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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16화 (316/556)

난 할 수 있어 316화

화면 속 박원국 위원장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극동일보 사옥을 향해 외쳤다.

“극동일보는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필래 비바체 인사에 개입하는가! 부당 인사개입 즉각 중단하라!”

“중단하라! 중단하라!”

“극동일보 기자들도 모자라 필래 비바체 직원들까지 홍씨 일가의 사노비로 전락할 수는 없다! 극동일보의 안하무인 내정간섭, 규탄한다!”

“규탄한다! 규탄한다!”

귀를 찌르는 소리에 대찬은 저도 모르게 한쪽 귀의 이어폰을 뺐다.

대찬은 어리둥절했다.

돌아가는 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화면 속의 노조원은 박원국 위원장을 포함해 종잡아 열댓은 되었다.

개중 몇몇은 대찬과 안면이 있는 노조 간부들이었다.

그들은 박원국 위원장의 목소리에 뒤지지 않는 고성으로 열렬히 호응했다.

그들이 목이 터져라 외치던 와중, 간부 한 명이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어! 저기! 홍 사장 차다!”

간부의 외침에 노조원들의 시선이 일순 그쪽으로 쏠렸다.

흡사 다리 다친 사슴을 발견한 코모도왕도마뱀처럼 그들의 고개가 동시에 그쪽을 향했다.

극동일보의 운전기사는 자주 갈렸다.

홍씨 일가의 성질머리를 오랫동안 견디려면 평소에 주변으로부터 생불 소리 정도는 들어줘야 했다.

그런 이는 많지 않았다.

1분이 멀다 하고 쏟아지는 폭언을 버티지 못해 나가떨어지기가 일쑤.

오늘 홍구완 사장의 차를 모는 기사도 그래서 새것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었다.

아마 관록 있는 기사였다면 사옥 앞이 사람들로 웅성거리는 걸 보고 다른 판단을 내렸을 터.

요령 있게 홍구완 사장을 사옥 뒷문에 내려줬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어어, 하다가 평소처럼 극동일보 사옥 정문 앞에 차를 세웠다.

홍구완 사장의 험악한 소리가 뒤에서 쏟아졌다.

“야, 이 병신 같은 새끼야! 여기에 세우면 어떡해!”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홍구완 사장의 검은색 자동차가 광분한 노조원들에게 둘러싸였다.

신참 운전기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죄송합니다만 염불처럼 외웠다.

대찬은 그 장면을 한 박자 느린 촬영본으로 보고 있었다.

필래 비바체 노조원들은 홍구완 사장의 자동차를 사방에서 두드리며 박자에 맞춰 외쳤다.

“홍구완! 나와라! 홍구완! 나와라!”

그러나 홍구완 사장은 철두철미한 선팅 뒤에 잠자코 숨어만 있었다.

영상은 거기까지였다.

넋 놓고 영상을 보던 대찬은 열차가 잠실역에 도착한 걸 보고 부리나케 내렸다.

대찬은 종종걸음으로 사무실을 향하면서도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어지는 영상은 뉴스 생방송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제법 시간의 간극이 컸는데도, 여전히 홍구완 사장은 차량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찬이 사무실에 들어오자 직원들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네, 좋은 아침이라고는 못하겠죠?”

대찬의 말뜻을 직원들도 알고 있었다.

대찬은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리모컨을 들어서 TV부터 켰다.

화면은 대찬이 보던 구도 그대로였다.

홍구완 사장의 자동차와 그를 포위한 노조원들.

사장이 나오지 않자 노조원들은 준비한 달걀을 자동차를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퍽, 퍽, 퍽.

날아간 달걀이 그대로 검은색 자동차에 부딪혀 줄줄 흘렀다.

그들은 잔뜩 감정을 담아서, 혼신의 힘을 다해 달걀을 투척했다.

그러면서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극동일보는 필래 비바체 인사에 손을 떼라!”

“너네 회사나 잘 챙겨!”

“딸내미 가정교육이나 잘 시켜라!”

“네 딸 도둑질이나 반성해라!”

준비한 달걀을 모두 소진하고 나서야 극동일보 측의 신고를 받은 경찰들이 부랴부랴 출동했다.

대찬은 떨떠름한 얼굴로 한태윤 차장을 돌아봤다.

“노조 분들 왜 저러신데요……?”

“저분들은 지금 신났어요.”

“신나다뇨.”

