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15화
대찬은 자리로 가서 한동안 액정에 시선을 두었다.
-극동일보가 뭔데 맘대로 회사 경영에 간섭하는 거죠?
-이건 내정간섭이나 다름없음. 가만히 있으면 호구 되는 거임.
-와 지가 조지아에서 깽판 쳐놓고 누구한테 화풀이하는 거임? ㅋㅋㅋ 진짜 어이없다.
-홍x연하고 얽히고부터 좋은 일이 하나도 없네 ㅋㅋㅋ 대표한테 미안하긴 한데 빠른 이혼 좀.
-이 글 보고 열 받아서 치킨 시키고 맥주 피쳐 사 옴. 극동일보 진짜 미친 거 아닌가?
└그냥 사우님이 먹고 싶어서 시킨 거 아니고요?
-여기가 조대찬 부장 팬클럽인가요? 부장 하나 징계 먹는 거 가지고 유난들은;
└조 부장이 그냥 부장인가. 솔직히 조 부장 없었으면 우리 여기에 취직도 못 했음.
└글쓴이 : 다른 데 했겠지ㅋ
└왜 부장 하나 징계 먹는 거 가지고 사우들이 유난 떠는지 잘 생각해보세요.
└글쓴이 : 모르겠는데요?
└그럼 옆자리 사수한테 물어보세요. 아마 친절하게 알려줄 겁니다.
└글쓴이 : 싫은데요?
└말본새가 왜 그러지. 사우님, 머리가 나쁘면 싸가지라도 좋아야죠.
└글쓴이 : 승질 드럽네ㅋ 혹시 조 부장 본인 아님?
└아 진짜 열 받게 하네. 너 수유점으로 와라. 옥수수 털어서 정신교육 똑바로 해줄 테니까.
└글쓴이 : 뭐야. 마트 점포 다니는 주제에 시비 턴 거임?ㅋㅋ 나는 본사 직원인데? 점장이라도 되나 봄?
└그래, 수유점 표성재 점장이다. 010-XXXX-XXXX. 전화해라.
대찬은 이마를 탁 짚었다.
“이상한 데서 에너지 낭비하고 있어, 표 점장.”
자기를 열정적으로 비호하는 모습이 고마우면서도 안쓰러워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찬은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면서 다른 게시물을 읽었다.
-근데 조 부장 징계 건 팩트이긴 한가요? 헛소문 아닌가.
└저 인사팀 소속인데 곧 징계위원회 열리기로 돼 있어요.
└진짜임?
└ㅇㅇ. 극동일보가 압력 넣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징계위원회 열리는 건 팩트예요.
└진짜 징계 먹인다고요? 미쳤네.
└서 대표가 굳이 나서서 조 부장 징계 먹일 리는 없고, 극동이 개입한 게 정황상 100%인 듯.
└조지아 와인 건으로 개빡친 듯.
이제 논의는 단순한 극동일보의 성토에서 구체적인 행동을 토의하는 것으로 옮겨졌다.
-누구 총대 멜 사람 없어요? 서명 같은 집단행동 정도면 동참할 의사 있는데.
└그러다가 해코지당하면 어떡해요?
└솔직히 대표도 직원들이 나서주길 바랄걸요? 서 대표도 조 부장이 징계 받는 거 원치 않을 텐데.
└글쓴이가 총대 메세요.
└글쓴이 : 그 정도까지 하고 싶진 않아서 ㅎ
└솔직히 저도 누가 총대 안 메는 이상 나서긴 힘들 듯…….
대찬은 거기까지만 읽고 오다혜에게 휴대전화를 넘겨주었다.
“나만 조용히 징계 받으면 끝나는 일인데, 회사 전체가 나서서 푸닥거리하게 생겼네.”
“솔직히 기분 좋으시죠?”
오다혜가 배시시 웃으며 묻자 대찬은 어정쩡한 웃음을 지었다.
“이건 기분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냥 따끔하게 한 번 찔리고 끝날 거, 폭탄 떠안은 것 같다니까.”
“그래도 이 팍팍한 직장에서 얼굴이나 한 번 봤을 사람들이 나서서 팀장님 응원해주잖아요.”
“…그래요. 그건 고맙긴 한데.”
대찬의 웃음은 여전히 어정쩡했다.
저간의 사정을 알고 나니 시선이 달리 느껴졌다.
대찬은 자신을 향하던 시선들이 쉬쉬하고 꺼리는 것이 아니라, 실은 소심하게 응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기에 출근길에 느끼는 시선과 퇴근길에 느끼는 시선은 같은 시선이되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개중 그래도 좀 붙임성이 있는 사람들은 대찬에게 다가와 말 한마디까지 건넸다.
