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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18화 (318/556)

난 할 수 있어 318화

“그런데?”

“근데 약한 벌레들은 쪽도 못 써요. 나방, 풍이 같은 애들이요. 사슴벌레도 나름 힘깨나 쓴다지만, 장수풍뎅이가 등장하면 게임 끝이에요.”

“그래? 사슴벌레나 장수풍뎅이나 비등비등할 줄 알았는데.”

“장수풍뎅이한테는 사슴벌레도 말벌도 어림없더라고요. 장수풍뎅이가 저 멀리서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면 슬슬 피하기 바빠요.”

“장수풍뎅이는 떡하니 가운데 차지하고 맘대로 수액 쪽쪽 빨아 마시고?”

“그렇죠. 나머지 애들은 손가락만 쪽쪽 빨아먹고요.”

민승기는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그래서. 극동일보가 장수풍뎅이라 이 말이야?”

“네, 사슴벌레 조대찬이 달콤한 서원웅 수액을 쪽쪽 잘 마시고 있는데 장수풍뎅이가 와서 한 번에 퉁 튕겨 나갔다구요.”

“그래도 이번에 마냥 찌그러지지는 않았잖아?”

“그렇긴 하죠. 자리 지켜내면서도 저쪽에 유효타도 먹이고.”

“그러니까 말이야.”

대찬은 흐흐 웃었다.

“가끔 사슴벌레도 장수풍뎅이 배때기에 턱을 쑤셔 넣는 케이스가 있거든요.”

“이번이 그 케이스였군.”

“그런데 매번 요행을 바랄 수만은 없을 테니까요. 장수풍뎅이 득시글거리는 수액터는 가끔 들러야겠어요.”

“그래서 필래에 쏟을 정력을 로튼 프룻츠에 더 쏟아주시겠다?”

대찬은 싱겁게 웃었다.

“참나무 수액만큼은 못하지만 사슴벌레는 썩은 과일도 좋아하거든요.”

“마인드가 썩었어.”

“갑자기 폭언을 하고 그러세요. 상처받게.”

민승기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너는 필래에서 아무리 잘나가봤자 그냥 큰 부품이야. 로튼 프룻츠에서는 주인이잖아. 여기가 네 본진이라고.”

“그럼요. 당연하죠. 로튼 프룻츠 간판도 제가 걸었는데 아무렴 애정이 없겠어요?”

“아무튼 네가 이쪽에 더 신경 써주겠다니 나야 환영이야.”

“그간 너무 소홀했잖아요. 죄책감 덜기 위해서라도 땀 좀 흘려야죠.”

민승기는 다 마신 커피를 버리고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렀다.

“다른 분야는 다 잘 굴러가고 있어. 커피야 어차피 내 전공이었으니 네 힘까지 빌릴 필요는 없고.”

“사회공헌사업도 필래 쪽에서 자금공급 원활하고 직원들도 오래 손발을 맞췄으니 별문제 없겠죠.”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힘이 제일 필요한 건 와인 쪽이야.”

“제가 물고 온 아이템이니 결자해지해야죠.”

“명분으로도 그렇지만 실력으로도 네가 우리 회사에서는 제일 나으니까. 네가 맡아주는 편이 좋아.”

“노력할게요. 물량은 잘 들어오고 있어요?”

“어. 그쪽은 걱정 안 해도 돼. 관건은 그다음이야.”

대찬은 살짝 미소를 띠었다.

“어떻게 팔 것인가?”

“그렇지.”

“혹시 염두에 둔 방법 있으세요?”

“염두에 둔 거야 있긴 하지.”

“뭔데요?”

대찬의 질문에 민승기는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비바체가 면세점도 갖고 있잖아. 면세점 통해서 팔면 어떨까.”

“면세점. 나쁘지 않죠.”

대찬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묘한 웃음을 지었다.

민승기는 그 웃음의 의미를 인지했다.

그는 겸연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이런저런 소란 때문에 부담스러울까? 비바체 쪽에 채널을 뚫기가.”

“네, 부담스러워요.”

대찬은 딱 잘라 말했다.

그렇잖아도 일개 직원 하나를 물 먹이려는 시도도 좌절당한 극동일보였다.

복수의 칼날을 숫돌에 쓱쓱 갈고 있을 게 자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와인 몇 병 수월하게 팔겠다고 빌미를 제공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여러모로 좋지 않아요. 커피도 그렇고 사회공헌사업도 그렇고 이미 우리는 필래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어요.”

“그렇지. 와인 건까지 필래에 의존하면 곤란하겠지.”

“네, 두발자전거도 충분히 탈 수 있는 실력인데 굳이 뒷바퀴에 필래까지 달아서 네발자전거로 만들 이유가 없어요.”