한태윤 차장은 대찬처럼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저 끓는 피를 어떻게 참아 오셨겠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한태윤 차장은 전보다 더 편한 웃음을 지었다.

“비바체로 들어간 이후에, 솔직히 노사 갈등이 단 한 건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죠. 생각해보니 파업도 길게 간 경우가 없었네요.”

“으레 하는 파업에 들어가도 필수인력까지 철수하는 경우는 없었으니까.”

“네.”

“뭐든 관성이란 게 있기 마련이잖습니까. 다른 노동자들이야 태평성대가 반갑기만 하겠지만 투쟁으로 살아온 양반들은 좋으면서도 아무래도 좀이 쑤시겠죠.”

“그럼 저분들 입장으로는 건수 잡았다, 이겁니까?”

한태윤 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래유통 산하에서 파업에 돌입했을 때 극동일보가 좀 극성맞게 굴었어야죠. 저분들 일거수일투족 털어가면서 성화를 부렸잖아요.”

“하기야 저분들도 쌓인 게 많기야 하겠죠…….”

“저분들의 행동이 부장님 신변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겠습니다만, 최소한 부채의식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한태윤 차장은 대찬의 등을 가볍게 쓸었다.

회사 동료가 아니라 나이 몇 살 더 먹은 인생 선배로서의 손길이었다.

물론 생물학적으로는 그렇지만 회귀한 대찬의 입장에서는 인생선배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대찬은 한태윤 차장의 위로 아닌 위로가 고마웠다.

그러면서도 홍구완 사장의 자동차에 계란 세례를 퍼붓는 노조원들이 걱정되었다.

극동일보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은 노조원들을 신속히 연행했다.

노조원들은 그들에게 끌려가면서도 끝까지 외쳤다.

“자식 교육이나 똑바로 해라!”

“필래 비바체는 극동일보 치맛바람에 아니 흔들릴쌔!”

* * *

대찬은 그들의 절규를 등진 채로 확대임원회의에 참석했다.

으레 있는 회의의 분위기는 예사롭지 않게 착 가라앉아 있었다.

가장 상석에 앉은 서원웅부터, 도진석 전무, 오윤 전무, 옥문영 상무까지.

모든 임원들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그들은 내놓고 쳐다보진 않았지만 은근히 대찬 쪽으로 더듬이를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대찬은 최대한 평정을 유지했다.

회의실에 비치된 TV에서는 뉴스 생방송이 음소거 된 채 화면만 나오고 있었다.

경찰에 끌려가는 노조원들의 모습과 날계란으로 범벅 된 검은 자동차를 뉴스는 연거푸 교차해서 내보냈다.

가장 먼저 서원웅이 입술을 뗐다.

대찬과 TV 화면을 번갈아 보던 임원들의 시선이 서원웅 쪽으로 고정되었다.

“어… 여기 참석하신 분들은 모두 지금 가장 시급한 이슈가 뭔지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

“대표로서, 그리고 극동일보를 처가로 둔 입장으로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

“극동일보의 인사개입이 있었는지에 대한 여부는 확인해줄 수 없습니다.”

“…….”

“다만, 회사 구성원들로부터 극동일보의 인사개입 정황이 강력히 의심받고, 오늘은 노조의 돌출행동까지 발생했습니다.”

서원웅의 얼굴은 한 글자를 발음할 때마다 체온이 1도씩 올라가는 듯, 서서히 벌겋게 달아올랐다.

“책임소재를 따지기에 앞서, 이는 결코 회사에 유익한 일은 아닐 겁니다.”

“…….”

“누구에게 잘잘못이 있는지 따지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걸 제하고, 우리가 어떤 스탠스를 취하면 좋을지 허심탄회하게 말씀해보십시오.”

서원웅의 말이 끝나자마자 옥문영 상무가 입술을 떼려고 했다.

그런데 도진석 전무가 선수를 쳤다.

“대표님, 책임소재를 따지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렇게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도 전무님.”

“상황이 이 지경이 되도록 조 부장은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직무유기예요. 지금 이 시각에도 회사 이미지, 그리고 대표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 말씀하시죠.”

도진석 전무는 서원웅의 주문을 따르지 않았다.

“이건 심대한 해사행위입니다. 잠자코 있는 것만으로도 징계감이에요.”

“전무님.”

“알겠습니다. 그만하죠.”

