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19화
스탈린과 문신 스킨헤드.
그들을 떠올린 민승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분들을 표지에 붙이면 오히려 고객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물론 그리골과 샬바를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그럼 저 같아도 사기 싫을 테니까. 무섭잖아요.”
“그럼?”
“민동철과 이라클리는 멀쑥한 지식인이고 신사였어요. 그런데 쌍놈의 새끼들이었거든요?”
“그리골과 샬바는 그 반대라는 거지.”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스탈린하고 스킨헤드가 알고 보니 참 좋은 사람이더라 이거죠. 한 글자로 줄여 말하면 ‘갭’인 거죠.”
“음.”
“남프랑스에서 소량 생산하는 말리뇨(Maligno)라는 와인이 있거든요. 그 말리뇨 와인의 껍데기에는 뭐가 있는 줄 아세요?”
“뭐가 있는데.”
“악마요. 생긴 것도 징그러워요. 근데 그게 딱 소비자의 인식에 각인이 돼서 성공을 거뒀단 말이죠.”
“악마도 되는데 스탈린이라고 안 될 것도 없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디자이너의 역량이 아주 중요하겠죠. 대중의 관심이 쏠리는 그 감성이란 게, 저나 선배처럼 메마른 아저씨들은 잘 이해를 못 하거든요.”
“메마를 거면 너 혼자 메말라.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감성이 메마른 사람들이에요. 받아들이세요.”
민승기는 꽁한 얼굴로 말했다.
“잘만 하면 게임이 될 거예요. 적어도 윤이영의 SNS에 보일락 말락 한 구석을 차지한 라벨이 눈에 잘 띄겠죠.”
“알고 보면 착한 사람들이 만드는 와인이라는 스토리텔링도 가능하고.”
“한국에서 이미지가 더러운 극동일보 덕분에 더 깨끗하고 선한 이미지를 과시할 수 있어요.”
“극동일보 좋아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어.”
“네, 근데 그분들은 주로 소주나 막걸리를 드시니까. 우리 제품을 사줄 양반들이 아니세요.”
“좋아, 그럼 일단 그렇게 틀을 잡고 가보자고.”
“아, 어디까지나 이건 제 의견이에요. 다른 직원들 의견도 충분히 들어봐야…….”
로튼 프룻츠의 사무실은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었다.
이미 두 공동대표끼리의 이러쿵저러쿵을 직원들도 다 듣고 있던 참이었다.
맹윤주가 대찬의 말을 뚝 자르고 들어왔다.
“저희는 전적으로 조 대표님의 의견에 찬성이에요.”
“맹 과장, 일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러자 진위생이 웃으면서 맹윤주의 편을 들었다.
“우리 같은 미물들이 어찌 조 대표임 탁견을 따라가겠음까? 괜히 회의해봤자 시간낭빔다.”
“아주 둘이서 죽이 척척 맞네.”
“직원들끼리 손발 척척 맞음 대표임으로서 기뻐해야 하는 거 아임까?”
“됐어요.”
대찬이 항복하자 민승기가 흐흐 웃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정해진 거다.”
“그래요, 그럼.”
두 공동대표가 속전속결로 결정을 내렸다.
작은 회사가 큰 회사에 비해 우위를 가지는 몇 안 되는 장점 중의 하나는 발 빠른 행동력이었다.
두 오너가 결정을 내리자 로튼 프룻츠 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대개의 업무는 로튼 프룻츠 담당자들의 그런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하나 불가능한 영역이 존재했다.
디자인이었다.
그건 어깨너머로 곁눈질이나 단순히 관심 있는 수준에서, 혹은 취미 수준으로 깔짝거리는 아마추어들이 넘볼 영역이 아니었다.
외주를 줄 수밖에 없었다.
디자이너를 섭외하는 건 민승기와 몇몇 직원들이 담당하기로 했다.
디자이너가 구해질 때까지 대찬은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에게도 한 가지 임무가 주어졌다.
이 아이디어의 핵심은 윤이영이었다.
로튼 프룻츠는 영세하고 미숙한 업체였다.
그런 로튼 프룻츠가 전사적 역량을 쏟아부어 봤자 윤이영 한 명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대찬은 윤이영과 둘이 있는 자리에서 말을 꺼낼 타이밍만 살피고 있었다.
둘이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던 어느 날.
윤이영과 식탁에 마주 앉은 대찬은 흠흠, 흠흠, 헛기침만 했다.
