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17화
옥문영 상무가 서원웅에게 말했다.
“저희가 더 드릴 말씀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대표님 결단만 남았어요.”
그 이후로 누구도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이제 결정은 오롯이 서원웅의 것이었다.
그는 대찬의 눈만 지그시 바라봤다.
대찬은 수더분한 얼굴로 그 눈빛을 받았다.
서원웅은 옥문영 상무가 내민 서류뭉치를 꽉 잡았다.
“조대찬 부장에 대한 징계위원회 설치의 건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좋은 결정이십니다.”
옥문영 상무는 도진석 전무를 바라보며 씩씩하게 웃었다.
오윤 전무도 한시름 놓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석 전무는 마뜩잖다는 표정.
대찬의 기색에는 변화가 없었다.
서원웅은 잠깐 호흡하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노조의 과격 행동이나 직원들의 요구에 의한 결정이 아닙니다. 대표의 자체 판단임을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다.
서원웅의 말을 대찬을 포함한 임원들은 모두 이해했다.
체면이 중요한 자리였다.
서원웅은 옥문영 상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옥 상무님은 이런 결정을 충분히 직원들에게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서원웅은 고개를 도진석 전무 쪽으로 돌렸다.
“도 전무님 역시 이 일에 대해 더 이상의 발언은 자제해주시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조 부장.”
“네, 대표님.”
서원웅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이 이상 이 문제가 불거지는 걸 원치 않아요. 극동일보에 대립각을 세우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먼저 대립각을 세우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혹여 저쪽에서 먼저 찔러 와도…….”
“찔리면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
서원웅은 지끈지끈 두통이 올라와 이마를 매만지고 힘없이 말했다.
“회의는 이쯤 하죠.”
임원들은 우르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대찬은 서원웅이 무슨 말을 따로 더 할까 싶어서 부러 천천히 일어났다.
그런데 서원웅은 대찬을 따로 부르지 않았다.
대찬은 찝찝한 기분을 안은 채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런 대찬을 흘끗 보던 도진석 전무는 대표실로 향하는 서원웅의 뒤에 따라붙었다.
“대표님.”
“네, 전무님.”
서원웅은 걷는 속도를 늦추지 않으며 대답했다.
도진석 전무는 딱 서원웅의 반 발 뒤를 따르며 말했다.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글, 그리고 노조의 돌출행동까지. 구린내가 진동하지 않습니까.”
“에두르지 말고 말씀하시죠.”
“조대찬 부장이 뒤에서 공작을 벌인 게 분명합니다.”
“우리 직원들이 고작 부장 하나 구명하겠답시고 발 벗고 나섰다고요? 사람은 이기적인 존잽니다. 어떻게 그러겠어요.”
“그게 다 조 부장이 의도한 일이란 뜻입니까?”
“합리적인 추측이죠.”
“못 들은 걸로 하죠.”
서원웅은 딱 잘라 말하고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
도진석 전무는 대표실의 닫힌 문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돌아섰다.
‘방금 흔들렸지, 눈빛.’
그는 피식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대표의 결정이 떨어지니 회사의 여론은 잦아들었다.
노조의 돌출행동에 극동일보는 알러지 반응을 보였다.
점잖은 말을 써야 하는 칼럼보다는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말을 써도 괜찮은 사설을 통해 노조를 공격했다.
-필래 노조의 ‘억측 난동’, 제정신인가?
-불지도 않은 치맛바람에 경기 일으키는 노조
-노조의 ‘폭력성’ 또다시 입증한 하루
이런 적극적인 반박은 도리어 극동일보의 보폭을 제한했다.
서원웅에게도 징계를 멈출 명분을 제공해주었다.
그의 결정에 홍승연은 당연히 격렬히 항의했다.
“당신, 진짜 나한테 이럴 거예요? 징계 하나 재량껏 못 내려요?”
“그만합시다.”
“그만하자고 징계 내리라 한 거 아니에요. 대충 상처 꿰매라고 했더니 왜 가만 놔둬서 곪아 터지게 하냐구요!”
서원웅은 싸늘한 눈빛을 홍승연에게 보냈다.
“그만하자고 했어요.”
“자꾸 막무가내로 나가는데, 그러니까 지금 이건…….”
홍승연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서원웅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하라고!”
