에게 찔러주었다.

“혹시 끝나고 술 한잔 하고 싶다는 사람 있으면 이걸로 하라고 해요.”

“대표님도 같이 가시죠, 왜.”

“난 피곤해서 자러 가야 돼요.”

“아까 기자 분들하고는 술 드시려고 했잖아요! 저희랑은 드시기 싫다는 거예요?”

맹윤주가 찌릿 눈총을 쏘자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기자님들하고 마시는 건 업무의 연장이거든요? 어떻게든 기사 한 줄 잘 내달라고 청탁하려고 했지.”

“그래도 섭섭해요!”

“참 나, 우리 회사가 민주적이긴 하죠? 직원들이 오히려 사장더러 회식 참석 안 한다고 눈치를 다 줘요?”

맹윤주는 헤헤 웃었다.

“그게 우리 회사 장점이죠.”

“로튼 프룻츠는 내일 알아서 출근하기로 했지만 저는 필래로 출근해야 되거든요. 오늘만 봐주세요?”

맹윤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고생이 많으세요.”

“해야죠, 그럼. 그만큼 많이 가져가는데.”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꾸벅하고는 여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윤이영에게 말했다.

“이영아, 집에 안 가? 데려다줄게.”

“안 갈 건데? 나 직원분들이랑 술 마시고 들어갈 건데?”

대찬은 찌릿 그녀를 노려봤다.

“사장 애인 있으면 맘대로 사장 뒷담화도 못한다고.”

그러자 진위생이 흐흐 웃으면서 받아쳤다.

“왜 못함까? 윤이영 씨랑 마르고 닳도록 실컷 할 검다! 안 그렇슴까, 윤이영 씨?”

“그럼요!”

대찬은 김빠진 표정으로 윤이영과 진위생을 번갈아 봤다.

“어련하시겠어요, 들.”

대찬은 옆구리가 시린 채로 홀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대찬이 출근하자 허운이 물었다.

“시음회는 잘하셨어요?”

“허 과장은 왜 안 왔어요?”

“에이, 제가 급이 돼야 말이죠.”

대찬은 싱겁게 웃었다.

“뭐 얼마나 대단한 자리라고 급을 따져.”

“에이, 그래도 김태준 사장님하고 서 대표님 가는 자리에 일개 과장이 어떻게 낍니까.”

대찬은 웃으며 말했다.

“와인 따로 챙겨줄 테니까 유채경 과장이랑 같이 마셔.”

“덕분에 애 생기겠네요.”

“생길 때도 됐지, 뭐.”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허운과 환담을 나누고 있는 사이.

사무실에 비치하는 신문을 갖고 오던 오다혜가 사색이 돼서 들어왔다.

“팀장님, 일 났어요.”

“일이라니?”

“이거 보세요.”

오다혜는 극동일보의 맨 뒷면을 펴서 보여주었다.

사설이나 칼럼 따위가 올라오는 오피니언 란이었다.

대찬은 극동일보인 걸 확인하자마자 인상을 팍 구겼다.

오다혜는 제법 큰 크기로 할애된 칼럼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구본진의 사진이 흑백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포도주 두 잔…….”

대찬은 제목을 천천히 발음했다.

그는 오다혜를 올려다보면서 웃었다.

“고마워, 오 대리. 잘 읽을게.”

“에휴, 진짜 징글징글하네요. 너무 마음 상하지 마세요.”

“땡큐.”

오다혜는 몇 마디 더 건네고 싶었지만 할 말이 궁해서 물러났다.

대찬은 자세를 잡고 본격적으로 칼럼을 읽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와인 시음회를 다녀왔다, 로 시작되는 칼럼은 두 번째 문단에서 바로 표적을 거론했다.

-와인 수입사는 요즘 세간에 자주 오르내리는 유명인이 경영하는 회사였다. 유명 여배우 Y씨의 애인이자 굴지의 재벌기업 F그룹의 기린아로 촉망받는 인재다. 일명 ‘커피남’으로도 불리는 남자.

“줄창 까대려고 한 번 빨아주는구만.”

대찬은 콧잔등을 씰룩거리면서 칼럼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구본진은 지면의 낭비 없이 바로 포문을 열어젖혔다.

-와인은 흔히 레드(red)와 화이트(white)로 나뉜다.

같은 잔에 레드를 마시고 화이트를 마시면 영 찜찜하다.

그래서 종업원을 불러 “잔 하나 더 주세요” 했더니 그분이 이렇게 말했다.

“잔은 1인당 하나입니다.”

잔은 1인당 하나. 대가리 하나당 하나.

와인잔 님은 너 같은 놈한테 함부로 몸을 주지 않는단다, 이 와인이나 축내려고 굴러온 놈아.

그렇게 환청이 증폭되면서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미친놈.”

대찬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웃기기만 했다.

-여기가 무슨 배급사회인가.

내가 아우슈비츠에 끌려가다가 "마지막 소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와인이나 실컷 먹으면서 죽는 것이오"라고 애걸하고, 검은 제복을 입은 간수가 "네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마. 그러나 잔은 두당 하나"라고 말하는, 뭐 그런 것인가.

대찬은 구본진의 옹졸함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나는 다시는 그 나라 와인을 먹지 않을 생각이다.

새 와인 잔을 주지 않았다는 그 옹졸한 이유 때문이다.

그 나라 와인이 어디인지는 밝힐 수 없다.

프랑스, 이탈리아, 칠레, 미국은 아니다.

“아휴, 구질구질하기도 해라.”

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마나 구질구질한가.

시음회장에서 당한 굴욕을 내내 마음속에 켜켜이 쌓아두었다가.

불쑥불쑥 떠오르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고.

그걸 또 어른답게 견디질 못해서 분노의 키보드질을 하고.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아 기어코 지면에 올리는 그 옹졸함이란!

“찌질한 새끼.”

대찬은 혀를 끌끌 찼다.

계속 대찬을 신경 쓰던 오다혜는 고개를 빠끔 내밀고 그에게 물었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네? 아, 네. 이건 뭐 화도 안 나네요.”

“아유, 우리 회사 사모님 쪽이라 입에 올리긴 아무래도 조심스럽긴 한데요.”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죠?”

오다혜는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너무 너무해요.”

“대응할 것도 없네요. 오 대리, 고마워요. 덕분에 웃었네.”

“그러셨다니 다행이에요.”

‘포도주 두 잔’은 희대의 칼럼이었다.

사람들의 생각이야 매한가지였다.

이건 정치적 입장에 따라 입장이 갈릴 일도 아니었고, 경제적 수준에 따라 그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순도 백 퍼센트 개인의 옹졸함이 빚어낸 역작이었으니, 세간의 지탄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구본진의 칼럼 ‘포도주 두 잔’은 비웃음만 샀다.

대찬에게는 별다른 유효타를 남기지 못했다.

그런 채로 무의미하게 사그라졌다.

지탄을 받은 구본진은 사과 명목으로 후속 칼럼을 게재했다.

그러나 다시 욕만 얻어먹었다.

사과를 할 거면 시원하고 정직하게 사과를 하면 되지.

하나도 안 미안하면서 배배 꼬인 속으로 사과를 하려고 드니 제대로 된 사과가 나올 리 만무.

허무한 미사여구의 진수성찬일 따름이었다.

남들이 수긍할 만한 사과는 되지 못했다.

대찬도 한번 비웃어주고 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구본진의 분노는 해소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도리어 더 심화된 듯했다.

그는 대찬을 향해 두 번째 폭격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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