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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22화 (322/556)

난 할 수 있어 322화

“이런 상황에 극동일보 기자까지 부르실 줄은 몰랐어요.”

“그, 극동일보요?”

“듣던 것보다도 대단하시네요. 그만큼 와인에 자신 있으신 건가.”

“잠깐, 잠깐만요.”

대찬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는 급히 섭외를 담당했던 맹윤주에게 물었다.

“맹 과장.”

“네! 대표님.”

“혹시 극동일보에도 초청장 돌렸어?”

그러자 맹윤주는 대찬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네에? 제가 미쳤어요?”

“안 돌렸지?”

맹윤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그쪽에 잘못 연락 갈까봐 주소록에서도 아예 삭제했어요.”

“어쨌든 우리 쪽에서 극동일보 부른 건 아니란 거지?”

“네. 직원들끼리 크로스체크도 된 거라 확실해요.”

“오케이.”

대찬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유소진 기자에게로 돌아왔다.

“유 기자님, 저희 쪽에서는 극동에 따로 초청장 안 보냈다고 돼 있는데요.”

“그래요? 이상하네요.”

“이 자리에 극동 쪽 사람이 와있습니까?”

“네, 저기.”

유소진 기자는 대찬에게만 보일 정도의 작은 손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멀쑥한 중년의 신사가 주변의 몇몇과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극동일보 문화부 구본진 기자. 평소에 와인 애호가로 기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해요.”

“저 인간이 왜 여기 왔지. 초청장 받은 사람들만 입장 가능한데.”

“기자들은 소속이 달라도 다 같은 선후배니까요. 아마 친한 타사 기자 초청장을 받아온 거 같네요.”

대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여기 왔다는 건.”

“좋은 소리 해주려고 오진 않았겠죠. 아마 내일 자 극동일보에 기사가 나긴 날 거 같은데.”

“막을 방법은 없겠죠?”

유소진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맨인블랙에 나오는 기억 없애는 장치라도 있으면 모를까. 이미 여러 잔 마신 거 같은데 막을 도리가 없죠.”

“…그래도 유 기자님이 미리 귀띔해주셔서 다행이네요.”

유소진 기자는 떨떠름하게 웃었다.

“차라리 말하지 말 걸 그랬나 봐요. 미리 안다고 대처할 방법도 없고, 괜히 간밤에 잠 못 주무시는 건 아닐지.”

“아닙니다. 기사 나가는 걸 막지는 못해도 거기에 어떤 액션을 취할지 미리 결정할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습니다.”

대찬은 와인을 마시면서 묵묵히 구본진의 모습을 바라봤다.

초청장을 받았느냐.

안 받았으면 당장 나가라.

그렇게 닦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래봤자 좋을 게 하나 없었다.

기자들은 동업자 정신이 강하다.

구본진 기자가 푸대접을 받으면 자기들도 푸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할 터.

그럼 와인의 맛보다는 푸대접, 무례 논란으로 홍역을 치를 게 분명했다.

지금껏 들인 공이 일거에 수포로 돌아간다.

극동일보야 반론의 여지가 없는, 대찬의 주적이다.

그런데 지금 구본진 기자의 주변을 둘러싼 기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대찬이 들고 있는 확성기라고 해봤자 최재한뿐이었다.

잘 쳐줘야 유소진 정도가 고작이었다.

구본진을 때리겠답시고 여타 기자들을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최재한과 유소진만으로 그들 전부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대찬은 다른 이들과 얘기를 나누는 중에도 구본진에게 자꾸 신경이 쏠렸다.

그는 극동일보 기자라는 사전 정보가 없어도 충분히 신경 쓰이는 손님이었다.

까다로웠다.

그는 손에 닿는 것, 입에 넣는 것, 눈에 보이는 것마다 사사건건 따졌다.

아예 그의 전담으로 로튼 프룻츠 직원 하나가 계속 붙어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멀리서 보자니 구본진의 행태가 영 거슬렸다.

직급도 경력도 부족한 직원이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찬은 같이 얘기를 나누던 이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는 구본진에게로 걸어가 친절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기자님.”

“오, 많이 보던 얼굴이네요. 사진으로. 조대찬 대표님 맞죠?”

구본진의 웃음을 능글맞았다.

모종의 의도를 갖고 이 자리에 온 이상, 그 역시 대찬에게 감정이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구본진의 얼굴에는 대찬을 꺼리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도리어 기껍게 여기는 듯까지 했다.

대찬도 초장부터 그에게 반감을 드러낼 이유가 없었다.

“맞습니다. 알아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극동일보 구본진 기자입니다.”

“그러셨군요. 저는 아시다시피 이 회사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조대찬입니다.”

둘은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구본진은 대찬이 초청장을 보내지도 않았다고 시비를 걸 것을 예측했는지, 미리 선수를 쳤다.