민승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이미 우리는 그리골의 와이너리에서 염가에 들여오고 있어요. 원가 자체가 저렴해요.”

민승기는 거듭 공감했다.

“땅 짚고 헤엄치기지. 좋아. 그럼 일단 필래 쪽 루트 뚫는 건 기각하고.”

“면세점에 입고할 만큼 물량이 충분하지도 않아요. 그리골의 와이너리가 일개 와이너리로서는 규모가 상당하지만, 결국 일개는 일개니까요.”

“네 말은 그럼 오프 트레이드보다는 온 트레이드 쪽에 주력해야 한다는 뜻이지?”

“네, 온 트레이드만으로도 충분해요.”

오프 트레이드(off trade)는 마트와 주류전문판매점 등 판매를 목적으로 유통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반대로 온 트레이드(on trade)는 와인바나 레스토랑 등 소비자가 그 자리에서 소비하는 공간에 유통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면세점이나 백화점 등에 유통채널을 개척해봤자 물량이 받쳐주지 못하면 무소용이다.

지금 로튼 프룻츠가 확보한, 그리고 앞으로 확보할 물량은 온 트레이드만으로도 충분했다.

민승기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온 트레이드에 주력하는 것도 문제가 있어.”

“네, 우리가 그 사업장들을 설득시킬 충분한 영업력이 갖춰져 있냐는 거죠.”

“그래, 그거야.”

민승기의 표정이 개운치 않았다.

조지아 와인은 생소하다.

게다가 그 와인을 수입하는 로튼 프룻츠라는 업체도 온 트레이드 업주들에게는 생소하다.

자본도 얼마 되지 않고, 업력도 짧고, 업종도 모호하다.

차라리 와인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업체면 모를까.

커피를 취급하질 않나.

사회공헌사업을 하질 않나.

심지어는 실험실에서 고기까지 만들겠단다.

뭘 좀 아는 사람들에게는 첨단산업이지만 문외한에게는 해괴한 연구일 뿐이었다.

업주들에게 어필할 구석이 하나도 없다.

오프 트레이드 방면으로는 로튼 프룻츠가 시도해볼 만한 방법이 많았다.

대형할인점이나 백화점, 면세점은 실험 삼아 독특한 조지아 와인을 선택할 여지가 있었다.

그들은 자본력이 충분하다.

어린아이 장난이나 위험한 실험이라도 승산이 있으면 시도해볼 만한 여건이 되었다.

그쪽 채널만 뚫어놓으면 여타의 골칫거리들도 만사 오케이다.

시음회 같은 프로모션을 대행해줄 것이다.

일일이 영세사업자들을 상대할 것도 없다.

마트나 백화점에 알아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선보이면 그만인 일이다.

그렇기에 민승기도 온 트레이드보다는 오프 트레이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너도 온 트레이드 시장을 뚫으려면 가시밭길 걸어야 한다는 거 잘 알고 있을 거야.”

“알고 있어요.”

“정면 돌파만이 능사가 아니야. 우리 몫을 조금 떼이더라도 오프 트레이드로 가는 게 편한 길이야.”

“온 트레이드로 가도 충분히 가능해요.”

“뭐?”

“아니, 오히려 오프 트레이드보다 수월할지도 모르겠어요.”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이야?”

“일단 투 트랙으로 가죠.”

“투 트랙이라니.”

“그리골의 와이너리에서 들여오는 와인을 두 부류로 나누자구요. 고가 라인과 중저가 라인.”

“그래서?”

“고가 라인은 걱정할 게 없어요. 희소성 충분하고 질도 충분합니다.”

민승기는 대찬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해. 오만 곳의 와인을 다 취급하는 고급 와인 바나 호텔 레스토랑에도 조지아 와인은 없거든. 거기다가 이 정도 질은 더더욱.”

“네, 그래서 고가 라인은 문제가 없어요.”

“문제는 중저가지. 물량도 여기가 훨씬 많고 단가는 낮지만 총액으로 따지면 이쪽이 오히려 주력이야.”

“알아요. 이름 없는 우리 회사가 인 트레이드로 생소한 조지아 중저가 와인을 팔아치운다. 어려운 일이죠.”

“그래, 거기에 대한 확실한 대책이 서야 돼.”

“방법이 있어요.”

“뭐야. 얼른 말해.”

대찬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정공법은 아니고 꼼수에 가깝긴 한데 우리가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니까.”

“꼼수라니.”

“제 사적인맥을 이용하면 돼요.”

대찬의 말에 민승기는 감을 잡았다.

“너, 혹시 윤이영 씨 말하는 거냐?”

“네.”

“광고모델로 기용이라도 하자는 거야?”

대찬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문제가 복잡해지잖아요. 그 경우에는 이영이가 오케이 해도 왈라비 쪽에서 한 푼이라도 더 뜯으려고 들걸요.”

