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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13화 (313/556)

난 할 수 있어 313화

최재한은 그들의 시커먼 속내를 알았지만 관계하지 않았다.

도리어 영광이었다.

최재한은 홍승연을 바라보며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물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불법 사실에 대해 인정하십니까?”

“…….”

“이 일로 나라 망신이라는 국민들의 비판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질문에 홍승연은 싸늘한 눈빛을 최재한에게 보냈다.

그런 눈빛에 위축될 것이었으면 애초에 저지르지 않았을 일.

최재한도 그 눈빛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홍승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걸음을 옮겼다.

최재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

“아무 권한이 없으면서 극동호텔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국민께 드릴 말씀이 아무것도 없으십니까?”

홍승연은 걸음을 딱 멈추고 쌀쌀맞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검찰, 조사에, 성실히, 응하겠습니다.”

“그게 전부입니까?”

“네, 전부입니다.”

홍승연은 그렇게 말하고 검찰청 안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홍승연이 검찰에 출두하고 며칠 후, 대찬은 최재한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마 기소유예될 거 같아.”

“기대도 안 했어. 아예 무혐의는 안 때리는 거 보니 양심은 있네.”

최재한은 흐흐 웃었다.

“당분간 너랑 나랑 둘이 만나는 건 안 되겠다.”

“그래야겠지. 벌써 너랑 나랑 동창인 걸로 군불 지피고 있을 텐데, 만나는 사진까지 찍히면 물타기 들어갈 테니까.”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해야 해. 바닥에 담배꽁초도 버리지 마.”

“원래부터 안 버렸어.”

“너랑 나, 둘 중에 하나만 뻘짓 해도 끝장이야. 조심하자고.”

“내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최 기자님. 암튼 고맙다. 쉬운 결정 아니었을 텐데.”

“너한테서 얘기 듣자마자 귀를 씻어버렸어야 하는 건데.”

대찬은 싱겁게 웃고는 전화를 끊었다.

최재한의 말대로 홍승연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그녀는 일이 종결되자마자 아버지 홍구완 사장을 찾아갔다.

홍구완 사장은 홍승연을 흘끗 보고 말했다.

“앞으로는 조심 좀 해야겠다.”

“조심할 게 뭐 있어요? 뭐 대단한 일이라고.”

“대단한 일을 대단하지 않게 만드는 데 기운이 많이 들어가는 법이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짧은 설교에도 홍승연은 지루함을 느꼈다.

홍구완 사장은 구겨진 난초 대신 새로 들여온 난초를 닦으며 말했다.

“조대찬이라는 놈, 아주 무시할 녀석은 아닌 거 같아. 서청수가 굳이 나한테 맞불을 놓으면서까지 지키려고 하잖아. 웬만하면 한번 숙여주고 말았을 텐데.”

“저는 이대로 못 넘어가요.”

“암,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지.”

“아버지가 힘 좀 써줘요. 내가 진짜 그런 이름도 없는 놈 때문에 검찰청까지 들락날락거려야겠어요?”

홍구완 사장은 픽 웃었다.

“산속에서는 털 있는 옷을 입으면 안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도깨비바늘이 붙거든.”

“아, 싫어요. 난 털옷 입을 거니까 그냥 산에다 불을 질러서 다 태워죽이면 되잖아요.”

“인생 참 쉽게 사는구나.”

“아빠 딸이니까.”

홍구완 사장은 흡족하게 웃었다.

홍승연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 민동철인지 뭔지 하는 버러지는 정리하셨어요?”

“죄인을 계속 직원으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잖니. 바로 모가지 쳤다.”

“그놈만 생각하면 내가 자다가도 머리털이 쭈뼛 선다니까요.”

“그러니 너도 사람 가려서 취급하는 법을 좀 더 배워야 하는 거다.”

“알았어요.”

“그런 모자란 놈한테 코가 꿰이면 그렇게 되는 거야.”

“알았다니까요. 그런데 어떡해요? 서 회장이랑 이렇게 영영 척 지면 우리한테도 좋을 거 없는데.”

“그래도 내가 굽히고 들어갈 순 없는 노릇이다.”

“그렇긴 하죠. 아버지가 어디 가서 고개 숙일 위치도 아니고.”

홍구완 사장은 난초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도 혼인신고서에 인주도 안 말랐는데 이러는 건 반갑지 않다. 네가 수고 좀 해야겠다.”

“네? 내가 뭐요?”

“서원웅이하고 화해해.”

“저 아무 사과도 못 받았는데요.”