그걸 몇 차례 듣던 윤이영은 대찬의 헛기침이 들릴 때마다 흘끔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다 대찬의 세 번째 헛기침이 시작되자마자 탁,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놨다.
대찬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윤이영은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는 살짝 짜증 돋친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응? 뭐, 뭐가?”
“빨리 말해. 신경 쓰여서 밥이 안 넘어가.”
윤이영의 말에 대찬은 쑥스럽게 웃었다.
“티 났어?”
“나는 처음에 조대찬 씨가 엄청 음흉하고 표리부동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응?”
“이쯤 되니 생각보다 표정 숨기는 걸 못하는 거 같아.”
“그건 진솔한 사람이라는 뜻인가?”
“세 치 혀 놀려서 자기 멋대로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가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으시고요.”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윤이영은 찌릿 눈총을 쐈다.
“빨리 말해. 용건이 뭐야.”
“널 우리 회사를 위해 좀 이용해야겠어.”
그러자 윤이영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와인 홍보 좀 해줘. 공짜로.”
대찬의 태도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당당했다.
윤이영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대찬은 그녀가 황당함에 발언권을 잃은 틈을 타서, 차분히 계획을 설명했다.
다 들은 윤이영은 다시 젓가락을 들어 밥알을 뒤졌다.
의혹이 해소되자 그녀의 얼굴에 잠깐 어른거리던 짜증도 해소되었다.
“뭐야. 겨우 그 정도 가지고 끙끙 앓고 있었던 거야?”
“…어?”
“생각보다 담이 작네, 조대찬 씨.”
“그래도 어디까지나 우리 사익을 위해서 네 힘을 빌리려는 거니까.”
“이봐요. 당신 사익이면 내 사익이기도 해. 섭섭하게 딱 선을 긋냐.”
“하하, 그래도 부탁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조심스러우니까.”
윤이영은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면 부탁 축에도 못 들어. SNS에 티 날 듯 말 듯 사진 찍어서 올려달라는 거잖아.”
“그렇지.”
“그 정도야 아무 부담도 없다구.”
“고마워. 회사에서 디자인 마치고 새로 생산되면 바로 갖다줄게.”
“알았어. 이름도 좀 쉬운 걸로 바꾸는 게 좋겠어. 와인 이름은 어쩌고저쩌고 너무 길더라.”
고급으로 취급받는 프랑스의 혀 꼬부라지는 발음의 와인 이름.
딱히 그것보다 쉬울 것도 없는 영미권의 와인 이름.
그것들은 소주와 맥주하고 더 친한 한국 대중에게는 낯설기만 했다.
이미 나라 이름부터 생소한 조지아의 와인이 이름마저도 어렵다면, 그건 대중의 혓바닥에 닿기도 전에 외면받고 말 것이다.
아무리 내용이 훌륭한 책이라도 표지와 제목부터 버겁다면 외면받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대찬은 윤이영의 말에 동감했다.
“그런 이름이 고급스럽게 느껴지긴 하는데 그만큼 친숙하진 않지.”
“그러니까.”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거기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긴 했어. 이름도 새로 지어놨고.”
“뭔데?”
“하나는 마마, 하나는 멜로티.”
윤이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발음하기는 확실히 쉽네. 무슨 뜻이야?”
“마마(მამა)는 아빠, 멜로티(მელოტი)는 대머리. 원래는 아빠와 아들로 하려고 했는데 아들은 입에 잘 안 붙는 발음이더라구.”
“아빠 포도주, 대머리 포도주야? 웃겨.”
대찬은 피식 웃었다.
“그렇긴 하지. 뭐 엄마 파이, 할머니 보쌈 같은 거 아니겠어?”
“하긴 그것도 그렇네.”
“뜻은 좀 직관적이어도 괜찮아. 어차피 우리나라 사람한테는 뜻보다는 입에 붙는 발음이 중요하니까.”
“그래도 그 사람들이 들으면 웃기겠어.”
대찬은 씩 웃었다.
“그건 그래. 그리골도 정말 괜찮겠느냐고 여러 번 물어봤어. 특히 샬바는 나한테 총 맞고 싶냐고 그러더라.”
“아무렴. 내가 샬바였어도 그랬을 거야. 그 개성 넘치는 샬바를 그냥 대머리로 퉁 쳐버리다니.”
“그래서 당분간 조지아는 안 가려고.”
윤이영은 큭큭 웃었다.
“그래, 머리도 안 셌는데 남편 무덤에서 곡소리 내기 싫다.”
“걱정 마. 윤이영 죽기 하루 전까지 살아있을 테니까.”
