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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21화 (321/556)

난 할 수 있어 321화

대찬은 진위생에게 말했다.

“진위생 씨, 팀별로 요구되는 적절한 인원 좀 조사해서 저한테 알려주세요.”

“아, 알겠슴다.”

대찬은 구체적인 지시를 남들이 보는 앞에서 내렸다.

인력수급이 단순한 구호나 공염불이 아니라 기정사실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민승기가 대찬에 이어 덧붙여 말했다.

“업무를 진행하는 데 있어 불편한 사항은 기탄없이 말해주세요. 그런 걸로 눈치 주고 그런 회사 아닌 거, 다들 아시잖아요?”

박 부장은 피식 웃었다.

“당연하죠. 일단 감히 직원들을 대표해서 제안 드립니다.”

“말씀하세요.”

“간식비 100프로 증액과 사무실에서의 자유로운 취식을 요구합니다.”

“뭐야, 박 부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 소박하신 거 아닙니까……? 그리고 이미 암암리에 자유롭게 드시고 계시잖아요? 저기 맹 과장 입술에 붙은 빵가루 좀 봐.”

민승기의 말에 맹윤주는 소심하게 웃으며 입가를 훔쳤다.

민승기는 박 부장과 직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은 간식비나 올리는 정도밖에는 해드릴 수 없습니다만, 일이 잘되면 성과급도 팍팍 꽂겠습니다. 우리, 당분간 고생 좀 하자고요.”

“네, 대표님.”

로튼 프룻츠의 회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끝났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는 다시 전투를 방불케 하는 치열한 영업이 개시되었다.

일단 신호탄은 윤이영의 SNS였다.

그러나 그건 입소문의 신호탄일 뿐이지, 연속된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지금껏 마케팅에만 의존한 채 본질을 망각한 바보들이 수도 없이 망해갔다.

대찬, 그리고 로튼 프룻츠는 그들의 전철을 밟을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러자면 와인의 질 자체가 좋고 가격이 합리적이어야만 했다.

로튼 프룻츠는 질과 가격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단정하는 건 우물 안 개구리밖에 되지 못한다.

외부의 평가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자신을 판단할 수 있었다.

기왕 외부의 평가를 받겠다면 전문가 그룹이 좋을 터.

시음회를 열기로 했다.

제법 이쪽 분야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초대장을 보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했다.

반응이 미적지근했다면 시음회는 단출하게 진행됐을 것이다.

그런데 노림수가 통했으니 기왕지사 판을 크게 벌이기로 했다.

일개 영세업체가 주최하는 시음회치고는 제법 규모를 갖췄다.

그리고 주류업계 관계자들과 다른 참석자들 역시 일개 영세업체가 주최하는 시음회치고는 이름값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개는 대찬의 개인 인맥 덕택이었다.

노근기.

매스컴에 자주 얼굴을 비춰 자타공인 ‘스타 셰프’가 된 지는 오래인데 이제는 전국에 매장도 여러 곳 거느린 사장님이 되었다.

단순히 현재의 매출만 비교하자면 로튼 프룻츠는 들이댈 것도 못되는 탄탄한 기업이었다.

“어, 우리 조 대표 잘 살았지?”

“하하, 어서 오세요, 노 대표님.”

짐짓 일부러 묵직한 표정을 짓던 노근기는 이내 원래대로의 친근한 옆집 아저씨 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우리가 서로를 대표라고 부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저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는데요? 노 대표님 솜씨야 익히 알았으니까요.”

“난 그래도 조 대표보다는 조 선생이라고 부르는 게 더 입에 붙어.”

“선생 소리는 몇 년째 들어도 적응이 안 돼요. 차라리 대표가 낫다.”

노근기는 대찬을 흘끔 보며 흐흐 웃었다.

“그럼 원하는 대로 조 대표라고 불러주지. 조 대표, 내가 식당에서 음식 좀 준비해왔는데 선보여도 민폐 아니지?”

“아유, 민폐라뇨. 솔직히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는데.”

“그럼 진즉 말을 하지!”

“저도 염치는 있어서 못 그러던 차였어요.”

“어이구! 이봐, 그쪽도 이제 어엿한 대표면 염치 이전에 산수가 돼야지. 돈 된다 싶으면 악착같이 달려들고 봐야 이런 불황에 살아남아요.”

“아주 이젠 진짜 기업가가 다 되셨네요.”

“조 대표도 진짜 기업가가 돼야지.”

“본받겠습니다.”

노근기는 피식 웃었다.

“자, 암튼 허락받았으니 나도 여기다가 판 벌릴게. 그럼 계속 손님맞이 하라고.”

노근기는 데리고 온 직원들을 능숙하게 부려 음식들을 날랐다.

노근기의 협조 덕분에 자리가 더 빛났다.

대찬이 그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 민승기는 주한 파푸아뉴기니 대사와 악수했다.

