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320화 (320/556)

난 할 수 있어 320화

디자인은 여러 버전이었다.

첫 번째의 테마는 심플.

그리골의 스탈린 수염.

샬바의 대머리와 문신.

그것들을 강조하여 캐릭터를 최대한 간략하게 표현한 디자인이었다.

이 디자인이 여럿 중에 첫 번째로 꼽혔다.

흔히 ‘심플 이즈 베스트(Simple is best)’라고 하니까.

두 번째의 테마는 세련됨이었다.

형형색색의 모자이크로 그리골과 샬바를 그려낸 디자인.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색감이 괜찮네요.”

“응, 그건 분위기 있는 와인바에 비치하면 괜찮을 거 같네.”

세 번째는 고풍스러움이었다.

와인 레이블로서는 어쩌면 이쪽이 가장 정통이었다.

감각적인 디자인은 젊은 소비자를 매료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도리어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소비자를 잃을 염려가 있었다.

그들을 위해 가장 보편적인 디자인도 마련했다.

포도밭을 배경으로 한 그리골의 인자한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렇게 세 분류의 디자인 모두 대찬의 마음에 들었다.

대찬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기대 이상인데요? 공들인 보람이 있네요. 고생 많으셨어요, 선배.”

“알아주니 고맙다.”

민승기는 대찬의 등을 툭 한번 건드렸다.

대찬에 마음에 드는 건 첫 번째 디자인이었다.

그는 샘플로 만든 병을 들고 윤이영과 만났다.

“와, 기대 이상인데?”

윤이영은 대찬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대찬은 그런 그녀를 보고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잘됐지?”

“응, 아주 잘. 이건 굳이 내가 안 거들어도 잘 팔릴 거 같아.”

“안 돼. 그 핑계로 빠져나가려고 하지 마.”

“아이고, 내가 넌 줄 알아?”

“너? 오빠한테 너?”

“까불지 마. 확 홍보 안 해주는 수가 있어.”

윤이영의 엄포에 대찬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는 윤이영의 팔을 붙들고 헤실헤실 웃었다.

“누나, 왜 그러세요.”

“조대찬 상대로 갑질을 다 해보네. 나 이거 최대한 즐기다가 올리면 안 될까?”

“절대 안 돼. 제품 출시되자마자 올려야 된다고.”

“그러면 너무 짜고 친 거 같잖아.”

“…그런가?”

윤이영은 흐흐 웃었다.

“당연하지! 그러니까 당분간 상전 노릇 좀 해야겠는데? 어쩔 수 없이?”

“…그래.”

대찬은 로튼 프룻츠의 디자인이 그리골의 와인병에 부착될 때까지 윤이영을 여왕처럼 섬겼다.

* * *

“아 도대체 왜 안 오는 거야!”

윤이영의 등쌀에 못 이긴 대찬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걸 본 민승기는 흐흐 웃었다.

대찬은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선배! 일부러 나 엿 먹이려고 아직 발주 안 한 거 아니에요?”

“야, 내가 너 좀 놀려먹겠다고 우리 사업 말아먹을 위인으로 보이냐?”

“그럼 왜 여태 안 오는 거예요. 기분 탓인가?”

민승기는 대찬의 팔짝 뛰는 모습에 여전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분 탓은 아닐걸? 실제로 오래 걸리는 거니까.”

“좀 빨리빨리 오라고 하면 안 돼요?”

“배로 안 싣고 비행기로 오면 그 운송비를 어떻게 감당할래?”

“하.”

“조지아에서 출발해서 여기까지 도착하는 데 얼마나 많은 곳을 들르겠어.”

“…얼마나 많은 곳을 들르는데요?”

“조지아 포티 항구에서 출발해서 터키 이스탄불 거쳐서 싱가포르, 중국 선전 찍고 부산에 도착한다고.”

“한 한 달이면 될까요?”

“한 달? 어림없지.”

대찬은 경악했다.

“에? 그럼 얼마나 걸리는데요?”

“배로 움직이는 데만 45일이야. 조지아에서 육상운송, 또 부산에서 여기까지 육상운송 고려하면 넉넉하게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

대찬은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구치소에서 풀려나려다가 무기징역 때려 맞은 죄수만큼이나 넋이 나갔다.

그래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대찬이 유래 불분명의 격언을 오래 붙들고 있던 보람이 마침내 있었다.

장장 50일간의 노예 생활에서 대찬은 해방되었다.

그리골의 손끝을 떠난 귀한 와인이 아시아 대륙 구석구석을 훑고 마침내 로튼 프룻츠 직원들의 손에 들어왔다.

직원들은 모두 환하게 웃었다.