“내 말이. 그럼 어쩌자는 거야?”

“광고모델 전면에 내세우는 건 요즘 세상에 좀 촌스러워요. 선배, SNS 하시죠.”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하지.”

“가끔 그런 사람들 있지 않아요? 뮤지컬 보러 간다고 티켓 찍는데 벤츠 로고 딱 새겨진 운전대랑 같이 찍는다든지.”

“응, 강아지 예쁘다면서 옆에 명품백 두고 같이 찍는다든지.”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에는 은근히 자랑하는 수단이었지만 요즘은 그렇게 하면 코웃음만 유발하잖아요.”

“노골적이어도 너무 노골적이지.”

“그러니까요. 마케팅도 비슷하잖아요. 내세우는 게 아니라 감추고 감출수록 광고가 되니까.”

“그래서?”

“이영이가 SNS를 즐겨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 이용해요. 팬들한테 근황이나 안부를 전하려고.”

민승기는 대찬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대찬은 말을 이었다.

“그럴 때 정말 사진 한 구석에 우리가 광고하려는 와인을 비치하는 거예요. 은근하게. 거의 감춘 듯이.”

“근데 그것도 벤츠나 명품백 쯤은 돼야 티가 나는 거야.”

대찬은 웃으며 민승기의 말에 동감했다.

“그렇죠.”

대찬은 뚜벅뚜벅 사무실을 걸어가, 샘플로 진열장에 비치된 와인 한 병을 꺼내 들었다.

그는 와인병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말했다.

“그리골이 포도 농사 잘 짓고 와인도 잘 만드는데 디자인은 영 꽝이에요, 그렇죠?”

“뭐, 따지자면 이 동네 와인이면 포천 이동막걸리나 정선 옥수수막걸리 같은 거 아니겠어?”

대찬은 피식 웃었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맛만 좋으면 되지 디자인까지 신경 쓰는 경우는 드물어요.”

“고가 라인은 그래도 제법 품을 좀 들이긴 했지만 중저가 라인은 솔직히 말하면 볼품없지.”

“맞아요. 이걸 윤이영 SNS에 노출시켜봤자 윤이영이 취미로 공병 줍고 다니냐는 소문만 날 거예요.”

대찬의 싱거운 농담에 민승기도 싱겁게 웃기만 했다.

“그래, 진찰 다 했으면 처방전 좀 써봐.”

“일단 샘플로 들어온 중저가라인 물량부터 처리해야 해요.”

“갖다 버릴 순 없잖아.”

대찬은 가볍게 진저리쳤다.

“갖다버린 걸 그리골이 알기라도 하면 샬바의 사냥총이 제 이마를 꿰뚫을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할까.”

“전문가들은 그래도 디자인보다는 맛에 신경 쓰겠죠.”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럼 전문가들 초청한 시음회에 사용하도록 하죠.”

“그러고도 남는 건?”

“남는 건 우리끼리 회식할 때 쓰고, 그러고도 남으면 코코뱅이나 만들어 먹자고요.”

“그럼 디자이너부터 구해야겠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골한테는 제가 연락 넣을게요. 디자이너는 비싼 사람으로 구해주세요. 모자라면 사비 보탤 테니까.”

“알았어. 눈알 튀어나올 정도로 비싼 디자이너 써주지.”

“그렇다고 파산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민승기는 탁자에 삐딱하게 기대며 말했다.

“근데 로고 디자인을 아무 가이드라인도 없이 디자이너한테 일임할 거야?”

“아뇨, 그건 서로 안 좋아요. 제가 구상해둔 게 있긴 한데. 제 의견 말고 다른 직원들 의견도 수렴해서 가이드라인은 이쪽에서 결정해요.”

“구상해둔 게 뭐야?”

“거창한 건 아니고요. 이런 로고에도 소소하지만 분명한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있으면 좋지. 단, 그게 억지스러워서는 안 돼.”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억지스러울 일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스토리가 실화에 기반을 둔 거니까.”

“실화?”

“네, 우리 대한민국 최고 언론인 극동일보가 끼어 들어준 덕분에 대중한테도 익숙하게 됐죠.”

민승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민동철하고 이라클리의 짬짜미를 써먹을 생각이야?”

“말씀드렸잖아요. 은근해야 한다고. 감춰야 한다고.”

민승기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하도 얘기 많이 들었더니 머리 아프다. 쉽게 좀 말해.”

“민동철, 이라클리 그 자식들이 뭐 예쁘다고 로고에까지 새겨주겠어요.”

“내 말이.”

“대신 살짝 결을 바꿔서, 그리골과 샬바를 전면에 내세우려고 해요.”

민승기도 그리골과 샬바의 사진을 대찬을 통해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인상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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