윤이영은 싱겁게 웃고는 대찬에게 물었다.
“근데 기준이 뭐야? 뭐가 마마고 뭐가 멜로티야?”
“와인 맛에 따라서 라벨링을 다르게 할 생각이야.”
윤이영은 대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관심을 보였다.
대찬은 그녀의 적극적인 관심이 고마웠다.
“드라이한 와인은 멜로티, 스위트한 와인은 마마.”
“어울려.”
그리골의 푸근한 웃음은 정겨운 달콤함이고 샬바의 살벌한 인상은 그야말로 단호한 쓴맛이다.
윤이영은 퍽 잘 나눈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대찬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중저가 라인에서 가장 가격이 높은 건 ‘마마 다 멜로티’, 아빠와 대머리로 붙이려고 해.”
윤이영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괜찮은데?”
“그치. 이제 관건은 디자인이 얼마나 예쁘게 뽑히느냐야. 임팩트 없게 뽑히면 말짱 도루묵이라구.”
“잘 될 거야. 일단 밥부터 먹자고요.”
윤이영의 말에 대찬은 웃으면서 밥술을 떴다.
디자인은 그날로부터 며칠 후 완성되었다.
대찬이 어깨너머로 듣기에, 그 디자인이 완성되기까지 상당한 산고가 따랐다고 했다.
엄격한 산파는 민승기였다.
그는 디자이너로 하여금 무지막지한 출산의 고통을 감내케 했다고 했다.
민승기는 디자이너를 닦달했다고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디자이너가 두 손 두 발 다 들고 도망치기 직전까지.
민승기는 다른 직원에게 일을 맡기지 않았다.
직접 디자이너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대찬은 회사 이메일에 잔뜩 쌓인 그들 사이의 족적을 확인했다.
보자마자 혀를 내둘렀다.
메일은 ‘와인로고_시안1’로 시작했다.
이어 ‘와인로고_최종’과 ‘와인로고_최종(최종)’과 ‘와인로고_수정안’을 거쳐 ‘와인로고_최종수정안(최종)’으로 끝나 있었다.
메일을 주고받은 시간도 오전12시부터 새벽 4시, 오후 11시까지 대중없었다.
숫자만 봐도 디자이너가 감내했을 고통이 대찬에게도 절절히 전해졌다.
보통 이런 문외한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경우, 기껏 잘 만들어놓은 결과물을 도리어 망치는 일이 허다했다.
보는 안목과 만드는 기술은 디자이너가 탁월한데, 정작 결정권은 문외한인 클라이언트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민승기가 젊은 오너라는 점이 주효했다.
디자이너의 훌륭한 감각과 기술.
클라이언트의 집요한 요구.
쌍방의 속성이 좋은 방향으로 시너지를 발휘했다.
민승기는 몇 날 며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로고 제작에만 열정을 쏟아왔다.
그런 민승기는 퀭한 눈으로 대찬에게 물었다.
“어때?”
그렇게 묻는 말에는 은근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대찬은 민승기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가 말없이 그러고 있으니 민승기는 괜히 불안했다.
“왜, 별로야?”
“아뇨. 아주 좋아요. 제가 딱 원하던 느낌 그대로예요.”
“아, 다행이다. 네가 퇴짜 놓으면 어쩌지 하고 전전긍긍했어.”
“제가 뭐라고요. 이건 전적으로 선배 담당이었으니까 제가 뭐라고 주절거리든 진행시켰으면 될 일이에요.”
“그래도 와인 자체가 네 아이템인데 어떻게 그래.”
대찬은 익살스럽게 웃었다.
“그래야 망해도 선배한테 책임 옴팡 뒤집어씌웠을 테니까.”
“망할 자식. 이제 네 컨펌까지 받았으니 망하면 무조건 네 책임이야.”
“알았어요. 그래도 걱정 안 해요. 절대 안 망할 테니까.”
대찬은 민승기와 디자이너의 노동력이 잘게 갈려 들어간 로고를 바라봤다.
절로 싱글벙글 웃음이 지어졌다.
이 로고가 탄생하기까지 상당한 비용이 투입되었다.
천문학적인 비용까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대찬의 가슴이 쓰릴 정도의 문학적인 비용은 되었다.
만약 결과물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민승기와 직원들도 그랬겠지만 그들보다도 더 대찬의 사기가 바닥에 뚝 떨어져버렸을 터다.
그런 참사가 벌어지지 않은 걸 대찬은 속으로 두 번 세 번 감사히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