대찬은 아이를 다루듯 천천히 쓰다듬으며 웃음을 흘렸다.

“실물로 보니 더 예쁘네.”

대찬은 디자인에 대한 미적 감각이 다른 이들보다 탁월하지 않았다.

딱 평균의 수준이었다.

대찬은 평균의 수준에 예쁘게 보였으니 대성공이라고 생각했다.

대찬보다 미적 감각이 조금 나은 윤이영도 와인 레이블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예뻐. 굳이 오빠가 안 권했어도 내가 샀겠는데? 술 안 즐기는 사람도 인테리어 소품으로 갖고 싶어 할 정도야.”

“그래? 네가 극찬했으니 성공은 불 보듯 뻔하네.”

대찬은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윤이영과 조지아에서 날아온 와인, 마마와 멜로티를 번갈아 바라봤다.

대찬과 윤이영은 한 병은 노예해방을 기념하기 위해 나누어 마셨다.

그리고 일주일 후, 윤이영의 SNS가 오랜만에 업데이트되었다.

윤이영·3분 전

잘 계시죠?

오랜만에 생존신고해요.

촬영 마치고 집에서 쉬면서 한 컷 찍어봤어요.

항상 사랑해주셔서 감사해요. 더 멋진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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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128개 댓글·33개 공유·10회

윤이영의 SNS에 그녀의 말마따나 오랜만에 글이 올라가던 그때.

대찬은 그녀와 함께 있었다.

둘은 소파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작은 휴대폰 액정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었다.

액정이 작으니 저절로 둘의 이마가 닿았다.

“와, 역시 스타는 스타네.”

대찬은 초 단위로 숫자가 바뀌는 윤이영의 글에 혀를 내둘렀다.

글과 함께 올라간 사진은 지극히 일상적이었다.

사진의 배경은 집에 딸린 작은 발코니였다.

집안은 하늘거리는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았다.

발코니에는 몇 가지의 화초와 함께 흰색의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아기자기한 소품과 장식들이 놓여 있었다.

노트 몇 권.

만년필 한 자루.

아늑한 쿠션.

이국적인 조각상.

그리고 마마 와인 한 병과 와인잔 여러 개를 거꾸로 매달고 있는 와인글라스랙.

윤이영은 그걸 배경으로 꾸밈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10분이 지나자 ‘좋아요’ 개수는 5배로 늘고, 댓글과 공유도 그 정도 배수로 증식했다.

그리고 그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사진이 전파되었다.

발코니에 놓인 소품들은 고의적으로 모두 단색이었다.

커튼부터 시작해서 탁자보, 노트, 쿠션과 조각상까지.

그렇기에 시선은 자연스레 상대적으로 간단하면서도 강렬하게 디자인된 마마 와인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역시 댓글에서도 마마 와인이 자주 언급되었다.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이 오랜만에 SNS에 얼굴을 비춘 윤이영이었고, 그 다음이 마마 와인이었다.

-언니! 와인병이 너무 예뻐요!

-ㅋㅋㅋㅋㅋㅋㅋ 와인병에 그림 너무 귀여워요.

-헐 언니 사진에 나온 와인 뭔지 아시는 전문가 계신가요? 급해요.

└레이블 디자인이 전형적인 라틴아메리카 감성이네요. 아마 칠레산 와인일 듯합니다. 지금까지 못 보던 디자인이라 한정판으로 나온 듯. 일반인이 구하긴 힘들어 보이네요.

└ㅋㅋㅋㅋㅋ 저기 떡하니 조지아 문자 써 있는데 ‘전형적인 라틴아메리카 감성’ ㅇㅈㄹ

└방구석 소믈리에 나셨네;;

└레이블에 ‘mama’라고 적혀있어서 검색해보니까 가격도 저렴하네용. 2만 원 정도.

└헐 감사합니다.

└조지아가 뭐임? 나라 이름임?

└댓글 쓸 시간에 검색 좀 하세요.

-우리나라에서 파나요?

└아직 취급하는 데가 많진 않은데 팔긴 파는 듯.

-마마 와인이랑 같이 멜로티 와인이란 것도 나왔네요. 이것도 한 예쁨 하는 듯.

마마와 멜로티 와인에 관심의 불씨가 생겨났다.

대찬은 거국적으로 한탕 크게 치려는 봉이 김선달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거국적 수요를 감당할 물량도 되지 않았다.

로튼 프룻츠라는 작은 업체에는 이 정도 관심만 해도 만족할 만했다.

윤이영의 SNS에서 시작된 불씨는 점점 소문을 타고 퍼져 나갔다.

실시간 검색어 1위 등극.

주문 폭주.