고분고분하고 수더분하기만 하던 남편의 고함에 홍승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서원웅은 짜증이 가득 사무친 눈빛을 한번 뿌리고 서재로 들어갔다.
쾅!
문을 닫을 때 나는 큰소리는 그의 심정을 노골적으로 알렸다.
홍승연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서원웅은 서재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굴욕적이었다.
처가의 입김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스스로가 굴욕적이었다.
불특정 다수의 직원들이 대찬을 향해 무한한 지지를 보내면서 자신에게 뜻을 꺾어라 강권하는 것도 굴욕적이었다.
자신에게는 콧방귀만 뀌면서 대찬을 위해서는 경찰에 연행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노조의 태도도 굴욕적이었다.
처가는 죽마고우를 핍박하라 끝없는 히스테리를 부린다.
죽마고우는 처가의 압박에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노라 강경한 태도를 유지한다.
임직원은 그런 죽마고우를 지지하고, 대표에게 달콤한 말을 하는 작자는 속이 시커멓다.
서원웅은 서재 위에 놓인 양주병을 바라봤다.
반쯤 남은 그걸 서원웅은 간밤에 다 마시고 취해버렸다.
상황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겉으로는 다시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누구의 마음도 개운해지지 못한 채, 모두의 마음에 앙금을 남겼다.
대찬의 기분이라고 편하지만은 않았다.
구제역이나 콜레라가 돌아 무더기로 가축을 가매장하면 잠깐은 감쪽같이 은폐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썩은 내가 나고 오염된 침출수가 배어 나온다.
급히 수습된 이 상황이 언제 썩은 내가 풍기고 오염된 물이 흐를지 알 수 없었다.
대찬은 꿉꿉한 생각은 관두기로 했다.
대신 자신을 위해 크고 작은 성의를 보여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는 언사이티드 게시판에 짧은 글을 올렸다.
-조대찬 부장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일개 부장을 위해 힘을 모아주셨습니다.
다시는 이런 부끄러운 일이 없도록 더욱 스스로를 단속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목소리에 기꺼이 귀를 기울여주신 서원웅 대표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여러분의 권익을 보호하고 회사의 이익창출을 위해 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조 부장님 힘내세요~
└극동일보가 또 괴롭히면 우리가 혼내줄게요. 대신 대표님한테 저희 월급 좀 올려달라고 해주세요.
└서원웅 대표 또 정신 못 차리고 이상한 짓 하면 저희가 뚝배기 깨러 가겠습니다.
└그런 말은 조 부장님한테 오히려 민폐예요.
└ㅇㅇ 맞음. 서 대표님도 칭찬합니다~
└우리는 됐고 옥 상무님한테 술이나 거하게 한번 사드리세요.
대찬은 박원국 노조위원장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괜히 면 대 면으로 접선했다가는 극동일보 레이더망에 걸려 쓸데없는 공격의 여지만 남길 터였다.
“위원장님,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따로 감사하고 그럴 거 없어요. 우리도 호시탐탐 건수만 노리고 있었다니까. 극동일보한테 화풀이할 건수.”
“그래도 다음부터는 몸조심하세요. 극동일보가 어디 보통내기던가요.”
“그럼 뭐 우리는 보통내긴 줄 알아? 우리 걱정은 하덜 말고 조 부장 본인 몸이나 잘 간수해.”
박원국 위원장의 호의 섞인 질책에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완전히 잠잠해지면 식사 한번 대접하겠습니다.”
“아, 그거야 좋지. 똥 무더기에도 한 떨기 장미는 피는 법이니까, 이번 일이 불미스럽긴 해도 비바체 노사가 가까워지는 계기로 삼자고.”
“좋은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분위기가 잠잠해지자 허운이 쭈뼛거리며 대찬에게 고백했다.
“부장님, 부장님, 우리 부장님.”
“왜요, 우리 허 과장님.”
허운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사과하려고요.”
“무슨 사과?”
“그, 맨 처음에 언사이티드에 올라왔던 글 있잖아요.”
그 말에 대찬은 눈빛을 벼렸다.
“뭐야, 당신이 썼어?”
“아니, 내가 쓴 건 아닌데… 하도 답답해서 장 과장이랑 술 마시면서 말했더니 장 과장이 글을 떡 올려버린 거 있죠.”
대찬의 언성이 버럭 높아졌다.