“아는 후배가 못 가게 됐다고 저한테 초청장을 양도해서요.”

“그러셨군요.”

“조금 치사하셨어요.”

구본진이 실실 웃으면서 말하자, 대찬은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치사하다뇨.”

“다른 자잘한 언론들에는 다 연락을 돌리셔놓고 우리만 쏙 빼니까.”

“서운하셨습니까?”

“그럼요. 서운하죠.”

“그렇게 느끼시는 것도 이해는 합니다만 기자님이 제 입장이었어도 아마 같은 선택을 하셨을 겁니다.”

구본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요. 저는 제가 떳떳하면 개의치 않는 성격이라.”

“대범하셔서 좋으시겠군요.”

“하하, 그러는 조 대표님은 대범하지 못하셔서 불행하신가요.”

대찬은 대답 없이 불편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구본진은 들고 있는 와인을 대찬의 앞에서 휘휘 흔들었다.

스월링이라고 하는, 와인을 공기와 접촉시켜 향을 극대화하기 위한 동작이었다.

그 능숙한 손길로 구본진은 자기가 대단한 와인 애호가임을 뽐냈다.

“그리고 기왕 내친 말이니 몇 마디 더할까요.”

“그러시죠.”

“영세 업체의 한계일까요. 오늘 시음회는 전체적으로 좀 조악하군요.”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공간 인테리어부터가 마음에 안 들어요. 칙칙해서 어디 와인 마실 분위기가 나야 말이지.”

“예산이 한정되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거슬린다니 사과드리죠.”

“뭐든 궁핍하면 궁상맞은 거예요. 돈 좀 쓰셨어야지. 아니면 인원을 좀 줄이고 좁은 곳에 잡으시든가.”

대찬은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요.”

“제 지적에 동의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윤이영 씨와 노근기 셰프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자진해서 오시겠다는 기자분들도 계셨거든요. 모두 모시려다 보니 조금 부족해도 넓은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구본진은 아랫입술을 살짝 내민 채로 입술을 우물거렸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거기에 이렇게 후배 초청장까지 받으셔서 와주시는 분도 계시잖아요. 어떻게 좁은 곳을 빌리겠습니까?”

“이봐요, 조 대표님, 저는 어쩔 수 없이 초청장이 아까워서 온 겁니다.”

“아유, 어련하시겠어요.”

대찬이 비꼬듯 말하자 독이 오른 구본진이 다시 불만을 제기했다.

“와인 시음회에서 떡하니 벌려놓은 중국요리들도 좀 그래요. 중국요리의 오일리(oily)한 냄새에 와인의 아로마가 가려진달까.”

“기자님의 취향이 그러시다면 유감입니다만, 다른 분들은 오히려 호평하시던데요.”

구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국 사람들, 뻐기기는 좋아해도 알고 보면 빈 깡통들 천지라니까.”

“무슨 뜻입니까.”

“그래도 여기 온 인간들은 와인 좀 먹어봤다고 자부할 텐데 저래요. 그저 텔레비전에서 몇 번 본 사람이라고 굽실거리고. 저 인간들이 와인을 제대로 알기는 하는 걸까 싶네요. 수준이 이래. 한국은 아직 멀었어.”

“말씀대로라면 여기에 제대로 와인을 즐기시는 분은 구 기자님이 유일하시겠군요.”

구본진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같은 박자로 와인 잔을 스월링했다.

“그렇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죠.”

“다행히도 선배 빼고는 다들 와인을 잘 즐기고 계신 거 같은데요? 안심하세요.”

유소진 기자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내내 대찬과 구본진 쪽에 시선을 주다가, 더 참지 못하겠는지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굳이 분란 일으켜서 뭐가 좋겠냐는 최재한의 말에도 유소진 기자는 그에게 따갑게 쏘았다.

새파랗게 어린 후배가 달려들자 구본진의 눈썹이 올라갔다.

“뭐야, 너.”

“선배, 아무리 조 대표님이 와인을 모르셔도 그렇지. 너무하시네요.”

“유소진.”

구본진의 이름 부르기는 성질 건드리지 말고 빠지라는 협박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유소진 기자는 빠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걸 걱정했으면 칼을 빼 들지도 않았다.

“일단 상대방 앞에서 스월링하는 거, 그거 비즈니스 매너에 엄청 어긋나는 일인 거 아시죠?”

“야, 여기 시음회장이야.”

“시음은 충분히 하셨잖아요. 그거 같은 와인 두 번째 드시는 거잖아요? 한 번 드셔서는 모르고 여러 번 드셔야 감이 오는 스타일이셨나요? 생각보다 하수셨네요.”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대찬을 상대로 잔잔한 호수처럼 평정을 유지하던 구본진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선 넘는다, 너.”

“그리고 중국음식하고 레드와인하고 얼마나 궁합이 잘 맞는데요?”