초도물량 하루 만에 매진.

‘마마 와인’으로 전국이 들썩.

요즘 마마 와인 모르면 진정한 ‘인싸’가 아니다.

그런 대단하고 떠들썩한 열풍은 아니었다.

거센 들불이 아니라 애벌레가 이파리를 갉아먹듯 야금야금 간지러운 입소문이었다.

그리골의 와인은 마마 와인이나 멜로티 와인보다는 일단 ‘윤이영 와인’으로 대중에게 퍼져나갔다.

그런 입소문이 대중에게는 잔잔할지 몰라도, 항상 업계 관계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업계의 동향에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대중보다 한 걸음 앞서서 움직여야 했다.

대찬의 계획이 맞아떨어졌다.

몇 안 되는 직원들을 온 트레이드 영업사원으로 돌리지 않아도 되었다.

어떻게든 연락처를 기어코 알아내서 그쪽에서 먼저 문의 전화가 왔다.

“여기 가로수길에 있는 와인 바인데요. 윤이영 와인 좀 구입하고 싶은데요.”

“라벨이 다양하던데 종류별로 구입이 가능할까요?”

“재고 입고되면 저희한테 먼저 전화주실 수 있습니까? 웃돈이라도 얹어드릴 테니.”

관계자들은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왔다.

그들은 마마와 멜로티의 히트를 일찌감치 감지했다.

대중이 떠들썩하게 찾기 시작했을 때 문의 전화를 넣는다면 그때는 이미 늦는다.

철두철미한 준비성만이 고객의 발걸음을 붙들어놓을 수 있었다.

직원들은 온 트레이드 업주들의 전화응대에만 꼬박 몇 시간씩 할애해야만 했다.

다른 업무는 올 스톱 상태였다.

로튼 프룻츠는 필래 같은 대기업과 달리 직원들 숫자가 적었다.

그래서 임원회의니 확대임원회의니 같은 말을 붙일 일이 없었다.

회의는 그냥 회의.

필요에 의해서 때때로 팀별로 하는 회의가 있었지만, 정기회의에는 항상 전 직원이 참석했다.

민승기와 나란히 앉은 대찬은 직원들에게 말했다.

“요즘 종일 전화응대만 하시느라 애로사항이 많으실 겁니다.”

“…….”

직원들은 침묵으로 동의를 표했다.

“하지만 비상시국이니 수고를 감내해주십시오.”

“이해는 하는데요. 전화 받느라 다른 업무를 할 짬이 안 납니다.”

그나마 직원들 중에서 가장 나이와 경력이 많은 박 부장이 대찬에게 말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시겠죠. 그래서 오늘부터 상시 야근체제에 돌입하고자 합니다.”

“뭐라고요?”

박 부장을 비롯한 직원들의 눈이 팽팽 돌아갔다.

그런 악마 같은 소리를 대찬은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민승기가 덧붙여 말했다.

“물론 그에 합당한 수당은 제공될 겁니다. 우리 조금만 수고합시다.”

직원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상황을 그들도 이해하고 있었다.

돈을 주고 시간을 산다지만, 대찬은 직원들의 시간을 도둑질한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사과하지는 않았다.

공사는 구분되어야 한다.

사석에서는 인간적인 교류를 통해 오너와 직원사이의 친분을 돈독히 해야 한다.

하지만 공석에서 미안하다느니 조금만 봐달라느니 말을 쉽게 꺼내선 안 된다.

바람직하지 않은 게 아니라 금물이다.

회사의 모든 일은 계약과 거래다.

오너와 직원의 관계는 돈으로 맺어진 계약이다.

죄송하고 미안하다는 말은 반 푼의 값어치도 없다.

미안하면 야근수당을 충분히 지급하면 그만이다.

그래도 죄송하다면 웃돈을 얹어주면 된다.

인간적인 정리에만 호소하는 건 위험하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그런 건 회사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는 건 원금 천 냥과 거기에 딸려오는 이자 몇 냥이다.

단, 소수의 인원에게 과중한 업무가 몰리는 중과부적의 상황.

이 상황을 타개할 대책을 경영진이 구상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릴 필요는 있었다.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작업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경영진의 암묵적인 의무니까.

“커피와 사회공헌사업이 본궤도에 오른 이 시점에, 와인까지 안착하면 현재 인원으로는 죽었다 깨도 업무를 다 소화 못 하겠죠.”

“…예.”

“이번 일만 잘 풀리면 대대적으로 인력을 수급하겠습니다. 경력직과 신입을 적정비율로 채용할게요.”

직원을 새로 뽑는 건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기존의 직원들도 그걸 어렴풋하게나마 인지하고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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