“부장님, 힘내세요.”
“아… 고맙습니다.”
대찬은 미소로 화답했다.
대찬은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휴대폰에 ‘언사이티드’부터 설치했다.
그리고는 소파에 누워 천천히 글을 읽었다.
아직도 게시판은 대찬의 일로 시끌벅적했다.
어떻게 행동에 나설 것인가에 대한 결론은 여전히 나지 않은 상태였다.
대찬에 대한 동정심, 그리고 부당한 징계처분에 대한 분노.
게시판을 이용하는 직원들은 대부분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발 벗고 나서서 대찬과 함께 소나기를 맞을 의지까지는 없었다.
급류에 휘말린 강아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인 까닭.
그렇기에 미온적인 태도만 유지하며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대찬의 시선에 한 게시물이 눈에 띄었다.
갈팡질팡하는 유약한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영웅이 등장했다.
-경영지원부문장 옥문영 상무입니다.
지난 밤사이 올라온 글들을 모두 읽어보았습니다.
저 또한 여러분과 같은 생각입니다.
모 언론사의 인사개입은 정황은 뚜렷하지만 증거가 뚜렷하지 않아 특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대찬 부장에 대한 징계가 온당하지 않은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이에 사우들의 뜻을 모아 임원회의에서 대표님께 전달할 생각입니다.
제 회사 이메일로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해주시면 취합 후 대표님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진짜가 나타났다.
└갓상무님 응원합니다.
└옥 장군님! 출근하자마자 메일 보내겠습니다.
└수유점 점장 표성재입니다. 저도 뜻이 같은 점장님들 의견을 취합해서 대표님 주관하시는 점장회의 때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걸 읽는 대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심정이 묘했다.
“아, 고맙긴 한데…….”
옥문영 상무까지 나섰다.
본의 아니게 여럿에게 폐를 끼치게 되었다.
더군다나 옥문영 상무는 지난번 법인카드 소요로 홍승연과 한번 크게 뒤틀린 전력이 있었다.
이번에도 불쑥 나서면 대찬과 함께 극동일보의 타깃이 될 수도 있었다.
대찬은 초조한 마음으로 옥문영 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옥문영 상무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조대찬.”
“상무님, 언사이티드에 올리신 글 봤습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잠자코 있어.”
대찬은 초조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상무님, 그냥 제가 징계 받고 끝낼게요. 별 거 아니에요.”
“별 거 아니라고? 조 부장아, 이거 너 혼자만의 일이 아니야.”
“…….”
“네가 여기서 픽 고꾸라지면 다음은 얼마나 쉽겠냐? 서청수 회장 뒷배로 두고 있는 너도 그렇게 찍어 누르는데 다른 인간들은 얼마나 쉽겠냐고.”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아요.”
“아는 사람이 그래? 극동일보가 제집 앞마당처럼 우리 회사 들쑤시는 꼴, 나는 못 본다.”
대찬은 받아칠 말이 궁했다.
옥문영 상무의 지적은 어느 정도는 타당했다.
옥문영 상무가 말하는 ‘다음’에는 그녀 자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찬을 제압한 홍승연은 아마 다음 제물로 옥문영 상무를 원할 것이었다.
당장 대찬과 옥문영 상무를 고등어 한 손 엮듯 내치진 않겠지만, 시간차를 두고 반드시 보복에 나설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의 당사자는 비단 대찬뿐만이 아니었다.
옥문영 상무는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직원들이 보낸 지지로 메일함 꽉 찼다. 조대찬, 네가 저 아우성을 말 한마디로 다물게 할 자격이 돼?”
“…안 됩니다.”
“그럼 얌전히 앞장서. 조 부장이 방파제야. 극동일보한테 우리 회사 야금야금 안 먹히도록 막는 방파제. 어쩌겠어, 부딪치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게 당신 운명인가 봐.”
“그런 운명이야 얼마든지 감수하겠습니다. 오히려 바라는 바입니다.”
옥문영 상무는 씩 웃었다.
“그럼 됐네. 나한테 적어도 방파제 뒤에서 얍삽하게 지원사격 하는 정도의 역할은 허락해줘.”
“번번이 감사합니다.”
“닭살 돋아. 그런 말은 됐고. 자, 내일 확대임원회의에서 보자고.”
옥문영 상무는 전화를 끊었다.
대찬은 불빛이 꺼진 액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파에 널브러졌다.