도진석 전무는 할 말을 다 해놓고 그만하겠다고 했다.

그는 말을 마치면서 흘끗 대찬의 기색을 살폈다.

대찬은 개 짖는 소리 들을 때와 마찬가지의 얼굴만 하고 있었다.

‘건방진 새끼.’

도진석 전무는 콧잔등을 씰룩이면서 시선을 거두었다.

다음으로 옥문영 상무가 말했다.

“대표님, 사내 여론이 확실히 들끓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서원웅의 앞에 서류 한 뭉텅이를 내밀었다.

서원웅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다 뭡니까?”

“조대찬 부장의 징계를 반대하는 직원들의 서명입니다.”

그러자 도진석 전무가 먼저 반응했다.

“이걸 왜 옥 상무가 갖고 있어, 엉? 말리지는 못할망정 직원들 선동하고 들쑤시고 다닌 거 아니야?”

“말씀 가려 하시죠. 저는 직원들의 의견을 수렴했을 뿐입니다.”

도진석 전무는 코웃음을 쳤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구만.”

“비아냥거리지 마십시오.”

“비아냥이라니?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도 전무님!”

옥문영 상무의 목소리가 커지자, 오윤 전무가 나서서 말했다.

“감정싸움으로 비화돼봤자 아무런 실익이 없습니다. 두 분 모두 자중하시죠.”

옥문영 상무는 얕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노조 활동에 심드렁한 직원들까지 나서서 조 부장의 징계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극동일보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고요. 대표님이 이 목소리를 저버리셔서는 안 됩니다.”

“…….”

“징계를 강행하시면 도리어 대표님의 이미지가 크게 손상 받을 겁니다.”

서원웅은 옥문영 상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오윤 전무에게 물었다.

“오 전무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도 옥 상무 의견에 동의합니다. 이번 징계 건은 사실 여부를 떠나 극동일보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게 기정사실화됐습니다.”

“그렇죠.”

“만약 강행한다면 대표님 리더십이 크게 흔들릴 겁니다.”

그러자 도진석 전무가 오윤 전무를 상대로도 따가운 말을 쏟았다.

“오 전무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조나 일부 직원들 징징거리는 목소리에 일일이 반응하는 게 도리어 리더십에 악영향을 끼칠 겁니다.”

“별로 동감하기는 힘든 의견이네요, 도 전무님.”

“자고로 리더는 스트롱맨 기질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이걸 인정 안 하시면 저도 오 전무님이랑 무슨 얘기를 더 하겠습니까.”

이렇듯 임원들이 한 마디씩 보태는 와중에 대찬의 입술은 살아있는 조개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서원웅은 대찬을 건너다보며 물었다.

“조 부장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제야 대찬은 서원웅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일은 제가 감수하고 가려고 했습니다만.”

“했습니다만.”

“이미 일이 이렇게 됐으니 대표님께서도 결단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양자택일이요.”

“조 부장은 어느 쪽이 좋은 거 같아.”

“바깥의 목소리보다는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걸 권하겠습니다.”

극동일보에 맞서 노조와 직원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택하라는 뜻이었다.

그 말에 도진석 전무가 먼저 반응했다.

“조 부장! 무슨 말이 그래? 일말의 죄책감도 없나?”

“제가 무슨 죄책감을 느껴야 합니까?”

대찬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도진석 전무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저 새끼는 꼭 내 말에만 사납지.’

그는 대찬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자네 하나 때문에 회사가 이게 무슨 꼴이냔 말이야.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 오르내리고, 노조가 깽판 치고, 이제는 일반 직원들까지 엉덩이 들썩들썩해대고 말이야!”

“그걸 제 과실이라고 생각하시면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럼 자네 과실이 아니란 말이야? 정직 중에 외유성 휴가 떠난 걸로 모자라서 개인 영리활동까지 해놓고?”

대찬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속사정을 모르지 않으실 겁니다. 정말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뻔뻔하긴!”

대찬은 서원웅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표님도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서원웅이 즉답을 내놓지 않자 도진석 전무의 기세가 살았다.

“대표님도 마냥 싸고 도실 일이 아닙니다. 꾸짖을 일은 꾸짖으셔야 해요.”

“잘잘못 따지지 말자고 이미 여러 차례 얘기했습니다. 그만들 하시죠.”

“…….”

대찬은 서원웅의 개운하지 않은 대답에 책상 아래에 있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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