대찬의 연인인 윤이영도 당연히 자리를 빛냈다.

그녀의 존재는 이런저런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도 단연 주목을 받았다.

대찬은 그녀와 가볍게 포옹했다.

“괜히 바쁜데 일부러 시간 낸 거 아니지?”

“당연히 일부러 시간 냈지. 동네 슈퍼 가는 것도 아니고 이런 자리에 일부러 시간 안 내고 심심해서 왔겠어?”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연예신문은 아니어도 기자들 더러 와있으니까 너무 오래 머물지 마. 좋을 거 없잖아.”

“싫은데? 황금루 본점 예약하려면 한 달 전에 해도 늦잖아.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배 빵빵해질 때까지 실컷 먹고 갈 거야.”

“결혼도 안 했는데 속도위반한 거 아니냐고 입소문 돌겠다.”

“가만 보면 나보다 오빠가 더 겁이 많은 거 같아.”

대찬은 가벼운 눈웃음만 지었다.

술이라면 막걸리든 양주든 가리지 않는 만몽거사도 모습을 드러냈다.

대찬은 그 누구보다 깍듯하게 그에게 인사했다.

“거사님, 몸도 불편하신데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이놈이 누굴 산송장 취급하고 있어? 나 돈 많아. 택시 타고 왔어.”

“하하, 괜히 노파심이 들어서요.”

“늙은 나도 안 내는 노파심을 탱탱한 놈이 왜 내? 나 오늘 잔뜩 취해서 돌아가려니까 이따 택시나 잡아줘라.”

“아유, 당연하죠. 맘껏 즐기세요.”

만몽거사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뒷짐을 지고 노근기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김태준 사장도 부인을 대동하고 시음회에 참석했다.

서원웅도 모습을 드러냈는데, 김태준 사장과는 달리 부인인 홍승연과 동행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아는 대찬은 묻지 않고 인사만 건넸다.

“왔어?”

“응, 왔어. 시음회치고는 손님들이 많이 오셨네.”

“공 좀 들였지. 노 셰프님도 오셨어. 온 김에 오랜만에 인사라도 해.”

“그래야겠네.”

“암튼 오늘 와줘서 고맙다.”

“무슨.”

둘의 대화는 어딘가 어색하고 경직돼있었다.

철수야, 안녕. 영희야, 안녕만큼이나 어색했다.

상황이 상황이니 대찬은 개운치 않은 입맛만 한번 다시고 관뒀다.

그래도 대표의 몸으로 여기까지 친히 왕림하여 주셨다.

관계개선의 의지가 서원웅에게도 있는 것이었다.

대찬은 그것으로 위로를 삼았다.

그는 서원웅의 처지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얼마나 난처하겠는가.

없던 일인 듯 훌훌 털어내자.

그렇게 끊임없이 생각하며 머리로는 서원웅도 갖은 애를 쓸 것이다.

그러나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냉철한 인간이 어디 흔한가.

‘그렇게 냉철했으면 진즉에 홍승연을 휘어잡고도 남았지.’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서원웅의 상황을 십분 이해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서원웅 때문에 자신의 뜻을 한 수 접어줄 의향은 없었다.

그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서원웅의 갈피를 못 잡고 떠다니는 마음이 순순히 이쪽에 닿도록 가만히 놔둘 참이었다.

웅덩이의 한가운데,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나뭇잎을 이쪽으로 끌어당기려면.

손을 웅덩이에 담가 열심히 이쪽으로 저으면 도리어 나뭇잎은 저만치 멀어진다.

바람이 용케 이쪽으로 불어 나뭇잎이 알아서 와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대찬은 서원웅 쪽으로 흘끗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손님들을 맞이했다.

시음회는 성황리에 치러졌다.

특히 기자들의 참석이 두드러졌다.

로튼 프룻츠의 직원들이 기자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면서 은근히 말 한마디를 곁들였다.

“배우 윤이영하고 노근기 셰프도 자리에 와주시기로 했어요.”

기자란 기본적으로 관심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같은 와인 시음회여도 기사를 올릴 때, 윤이영이나 노근기의 이름을 끼워 넣느냐 안 넣느냐에 따라 더 많은 관심을 끌 수 있었다.

와인시음회 하나만 봤다면 콧방귀를 뀌며 무시했을 기자들이 한 트럭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도 직원들의 귀띔에 태도를 달리했다.

몇몇은 행여나 늦을까 허겁지겁 달려와 자리를 채웠다.

최재한 역시 기자로서 자리를 채워주었다.

물론 윤이영, 노근기라는 말에 귀가 쫑긋해서 부리나케 달려온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대찬은 그를 반갑게 맞았다.

“시음회장 들락날락거릴 정도로 안 한가하잖아?”

“그래, 개인적으로도 들척지근한 와인에는 별 흥미 없어.”

“그럼 못 온다고 하지.”