“그래도 해. 서원웅이가 아무리 조대찬인지 뭔지 예뻐한대도 우리 손 뿌리칠 배짱은 없을 거다.”

홍승연은 살짝 고개를 모로 돌리며 다리를 꼬았다.

“싫어요. 와서 싹싹 빌어도 화해해줄까 말까 하는데 내가 먼저 숙이고 들어가라고요?”

“말 들어라.”

“…싫다니까요.”

거듭 자신의 말을 거역하는 딸에게 홍구완 사장은 뱀의 시선을 보냈다.

“들어라.”

홍승연은 아버지의 눈빛을 잘 알았다.

최후통첩이었다.

그녀는 침을 살짝 삼키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아버지의 지시를 받은 홍승연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갔다.

가출 치고는 제법 긴 가출이었다.

서원웅은 홍승연을 보고 길게 말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별 소용이 없음을 아는 까닭.

“왔어요.”

“네, 왔네요.”

홍승연은 짧은 질문에 짧게 대답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문을 닫고 들어가기 직전, 서원웅을 돌아봤다.

“여보, 이제 좀 어른답게 구세요.”

“…뭐?”

“친구랑 오순도순 떡볶이 사 먹던 의리 지키겠다고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서원웅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알아들으셨으면서 못 알아들은 척하시기는. 조대찬이요.”

“…애초에 이 사달을 낸 장본인이 조대찬이 아니라 당신이란 걸 알았으면 좋겠는데요.”

“그러니 아직도 현실을 모르고 계신단 거예요. 지금 잘잘못이 중요해요? 누가 당신한테 큰 힘이 될 수 있는지 그걸 생각하시라구요.”

서원웅은 굳은 표정만큼이나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생각을 좀 했으면 좋겠는데.”

“뭐라구요?”

“계속 그렇게 나한테 칼끝을 들이대는 게 당신한테, 또 극동일보한테 유익할지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허!”

홍승연은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문을 쾅 닫았다.

서원웅은 마음이 혼란했다.

홍승연의 고개가 여전히 뻣뻣하긴 했지만 자진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맞았던 서씨와 홍씨의 대립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지키면서도 홍씨와 아예 척을 지는 상황을 모면했다.

소식을 들은 대찬도 다소 안도했다.

극동일보와의 대립은 극동일보가 건재한 이상 계속될 것이다.

그래도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대찬은 초긴장 상태에서 일상으로 돌아왔다.

민승기는 대찬이 물어온 조지아 와인 수입 건을 추진했다.

그리골은 대찬에게 시중가보다 저렴하게 와인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걸로 큰 이문을 남기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저 늘그막에 조지아 와인이 생소한 동양 사람들에게 조지아 와인을 알려줄 겸, 최악의 상황을 막아준 대찬에게 공치사나 할 겸 거래를 텄다.

그러니 그리골의 특혜는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지속될 것이다.

대찬과 로튼 프룻츠 입장에서는 땅 짚고 헤엄치는 것만큼 돈 벌기 쉬운 건수였다.

커피 수출입이 꽤 짭짤한 수익을 올려준다지만, 은오영 교수와 싱 기술이사의 배양육 합작 연구에 상당한 재원이 투입되는 상황.

그렇기에 대찬이 물고 온 염가의 와인에 민승기의 얼굴은 확 밝아졌다.

그는 흡족하게 웃으면서 대찬의 등을 탁탁 두드렸다.

“휴가 가서도 건수 물어오는 조대찬을 어떻게 안 예뻐하겠냐.”

“배양육은 제가 저질러놓은 거잖아요. 괜히 이거 때문에 우리 회사 폭삭 망해버리면 선배하고 직원들 얼굴을 어떻게 보라고.”

“필래가 있는데 망하기야 하겠냐. 암튼 고생 많았다.”

대찬은 괜히 민승기에게 투정을 부렸다.

그가 맘 놓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서청수 회장에게 하자니 어불성설이고, 부모님에게 하자니 걱정만 잔뜩 얹을 테니까.

거기에 민승기는 대찬과 한 배를 탄 몸.

아무런 부담 없이 불안과 걱정을 토로할 수 있었다.

“고생길은 지금부터 훤해요. 당분간 여기하고도 거리를 좀 둬야겠어.”

“극동일보 때문에 그러냐?”

“네.”

대찬은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승기는 안쓰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벌집을 왜 건드려.”

“어차피 저쪽하고 대판 붙을 건 예정돼 있으니 선빵이라도 때려야죠.”

민승기는 허탈하게 웃었다.

“조대찬이 가끔 보면 여우같다가도 이럴 땐 멧돼지처럼 막 들이받는다니까.”