“그게 당신이 쓴 거랑 뭐가 달라! 손가락만 장 과장 손가락이지!”
“소리 지르지 마. 무서워.”
대찬은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쉬었다.
“암튼 일 키우는 데는 허운이 1등이다, 1등이야.”
“죄송해요. 다음부턴 아갈통에 자물통 단단히 채우고 안 나댈 테니까.”
대찬은 황당하다는 듯 허운을 빤히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허운은 대찬의 눈치를 살폈다.
대찬은 허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그래도 고맙네.”
“고, 고맙다니……?”
“우리 허 과장님 덕에 그래도 이 회사 사람들이 날 좋아해 준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하, 하하… 좋다, 긍정적인 마인드.”
“그리고 의도하진 않았지만 이 일로 극동일보도 나를 쉽게 못 건드리게 됐어.”
허운은 여전히 대찬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면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맘대로 헤집어도 좋을 상대가 아니란 걸 그쪽도 알았을 거야.”
허운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 직원들이 연판장 돌리고 노조가 나서서 계란까지 던져 줄지는 몰랐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과분하게도.”
“그런 존재를 건드리기는 아무리 극동이라도 껄끄럽죠. 약간 이게 산토끼 같은.”
“나 토끼 아니거든요?”
허운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고요.”
“그럼?”
“들판 뛰어다니는 산토끼 잡기는 무진장 어려운데 잡아봤자 고기가 별로 없잖아요.”
“응.”
“그런 셈이라고요, 팀장님이.”
대찬은 잠깐 묵묵히 곱씹다가 허운에게 물었다.
“그거 지금 칭찬이죠?”
“뭐 굳이 따지면, 네.”
대찬은 싱겁게 웃으며 허운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 원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알지?”
“…그, 그러믄입죠.”
“다음부터는 이런 일 있으면 제발 좀 나한테 바로바로 귀띔해줍시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대찬은 흐흐 웃으며 허운의 등을 탁탁 두드렸다.
대찬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속 깊은 곳에 애써 감춰둔 불안감은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했다.
벌레가 잔뜩 꼬여 꿈틀거리는 듯했다.
역하고 불쾌했다.
그런 불안감을 깨끗이 씻을 도리는 없었다.
완전히 해결하지 못할 불안감이라면 최대한 잊기라도 하자.
그게 대찬의 결론이었다.
무언가를 잊으려면 또 다른 무언가에 집중하면 된다.
직장인이 집중할 만한 것이 일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대찬은 그렇잖아도 워커홀릭 소리를 듣는 판에 더 일에 열중했다.
마침 그는 필래 비바체와 로튼 프룻츠 두 개의 명함을 갖고 있었다.
업무에 집중하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환경이었다.
대찬은 그간 소홀히 했던 로튼 프룻츠를 챙겼다.
필래 비바체 사무실의 업무를 마치고 꼬박꼬박 로튼 프룻츠에 늦은 출근도장을 찍었다.
로튼 프룻츠 직원들은 그런 대찬을 석간신문이라고 불렀다.
자신들은 아침마다 꼬박꼬박 출근하는 조간이고 대찬은 저녁에 그렇게 해서 석간이었다.
민승기는 그런 대찬을 보고 웃었다.
“뭐야?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자주 얼굴을 비출까?”
“와인 건은 아무래도 제가 시작한 건이니까요. 책임을 져야죠.”
“그런 수준이 아닌데? 거의 병적으로 사무실을 드나들잖아.”
대찬은 피식 웃으며 민승기를 바라봤다.
“왜요, 그래서 싫으세요?”
“누가 싫대?”
대찬은 커피를 홀짝이며 그에게 말했다.
“이번에 한바탕 소란을 겪고 나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무슨 생각?”
“권력에 너무 가까이 붙어있어도 골치 아프다고요. 원웅이가 후계자로 지목되자마자 이래저래 일이 많이 터지네요.”
“일이야 원래 많이 터졌지만 확실히 스케일이 커지긴 했지.”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요. 혹시 밤중에 산에 가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 갑자기 그건 왜.”
“밤중에 산에 가보면 달콤한 수액 고여 있는 곳에 벌레들이 잔뜩 있거든요. 수액 빨아먹으려고.”
민승기는 옅은 웃음을 머금으며 대찬의 말을 경청할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