“와인 마시러 온 거 아니야.”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 핵심 취재원 관리하러 온 거지. 괜히 안 왔다가 삐쳐가지고 이 건으로 천년만년 우려먹으면 어떡해?”

“하긴 그건 그래. 이왕 온 거 맛있는 거나 많이 먹고 가.”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대찬은 싱겁게 웃고는 최재한의 옆에 있는 여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 근데 이분은…….”

“우리 문화부에 유소진 기자. 나보다 두 기수 후배야.”

대찬은 유소진 기자를 향해 정중하게 묵례하며 웃었다.

“안녕하세요, 로튼 프룻츠 조대찬 대표입니다.”

“이렇게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유소진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최재한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말했다.

“우리 유 후배, 와인에 제대로 일가견 있어.”

“아, 전문가시구나.”

유소진 기자가 바로 정정했다.

“전문가는 아니고, 딱 최 선배가 소주 즐기는 정도로만 즐겨요.”

“아, 그럼 그냥 전문가가 아니라 박사님 수준이란 말씀이신가?”

유소진 기자는 난처하게 웃었다.

“그, 그게 아니라요!”

“농담입니다. 그래도 포도주스랑 와인이랑 간신히 구분하는 정도인 우리보다는 나으시잖아요.”

“하하, 네. 그렇긴 하죠.”

최재한이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시음해보고 유 기자 이름으로 단신이나마 리포트 나갈지도 몰라.”

“잘 보여야겠는데.”

“성격이 칼 같아서 공명정대하게 와인만 평가해줄 거야.”

그러자 유소진 기자는 어색한 웃음을 걸쳤다.

“선배, 그러지 마세요. 초면부터 인상 안 좋게 남아요.”

대찬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기자한테 칼 같다는 건 칭찬이죠. 강골 최재한이랑 친하신 걸 보면 유 기자님도 어지간하시겠는데요?”

“아유, 아니에요……. 이런 소문 자꾸 퍼지면 저 시집 못 가요.”

“왜요, 프로페셔널한 여자 좋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대찬의 공치사에 유소진 기자는 부끄러운 듯 웃었다.

그러면서 최재한의 눈빛을 흘끔 살폈다.

‘프로페셔널한 여자 좋아하는 사람 여기 있었네.’

대찬은 유소진 기자를 향하는 최재한의 말랑말랑한 눈빛을 보고 피식 웃었다.

“모쪼록 맛있게 드시고 기사 잘 좀 부탁드립니다.”

“제 혓바닥이 판단하겠죠.”

“칼 같긴 칼 같으시네.”

대찬은 웃으면서 최재한과 유소진 기자를 안으로 안내했다.

시음회를 위한 공간은 널찍한 곳이었다.

대관할 때 일부러 그렇게 해두라고 직원에게 귀띔한 덕택이었다.

그럼에도 시음회장은 인파로 빽빽했다.

분위기는 다소 어수선해도 로튼 프룻츠 입장에서는 반길 만했다.

직원들은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안도했다.

시음회가 그들만의 리그로 끝나지 않았으니 며칠간 바쁘게 뛴 보람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찬은 마냥 편하게 안도만 할 수는 없었다.

저 많은 기자들마다 길고 짧은 기사를 하나씩은 내보낼 것이다.

사람 입맛이야 다 비슷하다.

특히 전문가들의 견해는 더 그럴 것이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어도 대개 일정한 흐름의 평가가 만들어질 것이다.

만일 그들의 반응이 좋지 않으면, 윤이영의 SNS로 지펴놓은 불씨가 하루아침에 꺼질지도 몰랐다.

대찬은 마마와 멜로티 와인이 경쟁력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 불안감이 앙금처럼 남아있었다.

그렇기에 대찬은 적극적으로 기자들과의 스킨십에 나섰다.

기자들 중에 유소진 기자만큼 칼 같은 사람이 드물고, 최재한만큼 배짱 좋은 이도 드물었다.

도리어 밥술이나 잘 얻어먹고 비싼 술도 얹어지면 만고땡인 치들이 다수였다.

이날만큼은 대찬의 꼿꼿한 허리도 제법 굽실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기자들과 안면을 트고 환담을 나눴다.

기자들 만나는 자리에 술이 빠질 수 없고, 마침 명분이 또 시음회였다.

대찬은 계속 와인을 마셔야 했다.

이럴 때면 대찬은 잘도 버텨주는 정신력과 주량이 감사할 뿐이었다.

여러 기자들을 만나고 다시 최재한, 유소진에게로 돌아왔다.

셋은 잔을 부딪치고 와인을 마셨다.

대찬은 목만 축였다.

유소진 기자는 와인을 마시며 슬쩍 대찬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조 대표님, 근데 너무 자신감이 넘치시는 거 아녜요?”

“네? 자신감이 넘치다뇨.”

유소진 기자는 한쪽을 흘끗 바라보곤 다시 대찬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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