“다 계산된 거라니까요. 분에 못 이겨서 좌충우돌하는 게 아니고.”

“알았어, 인마. 암튼 몸조심해라. 너도 잘 알겠지만 지금까지 들이받았던 것 중에 제일 더럽고 치사한 물건이니까.”

“네, 알았어요. 로튼 프룻츠에도 아무 피해 없을 겁니다.”

“네 몸이나 생각해.”

민승기는 대찬을 향해 안쓰럽게 웃어 보였다.

대찬은 그 안쓰러운 웃음에서 한 조각의 위안을 얻었다.

필래와 극동의 표면적인 갈등은 우선 봉합되었지만, 극동일보는 순순히 물러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홍승연의 검찰 출두가 대찬의 손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찬이 필래 소속이니 필래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서청수 회장은 대찬의 해고를 완강히 거부했다.

홍구완 사장은 아량을 베풀어 차선책을 제안했다.

그는 서청수 회장이 아니라 서원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인어른.”

“어, 잘 지내지?”

“네, 다소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는데 잘 무마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실상은 아니지만 립 서비스는 필요했다.

홍구완 사장은 허허 웃었다.

“그래, 앞으로도 어려운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 테니.”

“감사합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자네도 내 체면을 좀 세워줘야 하지 않겠나?”

“예? 체면이라면…….”

“서 회장한테 조대찬이를 자르라고 했는데 절대 안 된다더군. 자네도 마찬가지겠지?”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좋다 이거야. 그럼 이건 좀 들어줘야겠어.”

홍구완 사장의 말에 서원웅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말씀하십시오.”

“이 사달이 벌어진 건 승연이가 좀 부주의한 측면도 있었어. 그건 인정해. 하지만 좀 더 근원적인 이유를 생각해볼까.”

“근원적인 이유라고 하시면.”

“내가 알아보니까 조대찬이의 탐욕하고 자네와 사돈의 지나친 관용과 방조 때문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홍구완 사장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이봐, 조대찬이가 조지아에 갔을 때 정직 맞은 상태였지?”

“그렇습니다.”

“정직은 중징계야. 정직 기간에는 자숙해야 맞지 않나? 만약 조대찬이가 반성하면서 얌전히 자숙했어봐. 이런 일이 있었겠나?”

“…….”

“자숙할 줄 모르고 그 와중에 제 잇속 채우자고 날뛰어서 이 모양 이 꼴 된 게 아닌가.”

“장인어른.”

홍구완 사장은 서원웅의 발언권을 허락하지 않았다.

“도대체 배울 만큼 배운 부자가 이렇게 싸고 도는 이유를 모르겠군. 어디 약점이라도 잡혔나?”

“장인어른도 아시겠지만 조 부장에 대한 징계처분은 조 부장이 회사를 위해 희생한 측면이 큽니다. 언짢으시겠지만 실상 원인을 따져보면…….”

“아, 그 말이 아니잖나! 조대찬이가 얌전히 칩거했으면 이런 일이 있었겠나! 자기 회사 잇속 채우려다가 이 사달이 난 게 아니냐고!”

홍구완 사장은 쯧, 혀를 차며 신경질적으로 호통 쳤다.

서원웅은 답답증이 일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장인어른 체면을 세워 드릴 수 있을지요. 일러주십시오.”

“간단해. 죽이지 못하겠다면 몸살이라도 좀 앓아야지.”

“이 건에 대해서 다시 징계를 내리란 말씀이십니까?”

홍구완 사장은 그제야 사위의 말귀가 좀 트이자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래. 어려운 일은 아니잖나? 이것마저도 거역하겠다면 정말 갈 데까지 가자는 뜻이지.”

“심사숙고하겠습니다.”

홍구완 사장은 짜증이 돋쳤다.

서자 새끼를 사위로 거둬줬더니 말이야.

시원하게 예, 하는 법이 없다.

“숙고할 게 뭐가 있어! 여기서 결정을 내리게.”

“이해해주십시오. 바로 말씀 올리겠습니다.”

“정말이지…….”

홍구완 사장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전화를 끊었다.

서원웅은 서청수 회장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혼자서 뚝딱 해치울 만한 일이 아니었다.

아들의 말을 들은 서청수 회장은 답을 내놨다.

“어쩔 수 없다. 징계 내려.”

“하지만 사유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다 보여주기식이다. 조대찬이가 일전에 그랬다고 하지 않았어. 징계가 자기 승진에 미칠 영향이 전무하다고. 때려.”

서원웅은 아버지의 뜻에 시원하게 예스라고 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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