“아, 몰라, 나도.”
그때 삑삑삑삑, 도어락 소리가 났다.
대찬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국이 시국이니 순간 극동일보에서 청부살인업자라도 보냈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문 안으로 들어온 건 흉기를 들이미는 그런 치가 아니라 윤이영이었다.
대찬은 과한 상상력을 발휘한 스스로에게 조소를 지으면서 윤이영을 맞았다.
“이영아.”
“뭘 그렇게 놀라? 나 몰래 야동이라도 보고 있었어?”
대찬의 조소는 실소로 바뀌었다.
“아니거든요. 근데 이 밤에 어쩐 일로?”
“어쩐 일은. 요새 조대찬 씨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길래 악몽이라도 꿀까 싶어서 왔지.”
대찬은 윤이영을 꼭 껴안았다.
“기특하기도 해라.”
“이천만 원짜리 와인을 오늘 깠어야 했어. 좋은 술 먹고 푹 자뒀어야 했는데.”
“술은 무슨. 필요 없어. 너 있으면 그만이지.”
윤이영은 피식 웃었다.
“답지 않게 느끼하시기는. 자, 빨리 씻고 일찌감치 자. 나도 자러 온 거니까.”
대찬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로 윤이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웃었다.
“조금만 늦게 자자.”
아침 6시.
대찬은 곤히 잠든 윤이영의 앞머리를 살짝 쓸고는 출근 준비에 나섰다.
한바탕 고된 촬영을 마치고 오랜만에 휴식을 얻은 윤이영에게 아침 6시는 없었다.
아침 6시가 아니라 새벽 6시이며, 무조건 깊은 잠에 빠져야 하는 시간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눈을 뜬 대찬은 윤이영을 위해 간단히 아침식사를 차리고 자신은 남은 것으로 대충 요기를 했다.
별로 많이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제법 큰 이벤트가 있는 날이니 많이 먹어봤자 속만 거북했다.
대찬은 집을 나서면서 옥문영 상무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상무님, 대표님 앞에서 최대한 부드럽게 말씀해주세요.
-조 부장이 코치 안 해도 내가 알아서 해. 나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야.
-주제넘었습니다. 그럼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ㅇㅋ
대찬은 출근길 2호선 전철에 몸을 실었다.
전철이 덜컹거리며 잠실철교 위를 지나갔다.
한강 위로 떠오른 햇살이 잠실에 우뚝 솟은 필래타워에 반사되어 2호선 전철 안으로 쏟아졌다.
대찬은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면서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훑어보았다.
한 기사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속보] 필래 비바체 노조원 일부, 극동일보 사옥 앞 대규모 규탄결의대회
‘뭐야. 우리 회사잖아.’
대찬의 손가락이 재빨리 그 기사를 클릭했다.
현장 동영상이 재생되었다.
동영상은 극동일보 사옥을 비추고 있었다.
마구 흔들리는 화면과 대중없이 카메라 앞을 휙휙 지나가는 행인들이 현장감을 더했다.
그 앞에 머리띠를 둘러메고 빨간 조끼를 갖춘 필래 비바체 노조원들이 도열해 있었다.
BGM은 여지없이 철의 노동자.
그들의 선두에 선 인물은 대찬과도 친분이 깊은 사람이었다.
박원국 노조위원장.
그는 필래유통 택배기사 노조위원장 시절, 대찬과 의기투합했다.
대찬은 그들을 지옥도 같은 필래유통에서 꺼내 필래 비바체의 울타리 안에 들여보냈다.
택배사업부가 필래 비바체 산하로 재편된 이후에도 대찬은 그들의 권익을 위해 최대한의 아량을 베풀었다.
그러니 박원국 위원장은 물론 택배사업부 노동자들은 대찬을 회사로 통하는 가장 든든한 창구로 여겼다.
박원국 위원장은 필래 비바체 소속이 된 이후, 필래 비바체 노조위원장 선거에 출마했다.
그가 쌓아온 노조위원장으로서의 경력과 관록을 신뢰한 노동자들은 그에게 표를 주었다.
택배사업부 자체가 마트사업부, 면세점사업부보다 이런 쪽으로 더 큰 목소리를 내왔다.
택배사업부에서 노조위원장이 배출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 박원국 위원장이 극동일보 앞에서 꽥꽥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대찬의 정신이 아득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이 아저씨가 여기서 왜 나와…….’
철교 위를 건너는 전철은 덜컹거렸다.
그 덜컹거림에 대찬의 눈동자도 덜컹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