“…….”

“오늘 보니까 노 셰프님이 대가는 대가시더라고요. 화이트와인하고도 어울리게 담백한 해산물 요리도 충분히 준비하셨던데.”

“…….”

“너무 개인감정 때문에 색안경 끼고 까시는 거 아녜요?”

“너 언제부터 이렇게 싸가지 없어졌냐?”

그러자 유소진 기자는 웃으면서 최재한에게 말했다.

“우와, 선배, 싸가지 없다는 소리 들으면 기자로서 정곡을 찌른 거라고, 잘한 거라고 하셨잖아요. 나 방금 잘했나 봐요.”

“어, 어어?”

최재한은 어정쩡한 웃음을 걸쳤다.

구본진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걷잡을 수 없게 동요했다.

그걸 가만히 보던 대찬도 지원사격에 나섰다.

유소진 기자가 모처럼 대찬을 위해 나서줬다.

수수방관하는 건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

“하하, 유 기자님이 제법 톡 쏘는 매력이 있네요. 구 기자님, 기분이 상하신 건 아니죠?”

“…….”

“후배가 틀린 걸 좀 바로잡아줬다고 선배의 권위로 찍어 누르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 고상하게 와인을 마시는 이 시음회장에서 말이죠.”

구본진은 대찬에게 눈을 흘겼다.

“내가 언제 권위로 찍어 눌렀다는 겁니까? 넘겨짚지 마시죠.”

“실례했습니다. 구 기자님이 그럴 분이 아니신데.”

구본진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로튼 프룻츠를 위해 건설적인 비판을 건네는 근거는 비단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뭐가 더 있죠?”

“와인 하나를 마시고 다른 잔으로 교체해달라고 했더니 직원이 딱 잘라 거절하더군요. 잔은 1인당 하나라면서.”

“선배, 시음회장은 원래 1인 하나 아니면 두 개예요. 더 주는 곳은 그쪽 재량이고요.”

대찬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유소진 기자가 치고 나가자, 구본진의 언성이 높아졌다.

“야! 유소진! 네가 여기 직원이야?”

“아뇨, 그건 아닌데 그냥 그렇다고요…….”

대찬은 웃으면서 구본진에게 말했다.

“그럼 기자님만 특별히 두 잔까지 쓰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직원에게 말해놓죠.”

“됐습니다! 다 먹은 판에, 뭘.”

“하하, 다음에는 잔을 넉넉히 준비해놓겠습니다.”

구본진은 악에 받쳐서 대찬을 쏘아붙였다.

“이거, 마마라는 와인 말입니다. 와인의 퀄리티도 저렴한 가격을 고려해도 좋지 못하더군요.”

“그러셨습니까?”

“시트러스(citrus, 귤·라임 따위의 향기) 향이 너무 지배적이어서 포도 맛을 해칠 정도예요. 돌하르방이 조지아 전통의상으로 위장한 느낌이랄까. 코르키(corky, 코르크 마개가 잘못 제작되어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한 맛이 두드러져서 불쾌하기까지 했고요. 피니시(finish, 여운)가 1꼬달리(caudalie, 여운이 머무는 시간. 1꼬달리=1초) 정도로 짧아 알코올만큼이나 가벼워서 역시 높은 점수를 주긴 힘들었습니다.”

구본진의 장광설에 대찬은 머리가 아파왔다.

어렴풋하게 아는 영어단어인데 그걸 한국말에 섞어 연거푸 쏟아내니 완전한 포도주 문외한인 대찬으로서는 곧바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역시 유소진 기자가 대찬의 대신 나서주었다.

그녀는 일견 비웃는 듯한 얼굴로 반박했다.

“선배 감상은 되게 희한하시네요. 그리고 정석적이지도 않고요.”

“네가 알면 뭘 안다고 정석 운운하는 거냐?”

“이 마마 와인은 시트러스 향보다는 바닐린 성분이 두드러지는 오키(oaky, 오크 향이 나는 것)한 향이 지배적인데요? 바닐라 냄새를 시트러스 향으로 잘못 표현하신 것 같아요. 코르키하다고 말씀하신 것도 오크의 스모키한 향을 착각하신 거 같네요. 그리고 이 와인은 가격에 비해 피니시가 나쁜 편은 아니에요. 아마 목구멍에 감도는 피니시를 선배가 감지하지 못하신 거 같아서 아쉽네요.”

대찬은 웃으면서 유소진을 제지했다.

“그래도 개인의 감상은 다 다르잖아요.”

“물론 그렇죠. 근데 선배 말씀은 파란색 보고 따뜻한 색이라고 하시는 정도라. 동의하기 어려워요.”

대찬은 구본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필링(feeling)을 받으셨다니 주최자 입장에서 베리(very) 쏘리(sorry)합니다.”

구본진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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